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풍의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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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오쇼 (211.♡.76.142) 댓글 0건 조회 6,953회 작성일 07-04-25 05:04본문
태풍이 불 때 그 한가운데는 비도 오지 않고 바람도 불지 않는다.
그것이 태풍의 눈이다. 분노의 중심, 성욕의 중심, 어떤 욕망의 중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태풍의 눈' 이 없는 태풍은 없다.
분노 역시 그 분노를 초월한 그대 내면의 어떤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을 기억하라. 그 어떤 것도 반대극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반대극은 항상 필요하다. 그대 내면에 움직이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중심이 없다면
거기엔 어떤 움직임도 가능하지 않다.
그대 속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없다면 흔들림조차 가능하지 않다.
다. 이를 분석하라. 이를 관찰하라. 그대 속에 절대적인 평정의
중심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비교가 필요하다. 비교할 수 있는 두 지점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면 그는 절대적으로 건강한 중심이 있기에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어떻게 머리가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머리 속에 아프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뇌 수술을 할 때 환자가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통증을 느끼는 머리 부분 자체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처럼 머리가 아플 때에도 그 아픔을 느끼는
관찰자가 있다. 그때만이 그대는 '내 머리가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픔은 아프지 않은 부분에 의해서 감지된다. 만약 그대가
병들었다면 그대는 열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대는 열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열이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열은 열 자신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을 초월해 있는 그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반대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가 분노 속에 있을 때 분노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대 속에 분노로 동요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 속에 있는 그런
부분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순수한 채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이 경전은 말하고 있다.
거대한 욕망의 파도 속에서도, 그대여 흔들리지 마라.
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억압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 방편은 분노가 일어날 때 분노를 억누르라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분노를 억누른다면 그대는 다른 부분에서 평정을 잃을 것이다.
그것은 두 배로 혼란스러운 상태다. 분노가 생길 때 그대의
문을 닫아라. 그리고 분노에 대해서 명상하라. 분노를 허락하라.
그대는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억누르지 마라.
억누르기도 쉽고 표출시키기도 쉽다. 우리는 둘 다 한다.
상황이 허락되면 그대는 분노를 표출시킨다. 만약 그대에게 불리한
상황이라면 분노를 억누른다. 그대의 직장 상사나 그대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분노를 억누른다.
표출이나 억압은 둘 다 쉽게 할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은 어렵다.
지켜보는 것은 억압하는 것도 아니며 표출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이 태풍의 눈이다. 분노의 중심, 성욕의 중심, 어떤 욕망의 중심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태풍의 눈' 이 없는 태풍은 없다.
분노 역시 그 분노를 초월한 그대 내면의 어떤 것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이 점을 기억하라. 그 어떤 것도 반대극 없이는 존재할 수 없다.
반대극은 항상 필요하다. 그대 내면에 움직이지 않은 채로 존재하는 중심이 없다면
거기엔 어떤 움직임도 가능하지 않다.
그대 속에 흔들리지 않는 중심이 없다면 흔들림조차 가능하지 않다.
다. 이를 분석하라. 이를 관찰하라. 그대 속에 절대적인 평정의
중심이 없다면 어떻게 그대가 흔들리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겠는가?
거기에는 비교가 필요하다. 비교할 수 있는 두 지점이 필요하다.
어떤 사람이 병들었다면 그는 절대적으로 건강한 중심이 있기에
자신이 병들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비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대는 머리가 아프다고 말한다. 어떻게 머리가 아프다는 것을
알 수 있는가? 머리 속에 아프지 않은 부분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뇌 수술을 할 때 환자가 별로 고통을 느끼지
않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통증을 느끼는 머리 부분 자체가
아프기 때문이다. 그처럼 머리가 아플 때에도 그 아픔을 느끼는
관찰자가 있다. 그때만이 그대는 '내 머리가 아프다'라고 말할 수 있다.
아픔은 아프지 않은 부분에 의해서 감지된다. 만약 그대가
병들었다면 그대는 열이 날 것이다. 하지만 그때 그대는 열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열이 난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열은 열 자신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을 초월해 있는 그 누군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반대극이 필요한 것이다. 그대가 분노 속에 있을 때 분노 속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면 그것은 이미 그대 속에 분노로 동요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증거다. 하지만 그대는 자신 속에 있는 그런
부분을 보지 못한다. 그것은 언제나 순수한 채로 남아 있지만 말이다.
이 경전은 말하고 있다.
거대한 욕망의 파도 속에서도, 그대여 흔들리지 마라.
그대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것은 억압하라는 뜻이 아니다.
이 방편은 분노가 일어날 때 분노를 억누르라는 뜻이 아니다.
만약 그대가 분노를 억누른다면 그대는 다른 부분에서 평정을 잃을 것이다.
그것은 두 배로 혼란스러운 상태다. 분노가 생길 때 그대의
문을 닫아라. 그리고 분노에 대해서 명상하라. 분노를 허락하라.
그대는 흔들리지 않고 그대로 있을 것이다. 그것을 억누르지 마라.
억누르기도 쉽고 표출시키기도 쉽다. 우리는 둘 다 한다.
상황이 허락되면 그대는 분노를 표출시킨다. 만약 그대에게 불리한
상황이라면 분노를 억누른다. 그대의 직장 상사나 그대보다
강한 사람 앞에서는 분노를 억누른다.
표출이나 억압은 둘 다 쉽게 할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지켜보는 것은 어렵다.
지켜보는 것은 억압하는 것도 아니며 표출하는 것도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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