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곱에 대한 묵상 (3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이광석 (82.♡.139.124) 댓글 3건 조회 7,062회 작성일 06-05-21 06:05본문
이곳에 창세기 인물 묵상을 올리기 시작한 뒤, 야곱 2편을 올리고는 한 달 이상을 보냈습니다. 어서 야곱편을 마무리지어야지 생각을 하면서도 잘 되지를 않았습니다. 이제야 바삐 마무리를 짓게 되어 좀 더 깊은 묵상이 되지 못해 서운한 마음도 있습니다. 저는 교회에 나가고 있어서 하나님이라는 말이 잘 나오지만 그렇지 않은 분들도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분들은 그냥 하느님, 진리 정도로 생각하시면 될 것 같습니다. 성경 창세기 지식이 어느 정도 필요한데 이번 기회에 창세기 한번 읽어보시는 것도 좋으리라 봅니다. 워낙 오랜만에 올리는 것이라 1, 2편 기억이 없으신 분들은 이 게시판에서 찾아보기로 야곱을 찾으셔서 먼저 읽어보시는 것이 좋겠지요.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
그러면 얍복강가의 야곱에게 구체적으로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요? 이번은 왜 지난번 벧엘 때와는 달랐을까요? 어떠한 회개가 있었을까요? 이날 밤 일어난 일은 하나님과 야곱만 압니다. 그저 상상의 나래를 펴볼 뿐입니다. 두려움에 싸인 야곱은 요즘 말로 정말 “쎄게” 기도했을 것입니다. 벧엘의 그 하나님께 해결책을 간구했겠지요.. 그런데 들리는 소리는 야곱의 기대와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생즉사, 사즉생”이라는 말이 있지요.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뜻입니다. 들리는 소리는 야곱이 가진 모든 것을 포기할 각오로 에서를 피하지 말고 직면하라고 합니다. 그것만이 해결책이라고 합니다. 믿어지질 않습니다. 에서가 모든 것을 빼앗아 갈텐데 직면하라니 말이 안됩니다. 이제까지 어떻게 모은 재산과 자리인데 포기할 수가 있습니까? 자기에게 평안과 행복을 가져다 줄 것이라 믿고 있던 것들을 포기하면 자신의 인생은 끝이라는 생각을 버릴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라반이 자기를 쫓아왔을 때 라반에게 했던 것처럼 강변했을 것입니다. “내가 정말 고생해서 모은 것인데 내가 가질 권리가 있는 것 아니냐”고 반박합니다. “이건 아니다, 다른 해결책이 있을 것이다.” 메치고, 둘러치고 계속 시간은 흘러갑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그렇게 실랭이를 벌이던 야곱은 환골뼈가 부서지는 아픔을 겪으면서 자신의 지난 날들을 돌아보게 됩니다. 이제까지 생각해 보지도 못했던 사실들이 살포시 고개를 들기 시작합니다. 벧엘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후 오직 자신만을 생각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통감합니다. 아내들에 대한 배려는 하나도 없었고, 자식들에 대해서도 아무 생각을 하지 않아 왔습니다. 자신이 왜 그리 결혼생활에서 피곤함을 느꼈었는지 자각하기 시작합니다. 야곱은 아리따운 여인 라헬만 있으면 저절로 평안과 행복이 뒤따라 올 것이라고만 생각을 했지, 자기 자신이 결혼생활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한다는 생각은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결혼생활에 실패하는 바로 그 원인이지요. 결혼생활 뿐만 아니라 모든 인간 관계가 그렇죠.. 상대방이 나에게 무엇을 해 주기를 기다리지 말고 내가 먼저 무엇을 해 주어야 한다는 진리를 야곱은 깨우치지 못했던 것입니다. 야곱의 회상은 다른 사람들에게로 옮겨갑니다.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연약함과 무능을 핑계로, 일이 바쁘다는 핑계로 아무하고도 진실한 관계를 이루어보지 못했던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에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야곱은 정말 자신이 에서를 내 쌍둥이 형제로 진실하게 대해 본 적이 있었던가 돌아봅니다. 항상 질투의 대상이었고, 그와 형제간의 진실한 대화 한번 해 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습니다.
흔히 나만 성실하면 되지 않냐는 생각을 많이 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내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열심히 최선을 다해 일을 하는데 누가 나에게 돌을 던지겠느냐는 생각, 나야말로 세상을 제대로 사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 이런 생각들이 저를 지배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나 오만했으면 누가 같이 저녁먹자고 하면 내가 선심을 베푸는 것으로 생각까지 한 적이 있었습니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이것이 얼마나 철부지 같은 생각이었는지 깨달은 적이 있었습니다. 나를 불쌍히 여겨 저녁이나 같이 먹자고 한 것을, 나와 저녁을 먹고 싶어 죽겠다는 것으로 오해를 했으니 말입니다. 야곱도 이와 같지 않았을까요? 여러 이유로, 핑계로 다른 사람에 대한 생각을 접어 왔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생각할 때는 오직 그를 이용한다든지, 그를 이겨야 한다든지 그런 경우만 있었을 것입니다. 모든 세상 사람들을 극복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왔던 것이지요. 사랑이라는 것은 생각조차 해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날이 밝아 야곱에게 비친 얍복강가의 풍경은 어제 보던 풍경이 아닙니다. 세상에 대한 눈이 떠지자 야곱에게는 모든 것이 달라보입니다. 자기 주위 생명의 “살아있음”에 전율하게 됩니다. 얍복강을 건너 에서를 만나러 갑니다. 에서에 대한 두려움은 에서를 보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변했습니다. 에서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에 대한 생각은 이제 없습니다.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만 생각합니다. 에서를 보는 순간 야곱은 자기를 죽이려 한다고 생각해 왔던 두려운 에서가 하나님 같이 보이는데 다시 한번 놀랍니다. 자신의 변화된 모습에 자신도 놀라는 것이지요. 야곱이 에서에게 일곱번 절을 하자 에서가 달려와 부둥켜 안고 결국 같이 웁니다. 이 세상에 같이 태어난 쌍둥이가 처음으로 화해하고 진정한 형제임을 확인하는 순간이니 울음이 나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세상에 대한 자기의 눈이 변함으로 세상이 달라보일 때의 그 감격을 많은 분들이 공감하리라 믿습니다. 이제 이쯤되면 야곱의 굴절된 삶도 여기서 그칠 것 같은데 그렇지를 않습니다. 아직도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 있습니다.
야곱은 그동안 돌보지 못했던 아내들, 자식들과 “빨리”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합니다. 같이 집으로 돌아가자는 에서의 제안에 야곱은 가족들, 종들, 가축들을 생각해 그렇게 할 수 없다며 천천히 가겠다고 합니다. 야곱은 지나간 시간들이 아깝고 지금 한시가 아깝습니다. 결국 하나님과 약속했던 벧엘로 돌아가지 않고 눈 앞의 기름져 보이는 땅에 정착합니다. 변화된 야곱은 가족들과의 새로운 생활에 깨가 쏟아집니다. 아내들과의 관계도 회복되었습니다. 야곱의 삶에서 처음 맞이하는 행복입니다. “아!!! 행복이란 바로 이런 것이었구나, 내가 참 그동안 미련하게 살았었구나” 느끼게 됩니다. “고난했던 지난 날들에 대한 보상이, 내가 바뀌니까 이제야 오는구나” 생각합니다. 부러울 것이 없었겠지요. 이렇게 평생 살다가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 생각했겠지요. 그 행복에 취해서 10여년을 그곳에서 지냅니다. 야곱의 이런 행복이 과연 평생동안 유지될 수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이 행복은 아주 오래는 지속되지 못합니다. 야곱의 하나뿐인 딸 디나가 근처 구경갔다가 토박이한테 성추행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합니다. 이를 알게된 야곱의 심정이 어떠했겠습니까? 가슴이 철렁했겠지요. 어떤 딸인데.. 저는 딸이 없지만 딸 둔 아비의 심정은 그제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라 봅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왜 이러시나” 생각을 했을 것입니다. 토박이들의 세력이 워낙 강해 어떻게 해 보지는 못하고 가슴만 조였겠지요. 그러나 디나의 오빠들은 달랐습니다. 야곱의 둘째, 셋째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는 디나에게 반해서 결혼하게 해 달라고 조르는 토박이 족장을 속여서 그 족속들을 모두 할례를 받게 한 다음 삼일째 되는 날 이들이 잘 움직이지 못하는 틈을 타 이들을 죽여버립니다. 엄청난 살인 사건입니다. 아무리 여동생 때문에 강퍅해졌다 해도 야곱에게는 충격이 아닐 수 없습니다. 또한 토박이들이 많은 수를 이끌고 쳐들어 올텐데 걱정이 됩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시련을 왜 또 주시나 하나님에 대한 원망이 저도 모르게 나왔겠지요. 그리고는 또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소리가 들립니다. 야곱은 그제야 하나님과 약속했던 벧엘을 기억하게 되고, 가족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갑니다.
이 사건들은 야곱에게 어떤 깨달음을 주었을까요? 가족들을 모두 목욕 재개시키고 우상을 없애버리게 한 뒤 이들을 데리고 벧엘로 올라간 것은 야곱이 특별히 깨달은 바가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 갑자기 생각이 나서 그리한 것 같지만은 않습니다. 디나 사건으로 야곱은 자신의 자식들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저 아이들이 왜 그리 강퍅해졌나… 그리고 라반의 집에서 지난 날 자기가 했던 행동들을 떠올립니다. 라헬만 끼고 돌 때 레아의 아들들이 느꼈을 아버지에 대한 적대감이 느껴집니다. 자식들이 그렇게 자란 것은 야곱 자신의 책임이었다는 것을 실감합니다. 자식들에 대한 미안한 감정들을 물질적으로 해결해 보려 했던 자신을 보게 됩니다. 자식들이 가지고 있던 내면적 문제들을 10여년 동안의 세상적 행복 속에서 모두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야곱은 자기가 이를 일부러 잊어버리고, 그런 문제가 나타나주지 말기만을 바래 왔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런 물질적 도움이 얼마나 허무하고 의미없었던 것인지 이제야 깨달은 것입니다. 그제서야 야곱은 자기가 만났던 벧엘의 하나님에게 자기 가족 모두를 데리고 가서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진실된 생명의 양식을 주고자 했던 것이지요. 비로소 야곱의 하나님이 그 가족들에게 소개되는 것입니다.
이는 요즘의 많은 부모들이 겪고 있는 문제이기도 합니다. 아이들에게 진정 잘 해 준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어려서부터 이것 저것 배운다고 학원 보내주고, 좋은 핸드폰 사주고, 좋은 대학 갈 수 있도록 과외 시켜주고, 용돈 많이 주고, 아이와 같이 밤을 새가며 공부해 주는 것일까요? 야곱의 예가 좋은 본보기가 되리라 봅니다.
야곱의 하나님이 그 가족들에게 소개되었다 해서 그들이 바로 변화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는 야곱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많은 시간이 필요한 법입니다. 이제 야곱은 지난날 자신이 저지른 일들 때문에 지금 자신에게 닥아오는 일들을 그저 겸허히 받아들이게 됩니다. 야곱은 하나님이 항상 자신과 함께 한다는 사실을 이제 의심치 않습니다. 자기가 그토록 사랑했던 라헬의 아들 요셉이 행방불명되고 그 형들이 요셉의 피 묻고 찢어진 옷을 들고 왔을 때 야곱의 가슴은 찢어지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참고 묵묵히 살아갑니다. 영화 “희랍인 조르바”에서 안소니 퀸이 해변에서 슬픈 듯, 기쁜 듯 알 수 없는 표정으로 춤을 추는 모습, 영화 “길”에서 안소니 퀸이 모자라는 여인 젤소미나를 떠나보내고 길바닥에 누워 눈물 흘리던 모습이 야곱과 함께 겹쳐집니다. 요셉이 없어지고 난 뒤 남은 자식들을 데리고 살아가던 야곱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합니다. 야곱의 인생도 이제 종착점에 가까워 오고 있습니다.
야곱은 양식을 구하러 갔다 돌아온 자식들로부터 요셉이 살아있으며 애굽의 총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자식이 살아있는 것 뿐만 아니라 큰 출세까지 했다니 얼마나 기뻤겠습니까? 그래도 야곱은 펄쩍펄쩍 뛰지는 않습니다. 나이도 들었지만 하나님이 그와 함께 했기 때문입니다. 속으로 깊은 감사의 기도를 들였으리라 봅니다. 그러기에 애굽으로 가도 되는지 하나님께 물어볼 수가 있었을 겁니다. 요셉을 다시 만나고, 애굽 왕을 만나 “정말 험난한 세월을 살았다”고 자기 인생을 짤막하게 고백하는 야곱, 가슴이 찡해 옵니다.
야곱은 인생을 마감하면서 각 자식들에게 축복을 합니다. 축복이 아니라 저주 같은 것도 있지만 이는 자식들의 성품, 성격, 그리고 그 동안의 그들의 행동을 고려해서 향후 남은 삶을 잘 살아나가도록 하려는 자식들에 대한 진한 애정에서 나온 것이라 봅니다. 이 생을 보내며 자식들에게 축복을 남길 수 있다는 것은 야곱에게도 큰 축복이었겠지요. 제 자신도 그럴 수 있기를 바래 봅니다.
하나님의 부름(초대, 메시지)을 알아듣고 이에 어떻게 응답하느냐는 전적으로 우리들의 몫입니다. 그것을 하나님이 대신해 주시지는 않습니다. 이 관점에서 야곱은 지난 편들에서 살펴본 이삭 및 에서와 어떤 특별한 차이가 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이삭은 단 한번의 회심으로 상속자 반열에 오릅니다. 흡사 사도 바울 같습니다. 충분히 준비되어 있던 사람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에서는 몇 번의 하나님 초대를 알아채지 못했고 어느 정도 알아챈 것으로 보일 때에도 그냥 지나쳐 버림으로써 인생의 전환점을 갖지 못한 채 이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안타까워겠지요. 야곱은 수차례 하나님의 초대(벧엘, 얍복강, 디나건, 요셉건)를 매번 심각하게 받아들였고 이에 순종하며 진지하게 응답하여 자기 인생의 전환점이 되게 하였습니다. 사도 베드로를 보는 것 같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갈 길이 멀었던, 그러면서도 굳건한 반석이 될 수 있었던 그런 사람입니다. 유대민족의 십이지파가 아브라함, 이삭을 거쳐 야곱에서 완성되는 것이 우연이 아니라 생각됩니다.
야곱의 삶은 정말 끊임없이 변화하는 모습이어서 조마조마 하면서도 너무 좋습니다. 묵상 서두에 누가 야곱을 연기할 수 있을까 했었는데 자연스럽게 안소니 퀸이 뽑혔네요. 이렇게 이끌어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
댓글목록
아줌마님의 댓글
아줌마 아이피 (59.♡.149.162) 작성일감사합니다.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아이피 (219.♡.100.109) 작성일
저도 참 잘 읽었습니다.
좋은 묵상 나누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김영대님의 댓글
김영대 아이피 (211.♡.9.67) 작성일
이광석님!
저도 성당에 오랜기간 다녔습니다.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