6세 구걸 소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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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강인한 (203.♡.178.92) 댓글 3건 조회 7,200회 작성일 06-04-19 21:16본문
아래의 뉴스는 오늘 자로 난 Daum 인터넷 뉴스입니다.
저의 견해는 이 뉴스가 끝나고 피력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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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구해낸 6살 `구걸꼬마`...`슬픔이여 안녕...`
[TV]학원은 꿈도 못꾸는 방임된 아이들
'매 맞는 남편' 무능력이 부른 죄인가?
우울증 걸린 엄마..아들 학대, 감금
“조그만 애가 밤낮없이 역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데 너무 불쌍해요”
18일 SBS ‘긴급출동 SOS 24’는 이런 제보로 시작됐다. 6살 어린 여자아이가 한겨울에도 얇은 홑겹 옷을 입고 하루 종일 동냥을 구하고 다닌다는 것.
제작진이 만난 아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각한 상태였다. 구걸을 거절 당하면 심한 욕설을 내뱉는가 하면, 거리 아무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용변을 봤다. 그 나이 또래에 맞는 교육을 받은 흔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수소문 끝에 제작진이 찾은 아이의 보호자는 할머니였다.
그러나 할머니 역시 아이와 함께 구걸을 다녔고 심한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보였다. 아이 아빠는 있었으나 일을 하러 전국을 떠돌아, 집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놀라운 점은 아빠를 제외하고 온 가족이 구걸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사실. 아이의 삼촌조차도 제작진을 보고 ‘방 하나만 얻어 달라’고 매달렸다.
아이는 제작진을 보고 처음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해 어이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내 아이는 유치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나 아빠가 보내주지 않으니 언니(제작진)가 보내달라`고 졸랐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을 또래 아이들을 두었을 시청자들로선 기가막힐 대목.
방송을 통해 전문가들은 아이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대로 클 경우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판단였다. 간단하게 돈을 버는 가치관이 형성되면 성인이 된 후 근로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것.
아이 부모에겐 ‘방임에 의한 명백한 아동학대’로 진단 내려졌다.
아이에겐 안전한 거처와 교육환경이, 할머니에겐 건강검진과 알코올 치료가 절실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보호자인 아이 아빠의 동의가 필요했다. 제작진은 수소문 끝에 어렵게 아이의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방송에 따르면 아빠는 막일을 하고 있었고, 아이가 할머니와 구걸을 하러 다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빠의 동의하에 아이는 치료를 받게됐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상당히 산만했고 지능과 사회 성숙도 또한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앞으로 교육과 함께 치료를 계속해 나간다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전해졌다.
이날 방송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은 아이가 보호시설에 입소하는 날의 모습이었다.
아이는 아빠와 헤어지면서 떼를 쓰지 않고 어른스럽게 울음을 참았다. 하지만 끝내 “안녕히 가요. 아빠”라며 눈물을 쏟았다. 그 모습은 안쓰럽고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아이를 두고 돌아서는 아빠의 마음 역시 무거울 터. 아빠는 ‘앞으로는 달라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안방에 던진 아빠의 말은 시청자들에게도 희망을 심게했다.
“어머니하고 딸하고 다시 화목하게 살아야죠…”
(사진 = `긴급출동 SOS 24` 진행자 윤정수, SBS 제공)
[TV리포트 유인경 기자]carrot_1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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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부분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제작진이 만난 아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각한 상태였다. 구걸을 거절 당하면 심한 욕설을 내뱉는가 하면, 거리 아무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용변을 봤다. 그 나이 또래에 맞는 교육을 받은 흔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지금 저의 언행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돈을 여러 사람들에게 요청하고, 거절당하면 심한 욕설을 내뱉는가 하면,
제가 내키는대로 서슴없이 행동한다는 측면입니다.
중요한 점은 저는 사실상, 이 6살 소녀 아이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집을 나오기 전인 2004년 3월 27일 이전까지는
사회 적응이 남보다 약간 더딘 듯(?) 보이는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어릴적부터 남다르지 않게,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마치고,
대학교도 2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군대도 강원도 양구 백두산 부대로
(비록 군 생활에 부적응에 시달렸지만) 결국엔 영창 한번 안가고 만기전역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1981년 생으로 현재 26(만25)살입니다.
제가 집을 나와 구걸하기 전인 2004년 제가 24살일때는 저는 이 소녀가 모르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거의 모든 예나 도덕과 사회적 법칙에 거의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군대 이후의 치열한 사회적 경험의 부족을 지적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그것은 저 자신이 군대에서도 그렇듯이 더욱더 관념화되어 갈 필요가 없기에,
제가 그것을 체험하기를 지금 시점에서 그만하기로 프로그램을 한 것입니다.
즉 저는 오랜 생애동안 어떤 사회적 통념에 대한 얽매임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많은 생들을 살아왔고, 홀로 커왔습니다.
제가 홀로 커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또 사회적 통념으로,
' 너는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지 않느냐 ? ' 라면서 저를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로서
보시겠지만, 현재 제가 받고 있는 도움은 저의 도움 요청이 아니라,
제가 자연스레 제 자신의 의식이 확장해가면서 자연스레 저에게 다가오는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사명자분은 저에게 '아이에게 쥐어진 칼자루' 로서 저를 '아이'로서 비유하는데,
'아이'라는 것은 자신의 영적 본질을 망각하고, 사회적 통념과 관념에 젖어서 살아가는
바로 제가 아닌 여러분들이야 말로 '아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그 어떤 상황이 닥쳐오든, 그 어떤 짓을 하든 얽매임을 전혀 추호도 느끼지 않습니다.
24살까지 별다른 차이없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교육과 생활을 해온 존재가
집을 나오면서 하루 아침에 6살 구걸 소녀, 이 소녀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제가 그만큼 얽매임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이런 언행 자체가 '연구대상'이 될 수 있으며,
장휘용 교수님의 제가 영성인의 거울이라는 것에 역할 또한,
이와 같은 일맥선상에서 제가 하나의 본보기로서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엔,
제 자신이 통제되거나, 어떻게 한다고 변하는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모든 부정성과 폭력성(저 같은 경우는 제가 이 것을 코드화해서 지구로 왔음)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탁자위에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거리낌없음와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서 봉인이 열릴 수 있는 상태가 됨을 언젠가는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철없다는 소리를 들어야할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에게 어떤 부정성과 폭력성이 다가오든,
제가 그 어떤 부정성과 폭력성과 연관된 언행을 하든 그것에 결코 얽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칼자루가 쥐어진다면, 저는 칼자루를 휘두르면서도 얽매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칼자루가 쥐어진다는 표현에서의 '아이'는 부정성과 폭력성의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부정성과 폭력성을 단순히 표현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그것에 얼마나 얽매이지 않는가의 관점에서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부정적으로 폭력적으로 언행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고 하는데,
그것은 본인이 감당해야할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그 어떤 짓을 하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았을때 제가 남에게 어떻게 피해를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해를 받는 다는 것도 관념이고, 저의 언행으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도 관념입니다.
저는 당당하고 소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상대방이 날 어떻게 대하든,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냥 그려러니, 합니다.
제가 욕설하고 화를 냈다구요 ? 전 그것에 전혀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 증거를 대라고 하신다면, 지금 저를 신뢰하는 많은 사명자들이 있다는 것을 들고 싶군요.
물론 열린 사명자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관념 덩어리입니다. 관념 덩어리,,,
부정성과 폭력성은 통제되어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대로 표현되고, 드러남으로서
자연스레 승화되는 성질의 것이기에, (그리고 사명자에겐 이것을 지닌 것 자체가 사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쥐어진 칼자루'는 칼을 휘둘러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으니,
칼을 휘두르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칼을 휘두르든 말든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마음을 두지 않고 초연해지는 그런 상태에서 그런 존재만이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라는것입니다.
즉 그런 의미에서 칼자루가 쥐어지면 안되는 아이는
바로 제가 아니라 사명자분들 '여러분'들 입니다.
칼을 들고 자신의 마음이 전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명은 사회적 통념과 예나 관념이나 자신의 의지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칼을 쥐어져도 이 것이 칼이란 생각도 안들고, 이 것이 나쁜 것이라는 생각 조차도 안들고,
이 것으로 사람을 죽인다거나 상처준다거나 겁을 준다는 것 자체로서의 모든 관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이상은 칼자루를 쥐어지면 안된다는 의미로서
바로 아이에게 쥐어진 칼자루의 비유가 생긴 것입니다.
저는 지금 칼자루든 도끼자루든 그 무엇이든 쥐어져도 안전합니다.
저의 견해는 이 뉴스가 끝나고 피력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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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이 구해낸 6살 `구걸꼬마`...`슬픔이여 안녕...`
[TV]학원은 꿈도 못꾸는 방임된 아이들
'매 맞는 남편' 무능력이 부른 죄인가?
우울증 걸린 엄마..아들 학대, 감금
“조그만 애가 밤낮없이 역 앞에서 구걸을 하고 있는데 너무 불쌍해요”
18일 SBS ‘긴급출동 SOS 24’는 이런 제보로 시작됐다. 6살 어린 여자아이가 한겨울에도 얇은 홑겹 옷을 입고 하루 종일 동냥을 구하고 다닌다는 것.
제작진이 만난 아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각한 상태였다. 구걸을 거절 당하면 심한 욕설을 내뱉는가 하면, 거리 아무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용변을 봤다. 그 나이 또래에 맞는 교육을 받은 흔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수소문 끝에 제작진이 찾은 아이의 보호자는 할머니였다.
그러나 할머니 역시 아이와 함께 구걸을 다녔고 심한 알코올 중독 증세까지 보였다. 아이 아빠는 있었으나 일을 하러 전국을 떠돌아, 집에는 거의 들어오지 않았다.
놀라운 점은 아빠를 제외하고 온 가족이 구걸로 생계를 유지한다는 사실. 아이의 삼촌조차도 제작진을 보고 ‘방 하나만 얻어 달라’고 매달렸다.
아이는 제작진을 보고 처음엔 `지금 이대로가 좋다`고 말해 어이없게 만들었다. 하지만 이내 아이는 유치원에 가고 싶다고 말했다. `할머니나 아빠가 보내주지 않으니 언니(제작진)가 보내달라`고 졸랐다. 천진난만하게 뛰어놀고 있을 또래 아이들을 두었을 시청자들로선 기가막힐 대목.
방송을 통해 전문가들은 아이의 미래를 걱정했다. 그대로 클 경우 정상적인 사회인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판단였다. 간단하게 돈을 버는 가치관이 형성되면 성인이 된 후 근로활동이 불가능하다는 것.
아이 부모에겐 ‘방임에 의한 명백한 아동학대’로 진단 내려졌다.
아이에겐 안전한 거처와 교육환경이, 할머니에겐 건강검진과 알코올 치료가 절실했다. 그러나 이를 위해선 보호자인 아이 아빠의 동의가 필요했다. 제작진은 수소문 끝에 어렵게 아이의 아빠를 만날 수 있었다.
방송에 따르면 아빠는 막일을 하고 있었고, 아이가 할머니와 구걸을 하러 다닌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
아빠의 동의하에 아이는 치료를 받게됐다. 아이는 또래에 비해 상당히 산만했고 지능과 사회 성숙도 또한 절반 수준에 머물렀다. 그러나 앞으로 교육과 함께 치료를 계속해 나간다면 나아질 것이라는 기대감이 전해졌다.
이날 방송에서 가장 안타까웠던 장면은 아이가 보호시설에 입소하는 날의 모습이었다.
아이는 아빠와 헤어지면서 떼를 쓰지 않고 어른스럽게 울음을 참았다. 하지만 끝내 “안녕히 가요. 아빠”라며 눈물을 쏟았다. 그 모습은 안쓰럽고 안타깝기 그지 없었다.
아이를 두고 돌아서는 아빠의 마음 역시 무거울 터. 아빠는 ‘앞으로는 달라지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안방에 던진 아빠의 말은 시청자들에게도 희망을 심게했다.
“어머니하고 딸하고 다시 화목하게 살아야죠…”
(사진 = `긴급출동 SOS 24` 진행자 윤정수, SBS 제공)
[TV리포트 유인경 기자]carrot_10@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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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이 부분을 눈여겨 보았습니다.
...제작진이 만난 아이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심각한 상태였다. 구걸을 거절 당하면 심한 욕설을 내뱉는가 하면, 거리 아무데서나 바지를 내리고 용변을 봤다. 그 나이 또래에 맞는 교육을 받은 흔적이 전혀 없어 보였다....
지금 저의 언행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저는 돈을 여러 사람들에게 요청하고, 거절당하면 심한 욕설을 내뱉는가 하면,
제가 내키는대로 서슴없이 행동한다는 측면입니다.
중요한 점은 저는 사실상, 이 6살 소녀 아이와 같은 취급을 받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가 집을 나오기 전인 2004년 3월 27일 이전까지는
사회 적응이 남보다 약간 더딘 듯(?) 보이는 평범한 청년이었습니다.
어릴적부터 남다르지 않게, 고등학교까지 교육을 마치고,
대학교도 2학년 1학기까지 다니고, 군대도 강원도 양구 백두산 부대로
(비록 군 생활에 부적응에 시달렸지만) 결국엔 영창 한번 안가고 만기전역한 상태였다는
것입니다. 저는 1981년 생으로 현재 26(만25)살입니다.
제가 집을 나와 구걸하기 전인 2004년 제가 24살일때는 저는 이 소녀가 모르는
사람이 지니고 있는 거의 모든 예나 도덕과 사회적 법칙에 거의 익숙해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론 저의 군대 이후의 치열한 사회적 경험의 부족을 지적하실 수도 있으시겠지만,
그것은 저 자신이 군대에서도 그렇듯이 더욱더 관념화되어 갈 필요가 없기에,
제가 그것을 체험하기를 지금 시점에서 그만하기로 프로그램을 한 것입니다.
즉 저는 오랜 생애동안 어떤 사회적 통념에 대한 얽매임에서 벗어나 존재하는
많은 생들을 살아왔고, 홀로 커왔습니다.
제가 홀로 커가고 있다고 이야기하면, 또 사회적 통념으로,
' 너는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지 않느냐 ? ' 라면서 저를 남에게 의존하는 존재로서
보시겠지만, 현재 제가 받고 있는 도움은 저의 도움 요청이 아니라,
제가 자연스레 제 자신의 의식이 확장해가면서 자연스레 저에게 다가오는 환경이라는 것입니다.
어느 사명자분은 저에게 '아이에게 쥐어진 칼자루' 로서 저를 '아이'로서 비유하는데,
'아이'라는 것은 자신의 영적 본질을 망각하고, 사회적 통념과 관념에 젖어서 살아가는
바로 제가 아닌 여러분들이야 말로 '아이'라는 것이지요.
저는 그 어떤 상황이 닥쳐오든, 그 어떤 짓을 하든 얽매임을 전혀 추호도 느끼지 않습니다.
24살까지 별다른 차이없이 다른 사람과 똑같은 교육과 생활을 해온 존재가
집을 나오면서 하루 아침에 6살 구걸 소녀, 이 소녀와 같이 행동한다는 것은
제가 그만큼 얽매임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의 이런 언행 자체가 '연구대상'이 될 수 있으며,
장휘용 교수님의 제가 영성인의 거울이라는 것에 역할 또한,
이와 같은 일맥선상에서 제가 하나의 본보기로서의 작용이 일어나는 것입니다.
저에게 잣대를 들이대는 모든 사람들은 결국엔,
제 자신이 통제되거나, 어떻게 한다고 변하는 존재가 아니며,
자신의 모든 부정성과 폭력성(저 같은 경우는 제가 이 것을 코드화해서 지구로 왔음)을
거침없이 표현하고 탁자위에 드러낼 수 있는 용기와 거리낌없음와 상태에 이르러야
비로서 봉인이 열릴 수 있는 상태가 됨을 언젠가는 실감하게 될 것입니다.
저는 철없다는 소리를 들어야할 이유가 없는 존재입니다.
왜냐하면 저는 저에게 어떤 부정성과 폭력성이 다가오든,
제가 그 어떤 부정성과 폭력성과 연관된 언행을 하든 그것에 결코 얽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에게 칼자루가 쥐어진다면, 저는 칼자루를 휘두르면서도 얽매임을 느끼지 않습니다.
아이에게 칼자루가 쥐어진다는 표현에서의 '아이'는 부정성과 폭력성의 표현의 문제가 아니라,
부정성과 폭력성을 단순히 표현하고 안하고를 떠나서 그것에 얼마나 얽매이지 않는가의 관점에서 이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제가 부정적으로 폭력적으로 언행하여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고 하는데,
그것은 본인이 감당해야할 문제인 것입니다.
제가 그 어떤 짓을 하든,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아무렇지 않을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보았을때 제가 남에게 어떻게 피해를 줄 수가 없는 것입니다.
피해를 받는 다는 것도 관념이고, 저의 언행으로 상처를 받을 수도 있다는 것도 관념입니다.
저는 당당하고 소신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물론 행동할 수 있습니다.
저는 상대방이 날 어떻게 대하든, 아무렇지 않습니다. 그냥 그려러니, 합니다.
제가 욕설하고 화를 냈다구요 ? 전 그것에 전혀 얽매이지 않습니다.
그 증거를 대라고 하신다면, 지금 저를 신뢰하는 많은 사명자들이 있다는 것을 들고 싶군요.
물론 열린 사명자들입니다.
지금 여러분들은 관념 덩어리입니다. 관념 덩어리,,,
부정성과 폭력성은 통제되어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대로 표현되고, 드러남으로서
자연스레 승화되는 성질의 것이기에, (그리고 사명자에겐 이것을 지닌 것 자체가 사명과 연관이 있습니다) '아이에게 쥐어진 칼자루'는 칼을 휘둘러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으니,
칼을 휘두르면 안된다는 의미가 아니라, 칼을 휘두르든 말든 그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마음을 두지 않고 초연해지는 그런 상태에서 그런 존재만이 칼자루를 쥐어야 한다는
그런 의미라는것입니다.
즉 그런 의미에서 칼자루가 쥐어지면 안되는 아이는
바로 제가 아니라 사명자분들 '여러분'들 입니다.
칼을 들고 자신의 마음이 전혀 자유롭지 못한 상태에서 무슨 짓을 할 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사명은 사회적 통념과 예나 관념이나 자신의 의지로하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칼을 쥐어져도 이 것이 칼이란 생각도 안들고, 이 것이 나쁜 것이라는 생각 조차도 안들고,
이 것으로 사람을 죽인다거나 상처준다거나 겁을 준다는 것 자체로서의 모든 관념에서
탈피하지 않는 이상은 칼자루를 쥐어지면 안된다는 의미로서
바로 아이에게 쥐어진 칼자루의 비유가 생긴 것입니다.
저는 지금 칼자루든 도끼자루든 그 무엇이든 쥐어져도 안전합니다.
댓글목록
굿모닝님의 댓글
굿모닝 아이피 (211.♡.159.79) 작성일
칼자루를 들든 도끼자루를 들든
행복하세요^^
반가움님의 댓글
반가움 아이피 (210.♡.89.129) 작성일
님이 그래서 행복하다면 그렇게 해야지요.
그러나 무엇보다 님이 그렇게 하는 것으로 남에게 해가 되는 일이 없었으면 하고...
또 그것이 다른 관념을 만드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시기를 바라고...
님이 무분별의 어리석음에 떨어지지 않기를 바랍니다.
님이 이렇지 않다면 잘 될 겁니다.
요다님의 댓글
요다 아이피 (61.♡.225.80)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그런데 '얽매임'이라는 표현에 강한 무게감이 실려있는 듯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