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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분의 깨달음에 관한 한 생각(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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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처럼 (211.♡.184.159) 댓글 5건 조회 12,413회 작성일 06-05-24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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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분의 느낌과 글이 공감되는 바가 있어 게시판에 올려봅니다^^
서프라이즈 문예방에 있는 송재광이라는 분의 글을 옮겨 봅니다.
고수님의 조언대로 침묵보임을 해야 하는데 아직도 수양이 한참 덜 되어서 또 머리가 근질근질해서 어쩔수없이 좀 토해놓고 가야겠습니다.
그렇다고 무슨 절박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습의 연장인 것도 같습니다.
그냥 이런저런 떠오르는 이야기를 좀 하구 갈께요. 일기도 안쓰는 제가 여기 아니면 또 어디다 비현실적이서 약간은 수상해보이는 이런 이야기를 하겠습니까요?
1. 저의 체험.
자꾸 체험이라 하니 제가 뭐 대단한 체험을 한것같아 송구스럽습니다.
그런데 제가 '어 이게 뭐지?' 하고 느끼는 그런것에 대해 좀 더 설명하고 싶어요.
아마 그것을 느끼는 분은 많으실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을 느낀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중에 어느정도 많은 분들이 제가 느끼는 것과 똑같은 것을 느끼시는지 그게 좀 궁금하기도 해요.
저의 '어 이게 뭐야! 이세상이 도대체 뭐야?' 이런 느낌은 글의 뜻은 의문이지만 의문은 아닙니다.
그게 궁금한 것은 아니고 크게 놀라움과 지긋이 느끼는 것에 가깝습니다.
저는 예민한 편이었는데요. 그리고 문학소년이라 할 수 있을 정도로 사춘기때부터 독서와 방황도 많이 한 편인데요. 이런 느낌은 삼십여년을 살고 나서야 처음 들었습니다.
참으로 문득! 아주 문득! 말이지요.
사춘기나 이십대 때도 우주가 도대체 뭘까? 인간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그런게 가끔 궁금했지요. 최신물리학책을 보면 신기하고 우주바깥에는 그럼 뭐가 있을까? 신은 있는가? 죽으면 영혼은 있는가? 그런게 궁금해서 티벳사자의 서도 보고 철학책도 보고 불경 성경도 조금은 보았었지요.
그런데 지금 어? 이게 뭐야? 하는 느낌은 그것과 아주 많이 다릅니다.
깜짝 놀람! 이라고나 할까요. 정말 놀랍습니다. 그것은 궁금한게 아니고 이 세상과 나와 타인들과 만물이 모두 놀라웁게 느껴집니다.
몇달동안은 그냥 생각만 했습니다. 한참 후에야 이런저런 책을 보게 되었지요.
그런 상태에서 제일 처음 발견한 것은 '현재만 있다!' 는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아주 놀라웠습니다. 살펴보니 '현재' 만 있었습니다. 예전에도 책을 통해서 현재만 있다는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제가 직접 현재만 있다는 걸 확인했다고나 할까요.
그리고 두번째로는 그렇게 현재를 들여다보다가 아주 무서웠습니다. 아주 극심한 공포를 느꼈습니다. 한참을 그러다가 어느때부터인가 현재가 아주 환희에 차올라왔습니다.
그 다음 느낀 것은 모두가 하나라는 느낌입니다.
가만히 보니까 모두가 한덩어리였습니다. 그때는 불교지식도 없고 다른 책들도 읽기 전이어서 느낌만 있지 개념을 정할 수 없었습니다. 하여튼 '모두가 하나구나!' 하는걸 느꼈습니다.
그 다음 느낀 것은 '죽어도 끝이 아니구나!' 하는 느낌입니다.
나는 몸과 자의식 그것만은 아니구나..내안에 뭔가 있구나..그런 느낌입니다.
그게 나를 통해서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는 몰라도 내가 죽어도 죽는게 아니구나!
내안의 어떤 존재를 느꼈어요. 그 존재는 영원한 것 같은 느낌요.
그 존재가 진정한 나로구나..하는 느낌. 그 존재가 날 지긋이 내려다보는 느낌. 아니 그 존재가 바로 나인 듯한 느낌.
그러니까 제가 절실히 느낀 것은 혹은 발견한 것은 세 가지입니다.
1.현재만 있다는 것 2.모두가 하나라는 것 3.내 안의 영원한 나
그 뒤로 여러 책을 읽으면서 저의 생각과 공명되는 부분을 많이 발견했지요.
2. 불교
특히 불교는 합리적이면서도 무궁무진한 깊이가 있어보였습니다.
좀 무모하긴 합니다만 한동안 출가의 욕망에 시달렸지요.
중이 되는 것이 내가 가야 할 길 같았어요. 그리고 속세에서는 더 이상 살 수 없을 것도 같았구요. 한동안 그렇게 출가하고픈 감정의 봇물이 솟구치더니 이제는 괜찮습니다.
저는 불교를 아직도 많이 모릅니다.
불교는 수많은 종교적 천재들에 의해 체험적으로 증득된 결과의 축적으로서 엄청난 깊이가 있습니다.
이런 쪽에 관심을 갖고 수행을 하다가 발생할 수 있는 어떤 오류들에 대해서든 불교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고 할까요? 그런 느낌을 받습니다.
3. 기독교
성경을 통독하지는 못하고 조금 읽어보았고 신학서적을 조금 읽어보았습니다. 성경은 불경에 비해서는 문학적이고 비유적이고 상징적이다 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러면서도 성경의 중간중간에 나오는 날카로운 통찰은 가슴에 깊이 다가왔습니다. 성경의 핵심은 불경과 다를바 없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더우기 신학이란 것이 성경의 빈틈을 메워줍니다. 신학이 방대하기도 하고 저마다의 충돌도 있지만 전체적으로 봐서 성경+기독교신학=불교..라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4. 그외의 수행단체
그외에는 가본 곳도 없고 책을 읽은 바도 적습니다.
서점에서의 독서도 많이 한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한 열번쯤 갔을까요..? 이년동안 열번이면 많이 간 것이 아니지요. 그러니 서점에서의 독서도 많이 한 것은 아닙니다.
라즈니쉬 크리슈나무르티 의 책들 몇권과 '신과 나눈 이야기' 가 아마 전부인 것 같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책과 버나뎃 로버츠의 책을 읽었구요. 다 비슷합니다.
'마음수련'이라는 명상모임에서 나온 '깨달음도 버려라!' 라는 책이 우리 나라 명상단체에서 나온 책으로는 제가 유일하게 읽은 책입니다.
그 책의 저자가 김연수님이라는 분인데 마음수련단체에 가입해서 단기간에 깨달음을 얻었다고 합니다. 그분은 단지 견성하신 것이 아니라 견성이후에도 계속 수행하셔서 크게 깨달으시고 스승님께 인가도 받았다고 합니다.
그분의 책을 보니 불교나 기독교등 기성종교를 비판한 부분이 있었습니다. 깨달음을 소수의 전유물로 만들어서 깨달음을 대중화시키는데 소홀한 측면이 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시대가 바뀐 만큼 수행법도 진화할 필요가 있다고 하시더군요.
저는 그분의 의견에 동의하면서도 종교적 전통의 사회체계에서의 역할. 깨달음을 쉽게 인가해주는 데서 오는 부작용. 성과 속의 분리가 주는 잠재적인 장점. 등의 측면에서는 반드시 그렇지만도 않다..하는 생각을 가졌었습니다.
공감이 많이 가던 부분은 자신은 위빠사나가 저절로 된다. 는 얘기였습니다.
다른 단체들도 많은 것 같던데 제가 접해본 바가 없어서 아무 얘기도 할 수 없군요.
다 대동소이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5. 신과 나눈 이야기.
이런 쪽에서 세계적으로 크게 베스트셀러가 된 책이 '신과 나눈 이야기' 같습니다.
저는 서점에서 속독으로 대충 읽었습니다. 정독하지 않고 대충 읽은 것은 그 책을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책이 너무 길기도 하고 뻔하다고 생각되는 부분들도 있어서 그리하였지요.
그 책의 저자는 신이 자기에게 해준 이야기를 통해 깨달음뿐만 아니라 정치 종교 사회 문화 섹스 사랑 등 삶의 전반적인 부분에 대해 확실하게 이야기를 합니다.
저는 그것을 읽으면서 공감되는 부분도 있고 이런 것은 좀 억측같은데? 하는 부분도 있었습니다.
앞의 깨달음도 버려라!..라는 책을 읽으면서도 느낀 것인데 저는 그렇게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는 사람들이 하는 얘기가 저의 느낌과 많은 부분 똑같아서 한편으로 몹시 놀라기도 하였습니다. '아니 그럼 나도 깨달은 것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쑥스럽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고 그러더군요. 픽! 웃고 말았지만요.
이 책은 채널링을 다룹니다. 채널링을 다룬 책들이 다른 책들도 몇권있는 것 같습니다. 채널링이란 자신의 주파수와 신의 주파수를 맞춰서 신의 얘기를 듣는다는 것인데요. 제 생각으로는 그게 결국 자신에게 떠오르는 영감으로 얘기하는 것이 아닌가합니다. 자기속의 또다른 자기의 얘기를 듣는 것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채널링을 한다는 것은 항상 자신속의 신을 만나지는 못한다는 것이거든요. 어떤 준비를 하고 한참을 기다려야 신이 다가온다면 그것은 항상 신을 만나고 있는 깨달음의 상태는 아닌것처럼 보여집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의 서술들은 상당히 그럴듯 합니다. 저자가 거짓말하는 것 같지는 않고 솔직하게 떠오르는 영감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상력이 영감과 혼재되어있다는 느낌을 받습니다.
제가 이년전에 발견했다고 했던 세 느낌..은 제가 보기에 저의 상상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늘이 파란 것처럼 자명하게 느껴집니다.
그 이상은 구체적으로 무엇이 어떻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신과 나눈 이야기..에서는 다양한 주제들에 대해서 상당히 구체적입니다.
저는 그것이 상상이거나 어떤 심리학적 생리학적 원인이 일으킨 과도한 흥분상태에서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6. 느낌. 해석. 상상.
다시 말하면 깨달은 자가 느끼는 것은 세 갈래일 겁니다.
1.어떤 느낌. 2.그에 대한 주체의 해석. 3.느낌과 해석을 바탕으로 한 주체의 상상.
저의 세 느낌은 저의 해석이 개입되기 전의 순수한 느낌 그 자체인 것 같은데요.
지금 보니 1번은 순수한 느낌. 2번은 느낌반 해석반. 3번은 해석이 과반수인 것도 같습니다. 하여튼 기본적으로는 느낌입니다.
그런데 그런 기본적 느낌에 상상의 박차를 가해서 직관의 말을 달리면 무수한 이야기가 쏟아져나올 수도 있습니다. 신과 나눈 이야기..가 그렇게 보여집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거짓이라 할 수는 없고 그것은 어쩌면 계시일 수도 있겠지요.
7. 깨달은 사람의 책을 읽을때 주의할 점.
깨달은 자의 책을 보면 ..아니 누구의 책을 읽더라도 저자는 저자가 처한 사회적 위치에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살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라즈니쉬를 보면요. 라즈니쉬는 계속 깨달음의 세계속에서 살면서 남들에게 그것을 선전하고 그로 인해 생계를 유지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런 삶의 조건은 그의 글과 말에 영향을 줍니다.
자기에게로 끌어들이는 것이죠. 깨달음을 파는 것이죠.
깨달은 자 누구도 앞에 있는 사람의 생계를 책임져주진 않습니다.
대신 돈을 내놓던 존경을 내놓던 인정을 내놓던 댓가를 내놓고 자신의 깨달음을 사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렇게 살기로 선택을 했던 것이지요.
깨달음을 얻은 사람의 인생은 보통사람보다는 울퉁불퉁할 것이고 자기가 잘할 수 있는 것은 깨달음의 상태에 머물러 있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깨달은 이야기를 하는 것이겠지요.
깨달음이 직업이 된 것이지요.
깨달음도 직업일 수 있겠지만 깨달음을 직업으로 가지면 깨달음을 과장해서 설명하거나 과대선전할 우려가 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오바를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깨달음을 깨달음 그자체 있는 그대로 설명하기 보다는 자신이 처한 사회적관계에 의해 호도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지요.
그렇게 되면 자신의 삶의 특수한 환경과 깊이 관련된 어떤 각성을 다른 삶을 살고 있는 무수한 사람들에게 일반화시킴으로써 다른 이의 삶에 적절한 도움을 주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런 측면에서 깨달은 사람은 세상의 어떤 직업이라도 갖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깨달음을 직업으로 갖지 말구요.
그래야 깨달음을 아무런 사적 이해관계없이.. 과장도 없고 치장도 없이 있는 그대로 정직하게 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자의 사회적 위치..숨은 동기들..숨은 이해관계들..을 살피는 것은 누구의 글을 읽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제일 좋은 것은 글쓰는 이가 그런 것을 밝히는게 제일 좋겠습니다만 프라이버시문제도 있고 또 그렇게 양심적인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해관계가 개입되면 일단은 자기에게 손해되는 일..자기 이미지깎이는 사실은 침묵하고 보는 것이 인지상정이지요.

댓글목록

옆에머물기님의 댓글

옆에머물기 아이피 (211.♡.246.8) 작성일

많은분들이...스스로 깨어나고 계시네요 부럽습니다^^

바람님의 댓글

바람 아이피 (59.♡.165.221) 작성일

'깨달음을 직업으로 갖지 말구요.'  이 말씀에 많이 공감이 갑니다.

혹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그것이 직업(소위 성직이라고 이름지어 이야기 하는 것)이 되였을 경우,  자기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위치나, 직업에 유리한 쪽으로 전하기 쉽고,  그렇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자기자신을 가리우게 하는 미망이 되기 쉽다.    이렇게 봅니다.

무무님의 댓글

무무 아이피 (211.♡.95.181) 작성일

스스로 '깨달았다' 비스무리 스타일로 나서서
(반대급부가 있건 없건) 답을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
일상의 소소한 직업 열심으로 해내면서
묵묵히 사는 사람들 중에 진짜 깨달은 사람이 있음을 많이 본다.
농부, 청소부, 목수, 파출부, 우체부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선생님들보다 더 존경한다. 진짜루.....

청량산님의 댓글

청량산 아이피 (211.♡.153.92) 작성일

김연수님의 사이트입니다.

http://www.born2.net/bbs/view.php?id=peac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1

많이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너무좋은글들이 많습니다
사실은 이런글올리기도 조금은 망설여집니다
본시 마음공부란것이 좀 미련하게 앞만보고 가야하는데,괜시리
이것저것 쳐다보는것이, 결국 무기수,장기수,뺑뺑이도는 지름길이기에...

지금여기님의 댓글

지금여기 아이피 (210.♡.49.23) 작성일

송재광님이 누군지 궁금하다 찾다가 이걸 발견했음.그래서 그냥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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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따로 뭐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뇌가 유연해지는 것이다. 왜 유연해지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의 뇌에 스스로 채워놓았던 사슬을 풀기 때문이다. 그 사슬은 기억과 자아의 이기심으로 생기는데 진화과정의 부작용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자기가 예전에 누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그로 인해 오랜세월 홧병에 시달리기 쉽다. 그런데 유연한 뇌로 생각해보면 그랬던 과거는 지금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당한 대우' 자체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가 홧병을 공연히 만들어내고 있었음을 알아채고 홧병이 풀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사회학적 현상이든 자기마음이든..깨달음은 과학의 객관성을 직접 자기마음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면 여러가지 불필요한 잡스런 흐름들이 보인다. 그런 잡스런 흐름은 기쁨을 주지 못하고 귀찮기만 하다. 그러니 그런것들의 실제를 보면 그것들은 그저 무시하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그런것조차 어쩌다 자기에게 들어온 손님처럼 사랑스런 눈길로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렇게 단순한 것인데 왜 불교나 기독교..그리고 숱하게 많은 수행단체들이 생겼는가?

나는 그것이 두 가지 이유라고 본다.

첫째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에 어떤 결여를 느끼고 종교를 창조하고 空을 만들고 無我를 만들고 구원을 만들고 하나님을 만들었다.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것을 따로 만들었다.

둘째는 종교인이나 수행자들이 보상심리를 갖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매몰비용..이란 개념과 비슷하다. 그들의 인생은 구도의 여정에 많이 투자..혹은 낭비되었다. 이제 무언가를 알락말락 할때 그들은 자기들이 알락말락 한 것이 그토록 단순한 것에 아차! 싶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 알락말락 하는 상태의 것을 과대포장한다.

구원 공 무아 천국 열반 극락 지옥을 만든다.

그런 것들이 제도화된 것이 종교이고 기성종교들에 밀려서 조그맣게 집단화된 것이 각종 수행단체들이다.

부처님 예수님은 그 주위의 사람들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것도 묻는 사람들에게만.

그런데 부처님 예수님 아닌 사람들이 부처님 예수님 되지는 못하고 흘러간 세월은 답답해서 온갖 개념들을 만들어냈다.

깨달은 사람들은 제자가 생길까봐 두려울 것이다. 제자가 생기는 순간부터 오류가 생기니까 말이다.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 제자가 될 리 없고 자기를 잘 모르는 사람이 자기의 제자가 될 터이니 그때부터 오류가 오류를 부르고 거짓을 낳게 되니 걱정을 안할 수 없다.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제자가 아니라 친구가 된다. 만약 자기가 스승이라 생각하고 누군가를 자기 제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것은 도움을 주는 사랑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가 있을  까? 사랑은 '문득' 온다. 제도화되어 혹은 집단화되어 형태가 굳어질수록 사랑에서 멀어져간다.

깨달음은 없다. 그냥 뇌가 유연해진 것 뿐이다.

그럼 깨달은 자들이 말하는 체험은 무얼까? 그것은 우리가 달리기하면 몸이 가뿐하고 경치좋은 곳에선 마음이 편안하고 오줌누면 시원하고 무엇엔가 집중하다 갑자기 고개를 들면 시야가 확대되면서 자아가 확대되는 느낌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아 편안해! 아 시원해!  아 즐거워! 라고 이야기안하고 왜 법신이니 신과의 합일이니 무한의 허공이니 공이니 열반이니 하고 얘기하느냐 하면 스승이나 책이나 종교나 수행단체에서 그렇게 얘기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야 스승도 먹고 살고 종교도 먹고 살고 단체도 먹고 살지. 그리고 본인도 보람이 있지.

그런데 깨달음이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 하여도 이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다보면 그게 또 수행이 되고 수행단체가 되고 수행법이 되고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러니칼하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무한한 감동이다.

해와 달을 있는 그대로 보면 해가 동그란 것은 너무너무 신기하고 달이 노란색이면서 모양이 변하는 것 또한 너무너무 신기하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너무너무 신기하다. 나를 보고 웃고 나와 같은 말을 하고  심장도 뛰고 나와 손도 잡지 않는가?

가장 신기한 것은 '나'다.

손을 올리면 손이 올라가고 웃으면 웃고 어려운 계산도 하고 복잡한 철학도 생각하고 밥도 먹고 똥도 눈다.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런데 아무리 신기해도 죽음은 두려울 수 있다.

그럴때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우주가 뭔지 나는 모르겠지만 나도 우주의 한 조각 아닌가? 설마 나만 쏙 빼놓고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진 않겠지? 신이 나를 세상에 나오게 했으니 죽은 다음에도 책임지겠지. 만약 안 그러면 정말 의리없는 신이다..

만약 그래도 두렵다면 이번에는 그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나는 지금 왜 두렵지? 죽음? 죽음이 뭔데? 죽음? 그건 정말 이해하기 힘들어. 나는 지금 기쁘게 살고 있는데 왜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려고 할까? 내가 왜 죽음을 이해해야 할까? 죽음없이도 나는 지금 행복한데..? 아하! 나는 죽음이 나의 행복을 가져갈까봐 두렵구나. 이 행복을 느끼는 내가 죽어서 없어지는게 두렵구나. 그런데 행복따로 나따로 인가? 내가 없으면 행복도 없고 행복이 없으면 행복해하는 나도 없는 걸? 그 행복이 나야. 그리고 그 행복은 지금 존재해. 있는 것은 지금 뿐이야. 죽음은 지금 없어. 그래서 죽음은 없어.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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