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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뿌리로 돌아가는 고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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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몽 (210.♡.107.100) 댓글 1건 조회 5,536회 작성일 07-06-07 1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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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노자 도덕경에서 가장 좋아하는 말이 '歸根(귀근)'이잖아.

'그 뿌리로 돌아가는 고요함'


나, 유럽 문명의 뿌리가 보고 싶었어. 그 뿌리를 본 소회란, 먼저 내가 뉴욕과 보스톤의 거리를 걸었을 때의 놀라움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빠리를 보았을 때 무척 작아졌어.


다시 그 빠리가 작은 점이나 하나의 동네로 바뀌는 것을 이탈리아에 와서야 느꼈어. 나라 전체가 거대한 박물관이라 할까. 아니 이탈리아는 거대 관광 산업 단지였어. 경주를 '울타리가 없는 박물관(museum without wall)'이라 하잖아. 하지만 솔직히 그 비유는 이탈리아에 맞을 듯한 느낌이 들더구나.


그러나 내가 이탈리아에서 무엇이 가장 인상적 이었나 묻는다면 “아! 천년고도 로마에 낙랑장송이 왠일인가!”


경주 남산의 소나무, 속리산과 해인사, 강원도에서나 보는 우람한 소나무가 이탈리아와 로마 시내를 뒤덮고 있지 않은가. 철갑을 둘러싸고 투구를 머리에 인 듯한 정이품 소나무가 로마의 가로수라니. 그래 여기 로마에서 로마인이 가장 귀중히 여기는 나무는 올리브 감람나무나 오렌지나무가 아닌 푸른 소나무였어. 바티칸 시국에서 본 장엄한 건축물도 솔방울을 상징하여 만들었다나.


그래서 가이드에게 물어 보았지. “이탈리아 사람이 왜 소나무를 그리 사랑하느냐고?” 이탈리아에선 소나무가 영광과 승리와 기상의 상징이라는 답이 돌아왔어. 한국에선 한(恨)과 절개의 소나무인데. 이렇게 소나무를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 또한 크더구나. 물론 따뜻한 나라의 소나무는 무엇인가 다른 느낌을 준다.


소렌토로 가는 길, 버스 차창에서 바라본 고대 로마의 길 아피아 가도(Appian way)에도 줄지어서 들판을 달리는 것은 끝없는 소나무의 질주였어. 창문 밖으로 보는 풍경은 제주도의 애월리나 밀양의 봄 들녘처럼 너무나 한국과 닮아 있구나. 푸른 초원과 밀밭에 흩어져 풀을 뜯는 양떼들이 없었더라면 나는 한국의 어떤 국도를 달리는 듯한 착각에 빠졌을 거야.


노란 유채꽃이 펼쳐졌다가 군데군데 백목련, 청목련이 터져 나오고 분홍빛 복숭아꽃과 벚꽃이 피어나다, 하얀 매화가 만발하고 다시 녹색의 파란 밀밭들. 그 밀밭들이 끝없이 펼쳐지더구나. 하지만 이탈리아에서 봄빛은 우리와는 조금 달라. 우리가 좀 수줍은 듯 은은하다면 여기는 더 환한 밝은 빛이라 할까.


유럽 문명이라는 존재. 이 밀도 높고 찬연한 대리석 경질 앞에서 개나리와 벚꽃과 소나무가 내 눈에 이리 밟히다니.


우리 아시아인의 눈에 거대하게 노출되어 있는 이 우유 빛 강도의 대리석은 물론 나의 연한 피와 살을 떨리게 하였단다. 돌과 나무와 진흙과 기와로 지어 올린 경주에서 남은 것은 많지 않잖아. 모두 자연으로 돌아갔던지, 파괴되었는지, 사라졌는지 우리의 눈과 피부로 느끼는 흔적은 참 약하거나 희미했었어. 그런데 왜 지금 내 머리 속에는 경주 박물관 정원의 머리가 없거나 머리만 남은 부처상이 지워지지 않고 떠오르는 것일까.


내구성! 대리석이란 밀도 높은 돌덩어리를 하나하나 쌓아 올려 깎고 다듬고 조각한 유물 앞에서 장중한 역사의 무게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어. 국가보다는 도시, 나라 보다 민족, 그리고 자기가 쓰는 말에 대한 무한한 애착. 그런 나라들이 국경을 마주하고 다닥다닥 붙은 게 유럽이란다.


소렌토로 가는 길에 루치아노 파바로티 자신이 가장 아꼈다는 '마파리(Mappari : 꿈과 같이)' 성악곡을 엘리꼬 라는 잘생긴 운전기사가 들려주었다. ‘꿈과 같이’ 감미롭고 아름다운 노래는 햇빛을 받은 아침의 고요함 속에, 성당의 종탑에서 나는 소리마냥 자박자박 꿈길에서 들려오는 듯 귀전에 잠시 울려 퍼졌다.


그래 내가 이탈리아에서 본 찬란한 역사도 며칠 밤의 아름다운 꿈의 환(幻) 이런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견고한 대리석 틈 사이에서 한 줌의 푸른 이끼나 풀잎에 마음이 흔들리거나, 허물어져 가는 폼페이의 소담한 돌담 아래 빵 굽는 돌 시루, 뜨거운 용암 불구덩이 속에서도 두 손을 놓을 수 없었다는 이름모를 남녀의 화산 유적에 오히려 감동하는 나는 아무래도 아시아적 정서를 떨쳐버리지 못했나봐. 그런 내 눈에 개나리, 백목련의 꽃망울 터짐이 유달리 스며들었는지도.


'그 뿌리로 돌아가는 고요함' 은 서라벌의 깨어진 기와 막새에도 로마의 금이 간 콜로세움의 원형경기장 담 벽에서도, 이상하게 함께 숨겨져 있었다는 걸 본 게 아마 이번 여행의 수확인지도.


다음에 베네치아에서 너에게 또 편지하련다. 모든 연인이 꿈속에서라도 꼭 한 번 가 보고 싶어 한다는 물 위의 도시를 보게 된다면 통영 다도해에서 본 달밤 이야기를 너에게 들려줄지도 모르겠다.

댓글목록

자몽님의 댓글

자몽 아이피 (210.♡.107.100) 작성일

공부 할 것 없구요.

내가 이 글 쓸 때 글 폼을 너무 잡았구나 하는 반성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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