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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교사의 역할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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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규 (211.♡.35.238) 댓글 2건 조회 6,579회 작성일 06-11-13 1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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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교사의 역할과 과제

-진정한 교육혁명가들의 출현을 기다리며-


2006. 11. 8 이동규

holydog@hanmail.net


들어가며


교육(敎育)이란 ‘학생을 가르치고 기르는 일’이다. ‘가르치고 기르는 일’이므로 그 주체는 어디까지나 교사이다. 그러므로 ‘수요자(需要者) 중심’이라는 경제논리를 교육에 적용하여 교사가 학생이나 학부형들의 눈치나 보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된다면 이는 결코 바람직한 교육현상이 아니다. 교사가 학생과 학부형들의 입장을 고려해야 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가르치고 기르는 일’이 효과적으로 이루어지도록 하기 위해서이어야 한다.

교육은 어디까지나 교사 주도의 일이므로 그 성과는 주도자인 교사가 준비되어있는 만큼 거두어진다. 교육에 있어서 ‘준비된 교사’의 존재는 그만큼 절대적이다. 그러므로 21세기 교사의 역할과 과제를 규명하자면, 먼저 지난 세기 교육의 성과가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데 얼마나 기여했는가에 대한 정확한 평가와 함께 미래사회의 바람직한 발전 방향의 정립 및 그 과제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것이 규명되어야만 21세기의 교사가 무엇을 준비해야 하고 또 어떻게 가르쳐야하는가에 대한 문제가 해명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20세기는 과연 인류의 행복지수를 향상시켰는가?


모든 국가 계획의 최종 성과는 그 나라 국민의 행복지수의 증가 여부로서 측정하는 것이 가장 타당하다. 교육의 성과에 대한 최종적 평가 역시 여기에 기준을 두어야 한다. 그것은 인간의 생존 목적이 행복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비롯한 선진국가 국민들의 행복지수는 과연 지난 세기 동안 향상되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인가?

유엔에서 조사하여 발표한 바 있는 각 나라 국민들의 행복지수를 보면 그 수치는, 기대와는 달리, 국민소득 등 물질적 풍요의 정도에 크게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것은 물질적 풍요가 결코 행복한 삶의 결정적 조건이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물질적 풍요를 향해 올인 해온 각국의 정책은 중요한 문제점을 가지고 있었던 셈이 된다. 이것이 무슨 문제인가를 규명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물질적 풍요를 누리는 선진산업사회의 모델로서 ‘경쟁을 통한 발전’을 오랫동안 추구해 온 미국사회는 경제 효율을 자랑하는 기업 시스템을 소유하고 있다. 그리고 이 시스템은 점차 미국사회의 전 분야로 확산되어 가고 있는 중이다. 이 시스템의 본질은 ‘경쟁을 통한 발전’이다. 그러나 치열한 경쟁 구조로 되어있는 이 시스템은 개인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줌으로써 각종 만성 질환의 원인을 만들고 있다. 미국인들의 만성 질병에 의한 희생자 수는 2차대전 중 연간 희생자 수를 훨씬 능가할 정도라고 한다. 이런 사회에서 행복지수가 생각보다 낮게 나오는 것은 오히려 당연하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들이 선진국의 모델로서 미국을 닮아가려고 애쓰고 있다. 그러나 미국 모델에 가까이 다가갈수록 그 사회의 병리현상도 함께 닮아가고 있다. 그 까닭은 미국 사회의 시스템이 친(親)웰빙시스템이 아니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이 믿고 있는 바는 발전의 원동력은 ‘경쟁시스템’에 있다는 명제이다. 그러나 이 명제는 결코 검증된 진리가 아니다. 오히려 이 무한경쟁시스템은 결국에는 인간을 물질적 소유로부터 소외(疎外)시키고, 치명적인 스트레스를 줌으로써 행복을 창출하는데 실패하고 있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다. 그러므로 이제는 ‘경쟁’과 ‘환경파괴’가 아닌 ‘협력’과 ‘환경보전’을 통한 발전을 진지하게 논의해 볼 때이다. 그러나 이러한 시스템의 혁명은 의식의 혁명, 즉 가치관의 혁명을 그 전제로 요구한다.


우리는 물신주의(物神主義)에 속고 있다.


그 사회의 정책과 시스템은 그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을 반영한다. 오늘날 대부분의 국가에서 경제적 발전을 국가의 최고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은 현대인 대부분이 물신주의적 가치관을 갖고 있음을 말해주고 있다. 물신주의란 인간의 행복은 오직 물질적 풍요에서 온다고 믿는 신념체계이다.

물질적 풍요를 최고의 가치로 숭배하고 있다는 의미에서 현대인 대부분은 물신교(物神敎) 신자들이라고 할만하다. “돈[=물질]이 최고야.”라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가 비록 종교인이라도, 그는 물신교 신자다. 물신교는 풍요와 행복을 약속했지만 결국 현대문명을 파멸의 절벽으로 몰아가고 있다. 세계가 이처럼 위기를 맞게 된 것은 이 사교(邪敎)가 세계를 지배해 왔기 때문이다.

정신적 가치보다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더 중요시 하는 가치관은 필연적으로 경쟁시스템을 낳고, 경쟁시스템은 점점 더 비인간적인 모습을 띠기 마련이다. 결국 인간도, 예컨대 노동자의 능력이 최고조일 때 그 진액(津液)을 빼먹고는 조기(早期)에 이들을 해고해버리는 식으로, 하나의 소모품이 된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경쟁시스템은 비양심적인 수단을 쓸 것도 강요하게 됨으로써 인간으로 하여금 “꼭 이렇게 살아야만 하는가?”라는 자괴감(自愧感)을 갖게 만든다.

한편 경쟁에서 도태된 하류인생들의 마음속에는 사회에 대한 분노가 점점 누적된다. 이런 분노는 계기만 주어지면 언제든지 폭발할 수 있는 사회 불안요소가 된다. 지난 세기 이 에너지를 가장 성공적으로 이용했던 것이 바로 공산당이었다. 그들은 역사를 지배계급과 피지배계급 간의 투쟁으로 규정하면서 노동자들의 분노를 촉발시키는데 성공하였으나, 혁명주체들의 의식혁명에는 실패했기 때문에 20세기말에 들어서자 그만 자체 붕괴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물신교적 가치관을 갖고 있는 혁명 주체들에 의한 혁명은 결국 지배계층의 교체만을 가져왔을 뿐이다.


그러나 위 모든 문제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며, 인류의 운명을 좌우할 역사상 가장 심각한 재앙이 지금 우리의 목전에 다가오고 있다. 그것은 바로 환경오염과 이에 따른 재앙들이다. 지금 인류는 이 문제를 알고는 있으나 그것이 시한폭탄처럼 위험한 줄은 실감하지 못하고 있다. 소수의 깨어있는 과학자, 정치가, 환경보호론자들이 이 임박한 위기의 심각성을 경고하며, 시급한 대책을 수립할 것을 호소하고 있으나 각국의 이해관계 로 인해 매양 대답 없는 메아리로 되돌아오고 있다.

그런 가운데 지난 세기 동안만 수만 종의 생물들이 멸종되었다. 21세기는 이 여파가 바야흐로 인류를 덮치려는 위기의 시대이다. 인류는 오직 물질적 풍요를 위해 열심히 달려온 죄밖에 없는데 도대체 무엇을 잘못한 것일까? 그렇다. 오직 물질적 풍요만을 위해 정신없이 달려온 바로 그것이 이 위기를 초래한 원죄(原罪)였던 것이다.


교육을 파괴하는 물신교(物神敎)적 가치관


“삶은 만인(萬人)의 만인(萬人)에 대한 투쟁이다. 이 경쟁에서 이겨야만 풍요로운 생활을 누릴 수 있다.”라는 물신교의 강령에 최면 되어 있는 교육정책 입안가들은 경쟁에서 승리하여 국가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생산하는 일을 실질적인 교육의 목표로 삼고 있다. 그리하여 바야흐로 교육에도 경제논리를 적용하려 하고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일'이란 본래 인생의 가장 즐거운 일 중 하나이다. 그러나 경쟁의 논리가 지배하게 된 학교에는 즐거움 대신 스트레스가 가중되어 마침내 전교 일등을 놓치지 않던 학생이 3등으로 떨어졌다는 이유로 자살하는 사건이 일어나는 지경에 이르렀다. 경쟁이 준 스트레스는 학생들을 이 정도로 미치게 만들고 있건만 교육정책 담당자들은 이에 무신경하다. 이들은 소수의 낙오(落伍)를 진화론에서 항용 있는 자연도태(自然淘汰) 현상쯤으로 여기고 있는 듯하다.

경쟁이란 본시 만인(萬人)을 나의 적(敵)으로 삼고, 결국에는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고 이기려는 쪽으로 나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선거의 과열 현상이 그 좋은 예이다. 그러므로 경쟁의 논리에 따른 교육 또한 필연적으로 과열될 수밖에 없다. 고액과외, 보충수업, 0교시 수업, 야자학습 등은 다 과열경쟁의 산물들이다. 이리하여 교사들은 학교교육에서 도저히 교육의 본령(本領)을 지킬 수가 없게 된다. 전인교육이란 교육의 궁극적 목표는 교육현장으로부터 괴리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아래 경향신문 기사는 대한민국 공교육의 파산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이다.


[한국의 高3] “선생님 목소리 방해” 뒷자리 쟁탈전


【“고3 교실에서는 아무것도 안 하는 선생님이 좋은 선생님이죠.” 서울 ㅅ고 3년 김희재군(가명)의 말이다. 이 학교 3학년 5반 교실에서는 아침마다 ‘그들만의 전쟁’이 벌어진다. 뒷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학생 간 치열한 경쟁이다.

‘딴 짓’ 하려는 게 아니다. 코앞으로 다가온 수능 준비를 위해 수업과 다른 과목의 ‘자기 공부’를 하기 위해서다. 앞자리에 앉으면 선생님 보기도 민망하고, 강의 목소리 때문에 공부에 방해가 된다.

앞자리에는 주로 진학을 포기한 학생들이 앉는다. 수업을 들으려는 학생들은 몇 안 된다. 어떤 선생님은 일부러 강의 목소리를 낮춘다. 자기 공부하는 제자들을 배려하는 것이다. -(중략)-

고3교실의 이런 진풍경은 ㅅ고만의 일이 아니다. -(중략)- 철학 등 수능 과목이 아닌 수업은 아예 폐강하기도 하며, 그 시간에 인터넷 강의실로 옮겨 수능공부를 하기도 한다. 교장․교감은 “철학 시간에 딴 공부한다는 얘기를 하지 말라”고 학생들에게 누누이 당부한다.

이런 상황이니 자기 강의를 들으라고 강요하는 교사들은 ‘비효율적이고 꽉 막힌 선생님’으로 오히려 원망의 대상이 된다. -(중략)-

교사의 강의를 듣지 않는 학생, 학생이 듣지 않는데도 꼬박꼬박 수업을 하는 교사. 이들을 주인공으로 하는 각본 없는 ‘부조리극’이 한국의 고3 교실에서는 매일같이 반복되고 있다.】


한창 운동해야할 아이들의 신체는 밤10시까지 학교란 감옥에서 시달린다. 일부 청소년들은 이 즐겁지 않은 학교생활을 도저히 견디지 못해 스스로 학교를 떠난다. 청소년들은 그 발달단계로 볼 때 무엇보다도 체육 및 정서순화를 위한 교육활동이 장려되어야 하고, 피로 회복을 위해 충분한 휴식이 주어져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자신에 대한 자긍심과 원만한 품성의 도야가 이루어져야 한다. 학습은, 새로운 것을 깨우쳐 나아가는 즐거움이 목적이 되어 이루어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교육현장에서는 오직 학우와의 경쟁에서 이길 것만 강조되고 있는 것이다.

교육현장의 이런 파행적 운영과 학생들이 받는 고통에 대해서는 아무도 책임질 사람이 없다. 물신교의 교리에 세뇌된 교육자들은 삶이란 물질 확보의 전장(戰場)이며, 학교는 이 전쟁에서 이기기 위한 훈련을 받는 곳이므로 스트레스는 어쩔 수 없는 필요악(必要惡)쯤으로 여긴다.

그러니 ‘인성교육’은 언제나 허울 좋은 구호에 그친다. 경쟁에서 지면 하류 인생이 기다린다는 위협이 암묵리에 설파되고 있는 학교에서 어떻게 진정한 ‘인성교육’이 이루어질 수가 있겠는가?


‘진정한 웰빙'은 무엇인가?


이 모든 악을 불러온 책임은 우리 모두에게 있다. 그리고 이 불행의 고리는 우리 모두가 물신교의 세뇌로부터 벗어나야만 끊을 수 있다. 그러기 위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은 진정한 행복이 과연 무엇인가라는 것을 다시 한번 진지하게 생각해보아야 한다.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로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물질적 풍요[=돈]를 우선적으로 떠올린다. 바로 이 전도(顚倒)된 가치관이 비인간적인 무한 경쟁을 낳고, 무한 경쟁은 만성질병(慢性疾病)과 환경파괴를 낳아 마침내 인류를 멸종의 절벽으로 끌고 가는 것이다.

상대와 무자비한 경쟁을 벌여야 되는 현대인의 내면에는 사랑과 기쁨이 깃들 수 없다. 경쟁의 뿌리는 불안이기 때문에 경쟁은 사랑과 기쁨을 근원에서부터 파괴한다. 그리고 사랑과 기쁨 없이는 진정한 웰빙도 없다. 그러므로 행복지수도 당연히 하락한다.

절대빈곤에서 탈출해야 하는 조건 하에서는 돈이 행복의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 있다. 그러나 빈곤의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되면 자신의 존재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확립하는 것을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겨야 행복한 사회로 나아갈 수 있다. 물질에 대한 욕심은 끝이 없는 법인데 개인이나 국가가 이것을 계속 최종적인 목표로서 추구하게 되면 현대문명의 위기 같은 엄청난 부작용을 초래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빵은 필요하다. 그러나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 없는 자는 빵이 풍성해도 결코 행복할 수가 없다. ‘자아에 대한 긍정적 인식’이라는 바탕이 없는 소유(所有)는 제로(0)에다 무한수를 곱해나가는 것과 같다. 그 무엇을 곱해도 제로(0)가 되기 때문에 풍요 속에서 허탈을 느낄 수밖에 없다. 현대인들이 우울증 환자가 되어가는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오늘날 구미 선진 각국에서 동양의 명상(瞑想) 인기리에 수련되고 있다한다. 그들은 이제야 자신이란 존재의 근원을 찾는 것이 물질적 풍요의 확보보다 더 중요한 것임을 깨닫기 시작한 것이다. 사실은 처음부터 순서가 잘못된 것이었다. 인간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가져야만 했었다. 소크라테스가 “먼저 너 자신을 알라.”고 충고한 것도 바로 이런 소식을 말한 것이었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하나?


병은 그 뿌리를 도려내어야만 근치(根治)된다. 뿌리를 그냥 두고서는 맨날 다람쥐쳇바퀴만 돌리게 될 뿐이다. 어느 시대이건 개혁(改革)을 부르짖지 않은 때가 없었건만 사회가 늘 이 모양인 까닭은 뿌리는 건드리지 않은 채 다람쥐쳇바퀴 놀음만 해 왔기 때문이다.

교육 개혁만 해도 그렇다. 야자학습, 0교시 수업, 보충수업, 내신 부풀리기 등 파행적 교육행태로 인한 부작용이 여론의 질타를 받게 되면 정부는 새 장관을 임명함으로서 국면을 돌파하려 한다. 새 장관은 제일성(第一聲)으로 상기(上記) 관행들을 엄금하는 한편 입시제도 등을 개혁하는 일련의 조치들을 발표하면서 이를 ‘교육개혁’이라고 한다.

이번에는 학생들이 방과 후부터 밤늦게까지 사교육(私敎育)에 시달린다. 지친 학생들은 학교 수업에 태만하게 되고, 유명 강사들은 천문학적 강사료를 챙긴다. 엄청난 사교육비를 감당하기 힘들어진 학모는 노래방 도우미로 일하다가 파탄이 나기도 한다. 이로 인한 부작용이 극에 달하면 다시 사회여론이 비등하고, 이에 공교육을 재건하라는 사명을 부여받아 다시 새 장관이 임명된다. 새 장관은 번창하는 사교육에 철퇴를 가하는 한편 또 다시 입시 제도를 바꾸는 일련의 조치를 취하면서 이를 ‘교육 개혁’이라고 부른다. 매양 이런 식으로 교육계의 다람쥐 쳇바퀴가 돌아가는 것이다.


아니다. 그래 봐야 말짱 도루묵이다. 뿌리는 그게 아니다. 뿌리는 바로 자신에 대한 긍정적 인식의 중요성은 외면한 채 그저 물질적 풍요를 최고의 가치로 숭배해온 우리들의 의식에 있다. 이렇게 전도(顚倒)된 물신교적 가치관을 그대로 두고는 아무리 정책을 바꿔봐야 풍선의 이쪽을 누르면 저쪽이 삐져나오는 것처럼 매양 다람쥐챗바퀴놀음이 될 수밖에 없다. 이것을 그대로 두고는 천년 만년 개혁을 논해봐야 헛일이 될 뿐이다.

이를 역(逆)으로 추적하면 이렇다. 파행적 교육행태는 과열경쟁으로부터 온다. 과열 경쟁은 일류학교에 들어가기 위해서다. 일류학교 입학은 높은 지위로 출세하여 상류사회로 진입하기 위해서다. 높은 지위와 상류 사회 진입은 물질적 풍요를 남보다 먼저 확보하기 위해서다. 물질적 풍요는 왜 그렇게 중요한가? 질문이 여기까지 오면 우리 국민들의 입에서 과연 어떤 답이 나오겠는가? “행복의 1차적 조건은 물질적 풍요이다.”라는 답이 나올 것이 분명하다. 바로 이것이다! 이러니 어떻든 제 자식을 일류교에 넣으려고 그렇게 극성인 것이다. 뿌리가 이것인데 이것은 고치려 하지 않고 애꿎은 제도만 바꾸려 하니 다람쥐챗바퀴를 돌리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이제는 정말 근본으로 돌아가서, 모든 것을 사람이 사는 참 목적, 즉 ‘진정한 웰빙’에다 맞추고 다시 한번 다음 질문들을 진지하게 생각해볼 때가 되었다.


“물질적 풍요가 인생의 궁극적 목적인가?”, “경제효율 최우선주의는 과연 행복한 사회를 만들 수 있는가?”, “산업경쟁의 결과로 초래된 환경 위기는 피할 수가 없는가?”, “난마(亂麻)같이 얽혀있는 이 불행한 사회를 개혁하고자 할 때 저 물신교적 가치관을 그대로 두고서 과연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까?”


지금 인류는 그야말로 소중히 여겨온 모든 것을 잃을 절대절명(絶對絶命)의 위기를 맞고 있다. 미 국방성 비밀보고서는 앞으로 20년 안에 지구 온난화로 인해 기근, 전쟁, 물 부족 등 끔직한 공황상태가 오게 될 것임을 경고하고 있으며, 일단의 영국 과학자들은 극지방의 해빙(解氷)으로 인해 수십년 안에 남극대륙을 제외한 지구 전 지역이 사람이 도저히 살 수 없는 환경으로 변하고 말 것임을 거듭 거듭 경고하고 있다. 이 모든 것이 지구 온난화라는 단 한 가지 원인만으로 예측한 결과이다.

왜 지구온난화인가? 그것은 에너지자원의 남용과 관계가 있다. 왜 에너지의 남용인가? 대량생산시설 및 운송수단의 급격한 증가와 관계가 있다. 왜 대량생산시설 및 운송수단의 급격한 증가인가? 생산효율의 증대로 경제전쟁에서 이기기 위해서이다. 왜 생산효율의 증대인가? 풍요로운 물질생활을 누리기 위함이다.

어떤 항생제도 듣지 않는 괴질 바이러스가 왜 출현하게 된단 말인가? 그것은 가축에 대한 무분별한 항생제 및 화학물질의 남용과 관계가 있다. 생산효율 최우선주의는 가축들에게 지옥과 같은 환경을 강요하면서까지 공장식 시스템을 추구하게 만든다.

《KBS스페셜》은 미국소의 90%가 풀을 안 먹고 곡물로 비육되고 있으며, 비용을 줄이기 위해 좁은 우리 안 분뇨와 오물더미 위에서 항생제와 성장호르몬을 맞으며 살 찌워진다. 그들은 더 이상 생명체가 아니라,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이윤을 남기기 위해 생산하는 상품에 불과하다.라고 고발한다.

가축공장에서 생산효율을 높이기 위해 항생제나 화학물질을 엄청 남용하는 환경 속에서 어떤 항생제에도 내성을 가진 수퍼바이러스가 출현하는 것은 시간문제이다. 이런 질병이 인간에게 전이(轉移)되면 인류를 삽시간에 몰살시킬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역시 물신적 가치관이 빚어내는 비극적 자화상이다.


21세기의 교사의 역할과 과제는 무엇인가?


근본적인 개혁은 가치관의 혁명이 바탕이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가치관의 혁명을 이루어내자면 교육의 실질적 목표가 ‘경쟁에서 이기기’에서 ‘자기존재에 대해 올바로 인식하기’로 바뀌어져야 한다. 그러자면 먼저 그 바탕이 되는 “남보다 물질적으로 풍요롭게 사는 것이 성공이다.”라는 전도(顚倒)된 가치관이 바뀌어져야 한다. 이런 가치관에 사로잡혀 있는 학생과 학부형들은 오직 남을 이길 수 있는 방법을 잘 가르쳐주는 교사를 우수교사로 환영한다. 지금까지의 인성교육이 전혀 성과를 거두지 못한 근본적인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이런 근본적인 교육혁명이 가능하자면 먼저 교사들의 가치관이 바뀌어져야 한다. 그러므로 21세기의 교사는 다가오는 큰 위기의 본질을 꿰뚫어볼 수 있는 혜안(慧眼)을 가지고, 국민의 의식개혁을 선도해야 할 사명을 갖고 있다. 이러한 소명의식을 갖는 교사, 정신과 의사, 심리학자, 명상가들 그룹이 힘을 합해 학생들에게 적용시킬 자아탐구 프로그램을 개발하고, 교육부는 개발된 프로그램을 교육과정에 반영할 수 있도록 필요한 시설들을 우선 지원하며, 연수과정을 조직화하는 일이 신속히 이루어져야 한다.


맺으며

생존(生存)이냐 절멸(絶滅)이냐의 문제 앞에 다른 모든 가치는 다 차순위일 수밖에 없다. 생명 이상의 가치는 없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가치들을 한입에 삼켜버릴 전 지구적인 재앙이 어슬렁거리며 다가오고 있는데, 지금도 교육정책 입안가들은 학교현장에 더 심한 경쟁 상황을 만들어 성적을 향상하는데 골몰하고 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과연 무엇이 행복을 위한 참 교육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하는 교사는 외로울 수밖에 없다. 다만 더 늦기 전에 인류의 생존을 위한 교육에 대해 진지한 논의가 있었으면 하는 게 필자의 한 가닥 가냘픈 소망이다.

그러나 위기는 또한 기회이기도 하다. 위기가 클수록 그 반전(反轉)은 비약적 도약으로 귀결될 수도 있다. 대중의 5%에 해당하는 자가 한마음이 되면 그 대중을 움직일 수가 있다는 이론이 있다. 혁명은 5%의 핵심 당원에 의해 성사될 수가 있다는 이론이다.

댓글목록

나그네님의 댓글

나그네 아이피 (124.♡.12.166) 작성일

이글을 예전에도 봤는데 다시 올려주셨군요.
통찰력이 대단한 글입니다.
결국 깨달음이 있어야 이글이 눈에 보이고 절실히 동조하며
하나로 힘을 모을수 있겠죠.

무명인님의 댓글

무명인 아이피 (220.♡.225.251) 작성일

문제와 위기는
모든 생명이 존재하는 한은 필연적으로 따르는 것.
완벽을 추구하는 한에
불완전은 필연적인 것.
누구를 교육코자 이런 글이 이런 자리에 .....
재미 옵다.
그냥 떠나자....
자꾸 이런 너절한 사꾸라 판이니.....
이런 너절한 글에 ,통찰력이니,깨달음이니, 이런 한심한 부류와 ....
챙피해서 같이 못 견듸겠다 !
에라이,이 한심이들아 !
김기태선생에  무슨 원한이 있는 인간들이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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