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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안교육을 하려면 (한겨레 블로그에서 퍼 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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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영훈 (211.♡.81.132) 댓글 1건 조회 4,718회 작성일 07-06-18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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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소 현학적이긴 하지만 꽤 읽을만한 내용이어서 퍼 옮김니다.
한겨레 블로그에서 복사했씸다~

대안교육을 하려면 | 여민락


같은 화두가 나올 적마다 반복해서 하고 있는 말이지만, 대안 교육을 하려면, 일본인들이 만들어낸 이 “敎育”이라는 말부터 쓰지 말아야 한다. “교육”이라는 말은 “가르치고 길러낸다”는 말인데, 이 말 속에 이미 어떤 일정한 교육관이랄까, 배움에 대한 철학이랄까 하는 것이 스며들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물론 가르치는 사람(주체)과 배우는 사람(대상)을 분리시켜 이해하고, 소위 교육 혹은 가르침-배움이라는 것을 전자(주체)에 의한 후자(대상)의 일방적인 계도, 지도, 지식의 전수라고 이해하는 생각인 것이다. 이를 나는 “爲”와 “강제 養成”의 패러다임이라고 부른다. 여기에는 “말한 대로 따라오지 못하면 때려서라도 이끌고 가겠다”는 폭력적인 사고방식도 깃들어 있다. 그래서 이러한 훈육 주의적 가치관은 교육기관 (학교)과 국가폭력기구 (군대, 경찰)에서 동일한 실천 원리로 적용되는 것이다.

세상이 바뀌어 많은 사람들이 자유를 누리고 살고 있지만, 불행히도 아직 대학이나 세상에 나아가지 못한 한국의 대다수 학생들은 그 건축물의 기본 구조뿐만 아니라 그 근본적인 철학까지 “강제적 양성”을 기치로 한 일제 훈육 주의적 교육관이 만들어낸 체제에, “그 복도, 그 운동장, 그 호루라기, 그 담임선생”이라는 체제에 감금되어 있는 것이다.

내가 “爲와 “養成”의 패러다임에 대치시키고자 하는 것, 소위 말하는 대안교육 - 물론 이 말은 “교육”이라는 말이 잘못되었으므로 바뀌어져야 한다 - 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無爲”와 “放生”의 패러다임이다. 이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무렇게나 방치하겠다는 것은 아니다. 사실 누군가를 가르쳐본 개인적 체험을 토대로 말해보면, 소위 이 “가르침”의 기회야말로 “배움”의 기회라는 생각을 아니 할 수 없다. 그러니까 “가르치면서 배운다”는 것인데, 이것은 “학생에게도 배울 바가 있다”는 단순한 말이 아니라, “무언가를 말하고 쓰는 과정에서 이른바 가르친다는 사람은 자기 훈련, 자기 단련, 자기 배움의 과정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이렇게 본다면, 선생과 학생은 사실 동일한 “배움의 과정”에 일정하게 다른 역할로 참여하고 있다고 봐도 된다. 한 사람은 그 과정을 이미 통과한 선배로서, 다른 한 사람을 그 과정을 이제 통과하는 신참으로서, 같은 과정을 함께 통과하는 것이다. 그러니 소위 선생이란 사람은 그 분야, 그 부분에 대한 “만능자” “권위자” “전문가” “신성한 지식의 주체”로 이해될 것이 아니라 학생보다 그 길을 먼저 간 “先生-먼저 태어난 사람”, “선배” 혹은 “동반자” “안내자” 나아가 “친구”로서 이해되어야 한다. 이런 이해가 성립한다면, 선생-학생은 “爲”와 “養成”의 패러다임에서처럼 주체-대상으로서가 아니라 같은 대상적 과정 속에 있는 동등한 위치의 두 주체로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이해 속에서는 소위 “체벌”과 같은 일은 상상할 수조차 없게 된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無爲와 ”放生“이 무얼 말하는 건지 말해주지 못하는 것 같다.

“無爲”와 “放生”으로서 내가 말하려는 것은 그럼 무엇인가. 이것을 말하려면, 역시 가르치고 배우는 과정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논의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 내 생각에 인간은 누구나 무언가를 배우려는 의지를 가진 동물이고, 그것도 “평생” “스스로” 배우려는 의지를 가지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내 개인적 체험을 돌아보아도, 한 학생이 소위 학교란 곳에 접촉하면서 무언가를 배운다고 할 때, 그 학생은, 어떤 지식의 만능자인 선생으로부터 지식을 전수받아 그것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라 선생으로부터 자극을 받아 스스로 그것에 대해서 알게 되는 경향성이 짙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위 교육이란 것의 핵심은, 그 본질론적 가치관으로도, 규범론적 가치관으로도, 자기교육과 평생교육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관점에서 누군가 지금 신문과 잡지, 단행본을 읽고 있는 이라면, 그가 학교 밖에 있다 할지라도, 이 자기 교육, 자기 가르침-배움 과정에 있다고 봐야 한다. 이런 의지는 그리고 평생 지속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학교 밖에서 뿐만 아니라 학교 안에서도, 다시 말해 “월사금”을 내면서 배우는 제도 교육과정 안에서도, 이런 원리, 즉 스스로 알아가고 깨쳐가는 원리는 핵심적인 원리로 작용한다는 점이다. 다른 식으로 말하면, 선생은 앞서 말한 대로 길을 안내하고, 자극을 주고, 방법을 알려주고, 공부와 인생과 관련된 자기의 경험담을 들려주는 보조적 안내자, 선배, 친구의 역할에 그치고, 그 지식 전달의 실질적 역할은 “씌어져 있는 것”, “저장되어 있는 것”, 다시 말해 책, 영상자료들이, 그리고 이것의 저장고로서의 도서관이 맡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수업 시간의 선생의 말이 학생의 지식 습득에 하등 중요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통제되어 있고 강제되어 있는 한정된 수업 시간에서의 휘발되는 말이 아니라, 도서관에서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찾아 읽어보는 “무한정한 글의 연쇄”야말로 인간을 지식으로 이끄는 실질적이고 근원적인 주체라는 말이다. 따라서 누군가, 좋은 교육, 이상적인 교육 - 하는 수 없이 이 말을 다시 쓰자면 - 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고 할 때, 그가 우선 머릿속에 그려야 할 것은 교실이 아니라 도서관인 것이다. 누군가 이른바 대안적인 교육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그가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학생들을 어떻게 “도서관으로의 放生”할 것인가 하는 것이다. 수영을 가르치려는 이는 아이를 물에 放生해야 하고, 지식을 가르치려는 이는 아이를 도서관에 放生해야 한다. 물론, 이 “無爲”와 “放生”의 패러다임에서 선생의 역할이 단순히 “無爲”인 것이 아님은 위에서 이미 언급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역할이 역시 통례적, 근대훈육적인 “爲”가 되어서는 아니 된다는 점에서 우리는 “無爲”라는 말을 의도적으로 쓸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인간 언어와 인간 주체의 대화적인 속성 탓에, 배움이 제대로 이루어지려면, 도서관에서 읽은 것, 습득한 것을 누군가와 말로서 풀어보는 과정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 누군가 중 말 잘하는 이, 겸손한 이가 있어 학생들의 대화에 참여해 자기 의견을 조곤히 말할 수 있다면, 우리는 그를 일러 선생이라 불러야 한다. 채찍을 들고 미친 말처럼 날뛰는 “훈육관”은 선생이 아니다. 나의 선생도 아니고 당신의 선생도 아니고 우리의 선생도, 우리 아이들의 선생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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