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나미 선생..이양반도 깨달은 양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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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자 (222.♡.94.3) 댓글 1건 조회 5,900회 작성일 07-04-19 23:40본문
김나미 선생님은 우리 옆동네 사시는 분인데
이양반도 깨달은 양반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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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를 찾는 구도자에게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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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백 하나 하겠습니다. 옛 일기장에 쓰여 있는 글귀입니다.
“허망하고 허탈하고 허황된 것에 보낸 허송 세월
아 세월은 이렇게 가고 마는구나. 세월에 지고 싶진 않은데…
천하장사도 별 수 없다는 세월 앞에서 뭘 해야 하나.
진작에 이럴 줄 알았지만 그래도 가느다란 희망은 있었는데 ...어쩌나.
참자, 그리고 또 기다리자. 그러나 그 연약한 가느다란 희망은 앞으로도 허망하고 허탈하고 허황된 것들 뿐일 게다.
다들 이렇게 살고 있을까. 아마도 그럴 거야.
부질없는 희망 때문에 살다가 그 희망이 낳아 준 실망에 또 좌절하겠지.
다시는 허망하고 허탈하고 허황된 것에 보낸 허송 세월을 탓하면 안되는데.....이 못난 사람이여”
옛날의 마음은 이랬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아닙니다. 사람 마음이 변한 것이지요.
하나님, 하느님, 한울님, 하늘님, 알라신들을 포함, 계시된 말씀을 읽고 또모든 성인들의 지혜로운 말씀을 자주 되새기며 그들 모두가 다 내 편인 줄 알고 말씀을 파고 들었지만 오랜동안 아리송하기만 했습니다. 모든 성인들의 말씀이 마치 암호 같았습니다.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 부터 시작, 부처님, 공자님, 예수님 말씀 모두가 말입니다. 우리에겐 힌트만 주고 답은 너 자신이 알아내라. 네가 찾아라 고 하는 것 같은 막연한 실마리는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퀴즈 문제와 씨름하듯 답을 찾았습니다. 그 답이 바로 도(道), 내지는 진리라고 믿었으니까요.
그런데 얼마전 제가 어느 도인을 찾아가 물었습니다.
“진리를 찾습니다. 가르쳐주십시오.”
그랬더니 도인 왈,
“대체 당신은 진리가 뭔지 알기나 압니까. 알면 나에게 가르쳐 주시오.”
“…………”
난 할 말이 없었습니다. 사실 진리라는 게 정확히 뭔지 잘 알지도 못하면서 막연히 찾고만 있었을 뿐, 진리가 뭐냐 했을 때 나에겐 구체적으로 뭐다 라고 할 게 없었지요. 막연한 '대자유' '해방' '구원' 같은 게 진리와 맞닿아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한참을 고민하다 대답이 나왔습니다.
“진리를 찾아내면 사는 게 자유로워 질 것 같아요. 지금은 무척 갑갑하고 답답해요.”
도인 曰,
“대체 누가 당신의 자유를 박탈했소.?”
난 아무 말도 못했습니다.선가에도 이런 말은 있습니다. 달마대사와 제자들의 문답에 나와 있습니다. 한 때 달마부인이라는 애칭까지 얻으며 한창 전국으로 달마를 찾아 다닐 때 달마와 그 제자들에 대해서 훤히 알고 있었으니까요.
도인이 잠시 뒤로 고개를 돌리며 曰,
“진리란 찾아야 하는 게 아니오.”
“그래도 난 찾아야겠습니다. 지금의 상태로는 숨쉬기도 힘들거든요. 그 길을 알려 주세요.”
도인왈
“진리의 자리는 길을 통해서 가는 게 아니오. 진리는 그건 너, 그건 너, 바로 ‘너’ 이것이오.”
“뭐라구요.?”
난 뭐라고 꿍시렁 대면서 또 도인의 말을 기다렸습니다.
그랬더니 도인 왈,
“자 여기 있소.”
도인이 손바닥을 내밀더니 몇 번이나 뒤집어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이게 뭐에요.”
“진리란 내가 이 손 안에 있고 지금 이 순간뿐이니 손바닥 뒤집는 것 보다 쉽소.”
난 멍해졌습니다. 그리고 한참을 침묵했지요. 할 말이 없었으니까요. 진리란 마치 무더운 날 냉 사이다를 마시는 것처럼 나를 시원하게 해 줄 수 있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찾고 찾았는데 바로 여기 손 안에 있고,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쉽다고 하니 멍할 수 밖에요.
그런데 지금의 마음은 이렇습니다.
꿀단지, 황금사과가 저 너머 아주 높은 곳에 있는 줄 알고 자꾸 찾아내려 했습니다. 그 다음부터 보따리에 싸여 저 멀리 있는 것, 추상적인 것들은 잠시 접어 두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자꾸 연습을 하다 보니 슬그머니 머리 속에 자리잡는 것이 바로 ‘억울함’이란 단어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어느 날인가 “아이고 30 여년의 아까운 세월, 바깥에서만 찾았는데….또 허전하군. 바보처럼 살았구나.”
사람인 이상 인간에겐 저 너머의 그 무엇을 그리워하고, 딴 세상을 동경하고, 뭔가 다른 내가 더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음, 텅빈 허전한 구석은 있게 마련이지요. 이것이 바로 인간인 이상 누구나 갖고 태어난 것일 겁니다. 그런데 그것은 흡사 자기 집안은 안 들여다 보고 자꾸 담장 너머 남의 집안만 들여다 보고 사는 것과 같지요.
인생이 마치 공 테이프와 같아 자기가 제작하고 연출, 연기도 맡아 자기가 만들어 나가는 것인데 인생의 클라이막스를 지날 때까지 아무것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엔딩 지점으로 가야 할 상태에서 “난 어디서 와서 어디 서 있는가. 난 누구였으며 지금은 누구인가.” 이것만을 붙들고 해피 엔딩에 되길 간절히 바랬습니다. 그리고 마음이 항상 딴 데만 가 있었습니다. 이런 탓에 몇 십년 간 밥을 먹어도 밥맛을 몰랐고 몇 십년 간 물을 마셔도 물 맛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알겠습니다. 지금의 나를 버리고 왜 또 다른 나를 찾아야 했을까요. 진리가 바깥 세상 어딘가에 있는 줄 알고 밖에서 찾아 다녔습니다. 또 다른 세상 속에 나를 만들어 놓고 뭔가 부족해 자꾸 허덕이던 모습이었습니다. 어딘가에 있을 ‘나’ 를 찾아 ‘자기 탐구’ 내지는 ‘자아 발견’ 라는 미명 하에 또 다른 나를 찾았지요. 그런데 진리는 바로 ‘그건 너’ 라는 그 말이 가슴에 와 박혔습니다. 진리는 지금 현존하는 바로 그 ‘나’ 이고 이 순간이었습니다. ‘나’ 를 빼고 더 이상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 이 순간의 나, 현실의 내 삶을 빼고 바깥에 그 무엇이 있을까요.
이제는 알겠습니다. 평상심(平常心)이 무엇인지. 평상심이란 지금 이 상태의 보통 일상의 마음이지요. 그런데 이 마음이 한번 호된 질풍을 겪고 나서, 그러니까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인데 한번은 산이 산 아닌 물이 물 아닌 상태를 거치고 나야만 다시 산이 산으로 물이 물로 들어오는 것입니다. ‘지금의 이 마음’ ‘ 지금의 나’ 를 버리지 말고 그 안에 계십시오.
실제 생활에서 한 가지 실천 해야 할 것은 분명 있습니다. 신심명에 이런 구절이 있어요. 지도무난(至道無難) 유혐간택(有嫌揀擇), 지극한 도는 어렵지 않은데 우린 자꾸 간택하고 시비(是非) 하고 판단하고 분별하고 그럽니다. 둘이던 셋이던 우린 뭔가를 취하려 합니다. 달면 삼키고 쓰면 뱉어 버립니다. . “좋네 싫네, 예쁘네 밉네, 맘에 드네 맘에 안 드네” 이것만 사라지면, 분명 손바닥 뒤집기 보단 쉽다는 지금의 나와 이 순간 이라는 진리를 만날 수 있다는 확신이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지난 몇 년간 만났던 진정한 도인들도 모두 지금의 자신과 함께 있고, 자기가 있는 자리에서 스치는 순간 순간에 충실한 모습이었습니다.
진리에 들어가는 게 손바닥 뒤집기 보다 쉽다고 합니다. 자, 그러니 손바닥 뒤집어 볼까요. 그냥 여기 이 순간에 내가 나와 함께 있어 질까요?. 여전히 마음은 자꾸 다른 곳으로 과거나 미래로 튀고 있으니 이렇게 한번 마술을 걸어 보면 어떨까요. “지금 바로 여기 있자. 지금 이 순간에 나만 들여다 보자.”
지금 여기, 이 순간을 떠나서 그리고 지금의 이 '못난 나'를 떠나서 밖에 그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이 도(道)이던, 진리이던, 또 다른 나이던, 아무리 밖에서 찾아도 찾아지지 않을 것이고 구해도 얻어지지 않을겁니다. 이것이 이제까지 찾고 찾은 구도의 결과였습니다. 수도, 득도는 꿈도 꾸지 않으렵니다.
우리 모두 같은 피부색, 같은 언어, 같은 음식을 먹고 사니 전체가 하나가 되는 한 식구도 되겠지요. 같은 하늘을 뒤집어 쓰고 같은 별에 사니 길 위의 반려자인 도반(道伴) 인 셈입니다. 이 글을 진리 찾고 도(道)를 구하는 도반, 구도자, 수도자들에게 드립니다.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이 없기를 .......
김나미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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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영훈님의 댓글
최영훈 아이피 (211.♡.81.132) 작성일음악 조코~ 글 조코~ 이 아침이 조코~ 낄낄 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