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어디 춤 뿐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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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최영훈 (61.♡.176.153) 댓글 3건 조회 6,702회 작성일 06-11-17 14:06본문
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아폴론은 밝음, 질서, 조화, 균형을 뜻하고 디오니소스는 어둠, 혼돈, 도취, 광란을 뜻한다.
물론 장르에 따라서 아폴론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있고 반대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다. 가령 조각이나 그림은 전자에 속하고 음악과 춤은 후자에 속한다.
특히 춤은 디오니소스적인 정열과 광기 그리고 힘의 요소가 다른 아폴론적인 요소들을 완연히 압도하는 강렬한 예술이다.
니체가 정말 춤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료들이 없다. 그러나 가장 생산적인 시기에 저술한 대표작, 이를테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권력에의 의지>등에서는 거듭거듭 춤추기를 절실한 언어로 예찬한다. “춤이 없다면 이 삶을 어떻게 견디랴?”
니체가 이렇게 춤을 예찬한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몸을 긍정하는 자만이 춤을 출 수 있고 춤추는 자만이 대지를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다.
요컨대 삶을 사랑하는 자는 춤추려는 열정을 숨기지 못한다.
이 지상의 삶을 부정하고 기도와 눈물과 참회만으로 생을 보내는 수도승이나 금욕주의자들을 싸잡아서 니체는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을 그는 다른 곳에서 또 ”가축 떼거리의 인간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니체에 따르면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이 나 가축 떼거리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가벼운 웃음과 삶의 경쾌한 즐거움을 잊은 근엄하고 경건한 영혼들이다.
그들은 지상의 덧없는 삶보다 저편 세상의 영원한 삶을 희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영원한 저편 세상이라는 것이 가축 떼거리 인간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니체는 이 망각을 일깨우기 위해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
이것은 일종의 폭탄선언이다.
오랜 역사 안에서 인류가 견지해 온 믿음을 산산이 깨트려놓는 주장이니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믿어야할 신이 없다. “그래도 신을 믿어야 한다면 나는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춤도 삶도 인간도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과정의 끝에 있다고 믿어지는 영원, 절대 필연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영화<쉘 위 댄스?>에서 마이가 자기 춤의 최종 목표라고 믿은 ‘블랙풀’은 단지 환상의 이념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춤은 그녀가 눈길을 던지는 저 블랙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댄스 교습소와 블랙풀 사이에 걸쳐진 나날의 삶 가운데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춤은 그런 단단하고 진부한 일상 속에서 내딛는 스텝이고 흔드는 몸의 율동이며 이 모든 것들의 순수한 과정일 뿐이다.
니체가 춤을 그토록 찬양한 것은 춤의 이런 순수한 과정성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내가 남자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은 전자가 전투에 능하고 후자가 출산에 능하며, 양자 모두 머리와 발꿈치로 춤을 추는데 능해 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 번도 춤을 추지 않는 날을 헛된 날이 되게 하라.
또한 아무런 웃음도 가져다 주지 않는 지혜는 거짓 지혜가 되게 하라.“ ”춤추지 않고 보낸 하루는 삶 없이 보낸 하루“라는 이 주장에는 몸과 삶과 대지를 온전히 긍정하라는 니체 철학의 근본 메시지가 명확하게 담겨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화 <쉘 위 댄스?>에서 선생 마이가 스기야마를 만나기 전에 추었던 춤, 즉 엄격한 원칙과 법도에 맞춰 실행되고 궁극적으로는 댄스 경연에서 승자의 월계관을 쓰기 위해서 연마하던 기능적인 춤은 차라리 ‘낙타의 발걸음’같은 것이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오직 오아시스에 도착하기만을 희구하며 묵묵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낙타에게 진정한 즐거움은 오직 오아시스에 도착했을 때에만 주어진다. 도착한기 전의 모든 과정은 그저 한갓된 금욕과 고행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마이가 바로 그런 춤꾼이었다. 블랙풀의 댄스 경연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하기 전까지는 어떤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의 것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구원과 천국에서 영생을 갈구하는 신도들에게는 이 지상의 삶이라는 게 어떤 본질적인 가치도 지닐 수 없는 것처럼.
춤은 반드시 교습소나 경연장같이 통제되고 정선된 공간에서만 추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녀의 고정관념은 그녀에게 춤을 배우는 수강생 스기야마를 통해 산산히 깨진다.
전차를 기다리는 그 잠깐 사이, 플랫폼에서 흥겹게 스텝을 밞으면서 춤의 법열에 젖는 스가야마. 한때 댄스 교습소 창 밖의 마이를 보는 순간에 스기야마의 삶이 달라졌듯이, 이런 스기야마의 모습을 우연히 쳐다보게 된 마이의 삶 또한 환골탈태하게 된다.
그렇다. 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블랙풀처럼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발을 디디고 선 플랫폼 같은 현재를 위한 것이며, 승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헥~헥~~헥~~~ 타이프 치느라 혼났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에서 발췌-
신은 죽었지만 춤은 영원합니다!
춤(삶)은 우리모두의 행복입니다!!
도덕경 식구 열분 열춤(열씨미 춤 춥시다)합시다!!!
니체는 예술을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결합이라고 정의했다.
여기서 아폴론은 밝음, 질서, 조화, 균형을 뜻하고 디오니소스는 어둠, 혼돈, 도취, 광란을 뜻한다.
물론 장르에 따라서 아폴론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있고 반대로 디오니소스적인 것이 더 우세한 예술이 있다. 가령 조각이나 그림은 전자에 속하고 음악과 춤은 후자에 속한다.
특히 춤은 디오니소스적인 정열과 광기 그리고 힘의 요소가 다른 아폴론적인 요소들을 완연히 압도하는 강렬한 예술이다.
니체가 정말 춤꾼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전하는 자료들이 없다. 그러나 가장 생산적인 시기에 저술한 대표작, 이를테면<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나 <권력에의 의지>등에서는 거듭거듭 춤추기를 절실한 언어로 예찬한다. “춤이 없다면 이 삶을 어떻게 견디랴?”
니체가 이렇게 춤을 예찬한 이유는 간단하다. 자신의 몸을 긍정하는 자만이 춤을 출 수 있고 춤추는 자만이 대지를 진정으로 신뢰할 수 있다.
요컨대 삶을 사랑하는 자는 춤추려는 열정을 숨기지 못한다.
이 지상의 삶을 부정하고 기도와 눈물과 참회만으로 생을 보내는 수도승이나 금욕주의자들을 싸잡아서 니체는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이라고 부른다.
이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을 그는 다른 곳에서 또 ”가축 떼거리의 인간들“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니체에 따르면 춤출 줄 모르는 자들이 나 가축 떼거리의 인간들은 하나같이 무거운 정신의 소유자들이다.
그들은 가벼운 웃음과 삶의 경쾌한 즐거움을 잊은 근엄하고 경건한 영혼들이다.
그들은 지상의 덧없는 삶보다 저편 세상의 영원한 삶을 희구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들은 영원한 저편 세상이라는 것이 가축 떼거리 인간들 자신에 의해 만들어진 환상이라는 사실은 망각하고 있다.
니체는 이 망각을 일깨우기 위해 “신은 죽었다”고 외친다.
이것은 일종의 폭탄선언이다.
오랜 역사 안에서 인류가 견지해 온 믿음을 산산이 깨트려놓는 주장이니 말이다. 이제는 더 이상 믿어야할 신이 없다. “그래도 신을 믿어야 한다면 나는 춤출 줄 아는 신만을 믿으리라.” 춤도 삶도 인간도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는다.
이 과정의 끝에 있다고 믿어지는 영원, 절대 필연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영화<쉘 위 댄스?>에서 마이가 자기 춤의 최종 목표라고 믿은 ‘블랙풀’은 단지 환상의 이념으로서만 존재할 뿐이다.
춤은 그녀가 눈길을 던지는 저 블랙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댄스 교습소와 블랙풀 사이에 걸쳐진 나날의 삶 가운데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춤은 그런 단단하고 진부한 일상 속에서 내딛는 스텝이고 흔드는 몸의 율동이며 이 모든 것들의 순수한 과정일 뿐이다.
니체가 춤을 그토록 찬양한 것은 춤의 이런 순수한 과정성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극단적으로 이렇게 말하는 데까지 나아간다. “내가 남자와 여자에게 바라는 것은 전자가 전투에 능하고 후자가 출산에 능하며, 양자 모두 머리와 발꿈치로 춤을 추는데 능해 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가 한 번도 춤을 추지 않는 날을 헛된 날이 되게 하라.
또한 아무런 웃음도 가져다 주지 않는 지혜는 거짓 지혜가 되게 하라.“ ”춤추지 않고 보낸 하루는 삶 없이 보낸 하루“라는 이 주장에는 몸과 삶과 대지를 온전히 긍정하라는 니체 철학의 근본 메시지가 명확하게 담겨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영화 <쉘 위 댄스?>에서 선생 마이가 스기야마를 만나기 전에 추었던 춤, 즉 엄격한 원칙과 법도에 맞춰 실행되고 궁극적으로는 댄스 경연에서 승자의 월계관을 쓰기 위해서 연마하던 기능적인 춤은 차라리 ‘낙타의 발걸음’같은 것이다.
사막을 건너는 낙타는 오직 오아시스에 도착하기만을 희구하며 묵묵히 발걸음을 내딛는다. 낙타에게 진정한 즐거움은 오직 오아시스에 도착했을 때에만 주어진다. 도착한기 전의 모든 과정은 그저 한갓된 금욕과 고행의 시간에 지나지 않는다.
마이가 바로 그런 춤꾼이었다. 블랙풀의 댄스 경연에서 그랑프리를 획득하기 전까지는 어떤 기쁨도 즐거움도 행복도 진정한 의미에서 그녀의 것일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치 구원과 천국에서 영생을 갈구하는 신도들에게는 이 지상의 삶이라는 게 어떤 본질적인 가치도 지닐 수 없는 것처럼.
춤은 반드시 교습소나 경연장같이 통제되고 정선된 공간에서만 추어야 한다고 믿었던 그녀의 고정관념은 그녀에게 춤을 배우는 수강생 스기야마를 통해 산산히 깨진다.
전차를 기다리는 그 잠깐 사이, 플랫폼에서 흥겹게 스텝을 밞으면서 춤의 법열에 젖는 스가야마. 한때 댄스 교습소 창 밖의 마이를 보는 순간에 스기야마의 삶이 달라졌듯이, 이런 스기야마의 모습을 우연히 쳐다보게 된 마이의 삶 또한 환골탈태하게 된다.
그렇다. 춤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고, 블랙풀처럼 먼 미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발을 디디고 선 플랫폼 같은 현재를 위한 것이며, 승자가 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자가 되기 위한 것이다.
헥~헥~~헥~~~ 타이프 치느라 혼났네 -철학, 영화를 캐스팅하다에서 발췌-
신은 죽었지만 춤은 영원합니다!
춤(삶)은 우리모두의 행복입니다!!
도덕경 식구 열분 열춤(열씨미 춤 춥시다)합시다!!!
할렐루야!!!!
댓글목록
전희경님의 댓글
전희경 아이피 (218.♡.240.229) 작성일
선생님! 이제는 춤이 삶에 일부가 되셨나보내요. 대전의 노래방에서 배우던
스텝이 떠오르네요. 잘지네시죠?
최영훈님의 댓글
최영훈 아이피 (59.♡.167.151) 작성일
아고 원장니임!
정말 오랜만입니다.
보고 잡은데...
어제 날 함 잡아볼께욤~
나비님의 댓글
나비 아이피 (211.♡.222.116) 작성일Shall we dan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