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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12월 산청도덕경모임 후기(43장. 무위의 유익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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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름가지 (117.♡.172.26) 댓글 3건 조회 7,663회 작성일 14-12-17 13: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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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바다의 청명함이란, 마치 제 마음같다고해야하나~~
제가 가을 내내 아팠습니다. 저는 성장하며 부모님의 관심과 이해를 받지 못했습니다. 부모님들껜 그만한 심리적 여유가 없었고, 또한 그럴 수밖에 없었음을 가슴깊이 이해합니다. 그렇게 관심과 이해를 받지 못해 성장하며 생겨난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내게 작은 관심조차없어...' 내 마음을 온통 잿빛으로 물들여버리는 그 절망을 만났습니다. 죽을 맛이었습니다. 그러나 한편 속으로 은근히 바라기도 했습니다. 그래야, 제 자신에게 한번이라도 더 사랑과 관심을 보여줄 기회가 생기니까요.
 
'가장 의미 있는 관계는 당신 자신과의 관계, 이것뿐입니다.'-바이런 케이티
 
 
 
 
  어느새 한해의 마지막 시간에 우리가 와 있습니다. 내년이면 산청모임을 5년째 이어나가게 됩니다. 다사다난했던 일들 속에서도 여기까지 잘 살아오신 여러분 모두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박수를 보냅니다. 얼마남지 않은 한해 마무리 잘 하시고 내년에는 더욱더 건강하고 온갖 좋은 일들, 복된 일들이 여러분들의 삶을 가득 채우는 한해가 되길 바랍니다.  한달에 한번이지만 매번 올때마다 노자선생님이 우리에게 들려주었던 삶의 실상들, 진실, 진리에 관한 이야기들을 참 고맙게도 여러분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어오고 있었는데, 오늘은 우리안에 있지만 우리가 미처 알지 못하고, 발견하지 못했기에 누리지 못하는, 분명히 우리 안에 있는 보물을 노자선생님의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 안에서 풍성히 발견하고 캐 내어서 우리 삶이 더 자유롭고 풍요로워지는 그런 귀한 시간이 되길 바라면서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43장. 무위의 유익함(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에고는 사라진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이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이기고,
있지도 않은 것이 틈없는 데로 들어간다.
나는 이런 까닭에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말 없는 가르침과 무위의 유익함은 세상에서 이것에 필적할 만한 것이 없다.
 
 무위란 함이 없는 것, 그러니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의 유익함입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데 그게 왜 유익할까요?. 여러분, 이 세상에서 가장 크고 단단한 것으로 무엇이 있겠습니까?. 다른 것은 다 부수는데, 자기는 부수어지지 않는 것!.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게 뭐죠?. 맞습니다. 다이아 본드. 다이아 몬드를 한자로 표현하면 '금강'이 됩니다. 그러면 이 금강이 무엇일까요?. 물질적으로는 다이아몬든데, 영적으로 보면 무엇을 의미할까요?. 다 부수면서도 자신은 부수어지지 않는 영원한 것, 굳이 말해 보자면 '지금'입니다. 모든 것들은, 현재 지금 일어난 것입니다. 실재하는 것은 '지금'밖에 없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지금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습니다. 지구가 멸망하더라도 '지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은 다 부수어 집니다. 흥망성쇄, 생멸을 거듭합니다. 언제나 지금인데, 지금에 있는 것들은 다 사라집니다. 모든 것들은 다 부수어지지만 '지금'은 없어지지 않습니다.
 우리 마음이 지금으로 돌아오면, 우리 마음도 금강이 됩니다. 여러분이 곧 금강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우리 마음이 지금으로 돌아오면'하는 이 말이 무슨 말인가요?. 우리는 지금을 살지 않습니까?!!!. 누구나 다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지 않습니까?!!. 지금 이순간을 떠나서는 단 한순간도 존재하지 못하지 않습니까?!!. 다 지금에 있는데, '우리 마음이 지금으로 돌아오면'이라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저의 경우를 보면, 저는 예전에 제자신이 참 초라하고 볼품없고, 쪽팔리고, 쩔쩔매고, 우유부단하고, 늘 불안했고, 하여간 난 참 이런 내 자신이 싫었습니다. 이런 내가 싫다보니깐 내가 바라는 나, 내가 되고 싶은 나, 내가 원하는 나가 있었습니다.  초라하고 볼품없고, 쩔쩔매는 이런 것들이 없는 충만하고 완전하고, 가득차고, 뭐든지 분명한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저는 항상 자신감이 없었습니다. 열등감에 사로잡혀 있고, 말을 더듬고, 말꼬리를 흐리고....그래서 자신감 있는 존재가 되고 싶었습니다. 지혜롭고, 더군다나 사랑으로 가득한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성능좋은 캠코더를 마련했습니다. '까지것, 노가다 며칠더하지~' 쿨한, 그러나 누구나 그러지는 못하는 대찬 포스를 내품으며 말이죠. 박미경/최용림부부가 마련해 주셨습니다. 고맙고 감사합니다. 도덕경식구들에게 이보다 더 감사한 연말 선물이 있겠습니까....
 
 
 
 
 자, 보십시오. '마음이 지금으로 돌아오면'이란 말의 의미는, 제가 지금 경험하는 것은 초라하고 볼품없고, 보잘 것 없는 나입니다. 제게 지금 일어난 것은 이런 감정인데,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고 용납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제 마음은 항상 찌질한 지금을 버리고, 훌륭한 미래로 달려갑니다. 분명히 존재하는 것은 지금 이것, 찌질함인데, 찌질하고 못난 나를 어떻게든 건너 뛰려고 했습니다. 전 현재에 있지만 현재에 있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러니 마음이 지금으로 돌아오면의 의미는, 지금 일어나는 이것을 경험하고 받아들이고 그 속에 머문다는 것입니다.
 또 이건 이렇게도 볼 수 있습니다. 아, 내가 그때 이랬더라면, 내가 이런 환경에서 태어나지 않았다면, 지금 분명히 이런저런 일들이 현재에 일어나는데, 내 마음은 과거에서 현재를 비추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현재 일어나는 일들을 재단하고 판단하고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합니다. 현재에 있으면서도 현재에 존재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초라한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 목숨까지 내 걸었습니다. 이렇게 쪽팔리는 모습으로 인생을 살아간다는 것은 숨막히는 불행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이 아닌  미래로 달려가서 자유를 얻으려 했는데 결과가 어떠했냐하면, 충만하고 가득찬 존재가 됨으로써 자유롭고 쉼이 오고 내 방황이 끝난게 아니라, 전혀 뜻밖에도 저렇게 되려는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그러자 미래가 사라지고 과거를 한탄하는 마음도 사라졌습니다. 저는 이런 초라한 몰골이 저주스러웠습니다. 근데 희한한건, 제 마음이 지금으로 돌아오니깐 내 마음이 금강이 되어버렸습니다. 여전히 초라하고 쪽팔리는 똑같은 것들을 경험합니다. 살아있기 때문에, 사람의 감정이라는 것은 목석이 아닌 한 이런저런 일들로인해 뜻밖의 자신을 경험하게 됩니다. 그래서 내가 유지하고 싶은 마음의 평화와 자유는 갑작스러운 일로 찢기고 흔들립니다. 옛날에는 그랬을 때 흔들리는 제가 싫었습니다. 그래서 흔들리지 않는 존재가 되려 했습니다. 전 지금도 흔들립니다. 당연히 흔들리죠. 살아 있으니까. 그런데 제가 예전과 다른건, 흔들릴 때 흔들릴 줄 알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비로소 현재로 돌아온 것입니다. 내 삶을, 내 마음을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예전과 여전히 똑같습니다. 초라합니다. 그런데 내가 경험하는 것은 초라함인데, 이것을 경험함으로 내가 초라해지느냐?. NO!!!
 또 이런 것들만 있는게 아니라 굉장히 자유롭고 충만하고 대단한, 마음이 굉장히 넓은 나도 경험합니다. 그러면 그렇게 훌륭하고 멋진, 감정과 느낌들을 경험함으로써 내가 대단한 존재가 되느냐?. NO!!!.
 저는 여전히 같은 것을 경험하는데 그냥 그럴뿐입니다.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할 뿐입니다. 그래서 경험하는 것은 초라함인데, 야 설명할 수 없는 평화와 쉼이, 자유와 지혜와 사랑이 가득히 일어납니다. 볼품없는데 그 볼품없는 것 속에서 정말 위대하고 대단한 것들이 일어납니다. 세상에서 가장 굳고 단단한 것은 금강, 바로 지금이고, 우리자신이 모두 금강입니다. 다시 말하면 우리가 부처라는 말입니다. 무얼 더 할게 없습니다. 지금 이대로 금강이면서 왜 금강을 못사느냐 하면, 실재하는 것은 지금 현재 존재하는 이대로인데, 마음이 과거로 가거나 미래로 가기 때문입니다. 지금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금강인 실상이 드러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무위'하는 것입니다. 이미 금강이기 때문에 우리가  진리를 깨닫고 자유롭고 영원할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그 가능성은 따논 당상입니다. 황벽선사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도를 배우는 사람들이 만약에 얻어서 성불하고자 하거든(이 말을 달리하면 마음의 모든 고통을 뛰어 넘어서 영원한 자유와 평화, 진정 나답게 살아가는 삶, 영원히 행복한 삶으로 들어가고 싶거든 하는 말입니다.) 불법을 전부다 배울 필요가 없다. 어떤 불법도 배울 필요가 없다. 정말 맞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딱 하나만 배우면 됩니다. 곧 '구함없음과 집착없음'만을 배우면 됩니다.
 '구함없음과 집착없음'이것을 다른 말로 하면 무위, 지금 이순간 그대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늘 마음이 평화롭고, 기분이 좋거나 하지는 않습니다. 좋던 기분도 가라앉습니다. 우울하고 힘들고 고통스럽고, 그렇게 힘들어지기도 합니다. 그런데 구함없음이 뭐냐면, 이때 힘들고 초라하고 답답할 때, 우리는 이것을 견디지 못합니다. 그래서 얼른 회복하려하고 얼른 평화를 찾으려하고, 지금 현재 내게 다가와 있는 것은 이런 초라하고 볼품없고 불안함인데 이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이것을 허용하지 않으면서 다른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구함없음'은 바로 지금 일어나는 이것 아닌 다른 것을 구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냥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라는 것입니다. '집착없음'은 뭐냐면, 지금 일어나는 이것을 벗어나려 하는 것도 사실은 집착입니다. 우리에게 괜찮은 마음이 있을 때가 있습니다. 편안한 마음, 평화로운 마음이 있는데, 이런 마음이 오면 사람들은 이걸 지키고 유지하려하고, 확장하려합니다. 하나는 지키고 하나는 버리려하는 것, 이것또한 집착입니다. '구함없음과 집착없음' 곧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편안하고 평화로운 마음은 지속되지 않고 곧 떨어집니다. 또 고통과 괴로움, 답답하고 힘든 이걸 받아들이고 경험하고 이 속에 있으면 구름처럼 모든 건 생겨나다가 곧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분별심/에고는 그걸 참지 못합니다.
 
*도덕경 식구들의 마음을 편안하게 하는 사진을 찍고 싶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을 때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진리와 자유를 만나게 된다는 것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가르침이다.
<간음중에 잡힌 여자>
끌려가는 여자는 외마디 비명소리 한 번 지르지 못한 채 극도의 두려움과 공포와 수치심 속에서 그저 죽을 듯이 떨고만 있다. 더러운 죄인이라는 낙인이 그녀의 마음을 더욱 괴롭고 비참하게 한다. 그런데 그녀는 자신을 위해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살려 달라고 소리치지도 않았고, 잘못했다고 빌면서 눈물로써 용서를 구하지도 않았으며, 다시는 그러지 않고 깨끗하게 살겠다고 맹세하지도 않았다. 또 예수 앞에 섰을 때에도 그녀는 자신을 불쌍하게 여겨 달라고 선처를 호소하지도 않았고, 당신의 사랑으로 자신의 영혼을 구원해 달라고 울부짖지도 않았다. 그녀는 정녕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저 황망히 끌려온 그대로 단지 무리 한가운데에서 두려움에 떨며 가만히 서 있었을뿐이다. 그런데 그 더러운 그대로, 그 초라한 그대로, 그 수치 그대로, 그 비참함 그대로 그녀는 홀연히 구원을 받고 자유함을 얻었던 것이다.<종교 밖으로 나온 성경에서...>
 
 
 
 
 
  에고가 살아있기 때문에 지금 일어나는 이것을 있는 그대로 경험하지 못하고 미래의 것을 구하는 것입니다. 고통이 아닌 평화를, 괴로움이 아닌 편안함을 바라는 것입니다. 초라하고 볼품없는 이 모습 그대로는 살아갈 수 없고, 또한 내가 이런 쭉정이라는 사실을 남들에게 들키면 어떡하나, 채워야지, 있어 보이고 남들에게 주목받으려 하는데, 사실 이렇게 하는게 더 힘드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극복하고 벗어나려고만하지 이 초라한 것의 가치는 모릅니다. 훌륭한 것의 가치는 아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사실 그 훌륭한 것의 가치도 모르는 것입니다. 겉보기에 훌륭한 것이 좋아 보이고 더 가치가 있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그 훌륭한 것에 붙어 살려 합니다. 그러나 한쪽 측면인 어둠을 버리고선 빛이 존재하지 못합니다. 좋은 것을 지키려고 하는한 초라한 것, 어둠의 가치를 모르게 됩니다. 우리 마음이, 세상 모든 것이 금강입니다. 지금이라는 측면에서, 초라함, 찌질함, 번뇌 그대로 보리이자 금강입니다. 정말 맞습니다. 지금 이순간이 금강입니다.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게 되면, 영원한 것을 알게 됩니다. 비록 겉으로 볼 때는 흔들리지만, 자신이 결코 흔들리지 않는 존재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불교식으로 이야기하면 분별심, 곧 가리고 택하는 마음이 있어가지고, 이런 못난 것을 받아들이고 이것이 나라는 것을 인정하고 시인하면 자기가 지금까지 지키고 있던 그 훌륭한 '나'가 다 무너질 것 같으니까, 이 미망을, 착각을 결코 버리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단지 지금으로 돌아와 금강을 알게되면 모든 걸 다 경험하지만 훌륭한 것에 집착하지도 않고, 초라하다고 그것을 버리지도 않습니다. 끊임없이 우리는 섰다/무너졌다, 됐다/안됐다, 당당하다/불안하다, 모든 것들을 경험하는데, 그 모든 흔들리는 것 속에서도 영원히 흔들리지 않는 그 무엇을 발견할 수 있게됩니다. 그 길이 바로 '지금'입니다. 이 이야기를 노자의 표현을 빌려 다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천하의 지극히 굳고 단단한 것을 이긴다. 이때 천하의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 무엇이냐면, '무위'입니다. 천하의 지극히 굳고 단단한 것은 '나'라고 하는 '에고'입니다. 이 에고가 얼마나 굳고 단단하냐면, 이걸 무너뜨릴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 에고는 사실 존재하지 않습니다. 지금 있는 그대로의 것에 저항하고 거부하는, 뭔가를 이루려고 하고 도달하려하고, 지키려하는 그 모호한 마음, 살아오는 삶속에서 이런저런 경험과 지식으로 인해 형성된 그 애매한 있지도 않은 그것인데, 이게 얼마나 큰 힘을 발휘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왜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지 못하느냐면, 이 에고 때문입니다. 지킬 내가 있고 바라고 원하는, 도달하고, 이루고 싶은 '나'가 있습니다. 그래서 좋고 훌륭한 것은 자기 동일시해서 받아들이고, 작고 초라한 것은 자기동일시를 하지 않고 건너 뛰려하는 것, 이 모두가 에고가 하는 짓입니다. 사실 이 에고, 나라고 하는 걸 부술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도닦는 사람들을 보면, 특히 깨달음을 얻었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평생을 닦아서 부처가 되고 싶어합니다.(사실 부처는 아무것도 아닌 것입니다.)근데 사람들이 공부를 하다보면 그래서 부처가 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은, 실상은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된다는 것인데, 부처는 굉장히 대단하고 높고, 도달하면 다시는 내려오지 않는 어떤 자비로운 존재가 되는 것으로 착각을 합니다. 제가 아는 어떤 분은 내가 드디어 부처가 되었다, 깨달음을 얻었다 선언하면서 사람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사실 이것이 에고의 속임입니다. '내가 뭐다'하는 것은 다 에고입니다. 늘 구하고 겸손하고 묻고 하던 사람이 이젠 부처가 되었다고 가르치려들고, 자기레벨에 맞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합니다. 그 부처가 되었다는 분의 모임에 한번 가보니까 다른 사람들이 부처님, 부처님하는데, 부처가 무척이나 되고 싶었겠죠. 삶이 약간 비리비리하고 찌질하고 분명하지 않으니까, 확 부처가 되어 어느 순간에도 당당하고 싶은 그런 열망이 있었을 것입니다. 내가 부처다, 내가 전체다, 내가 우주다 하는 것도 어쩌면 전부 에고입니다. 이렇게 에고는 정교하고 절대 부서지지 않습니다.
 
  아니타 무르자니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이 변했다'라는 책을 쓴 사람인데, 프랑스계 인도여자입니다. 이 분이 암에 걸리게 됩니다. 암세포가 온몸으로 다 퍼져 복수에 물이차고, 나중에 숨도 쉬지 못하게 되어 산소호흡기로 연명해야할 만큼 위독하게되었는데, 무르자니는 그 순간에도 절대 놓지 못하는 게 있었습니다. 인도계 여자로서 인도여자의 전통을 부모로부터 배우게 됩니다. 어려서부터 여자는 시집가서 남편을 봉사하고 요리를 해야하며, 늘 순종해야한다는, 자유로운 영혼을 지닌 무르자니에게는 목을 조이는 그 무엇이었습니다. 또한 프랑스미션스쿨을 다니게 되는데, 전통적인 인도 의상을 입어야 하는 무르자니는 그 학교에서 다른 학생들에게 많은 놀림을 받았을 것입니다. 이러다보니 서양학생들 사이에서 늘 눈치보고, 단 한번도 자기자신이 있는 그대로 방아들여져본 경험을 해보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저도 마찬가지입니다만, 상처가 생기게 됩니다. 누구에게든 사랑받고 싶은 마음상태가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려면 사랑받을 수 있는 자기를 자꾸 만들어야 합니다. 사랑받고 인정받는, 용납되는 존재가 되기위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있지도 않은 허상의 자기와 자기동일시를 하게됩니다. 그래서 그것을 지키려하고 잃어버리지 않으려합니다. 이게 여자들 같은 경우에는 우아하고 품위있는 모습인데, 이 무르자니는 암에 걸려 완전히 뼈만남아있고, 동공이 튀어 나오고 머리칼이 빠지고 산소호흡기로 연명하는, 곧 죽음을 맞이해야하는 순간인데도 그것을 놓지 못했던 것입니다. 친구들이 병문안 오는데, 병문안 오는 친구들에게 바로 죽음이 코앞인데도 불구하고 자기를 우아하고 품위있게 보이려합니다. 이게 에고가 하는 짓이고, 또한 상처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그런데 죽음을 앞에 둔 마지막 순간에 그 죽음을 앞두고도 지키려하는 자기 몰골을 딱하니 보게 됩니다. 이 분이 스스로 고백하기를 '아, 지금 이 순간에도 내가 이것을 지키려 하는구나, 지금 이 순간에도 지킬 그 무엇이 있단 말인가?!!!', 이러한 자신의 모습을 자각하면서 그 지키려는 마음을 놓게 됩니다. 그리곤 곧바로 육체의 죽음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서 아니타 무르자니 같은 경우는  전혀 다른 세계를 갑자기 보게 됩니다. 곧 이 몸이 내가 아니라는 사실, 실상을 알게 됩니다. 나는 오거나 가는 존재, 있다가 없는 존재가 아니라는 실상을 보게됩니다. 임사체험후 이 세상으로 돌아가기를 결정하고 돌아오게 됩니다. 그때 온몸에 물혹처럼 부풀어 있던 암세포가 전부 치유되게 됩니다.
 
*나는 우주에 관한 가장 놀라운 진실은 별이나 행성을 공부하는 것처럼 저 바깥에 있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진실은 우리의 깊은 곳, 우리의 장엄한 가슴과 마음, 영혼 안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한 우리는 바깥에 있는 것을 이해할 수 없을 겁니다.<아니타 무르자니>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으냐면, 지금 이순간은 절대 무너질 수 없습니다. 가장 부드러운 것이 가장 굳고 단단한 것을 이긴다고 할 때, 지극히 부드러운 것은 무위이고, 굳고 단단한 것은 에고입니다. 이 에고를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기려는 그놈이 바로 에고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내려놓는다 하는데 내려 놓을 수 없습니다. 그 내려놓으려는 그 놈이 바로 에고이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수련하다고 하는데  수련하는 그것이 에고입니다. 그러니 마음으로는 마음을 절대 어떻게 할 수가 없습니다. 마음위에 마음을 포개어 놓는 행위가 될 뿐입니다. 지금 내가 경험하는 것은 번뇌이고 불안이고 우울인데 그 위에 평화라는 마음을 얹어 가지고 추구의 대상, 목표의 대상으로 만들면 마음이 미래로 내달리게 됩니다. 에고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워낙 단단하고 빈틈이 없습니다. 흔히 하는 말로 손오공이 부처님에게 벗어나려 지구 끝까지 간단 말입니다. 그러면서 손오공이 이제 다 벗어났구나 싶었는데, 여전히 부처님 손바닥 안에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 마음을 가지고 우리 마음의 평화를 얻고 깨달음과 쉼을 얻고 나 자신을 완성하려는 모든 몸짓이 부처님 손바닥 안입니다. 마음을 가지고서는 영원한 자유와 평화를 얻을 수 없습니다. 저는 수행을 하면서 부처가 되는 체험을 하고, 완전해지는 체험을 하는 사람들을 많이 봐왔습니다. 어떤 스님 한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분은 티벳, 네팔 등지에서 오랫동안 수행을 하셔서 지복, 황홀경, 내가 곧 우주다는 느낌도 갖습니다만, 그것 전체도 부처님 손바닥안이고 에고의 장난입니다. 이 모두가 에고가 하는 일입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오는 작은 에고를 경험하다가 확 넓어지고, 전체가 되는 듯한 체험을 하게 되면 그것이 에고가 하는 짓이라는 생각을 못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것 조차도 에고의 짓입니다.
 
  이 에고를 깰 수 있는 방법은 도무지 없습니다. 그러나 유일한 길이 딱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무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노자가 말합니다. 무위하면 자연이라고,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저절로 그렇게 된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구무착' 곧 구함이 없고 집착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아니타 무르자니가 죽음 직전에서 조차 내려놓지 못했던 자기를 지키려고 하는, 그게 에고거든요. 나/에고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데 무언가 지킬게 있는 것 같은 거죠. 어떻게 뭔가를 하지 않으면 자신을 잃어버릴 것 같은, 아무것도 아니게 된다는 것 자체를 굉장히 두려워하는 존재가 바로 에고입니다. 실상을 보기 두려워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기보다는 뭔가 의미있는 특별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 바로 에고입니다. 이걸 놓을 수 있는 유일한 하나의 방법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을 노자는 지극히 부드러운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감정은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으며, 더 나빠지기도 합니다. 좋은 것은 지키려하고 그렇지 않은 것은 건너 뛰려하는, 바꾸고 고치고, 자기가 늘 유지하고 싶은 평화가 있습니다. 항상 그 평화의 상태로 돌아가려고 하는, 이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게 뭐냐하면, 지금 내게 와 있는 이것(불안, 우울, 답답함, 찌질함 등등)이 아닌 다른 것을 구하고 원하는 그 마음은 무엇인가를 하고자 하는 마음입니다. 무엇인가를 해서 부족한 것을 충만한 것으로 바꾸려 하고, 잃지 않으려고 하고 지키려하고 그러기 위해 자꾸 무엇인가를 하게 됩니다. 이게 하는 것, 함이라면, 무위는 그 짓을 당장 관두는 것입니다.
 
 쪽팔림이 오면 쪽팔림으로, 강함이 오면 강함으로 그냥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그것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 무위입니다. 다시 말하면 '금강', 지금 이순간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오직 이 순간에 존재할 때에만 에고는사라지게 됩니다. 원래 에고란 존재하지 않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에고는 자꾸 무엇인가를 하려고 합니다. 너무 무의미하고 공허한 삶이 싫어 의미를 찾습니다. 그런데 이공허가 금강입니다. 지금 이순간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이것이 금강입니다. 우리는 금강을 찾는다는 이유로 금강을 떠납니다. 왜 떠나느냐하면, 모습때문에 그렇습니다. 이건 절대 아니지 하며 모습 때문에 다시 말하면 분별심 때문에 그러는 것인데, 모든 사람이 지금 이순간 금강입니다. 그러니 아무것도 할 필요가 없고, 일체불법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구함없이 그 순간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때 그 순간 존재하면 아픕니다. 힘들고 괴롭고 마른 모래를 씹는 것 같고 쩔쩔매고, 온몸이 소금에 절여 쫄아지는 것 같은, 그러나 그럴때 쫄리면 됩니다. 모습을 따지면 이것과 저것이 다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그렇지가 않습니다.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아픔과 고통을 동반합니다. 왜 아픔과 고통을 동반하느냐면, 이 찔질함을 버리고 훌륭하나 것을 바라는 만큼, 그 무게, 간격 만큼 지금이 괴롭게 됩니다.
 
 괴롭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훌륭한 모습에 대한 집착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손가락이 곪았다면, 째고 꽉 눌러서 고름을 빼야 합니다. 그러자면 당연히 아픕니다. 이 아픔은 내게 자유가 왔다는 증거입니다.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지금 내게 일어나는 것들은 찌질함, 강박입니다. 이걸 건너 뛴다는 것은 내가 나를 판단한다는 것입니다. 도대체 이런 나를 도저히 사랑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건너뛰고 고치고 바꾸고 자신을 짓밟고 학대하면서 입으로는 사랑을 이야기하는 자, 다 거짓말하는 자입니다. 그것은 단지 이념일 뿐입니다. 나를 힘들게 하고 남을 힘들게 할 뿐입니다. 사랑은 그런게 아닙니다. 사랑은, 정만이가 그랬습니다. 감정적인 차원의 것이 아니라고. 그렇습니다. 사랑은 존재차원의 것입니다. 존재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이 바탕위에서 온갖 것들이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을 감정적인 차원으로이해하는데, NO!!!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있는 그대로의 다른 이름이 사랑이요 자유입니다. 우리는 너무나 익숙하게 보고 듣고 손에 만지는 감정적인 차원으로 이해하다 보니까 싫으면 뱉고, 물론 그 마음을 알고 이해합니다. 그러나 진짜 자유롭고자 하면, 이 한번 태어난 삶에서 진짜 알고 누리며 살고 싶거든, 모든 것들이 왔다가 가는 이 허망함 속에서 영원히 허망하지 않는 것을 알고 싶거든, 그 기회는 언제나 지금 이순간 속에 있습니다. 삶이 축복인건 계속해서 우리가 현재에 있다는 것입니다. 이 현재가 하나님이고 무한한 자입니다. 다만 가리고 택하는 그 한마음만 내려 놓는다면, 무위속에서 에고를 녹일 수 있게 됩니다.
 
*괴롭다는 것은 자신이 바라는 훌륭한 모습에 대한 집착이 떨어져 나간다는 것입니다.
 
 
 
 
  무위,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것의 뜻이 무엇이냐면, 그냥 이대로, 매순간 그냥 이대로란 뜻입니다. 지금 일어나는 이것을 떠나지 않고, 바꾸지 않는 것입니다. 마조선사가 그랬습니다. 도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만 않으면 된다. 어떤 것이 더럽히는 것이냐면, 지금 일어나는 이게 싫어서 조작하고 바꾸어서 저리가려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다행스러운 것은 여러분들은 지금 이순간에 존재합니다. 온갖 일어나는 감점들과 느낌들을 경험합니다. 그럴 때 다만 그것 그대로 경험할뿐 벗어나려하거나 바꾸려 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그러면 에고는 사라집니다. 원래 에고는 존재하지 않았기에 그렇습니다. 삼조승찬스님이 말씀하십니다.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다. 다만 취하고 버리는 그 마음만 내려 놓으면 된다. 다만 미워하거나 사랑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해질것이다.
 
 천하에 지극히 부드러운 것, 곧 무위는 지키려고 애쓰지 않고, 유지하려하거나 확장하려 하지 않고, 지금 일어나는 이것을 건너 뛰려하지 않고 매순간의 자신으로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케이티가 이렇게 말했습니다.(케이티는 43세에 깨어납니다. 깨어나기전 10년 동안 극도의 우울증과 자살 충동에 시달립니다. 너무나 모든 것이 허무하고 헛되게 느껴지다보니, 이 케이티는 이도 닦지 않게됩니다. 그러면서 삶이 너무나 괴로워 요양원엘 들어가게 됩니다. 요양원엘 가면 침대가 있는데, 자기는 침대에 누워 잘 자격조차 없다고 생각하며 요양원 다락방 바닥에 그냥 누워 자게 됩니다. 그렇게 자다가 발이 간질간질해서 잠에서 깨게 되는데, 바퀴벌레 한 마리가 발로 기어올라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순간 케이티는 깨어납니다. 깨어나며 하는 첫마디가 '없다'. 내가 그렇게 옳다고 믿었던 생각들, 관념들, 온 세상이 다 사라져 버립니다. 발로 기어 올라왔던 바퀴벌레가 더 이상 바퀴벌레가 아니었고, 발이 발이 아니었습니다. 모든 이름들이 다 떨어져 나가게 됩니다. 그렇게 깨어나니 사람들이 케이티를 찾아오게 되고 실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시작합니다. 바이런 케이티는 그냥 살다가 깨어났습니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경전에 대해선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러나 남편(세번째) 미첼은 여러 경전에 관한 세계적 권위자입니다. 그러니 미첼의 입장에서 보면 그 경전이 하는 말들이 케이티의 입에서 평범한 언어로 나오니 아주 놀라웠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미첼과 케이티는 도덕경에 관해 대화를 나누게 됩니다. 그 이야기가 한권의 책으로 나온게 '기쁨의 천가지 이름'입니다. 김윤사장이 그 책을 번역했는데 자신이 잘 이해되지 않은 부분을 교정해 달라고 제게 부탁했습니다. 그래서 원고를 받아 먼저 스티븐 미첼이 쓴 서문을 읽어나갔습니다. 케이티가 미첼에게 묻습니다. '도'가 무엇이냐고, 미첼이 말하길 도의 원래 글자뜻은 길인데, 그것은 궁극적인 실재를 가리킨다고 대답합니다. 케이티가 남편의 설명을 듣고 기뻐하면서도 '궁극적'이라는 개념이 이해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현존, 현실, 지금은 너무나 단순하다. 그것 위에 아무것도 없고, 그것 뒤에 아무것도 없다. 그것은 지금현재 당신에게서 일어나는 이것, 이것 이상 그 어떤 비밀도 없다. 드러나 있지 않거나 감추어진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지금 일어나는 것과 당신이 싸운다면 당신이 지게되어 있다. 지금 있는 것과 다투는 한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 저는 이 구절에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고통의 원인은 '지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있는 것을 거부하고 저항하고, 다른 것을 원하는 것이 고통입니다. 마음위에 마음을 얹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고통은 내 마음이 만들어 내는 것입니다. 실상을 알게 되면 고통은 없습니다.) 당신이 만약에 삶이 물처럼 흘러가도록 허용하면 당신은 그 물이 될 것입니다. 사실은 삶이 물처럼 흘러갑니다. 이 흘러감을 허용하기만하면 당신은 그 물이 됩니다. 영원한 그 무엇이 됩니다. 이것을 노자는 지극히 부드러운 것, 무위가 지극히 단단한 것, 에고를 개뜨린다고 말합니다. 에고는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인데 그 지키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고통받으면 원래 없던 에고니까 사라지게 됩니다. 그렇게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면 아프고 힘들지만, 조금 시간이 걸리겠지만 나비가 되게 됩니다.
 
 나비가 뭐죠?
그것은 네가 되어야할 그 무엇이야.
아니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것은 털이 부숭부숭하고 그저 기어다니기만 할뿐인 보잘 것없고 초라한 모습인데 이것 속에 어떻게 나비가 있다는 것을 믿죠?.
 
우리 삶이 그렇습니다. 찌질하고 기어다닐뿐입니다. 이런 대화를 하다가, 마지막에 늙은 애벌레가 말합니다.
너는 나비가 될 수 있다. 우리는 너를 기다린다. 다만 시간이 조금 걸릴뿐이다.
 
 매순간 이대로 존재하는 것, 고통스럽고 힘듭니다. 그러나 그냥 고통받고 힘들면 됩니다. 시간이 좀 걸리긴 합니다. 왜 시간이 걸리냐면, 사실 이 금강, 지금에는 시간이 존재하지 않습니다만 자꾸 무엇인가를 간택하고, 도달하고 이루려고 하는 습이 있는 만큼 시간이 걸립니다. 근데 이 지금이라는 것은 정말 강렬합니다. 벗어나거나 도망가려하지 않고 지금 이순간 존재하면 켜켜이 쌓여있던 모든 에고, 상처와 업장들을 다 녹여버립니다. 지금 이순간은 그토록 강렬합니다. 사람들은 지금 이순간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내 모든 생각과 판단으로 지금 올라오는 이것을 건너 뛰려하기 때문에 지금 이순간의 가치를 모릅니다. 또한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는 것의 가치를 모르기 때문에 늘 어떠너 목적을 두고 그것을 이루려 무엇인가를 하려 합니다.
 
 서울에 가면 어떤 대학생이 있는데, 늘 자신이 초라하다고 생각합니다. 여학생 앞에만 가면 자신감있게 꼬시지 못하고 찌질하게 되는. 왜 나는 그대 앞에만 서면 작아지는지하며 자신의 그런 모습에 너무 힘들어 했습니다. 그러면서 너무 불공평하다고, 어떤 사람들은 편하게 하는데 왜 나만 이렇게 힘드느냐, 답답하고 괴롭다. 그래서 제가 말했습니다. 힘들어라, 답답해라, 지금을 버리지 마라, 괜찮다, 니가 지금을 버리면서 너 자신의 초라함을 용납하지 못하면서 니가 원하는 것이 제대로 오리라고 생각하느냐?!!. 세상에 그런 것은 없다. 저의 이야기가 이 학생의 가슴에 와 닿았는지, 좋습니다. 제대로 한번 힘들어 보겠습니다라는 결심을 내었습니다. 맞습니다. 제대로 힘들어 보겠다는 이 마음이면 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것에서 도망가지만 않으면 됩니다. 어떤 것이 와도, 와라!하는 마음이면 됩니다. 지금 일어나는 이것을 받아들임으로 지금까지 나라고 생각해서 내가 굳건히 지켜오는 모든 것들이 한순간에 무너지더라도 그렇게 되리라. 죽으면 죽으리라하는 그 마음이면 됩니다. 그런 마음이면 철옹성같은 에고마저도 겁이나 달아나게 됩니다. 어쩔수가 없거든요. 깨달음을 얻는 것은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있는 영역안에 있습니다. 마음으로 마음을 넘을 수 없지만, 또한 마음으로 그 자리에 들어설 수 있습니다. 어떤 마음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렇습니다. 지금 이것에 존재하겠다. 나를 위해서 지금을 벗어나는 어떤 짓도 하지 않겠다. 지금 일어나는 이것에서 달아나지 않겠다. 그래서 힘들면 힘들어 보겠다. 찢기고 피흘리겠다는 마음이면 됩니다. 에고가 제일 무서워하는게 무엇인지 아십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에고는 자꾸 무엇인가를 해야 합니다. 마치 지킬 무엇인가가 있는 것처럼, 그것이 에고의 생존방식입니다. 예수가 말했습니다.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 자는 살 것이다. 여기서 '나'가 무엇입니까?. 예수?. NO!!!. 예수의 실상은 '지금'입니다. 예수는 2000년전에 태어난 어떤 구체적인 인물이 아닙니다. 예수는 '지금'입니다. 자기 십자가를 지지 않고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있지도 않은 것이 틈 없는 데로 들어간다.'
무위, 있는 그대로가 모든 것을 다 부수어 버립니다. 단지 시간이 조금 걸릴 뿐입니다. 또 이렇게 말해 볼 수 있습니다. 힘들고 아픈, 초라한 이 '나'를 받아들이는, 일어나는 것을 거부하지 않고 건너뛰려하지 않고 맞닥뜨리려는 이 마음안에서는 새로운 지혜가 열립니다. 진정으로 삶, 자기 감정으로부터, 지금 이순간으로부터 배울 줄 아는 마음이 됩니다. 이게 자각의 힘입니다. 비로소 삶에 대해서, 실패에 대해서, 무너짐에 대해서, 약함에 대해서 배울 줄 아는 마음이 됩니다.  달아나거나 어떻게 이루려고 하는  동안에는 이 지성이 열리지 않습니다.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는 자는 당할 것은 당하고, 아플 것은 아프고, 찢길 것은 찢깁니다. 그리고 물러나지 않고 맞닥뜨리려는 그 마음안에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새로운 에너지가 각성됩니다. 우주가 가지고 있는 참된 에너지가 각성됩니다. 노자는 말합니다. 나는 이런까닭에 무위의 유익함을 안다. 이게 바로 영원으로 들어가는 문입니다. 우리의 실상을 볼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말없는 가르침이란,  분별/언어를 내려놓고 하는 말입니다. 분별을 내려놓고 하는 말은 어떤 말이라도 한마디도 하지 않은 것과 같고, 분별속에서 아무리 침묵하더라도 소음에 불과합니다. 실상을 아는 자의 가르침은, 사실 엄밀히 말하면 제가 실상을 알아 여러분을 가르치는게 아니고 이보다 더 큰 스승이 있습니다. 이런 표현이 있습니다. 도라는 것은 알거나 알지 못하는 것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도를 아는 데에는 어떤 것도 필요없습니다. 어떤 불법도 배울 필요가 없습니다. 왜그러냐면 도라는 것은 현존이고, 지금 이대로 이기 때문입니다. 중생심 이대로가 곧 부처입니다. 그러니 지금 이것 이대로 도인데, 이걸 알기위해 어떤 지식이 따로 필요하겠습니까?!!. 또 도를 알았다하더라도 따로 새로이 생겨난 지식이 있겠습니까?!!. 또한 도를 얻었다고 해서 따로 얻은 무엇이 있겠습니까?!!. 그냥 이대로일 뿐입니다. 지금 이순간에 존재하기 위해 어떤 지식과 방법이 필요합니까?.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다만 존재하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하기에 실상을 깨달은 스승보다 더 큰 스승은 바로 여러분 자신입니다. 여러분 자신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 이게 바로 말없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에 무슨 말이 필요합니까?. 제가 말을 많이 하는 것은, 이 실상을, 이 진실을 여러분들에게 알리고 가슴을 울리게 하기 위해서 그런 것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 자체는 아무런 말도 필요없습니다.
 
*학교에 눈이 왔습니다. 눈송이 하나도 자신이 떨어져야 할 자리에 정확히 떨어진다고 합니다. 지금 내게 일어난 현실과 다투지 말아야겠습니다.
 
날이 춥습니다. 슬기롭게 겨울추위 이겨내시길 ~~
 
 

 
 함이 없음의 유익함. 그냥 애쓰지 않고 용쓰지 않는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것, 곧 말없는 가르침과 무위에 필적할 만한 것은 없습니다. 여러분 자신이 답이고 열쇠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올라오는 이것보다 더 큰 스승은 없습니다. 석가모니가 그랬습니다. 자기자신을 등불삼아가라, 자기자신이외의 그 어떤 것에도 의지하지 마라. 아멘입니다. 답이요, 금강이요, 모든 것인 여러분!, 이 일상이 우리에게 주어지는 것은 내가 이미 금강이요, 내가 이미 흔들림 속에 흔들리지 않는 부동이요, 영원한 것이라는 것을 알게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고 그 앎 하나가 자기와의 싸움을 끝나게 하고, 지극한 평화와, 자유와 쉼(안식)이, 사랑이 나오게 합니다. 그때 비로소 존재의 본질이 드러나는데 그 존재의 본질이 사랑입니다. 나와 너의 구분이 없는, 나를 있는 그대로 경험하고 받아들이면 나와 너의 구별이 없게됩니다. 또한 내가 갇혀있었고 아팠던만큼 다른 사람들이 아프기 시작합니다. 없는 짐을 지고, 그 무게에 힘들어하는 그 고통을 나도 같이 느끼게 됩니다. 우리에게 이 일상이 주어진 것은 이 실상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끊임없는 사랑의 연속이 곧 일상입니다. 케이티가 그랬습니다. 삶은 곧 기쁨이다. 온통 기쁨밖에 없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다람쥐쳇바퀴 도는듯한 일상이지만, 이게 얼마나 아름답고 감사한지, 기뻐하며 서로 나누며, 경험하며, 성장하는 아름다운 여러분~~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봉식이할매님의 댓글

봉식이할매 아이피 (175.♡.214.244) 작성일

헐 글끝이 아니라 진행중~~~? 오마이갓!!

봉식이할매님의 댓글의 댓글

봉식이할매 아이피 (175.♡.214.244) 작성일

읽고 있으니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들을때마다 새롭게 들리는 김기태 선생님의 강의 내용도 놀랍지만,

그날의 강의를  꼭 복사기로 복사라도 한것처럼

소름끼치도록 정확한 후기에 여름가지님의 정성스러움에 나도 모르게 감탄이 터져나오네요.

여름가지님 화이팅~~~~!!

서정만♪님의 댓글

서정만♪ 아이피 (221.♡.67.24) 작성일

정말 대단하네요..여름가지님..글을 읽었는데...
글에 들어간 수고에 감탄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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