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재연되는 좌우익의 싸움을 보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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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규 (211.♡.35.238) 댓글 2건 조회 5,050회 작성일 06-11-09 13:48본문
이데올로기[신념체계]의 뿌리, 에고(ego)의식
이데올로기[=신념체계(信念體系)]의 대립은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성격상 피할 수 없는 문제이다. 우리가 사는 이 상대세계(相對世界)는 높은 곳이 있으면 낮은 곳이 있고, 강자가 있으면 약자가 있으며, 선이 있으면 악이 있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이편에 하나의 완고한 이데올로기가 서면 저편에는 반드시 그에 상응하는 이데올로기가 선다.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런 상대성을 서로가 깊이 이해하기만 한다면 이러한 이데올로기의 대립을 공동이익의 창출로 승화(昇華)시킬 가능성이 없지는 않을 것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인류는 유사 이래 자신들이 창조한 이데올로기 때문에 너무나 큰 고통을 반복적으로 겪어왔다. 공(共)․자(資)의 이데올로기 대립을 비롯하여 가장 완고한 이데올로기인 종교 간의 대립이 그동안 인류에게 준 비극들은 이루 말로 다할 수 없을 정도이다. 인간의 이성(理性)은 과연 이런 어리석음을 끝없이 반복해야 할 정도로 무력한 것일까?
필자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인류는 이데올로기 대립의 고통을 충분히 겪어왔으며 이제는 이런 어리석음과 그로 말미암은 고통에서 벗어날 때가 되었다. 특히 한반도는 이 고통을 그 어떤 땅보다도 가장 처절하게 겪은 곳이므로 그 해결책이 나타날 수 있는 기운이 사무쳐 있는 땅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이데올로기 대립의 해결책은 “도대체 이데올로기란 무엇인가? 사람은 어떤 과정을 통해 이데올로기스트(Ideolgist)가 되어 가는가?”라는 본질 문제가 해명되어야만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고 본다. 그 과정에 대한 필자의 연구 결과는 아래와 같다.
『모든 인간은 태어날 때 이미 어떤 경향성[=유전적(遺傳的) 요인]을 가지고 태어난다. 이 경향성은 그에게 최초로 주어진 환경과 반응하면서 호불호(好不好)의 감각을 경험하게 되고, 이 정보를 뇌에 입력시킨다. 그리하여 이 새 정보는 다시 다음 행동을 선택하는 경향성이 된다. 이런 식으로 무수한 경험들이 각종 경향성을 낳고, 끊임없이 수정(修訂)과 강화(强化)를 반복한 경향성들이 뇌에 입력되게 되면 드디어 자신이 좋다고 느끼는 세계를 일관되게 설명할 수 있는 사고(思考)의 망(網)이 형성되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념체계[=이데올로기]이다. 이 사고의 망은, 오늘날 뇌 연구자들이 말하는 시냅스(synapse)의 망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이데올로기스트란 이 사고의 망이 매우 견고하게 형성된 사람을 말한다.』
그러므로 사람이 어떤 종류의 이데올로기스트가 되는가 하는 것은 다분히 운명적이다. 즉, 만일 내가 이슬람 국가라는 운명적 환경에 태어났다면 나는 십중팔구는 이슬람교인이 되어있을 것이고, 그 결과 빈 라덴의 열렬한 추종자나 반미주의자가 되어 있을 지도 모르며, 만일 티벳에 태어났다면 십중팔구 불교인이 되어 달라이 라마를 추종하면서 반(反)중국 감정을 가지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내가 만일 북한에 태어났다면 십중팔구 수령을 절대선(絶對善)으로 여기는 주체사상교(主體思想敎) 신자가 되어 있을 것이며, 반미자주(反美自主)를 민족의 정도(正道)로 확신하고 있을 것이다. 또 내가 만일 가난한 집안에 태어났다면 자본주의 보다는 공산주의에 더 호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며, 비록 북의 지도자 동지라 할지라도 그가 만일 어느 재벌가에 태어났다면 자본주의 애찬론자가 되어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원래 이데올로기에는 입에 거품을 물고 주장해야할 숭고한 절대성(絶對性)이란 게 애당초 없는 것이다.
이처럼 우리는 타고난 경향성과 경험의 누적에 의해 이데올로기화 되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의식작용이 일어나는 인간의 마음을 좀더 탐색해 들어가 보면 우리는 에고의식[=‘나’라는 존재감]이라는 하나의 공통된 원천에 도달하게 된다. 즉 저마다에게 있는 이 ‘나’라는 존재감[=에고의식]이야말로 모든 의식작용을 일으키는 욕망의 근본 동인(動因)이라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실로 이 에고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욕망들이 생산해내는 복잡한 생각들로써 영위된다. 그런데 에고의식으로부터 일어나는 가장 근본적인 욕망은 생존욕(生存慾)이라고 볼 수 있으며, 그 밖의 모든 욕망들은 다 이 생존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2차적 욕망들이라고 볼 수 있다. 예컨대 권력욕(權力慾)은 권력으로써 나의 생존을 더 안전하게 확보하려는 욕망이며, 성욕(性慾)은 나의 육체적 생존을 연장하려는 욕구의 변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욕망들은 에고의 생존을 위한 각종 안전판들을 구축하려고 한다. 재물, 각급의 공동체[=가족, 종족, 민족, 국가], 법, 제도, 지위, 명예, 신(神), 천국 등 인간이 가치를 부여하고, 추구하는 모든 것들이 다 안전판에 해당하는 것들이다. 이 안전판들이 필요한 이유를 잘 설명하고 있는 내적 사고체계가 바로 이데올로기이며, 그것은 생존욕의 가장 근본적인 지지대(支持臺)가 된다.
이데올로기는 이처럼 생존을 위한 모든 안전판들의 당위성을 보장해주는 최종적인 근거가 되기 때문에 인간은 이제 이 이데올로기를 자신과 동일시하는 데까지 나아가게 된다. 이리하여 인간은 자신이 만든 이 창조물에게 영원성과 절대신성성(絶對神聖性)이라는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기까지 한다. 마르크스가 자신의 이론에 대해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절대불변의 과학적 진리라고 장담한 것이라든지, 종교인들이 자신이 믿는 종교를 신(神)이 계시한 절대불변의 진리로 확신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신념체계가 견고할수록 적(敵)과 동지(同志)는 더욱 분명해지게 된다. 자신과 동일한 이데올로기를 가지면 동지요, 그 반대자는 적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신념체계의 절대성에 대한 믿음은 곧 적에 대한 공격행위를 정당하게 여기게 만든다. 그러므로 모든 이데올로기스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지 않으면서 적을 무자비하게 타도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극단적인 이데올로기 집단에서는 친구나 어버이조차도, 그가 이데올로기의 적이면, 고발․처형하도록 권장(勸獎)되기도 한다.
이데올로기의 적을 사악(邪惡)한 존재로 인식하는 것은 사랑을 가르치는 종교라 할지라도 예외가 아니다. 종교 간의 전쟁에서는 이교도(異敎徒)에 대한 무자비한 살인행위가 성스러운 행위로 격려된다. 이 얼마나 큰 모순인가? 그런데 바로 이 모든 비극들이 실은 에고의식이 벌이는 장난인 것이다. 당사자들이 이를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은 그들이 이데올로기와 자신을 동일시해버렸기 때문이다.
에고의식이 이데올로기를 자신과 동일시해버리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에고의식은 바로 개별자(個別者)로서의 의식이다. 그러므로 에고의식은 본질적으로 불안(不安)하다. 왜냐하면 개별자로서의 의식은 전체 또는 타 존재로부터 분리되어 있다는 의식을 수반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바로 에고의식의 ‘원초적 착각’이다. 이것을 착각이라고 하는 까닭은 전체로부터 분리된 개별자란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부분이 어떻게 전체로부터 분리될 수가 있겠는가? 이처럼 전체로부터 분리될 수도, 분리된 적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의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이를 착각이라고 하는 것이다.
필자는 이 ‘원초적 착각’으로부터 생기는 불안을 ‘원초적 불안’으로 명명(命名)하는 바이다. 그리고 인간이 추구하는 모든 안전판들은 다 이 원초적 불안으로부터 자신의 안전을 확보하고자 요구된 것이라고 본다. 그렇다면 인간은 이 분리착각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일까?
태초에, 알 수가 없는 한 근원 -이것을 그냥 ‘하나’라고 하자- 이 우주로 화현(化現)하고, -최근 과학자들은 이 시기가 지금부터 137억년 전이라고 한다- 또다시 생명체로 화현하여 진화를 거듭하다 마침내 영장류의 최고봉인 인간으로 화현하였다. 우주는 인간이란 생명체가 출현함으로써 비로소 인식주체(認識主體)와 인식대상(認識對象)으로 나눠지게 된바 이것은 우주가 자신을 인식하는 획기적인 사건인 것이다.
생명체 중에 인식주체로서의 자기를 인식대상과 분리하여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존재는 오직 인간뿐이라고 한다. 인식주체로서의 자신을 인식하는 이 의식이 바로 에고의식이다. 그러므로 에고의식은 원초적으로 ‘분리착각’의 상태에 놓여 있는 것이다.
그러면 우주의 근원인 그 ‘하나’는 대체 무엇인가? 아쉽게도 그것은 우리의 인식 대상이 아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인식주체와 대상이 분리되기 이전의 그 무엇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떤 사물을 인식하듯 그것을 인식할 수도 없고, 어떤 사물을 묘사하듯 그것을 묘사할 수가 없다. 이 ‘하나’는 결코 어떤 사물처럼 말해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 다만 논리적 의미만을 갖는 그 무엇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를 인식 가능한 무엇으로 묘사하고 있는 말들은 전부 삿된 것이며, 필경 그것은 묘사하는 사람[=에고의식]의 욕망을 반영하는 것일 뿐이다.
이 ‘하나’를 허공(虛空)이라고 묘사한다고 할지라도 오히려 오해의 소지가 생긴다. 그것은 유(有)의 상대개념인 정말 텅 비어있는 '무(無)'도 아니며, 공간[Space]인 '하늘'도 아니다. 무(無)라면 일체 존재가 화현될 수 없고, ‘하늘’이라면 결코 무(無)가 아닌 것이다. 그것은 인간의 어떤 상념으로도 미칠 수가 없기 때문에 ‘텅 비었다’고 할 뿐이다. 어떤 이는 궁여지어(窮餘之語)로 ‘텅 빈 충만’이라는 표현을 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모순된 말임은 물론이다. 그러므로 이 ‘하나’는 영원한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두어야 한다.
만일 어떤 사람이 조물주(造物主)를 만나는 굉장한 체험을 했다고 말하고 있다 하자. 그는 그가 만나본 조물주의 모습은 이러저러하며, 그의 뜻은 선(善)하고, 그가 장차 세상을 이러저러하게 다스리려 하더라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의 이 체험을 어떻게 평가해야 할 것인가?
그의 체험은 사실일 수가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가 정말 조물주를 만났다고 인정할 수는 없는 것이다. ‘하나’인 조물주는 결코 인간의 인식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만났던 것이 조물주가 아니라 자신의 원망(願望)이 반영된 마음의 창조물을 만났다고 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조물주가 어찌 선(善)하기만 하겠는가? 그가 선하다면 세상의 모든 악들은 다 어디로부터 온 것이며, 독사와 해충은 대체 무엇이 화현한 것이겠는가?
여기서 지금까지의 논의 내용을 일단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에고의식은 필연적으로 분리착각을 일으키고, 이로 말미암아 생존에 대한 원초적 불안을 안게 된다.
2. 에고의식은 이 원초적 불안을 해소하기 위해 각종 안전판들을 세우려 한다.
3. 이 안전판들의 당위성을 보장하기 위해 사고의 망이 형성된다. 이것이 신념체계[이데올로기]이다.
4. 에고의식은 이 신념체계와 자신을 동일시하고, 적과 동지를 나눈 후 투쟁을 벌인다.
5. 에고의식은 자신의 신념체계를 절대선으로 여기기 때문에 적을 타도하는 자신의 행위를 성스럽게 여긴다.
이렇게 정리해놓고 보니 에고의식과 이데올로기 투쟁 간의 관련이 더욱 분명하게 보인다. 이제 이 어리석은 놀음을 종식시킬 대안을 찾아야 할 과제가 남았다. 필자가 찾은 해결책은 다음과 같다.
첫째. 각국의 모든 교육기관 특히 유치원 등 초급기관에서부터 이데올로기의 본질에 대한 교육이 시급히 이루어져야 한다. 이것이 세계평화를 위한 가장 근본적인 조치이다. 이런 교육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질 때에만 인류는 이데올로기와 자신을 동일하게 여기는 환상에서 깨어나 이데올로기에 부여했던 절대성을 스스로 회수(回收)하게 될 것이다.
이처럼 자신의 신념체계의 절대성에 대한 의식만 다소 완화되더라도 극단적 대립만은 자제될 수 있을 것이며, 이로부터 타협의 가능성이 열리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는 중도(中道)적 견해가 들어설 수 있는 공간이 도무지 용납될 수가 없었기 때문에 이데올로기 간의 무한 대립에 있어서 중도를 지향하는 인사는 양쪽으로부터 공격을 받아 협살(挾殺)되기 일쑤였다. 사람들이 심중으로는 중도를 지지하면서 이를 표현하기는 두려워한다면 결코 타협을 기대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각 나라의 교육기관마다 최우선적으로 이데올로기의 본질에 대한 교육을 실시해야 하며, 그렇게 되자면 먼저 UN 같은 국제기구에서 이데올로기의 본질에 대한 교육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결의가 선행되어야 한다. 이것이 세계평화를 위한 진정한 제일보(第一步)다.
둘째. 투쟁의 근원은 각자의 에고의식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에고의식의 극복을 위한 구체적 노력을 해나가야 한다. 각급 교육기관에서는 마음 지켜보기[=명상]를 인성교육의 핵심 교육과정으로 도입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기존의 도덕시간이나 재량활동 시간을 최대한 활용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고의식의 극복은 곧 의식의 중심이 마음의 창조물에 머물지 않고, 마음 그 자체에 머물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의식의 중심이 마음의 창조물에 있다는 것은 마음이 에고의식의 창조물에 집착하게 된다는 말이며, 집착 있는 곳에는 반드시 투쟁과 그 후유(後有)로 인한 고통을 피할 수가 없게 된다.
의식의 중심이 마음 그 자체에 머문다는 것은 또 무슨 뜻인가? 고인(古人)들은 순수한 마음 그 자체를 본성(本性)이라 하고, 마음 그 자체를 보는 것을 견성(見性)이라 했으며, 견성을 위한 노력을 수행(修行)이라고 불러왔다. 수행을 통해 본성을 보게 된 선각자(先覺者)들은 마음의 중심이 마음자체로 이동해 있기 때문에 언제나 무심히 마음작용을 지켜보게 된다. 이렇게 되면 마음은 여전히 작용을 하지만 그 내면은 흔들림이 없게 되어 집착을 일으키지 않는다. 이것을 고인(古人)들은 ‘동중정(動中靜)’, ‘성성(惺惺)’ 또는 ‘깨어있음’이라 표현하였다.
성실한 수행자라면 능히 알겠거니와 마음은 분명 에고의식이 작용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가 있다. 선각자들에 의하면 이처럼 지켜보기를 계속하면 우선 죽 끓듯 하는 마음작용[=상념(想念)]이 고요해지고, 마음작용이 극도로 고요해지면 마음작용의 메커니즘이 다 드러난다고 한다. 이제 일상은 여전히 마음작용으로 전개되지만 뭔가가 근원에서부터 달라지기 시작한다. 내 마음을 이해하는 만큼 상대방의 마음도 이해하게 되고, 이해한 만큼 용서하는 마음도 생긴다.
그리하여 마침내 한 생각도 일어나지 않은 상태가 오게 되면 문득 지켜보는 마음도 보아야 할 대상인 마음도 함께 사라져 버린다고 한다. 이렇게 마음이 사라지게 되면 “나는 무엇인가?”란 물음도 동시에 사라진다. 이것이 무심(無心)이며, 본성(本性)의 상태다. 이제 무엇이 남는가? 남는 것이 하나도 없다. 선각자들은 이를 언표(言表)가 불가능하다라고만 말한다. ‘분리착각’과 이에 따른 ‘원초적 불안’도 여기에 와서야 사라진다. 참 평화는 오직 이처럼 마음이 사라진 곳에만 있다.
이러한 과정은 마음 그 자체를 탐색했던 수많은 선각자들이 각 단계별로 그 경지(境地)의 이름까지 붙여가며 증언하는 바이다.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사과(四果), 대승불교에서 말하는 ‘보살 십지’ 등이 그것이다. 그럼 본성을 본 이후에는 그들의 삶이 어떻게 되는가? 그들의 삶은 결코 예전처럼 돌아가지 않는다. 그들은 이를 불퇴전(不退轉)이라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그의 의식의 중심은 에고의식에서 마음자체로 이동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에고의식의 흔적은 남아 있다. 그러나 예전처럼 집착(執着)하는 병통은 없다. 에고의 뿌리가 잘려버렸기 때문이다. 뿌리에는 이미 한차례 칼이 지나갔다. 그것은 여전히 연결된 듯 보이지만 이미 영양 공급이 중단되었다. 그것들은 시간이 지나면 어차피 말라죽을 운명에 놓여있다. 더 이상 예전처럼 싱싱한 힘이 없다.
이처럼 에고의식이 극복되지 못한다면 개인에겐 진정한 평화가, 인류에게는 미래가 없다. 그 징후가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21세기의 인류들은 이제 오랜 역사를 거치면서 에고의식들이 벌인 무한경쟁(無限競爭)의 과보를 거두어야만 하는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것이다.
환경호르몬의 영향으로 인류의 현재시각은 11시 55분이라는 경고가 과학자들로부터 이미 나와 있다. 인류멸종의 시각은 자정(子正), 이제 불과 5분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이 이 경고의 내용이다. 가축들에게 먹인 항생제의 폐해로 곧 더 이상 치료방법이 없는 치명적인 질병도 곧 도래한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화석연료의 남용으로 인한 치명적 재앙들도 곧 다가올 것이라고 한다. 그런데 이 끔찍한 이 재앙들의 뿌리가 바로 인간의 에고의식임을 아는 이는 적다.
에고의식은 처음에는 생존을 위한 욕망을 발한다. 그러나 곧 비교우위(比較優位)를 점하기 위한 경쟁이 벌어진다. 생존을 위한 물질 획득 경쟁은 곧 자원의 선점, 일류기술의 확보, 효율적 경제시스템의 구축, 군사력의 우위 확보 등의 무한경쟁을 유발시킨다. 그리하여 경제는 전쟁이 되고 개인, 기업, 국가 조직은 생산효율의 극대화에 매진한다. 그 결과물이 바로 위에서 언급한 재앙들인 것이다. 이것 말고도 경쟁체제로 말미암아 개인이 받는 스트레스와 그로 인한 폐해 또한 막대한 것이지만 여기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한다.
이대로 가면 우리는 정말 절벽으로 간다. 무한경쟁을 유발하게 된 근본 원인이 바로 마음의 ‘원초적 불안’에 있기 때문에 그 해결책은 ‘원초적 불안’의 해소에서부터 구해야 한다. 에고의식의 ‘원초적 불안’이 동인(動因)이 된 마음작용은 입력된 정보에 따라 기계적으로 작용하면서 이 불안을 오늘의 현실로 실현시킨 것이다. 그러므로 멸망으로 가는 이 행진의 진행 방향을 돌리려면 인류가 속히 이 에고의식의 구속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인류의 의식을 에고의식의 족쇄로부터 벗어나게 할 수가 있을까? 그것은 인류가 마음작용의 메커니즘에 대해 깊이 이해하고, 이를 벗어나고자 노력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그러므로 인류는 이제 오래 전에 이미 마음의 비밀을 밝혀낸 선각자들의 지혜를 경청해야만 할 때를 맞이하였다고 볼 수 있다. 과학자들이 뇌와 마음에 대한 연구에 입문하기 훨씬 이전에 인류 가운데는 마음에 대한 비밀을 밝혀낸 선각자(先覺者)들이 있어왔으나, 인류는 그들의 진정한 가치를 알아보지 못한 채 에고의식의 장난에 휘둘린 나머지 오늘날 이 같은 자업자득(自業自得)의 위기상황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석가모니는 불교(佛敎)라는 종교의 창시자임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는 한 종교의 교주(敎主)이기 이전에 심학(心學)에 정통한 초(超)종교적 선각자(先覺者)이다. 그는 자신의 마음작용을 치열하게 지켜봄으로써 마음작용의 비밀을 알아내었고, 마음작용이 완전히 정지한 경지에 도달함으로써 마침내 마음자체[=본성(本性)]가 어떤 것인지를 증험(證驗)하였다. 그리하여 그가 여생 동안 한 일은 다만 제자들에게 이 ‘마음 지켜보기’를 수행하도록 가르쳤을 뿐이다. 그는 결코 여느 사이비 교주처럼 자신을 절대자나 초인(超人)으로 믿으라고 한 적이 없다.
세상의 종교는 크게 둘로 나눌 수 있다. 절대자를 숭배하는 종교와 마음자체를 알게 하는 종교가 그것이다. 전자는 인류의 마음을 갈라지게 하고, 서로 싸워서 원수 되게 만든다. 그들의 입은 한결같이 사랑과 평화를 부르짖는다. 그러나 그들이 감추고 있는 손은 그들이 마귀로 단죄(斷罪)한 자들의 피가 흥건하게 적셔져 있다. 이것은 그들이 아무리 감추려 해도 감출 수 없는 역사의 진실이다. 심지어 그들은 단지 종파가 다르다는 이유로 믿음의 형제들을 이단으로 몰고 몰살시켜왔다.
그들은 알 수 없는 신비인 그 ‘하나’를 감히 이런 분, 저런 분으로 묘사하며, 자기와 다른 묘사에 대해서는 대단한 적개심을 드러낸다. 이처럼 세상을 갈기갈기 찢어놓고, 말할 수 없는 것을 말하며, 제 말만 절대로 옳다 하여 다툼을 일으키니 필자는 이를 감히 미신(迷信)이라 부를까 한다. 세상을 이처럼 미혹하는 종교이니 이것이 미신이 아니면 무엇이 미신이란 말인가?
이게 다 무슨 짓들인가 하면 바로 에고의식의 창조물을 제 생명인양 착각하고 다투는 어리석은 놀음들인 것이다. 보라. 절대자인 신이 왜 악마와 서로 충돌하는가? 그것이 신들의 책임이라고 생각되는가? 아니다. 그것은 바로 인간의 에고의식의 충돌인 것이다. 신들의 싸움, 영적세계의 싸움을 중지시킬 이는 바로 신이 아닌 사람이다! 인류가 살려면 하루속히 이런 미신들로부터 깨어나야만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마음자체를 탐구하는 종교는 그 어떤 절대자도 말하지 않는다. 부처님은 다만 마음 그 자체를 해명한 선각자(先覺者)로서, 중생으로 하여금 에고의식이 벌이는 고통의 연극을 종료하고 진정한 평화의 세계로 돌아가는 길을 알려주는 도사(導師)로서의 역할을 했을 뿐이다.
필자는 일찍이 한 미신을 믿다가 거기 진정한 평화가 없음을 알고 방랑자가 되었다. 그리고 또 여러 미신들을 순례하고 나서야 비로소 이 무엇인가를 찾는 불안한 마음부터 해명하는 것이 선결과제임을 깨닫게 되었다. 그러나 마음공부에도 함정들이 무수하다. 구도자들은 자칫하면 마음자체가 아닌 마음의 창조물에 현혹되기 일쑤이니 조심 또 조심해야 한다.
어떤 이는 ‘본질(本質)이 곧 현상(現象)’이라는 달콤한 한 생각 -현상을 넘어 본질이란 것이 따로 존재할 수 없다는 ‘생각’ 역시 마음작용의 창조물이다- 에 속아 넘어가서 마음 그 자체를 보려는 노력을 아예 포기해버린다. 생각이 문득 이에 이르면 홀연 마음을 짓누르던 구도의 부담이 사라지면서 황홀한 자유가 일시에 찾아든다. 수행은 고통스런 길이다. 그러므로 수행할 필요가 없다는 말은 매우 달콤하게 들리기 마련이다. 그리하여 수행자는 아래와 같이 자신의 상념에 속아 버리게 되는 것이다.
「따로 찾아야 할 도(道)란 것이 애당초 없는 거로구나. 모든 것이 도 아님이 없구나. 그냥 살면 되는 것이구나. 중생의 마음이 곧 부처의 마음이로다. 수행은 제 코를 쥐고서 코를 찾는 어리석은 놀음이구나. 지화자 좋다. 대자유로구나!」
이것이 선각자들이 경고하고 있는 대표적인 함정인 ‘해오(解悟)’의 경우이다.
또 어떤 이들은 상념(想念)을 강화시키는 수련을 마음공부라 참칭(僭稱)하기도 한다. 예컨대 『사람이 곧 신이므로 이 사실을 믿기만 하면 그대로 실현된다.』, 『이 주문은 신이 주신 도통주문(道通呪文)이므로 지성(至誠)으로 외기만 하면 도통한다.』, 『십가가에 달리신 주님의 고통을 묵상(黙想)하라. 그러면 신의 사랑을 알 것이다.』, 『내가 죽어간다고 상상하라. 죽었다는 상상이 극에 달하면 마침내 무아(無我)를 체득할 것이다.』 라는 등등의 상념집중수행
댓글목록
한 삶님의 댓글
한 삶 아이피 (203.♡.145.114) 작성일
이동규님 삶의 체험, 잘 보았습니다.
모든 개체 삶의 체험은 각각의 독특한 기록으로 우주에 남을 것입니다.
이승민님의 댓글
이승민 아이피 (149.♡.26.226) 작성일
호주 시드니에 살고 있습니다
이동규님의 글을 잘 읽었습니다
균형잡히고 체계적인 글은 많은 생각을 하게 만드는군요
앞으로도 더욱 건강하시고 자유로운 삶을 누리시기를 진심으로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