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나 이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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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59.♡.247.163) 댓글 5건 조회 5,356회 작성일 07-07-02 18:38본문
불교철학의 관점에서 흔히 거론되는 말 중에 ‘세상에는 나만 존재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문제는 이 말이 ‘세상에 타인은 없고 나만 존재하기 때문에 타인의 삶에 관심 가지는 것
자체가 의미 없는 짖이고, 내 삶에만 충실하면 된다’는 식의 유아론적 관점으로 대략
이해되고 있다는 것이다.
1. 유아론적 ‘나’ 개념 탈피하기
그렇담 석가를 비롯한 걸쭉한 불교 사상가들이 ‘세상에는 나만 존재한다’고 말했을 때의
이 ‘나’의 의미가 우리가 흔히 아는 것 처럼 좁은 개인성/이기성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한 ‘자아’를 말했는가?
아니었다.
그들이 말한 것은 ‘대아’ 즉, 세상의 모든 나가 합쳐진 ‘나’... 인류와 생명 의식의
‘원형’을 말한다.
일상에서의 갖은 욕망과 분별을 만들어내는 의식의 두루마리인 ‘소아(개인적 자아)’는
이 ‘대아’와 대치 점에 있고, 대아가 깨어나지 못하게끔 줄기차게 귓속말로 ‘권력’과
‘쾌락’을 쫓게끔 종용한다.
이렇기 때문에, 선각자들은 ‘세상에는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다’(대아)고 하면서, 모순되게도
‘세상에 나(소아)는 존재하지 않는다(나를 버려야 한다)’(소아)는 얘기를 했던 것이다.
물론 그 선문답 같은 이야기들은 조금만 들여다보면 모순이 아닌 인간존재의 기반을
층층히 잘 들여다 본 모습임을 확인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대아’ 하기 위해서 자신이 ‘말’하거나 ‘듣는’ 말들의 개념을 잘 못 이해하여
스스로의 존재의 기반을 곡해하는 일이 없도록 이러한 작은 개념의 사용과 숙고에서부터
조심해야할 필요가 있다.
1 - 1. 대아 이해에 방해되는 개념의 요소 - ‘통념’을 분쇄하기
이러한 대아 이해에 방해되는 개념의 요소로 ‘통념’을 들 수 있다.
이 통념은 개인주의/이기주의화된 사회에서 ‘나’와 ‘너’를 구분 짖는 일체의 ‘소아적’ 사고
방식을 말한다. 이것은 워낙 어렸을 때부터 우리의 의식 속에 뿌리내린 것이라, 이의
문제를 제대로 분별하고 뿌리를 뽑아내기는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더군다나 옛날부터 내려오는 지독히 옳다고 여겨지는 고사성어 중에서 이러한 ‘소아적’
관점은 버젓히 존재한다.
일 예로 ‘수신제가치국평천하’라는 고사성어는, 나를 세우고 가정을 가꾸며 나라를 통치하고
세계를 평화롭게 한다는 의미로 ‘대아’를 실현하기 위한 관점에서 별달리 이의를 제기할
꺼리가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의지와 삶을 국가의 하위 (기본)구성 단위로 ‘명시’하고 ‘소아’와 ‘대아’
를 나눠서 애초에 하나 되게 만들 수 없게끔 의식화 시킨 논리이다. 그 이해 자체가 ‘권력
집중을 통한 세계 통치의 이상'을 실현키 위한 유가적인 관점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인데,
당연스레 이는 ’대아‘를 향하는 길을 막는 해악적 가치로 작용한다.
물론 이러한 주장에 대해서 ‘그렇담 대아를 성취하자는 말은 자기 자신을 갈고 닦지 말아야
하냐는 말이냐?’고 반발할 수 있다. 이는 전혀 차원이 어긋나는 반발이다.
‘몸을 갈고 닦지 말라’는 말이 아니라, ‘나’라는 존재가 ‘국가’의 종속적인 위치에 있는 관념
자체가 문제라는 것이다. ‘나’를 말 그대로의 국가에 종속된 작은 개인(소아)로 규정하는
한, ‘대아’를 실현할 길은 영원히 없다.
설령 그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그것은 피라미드 조직의 ‘꼭데기’에 올라간 것일 뿐이지,
‘대아’를 실현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앞서 말했듯이 ‘대아’는 ‘각 기의 나가 모인 총체’이고, ‘인간과 생명의식의 원형’이다.
따라서 ‘대아적인 삶’은 내 행위 자체가 모든 시대와 장소에 보편타당하게 당당하고 거리낌
없으며 공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하늘의 뜻’대로 사는 것이지, 특정시대의
사회구성원으로서 충실하다(수신-제가)는 의미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물론 ‘대아’를 실현하는 것이 늘 ‘수신-제가’와 대치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유가적인
관점에서의 ‘치국평천하’ 하기 위한 ’수신‘은 현대사회에서 거의 전적으로 ’경제력‘의 관점에
서만 개념 되어 강조됨으로 오히려 ’하늘의 뜻‘ 을 거스르지 않기 위해서라도 유가적인
’수신‘을 거부해야할 필요가 있다.
다시 말해서 과거 300년전보다 1인당 2000 이상씩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면서, 끝없는
소유, 소비의 의지를 충족시켜야 ‘온전하게 성공했다’(수신)고 일컬어지는 기준으로 인해서,
지구가 앞으로 100년 안에 황폐해진다는 상황이고 보면, 현대시대에서 ‘수신’하기 위한
노력 자체가 오히려 ‘천륜과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라는 것이다. 제 자손들의 미래를
착취해가면서 ‘수신’하는 것이 하늘의 뜻임은 아닐 것이 쟎은가?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잘못된 ‘관념의 덩어리’들이 ‘대아’를 실현하는데 방해하는 요인들을
하나씩 찾아서 분쇄해야 한다.
우리는 ‘통념적 진실’을 들여다 보고, 올바로 해체하여, 다시 올바로 조립할 수 있는 역량을
길러야 한다.
앞서 1. ‘유아론’적인 관점에서의 ‘나’라는 개념을 탈피해야할 이유와 그 하위 차원에서 -
‘대아’의 개념 구축을 막는 잘 못된 통념의 덩어리들을 분쇄하기 위한 노력의 필요성을
이야기 했다.
그렇담 이제 2. 대아 실현을 위한 ‘관념화된 의지’를 일상의 ‘삶’의 과정에서 ‘실천’할 필요
에 대해서 생각해 보자.
2. ‘대아’의 이해와 의지를 실천하기
삶에서 실천으로 동반되지 않는 ‘대아’의 개념은 ‘허구’와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한 이들의 ‘대아’는 실현 되었다고 말할 수 없다. 그것은 ‘위선’이고 ‘이율배반’이다.
앞서 말했듯이 ‘저쪽에 서 있는 너’ 역시 ‘나’임의 사실을 ‘알게’되는 ‘대아’가 성취 된다면,
우리는 단순히 ‘감상’과 ‘관념’의 차원에서만 ‘너(생명-사회)’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삶’의 차원에서의 이웃과 세상과 생명을 위해서 힘쓸 수 있게 된다.
따라서 현재 빚어지고 있는 인류의 고통과 생명의 황폐화에 맞서서 어떠한 조치도 취하려고
하지 않는 모든 ‘대아’에 대한 가르침은 ‘위선적인 것’이다.
세상이 이렇게 아픈데, 그 아픔을 공유하려고는 않고 아무런 위험부담이 없는 편하고 안락
한 ‘감성’과 ‘개념’에만 안주해서 ‘대아’를 설법하는 그것이 과연 ‘대아’이겠는가?
약자의 핍박, 유린되는 인권, 부조리한 사회구조, 파괴되는 환경, 빼앗기는 후손들의 미래,
괴로운 인간의 실존의 문제에 대해서 별다른 고민도 하지 않고 그럴싸한 설명과 논리를
늘어 놓으며 설법하는 ‘대아’는 ‘위선’의 다른 이름일 뿐이다.
실천과 실존이 따르지 않는 편안한 ‘관념에만 안주’한 그들의 가르침보다, 길바닥에서 약자
의 생존권을 위해서 투쟁하며 땀을 흘리는 대학생들의 순수한 의지 자체가 오히려 대아적이
리라.
물론 이 말을 오해하면 ‘밖에서 데모를 하지 않으면 대아가 성취되지 않냐?’는 반발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몸으로 뛰라’는 이야기가 아니라, 그에 대한 ‘문제의식’을
갖고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나선다’는 이야기도 ‘약자에 대한 강자의 억압구조 분쇄’만이 아니
라, 강자들과 약자들의 그러한 억압 하고-당하는 의식의 ‘허황됨?’ 알리는 것 까지가 포함된
다. 어차피 가해하는 자나 가해 당하는 자나 ‘소아’적인 관점에서 고통당하는 것은 마찬가지
임으로 ‘그들’(고통 주고 고통 받는 이들)을 대상으로 ‘대아’적 관점으로의 해방을 위한 스위
치를 달아주는 노력은 ‘대아’를 설법하고자 하는 이들이 참으로 ‘해야할 일’인 것이다.
이에 대한 아무런 ‘관심’과 ‘이해’와 ‘실천’도 없이 ‘모든 것이 허황되다’는 식의 극단적인
회의론만을 설법하면서 ‘대아’ 운운하는 이들은, 깨달은 이로서의 ‘이에 따른 실천의 책무’를
소홀히 한 결과로 ‘다른 자아’들을 오히려 더욱 복잡하고 헤괴한 실존의 구렁텅이 속으로
몰아넣는다.
3. ‘보시’의 올바른 길, ‘대아’를 향하는 길
보시는 좁은 의미로는 ‘절에 금전을 바치는 행위’이다.
그런데 이 보시가 올바른 의미로 ‘작용’되면 그것 자체로 ‘대아’와 맞물린다.
앞서 1. ‘대아로 확장시키기’와 2. ‘대아 실천하기’를 이야기한 바가 있다.
문제는 불교에서는 내려오는 바대로 1. ‘보시를 하되 했다는 생각을 하지 말며’
2. ‘보시를 해야한다’ 는 얘기가 바로 그와 정확히 맞닿아 있다는 것이다.
어떻게 그러한지 살펴보자.
1 ‘대아 확장시키기’와 ‘보시를 하되 했다는 생각을 하지 말라’는 말의 연결.
절에서는 ‘보시를 하되 이를 드러내지 말라’는 말을 하곤 한다.
일예로 한 재력가가 절에 큰 보시를 하고 그 ‘공덕’을 적어서 현판으로 걸어 놓자, 한 스님
이 그에게 다가가서 ‘진정한’ 충고를 해주기를, ‘이런 큰 공덕을 적은 현판을 사람 많이 다
니는 저작꺼리에 달아 놓지 왜? 이것을 절간 구석에 달아놨는지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했다
고 한다. 이에 그 재력가의 얼굴이 붉어져서 현판을 쪼개서 아궁이에 쑤셔 넣었다는 일화도
있다.
문제는 이것이 ‘겸손의 미덕’을 강조한 대목이 아니라는 것이다.
‘보시’의 ‘핵심’은 ‘보시를 하되 했다는 생각 조차를 하지 말라’는 말에 있다.
‘한 것을 혼자만 알고 있어라’는 얘기가 아니라 ‘한 것 자체를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자... 왜? ‘한 것’을 한 것으로 생각하지 말라고 하는가?
그것은 다름이 아니다.
‘대아’에게 보시를 했기 때문에... 즉 다른 사람이 아닌 ‘나 자신’에게 보시를 했기 때문에
그것을 했다는 생각조차를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내가 내 자신의 입에 밥을 쑤셔 넣은 후에 ‘난 나에게 밥을 줬어. 참으로 봉사정신 가득해’
라는 생각을 하겠는가?
마찬가지로 ‘대아적 행동’은 그것을 마음에 담고 있을 필요조차 없기 때문에 그냥 ‘하는 것’
으로 끝나는 것이다.
보시 했다는 생각자체를 마음에 담고 떠벌리는 순간에 ‘대아’에서 ‘소아’로 자아가 급격히
위축되는 해악이 발생하기 때문에 생각 있는 스님들은 ‘보시 했다는 생각도하지 말라’고
신자들에게 당부하는 것이다. 물론 생각 짧은 스님들은 보시 받고 현판 걸어주며 ‘소아적
공생’관계에 머무르는 것이다. (이는 교회도 마찬가지이다.)
자. 이렇기 때문에 ‘소아’를 탈피해서 [대아를 실현하는 것]과 [보시를 하고도 한 것 자체를
잊어버리는 것]은 등가이다.
2. ‘대아실천하기’와 ‘보시하기’ 의 관계.
‘보시를 한다’는 말의 좁은 의미는 ‘절에 금전을 갖다 받친다’는 것이지만,
그 넓은 의미는 ‘세상 만물을 위해서 힘을 쏟는다’는 다름이 없다.
그렇기에 앞서 살펴봤던 대로 [대아를 실천]하는 것과 [보시를 하기] 역시 등가이다.
4. 대아의 실현은 무한한 자비와 영원한 사랑
우리의 의식 아래편에는 ‘대아’가 묵직하게 그 기반을 받치고 있지만, 생물학적인 한계를
가진 육체의 틀 속에서 우리의 ‘자아’는 그 육신과 욕망에만 반응하며 ‘소아’ 만을 성장시키
게 된다.
따라서 자아에의 집착경향을 극복하려는 노력을 통해서 우리는 좀 더 자신의 의식의 지반을
넓은 곳에 위치시킬 필요가 있다.
문제는 이에 대해서 ‘왜? 내가 현재와 같은 편하고 만족한 상태에서 그런 상태로 넘어가야
하냐?’ ‘왜? 내가 머리 아프게 다른 사람과 세계의 문제까지 고민해야 하느냐?’는 반발이 있
을 수 있다. 이는 ‘소아’적인 관점에서는 지극히 당연한 반발이다.
이는 마치 ‘회사의 일’을 봉급받기 위한 목적으로 마지못해 하는 사람에게, ‘자발성/주체성’
으로 무장해서 넘치는 에너지로 일을 하는 이가 ‘좀 주인의식을 가지고 생활하면 즐거울 것
이다’라고 얘기를 했을 때 나오는 반발과 똑같은 것이다.
그들의 오그라들어 있는 관점에서는 더 넓은 관점의 문제가 보일 리가 없는 것이다.
‘대아’적 인 관점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무한하신 부처님의 자비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사
랑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상태에 다다르면 당신은 시대와 장소를 초월해서 늘상 공
평무사하고 당당한 삶을 살게 될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삶’과도 연결된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무한한 자비’와 ‘영원한 사랑’은 일반의 불교도와 기독교인이 이야기하
는 바와 같이 시종일관 감정적인 평안과 풍요만이 있는 행복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는 것이다. 그렇게 시종일관 자비와 사랑만 계속되는 것은 권태의 다름이 아니다.
여기서 말한 무한한 자비와 사랑은, 자유의지와 열정을 통해 ‘만유자아’의 해방을 위해서
기꺼히 ‘작용’하는 상태를 말한다. 세상-생명계(대아)의 문제에 고민하면서 실천할 때에는
끝없는 시련과 고난과 고독이 따르기 마련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끝없이 몸부림 치고,
괴로워하지만, 그러나 항시 다시 새롭게 태어나는 상태가 바로 무한하신 ‘자비’와 ‘사랑’인
것이다.
인간이 다른 인간을 내리 누르지 않고 함께 조화롭게 화합 할 수 있는 세상... 인간의 욕심
에 의해서 생명이 함부로 훼손당하지 않고, 인간과 자연이 서로 어울려 하나 되는 세상.
이에 향하는 그 어떠한 장애물도 기꺼히 나서서 치워내려는 처절한 노력 속에 ‘자비’와
‘사랑’이 존재한다.
석가가 그리하고, 예수가 또한 그랬더 것 처럼...
5. 기독교와 연계해서...
앞서 논한 내용은 기독교의 그것과도 정확히 일치한다.
표현은 다를지 몰라도 기독교에서
‘나의 세상이 아니고 하나님의 세상이다’는 이야기도 결국은
‘세상에는 나(대아) 만 존재한다’말과 맥이 같은 이야기이다.
이는 풀어보면 ‘나(하나님-대아)의 뜻만이 세계에 존재하고, 조만간 흐트러져버릴 소아는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다’라는 말과 같다.
이런 차원에서 예수께서 ‘네 왼손이 한 일을 오른손이 모르게 하라’고 한 얘기‘와 ’거지를
대한 것이 나를 대한 것 이다.’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한 얘기도 역시 간악
한 인간의 개인성’소아‘를 버리고 ’대아‘로 나아가라는 이야기이다.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대아)가 역사하는 것’ 역시 그러한 노력들을 통해서 각자가 ‘소아’를
버릴 때에만 가능하다. ‘네 마음속에 있는 하늘나라’ 또한 우리 각기의 ‘소아’가 그 들고
일어섬을 막는 ‘대아’의 다른 이름이다.
성경 내에는 이렇게 ‘대아’로의 길로 향한 풍부한 먹 꺼리가 넘쳐나서 굶주리지 않고 진군
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길’을 제대로 일러주는 종교지도자가 적다. 뿐만 아니라, 어렸
을 때부터 훈련된 ‘소아’적 의식구조가 그것을 볼 수 없게 만들어, 그 풍부히 널려진 영양분
을 섭취하지 못해, 결국 한국의 기독교는 그 엄청난 양적폭발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성장하
지 못한 채 머물러 있는 상황이다.
개인적으로 판단하건데 대다수 기독교인들이 느끼는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은 ‘소아’적인
사랑에 불과하다. 이는 불교도들 상당수의 믿음이 ‘대아’로 탈각하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교회 안에서 눈물 흘리고, 박수치고 ‘사랑을 갈구’하고 통곡하며 죄를 ‘참회’ 하지만, 그것은
단지 ‘소아’적인 관점에서 (소아 상태를 유지하면서) 외부에 있는 ‘대아’(하나님)를 대상화해
서 느끼는 감정적 격정일 뿐이지, 온전히 ‘대아’를 실현하는 것과는 차원적으로 다르다.
이렇기에 그들이 느낀 [감정적 격정]은 생명-세상(대아)이 겪는 아픔에 대해서 구체적인
고민도, 실천도 동반하지 않고, 다만 주말마다의 반복적인 경기로만 되풀이 되곤 하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 구색 맞추기 차원에서 ‘생명과 세상에 대한 관심’을 장착시키기도 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러한 노력은 아예 안하는 것보다는 낮지만, 이는 참으로 어설프기 그지없다.
그러나 기독교인들 중에는 올바로 ‘대아’를 실현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다. 어떤 조직에나
‘확률적’으로 그런 예외들이 몇몇은 있기 마련이고 기독교사회에 역시 그런 이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문제는 그들 스스로 내부에서 경험하는 ‘대아’를 제대로 정립해서 이해하고, 타인에게 설명
할 수 있는 사고력이 갖춰져 있지 않은 이유로 혼자서만 그것을 ‘향유’하거나 일시적으로
그러한 ‘대아’상태에 머물러 있다가 다시 ‘소아’적인 차원으로 내려앉는 경우가 있다는 것이
다.
제대로 의식화 되지 않은 ‘통찰’은 그 자신의 삶 속에서 경험될 수는 있을 지언정 예수나
석가가 그랬던 것과 같이 그것을 타인과 공유할 수 있는 차원으로 이끌어 낼 수 없는 것이다.
댓글목록
모난놈님의 댓글
모난놈 아이피 (210.♡.89.45) 작성일
또 헛소리냐 ?
니 자신이나 알라고 서가나 예수나 소쿠리나 다 말씀 하신 것을, 넌 왜 ㅈ 도 모르면서 계속 헛소리냐 ?
넌 왜 말킅마다 세상사람 걱정이냐?
과연 니 새끼가 주렁주렁 해도 ,과연 니가 다른 이들과 니 새끼들과 동등히 볼 자신이나 있나 묻고 싶구나.
사실은 ,이미 넌 ,니와 다른 이들과 철저히 구분을 짓고 있는 하류 정신세계에 묶여 있는 가여운 존재 일뿐이야. 웃기는 ㄴ ㅗ...
충고컨데, 성인들을 함부러 니 기준에 들이대지 말거라 !
ㅈ ㄷㅗ 모르면서......
쓰임 문둥아님의 댓글
쓰임 문둥아 아이피 (221.♡.32.122) 작성일
그대도
그와 과히 다름이 없어 보이는데, 웬 충고 ?
그대나 잘 하셔요.
과부와 홀비님의 댓글
과부와 홀비 아이피 (221.♡.32.122) 작성일그대의 짝이 이미 있네요.
자몽님의 댓글
자몽 아이피 (210.♡.107.100) 작성일둥글님의 글에 많이 공감합니다. 좋은 지적입니다.
유유상종님의 댓글
유유상종 아이피 (203.♡.145.114) 작성일
개념으로는 분별의 한계(대아/소아)를 못벗어납니다.
我는 대아도 아니고 소아도 아닌 것입니다.
머리로 접근하면 허무라는 한계에 부딛히지만,,,
스스로 드러나면 그것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