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인물 묵상 - 아브라함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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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석 (58.♡.29.32) 댓글 1건 조회 5,627회 작성일 07-07-30 23:04본문
작년 초에 창세기 인물들(이삭, 에서, 야곱)에 대한 묵상을 올렸던 사람입니다. 파리에 있다 작년 8월말에 귀국했습니다. 1년 반을 지나서야 이제 후속편들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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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삭, 에서 및 야곱에 대한 묵상을 진행하면서 의문이 들었던 것은 이 묵상의 여정이 왜 아브라함부터 시작하지 않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순서대로 묵상해 나가는 것이 일반적일텐데 왜 순서가 거꾸로 되었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묵상이 끝날 때면 알 수 있으리라 봅니다. 이제 그런 의문들과 망설임을 거두고 아브라함에 대한 묵상을 시작해 봅니다.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이라 합니다. 그 명성 때문에 일반인들이 접근하기 참 힘든 인물이 아닌가 합니다. 이에 따라 아브라함의 모습을 연상해 보면 일반적으로 수염이 더부룩한 근엄한 아버지 얼굴이 떠 오르지 않나 싶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친아들을 하나님께 제물로 바칠 정도로 믿음이 투철했던 “전사” 같은 모습도 있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묵상을 진행하면서 그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사라지고, 우리 곁에 흔히 있는 다가가 응석이라도 부리고 싶은 친근한 옆집 할아버지 같은, 아니 제 친할아버지 같은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그런 모습이 “믿음의 조상”이라는 확신이 더해져가면서 말입니다.
처음에는 아브라함에 대한 묵상을 이삭이나 야곱처럼 시간을 따라 나아가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묵상을 시작한 이후 수개월을 그냥 보내면서 진척이 되질 않았습니다. 그러던 중 아브라함에 대한 묵상은 시간축이 아니라 그의 공간축으로 묵상을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아브라함이 함께 한 많은 사람들(아버지 데라, 아내 사라, 조카 롯, 하인, 첫아들 이스마엘, 적자 이삭)과의 관계, 궁극적으로 아브라함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묵상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먼저 아브라함과 아버지 데라와의 관계를 묵상해 보기 위해, 아브라함의 어린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 봅니다. 아브람(아브라함의 원 이름)은 인류의 첫 문명이었던 수메르 문명의 중심지인 갈대아 우르에서 세 쌍둥이(아브람, 나흘, 하란)중 하나로 태어납니다. 이때 아버지 데라가 70살이었으니 자식을 매우 늦게 본 셈이었을 것입니다. (아브람의 어머니 이야기가 성경에 나오지 않는 것이 좀 이해하기 힘듭니다만 그냥 지나가 봅니다.) 그래도 셋이 한꺼번에 나왔으니 기쁨이 컷겠지요. 세 아들은 삼총사로 우르에서 모두 튼튼하게 잘 자랐습니다. (아브람이 나중에 아버지를 따라 나선 것을 보면 어린 시절 정신적/경제적 측면에서 아버지의 영향이 매우 컸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그 시절로 보면 한국에서는 서울 도심, 세계적으로 볼 때 뉴욕 맨허탄이나 유럽의 파리 도심에서 자랐다고 보면 맞을 것 같습니다. 문명의 중심 지역에서 자라다 보니 이들의 자부심이 대단했을 것이고 장래에 대한 포부도 남달랐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들의 미래는 그저 줏어 담기만 하면 성공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던 중 제일 먼저 결혼했던 하란이 아이들을 남기고 갑자기 세상을 떠납니다. 원인은 알 수가 없지만, 이는 아브라함과 나흘, 그리고 아버지 데라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뭏든 한 몸과 같았던 쌍둥이 형제 하란의 죽음은 아브람에게도 큰 상처가 되었겠지요. (이것이 나중에 아브람이 하란의 아들인 롯을 그렇게 챙기게 한 요인이 된 것이라 봅니다.) 그래도 남은 두 형제는 미래에 대한 꿈을 계속 키워갑니다. 아브람은 사래와, 나흘은 조카 밀가(하란의 딸)와 결혼도 합니다.
그러던 어느 날 갑자기 아버지 데라가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간다고 합니다. 아브람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입니다. 가나안 땅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그런 곳으로 가겠다는 아버지를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나흘은 우르에 그대로 남겠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눈 앞에 보이는 화창하고 폼나는 미래를 두고 떠나기는 아쉬웠지만 아버지와 떨어질 수는 없어 아버지를 따르기로 합니다. 아브람을 어려서부터 따랐던 롯도 함께 가기로 합니다. 아버지와 온 가족과 함께 가나안 땅으로의 긴 여행을 떠나갑니다. 그런데 아버지 데라는 왜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 땅으로 가고자 했을까요? 이것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문명이 형성되고 번영의 길을 지나 시간이 지나면 그 문명은 필연적으로 쇄락의 길을 걷게 됩니다. 여기서 자유로웠던 문명은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아마 수메르 문명도 이 때 몰락의 시기로 접어들었던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문명의 몰락 시기에 나타나는 사회적 혼란은 그 이후 로마시대, 중세시대, 현재의 자본주의 시대의 예를 보면 짐작이 갑니다.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나타나는 돈과 권력에 대한 숭배, 성의 문란, 인간관계의 붕괴, 그런 모든 현상들이 갈대아 우르 지역에 만연해 있지 않았을까요?
나이가 이미 100세에 가까워 있던 아버지 데라는 그동안 쌓아온 지혜로 이런 세상과의 결별을 선택했던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자신은 몰라도 자식들은 이런 곳에서 살게 할 수 없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습니다. 우르에 계속 있다가는 진정한 삶을 유지할 수가 없다고 판단했으리라 봅니다. 특히 아들 하란의 돌연한 죽음으로 데라의 마음이 더욱 굳어졌을 것입니다. 하란의 죽음과 가나안으로의 출발은 기존 문명(옛사람)의 쇄락과 새로운 문명(새사람)의 탄생을 상징하는 것이 아닐까요? 아브람에게 믿음의 긴 여정이 시작되는 것이지요. 아브람이 능동적으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아버지 때문에 시작한 것이지만 아뭏든 시작한 것이 중요한 것이라 봅니다.
데라는 가족을 거느리고 먼 가나안 땅으로 떠나갑니다. 그 당시에 데라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있어서 길은 잘 알려져 있었을 것으로 보이나, 가는 길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중간중간 사막도 있고 먹을 것도 부족하고 힘들었겠지요. 하지만 이 여정은 아브람에게 귀한 경험을 가져다 줍니다. 서울에서만 살면서 보지 못했던 지방의 모습들을 보게 된 것이지요. 문명에 길들여 있던 아브람에게는 모든 것들이 새로울 뿐입니다. 문명에 찌들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보았겠지요.
그들은 가나안 땅으로 가는 길목인 “하란”에 도착합니다. (이곳의 이름이 아브람의 쌍둥이 형제 하란과 같다는 것이 우연일까요?) 하란도 당시 상업도시로 매우 발달되어 있던 도시입니다. 우르에서의 긴 여정으로 힘들어 하던 데라 가족은 하란에 머물고 그곳 생활에 익숙해지면서 결국 정착하고 맙니다. 문명 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생활을 해 보면서 문명생활이 주는 편안함을 그리워하게 되고 그것을 맞이하자 그것을 거부하지 못한 것이라 봅니다. 아무튼 오랜 세월(아브람이 40살 정도에 우르를 떠났다고 보면 30년이 넘음)을 하란에서 보냅니다. “가나안으로 가겠다”고 우르를 떠날 때 가졌던 데라의 마음은 점점 사라져 갑니다. 그러나 이러한 데라의 마음은 아브람에게 옮겨갑니다. 아브람이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니 데라의 역할은 여기까지이지요. 데라의 역할은 아브람을 가나안으로 데리고 가는 것이 아니라 아브람이 자신의 결정에 따라 가나안으로 가게 만드는 것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 신앙생활을 시작하는데 알게 모르게 참 많은 “데라”가 있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데라”가 나의 모든 것을 책임져 주지는 못합니다. 다만 길을 열어줄 뿐이지요.
아브람은 하란에서의 풍족한 생활에 만족해 하면서도 우르를 떠나 하란으로 오던 그 여정을 잊지 못합니다. 풍족한 생활 속에서도 한편으로 무엇인가 부족함을 느끼곤 합니다. 아버지가 가자고 했던 가나안이 어디인지 궁금하고 그 부족함이 무엇인지 알기를 원하게 됩니다. 깊은 생각에 잠기고 찾고 구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오랜 세월을 보내던 중에 아브람은 어디선가에서 나는 소리를 듣게 됩니다.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라”고 합니다. 무슨 소리인가 어리둥절 했겠지요. 그러나 그 소리는 점점 더 분명하게 들립니다. 아브람은 온 몸에 흐르는 싸늘한 기운을 느끼며 이 음성의 주인이 이 세계와 자신의 삶을 주관하는 절대자라는 것을 확신하게 됩니다. 찾고자 하는 자에게 하나님은 언제나 어디서나 나타납니다.
아브람은 그 미세한 소리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이라는 것을 확신하면서도 정말 아버지와 가족들이 있는 이 풍족하고 여유있는 하란을 떠나야 하는지 고민합니다. 어디로 가야 할지, 앞으로의 여정이 어떨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떠난다는 것은 정상적인 사고로는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지금 여기 하란에서의 삶이 자신이 갈구하는 부족함을 채워주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이 들면서 가나안으로 떠나기로 결단을 내립니다. 아브람의 진정한 여정이 시작되는 순간입니다.
아브람 여정의 시작는 우리 믿음(구도)의 시작을 생각나게 합니다. 데라는 우리를 믿음까지 인도해 준 사람들, 책들, 상황들을 의미하는 것 같습니다. 처음에는 여러 다른 이유로 교회를 나오기 시작하여 어색한 분위기 속에서 색다른 경험을 하다가 눈을 뜨고 하나님의 미세한 음성을 듣기 시작하는 그 단계말입니다. 저도 40대 후반에 파리에 파견나오면서 이국 땅에서 아이들의 중심을 잡아주기 위해서는 교회에 보내야 하겠다는 생각에 교회를 다니기 시작했습니다. 처음 생경한 분위기 속에서 목사님, 사모님, 집사님들의 따뜻함에 계속 다니다가 로마서를 공부하며 눈을 뜨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지고 있던 생각들이 얼마나 철없었는지 깨닫게 되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던 것 같습니다. “이것이 내가 가야할 길”이구나 결단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가나안”으로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지요.
시작이 반이라고 하지요. 그처럼 시작이 중요합니다. 어떠한 일도 결단을 통한 시작이 없이는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따라서 믿음도 “옛사람”으로부터 탈피하겠다는 결단으로부터 시작됩니다. 그렇다고 시작이 모든 것을 보장해 주는 것은 아닙니다. 아직 가야할 길이 많이 남아있는 것이지요. 아브람에게도 가야할 길이 아직 멉니다. 아멘..
댓글목록
바람님의 댓글
바람 아이피 (59.♡.165.127) 작성일
기존의 것에서 날마다 가나안(그 나라와 그 의)로 떠나감이 신앙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 듯도 한데, 그러면 기존의 것에서는 날마다 더 멀어지는 것 같지만, 영(하나님)으로서는 도리어 더욱 가까워지기도 하는 것이니,
결국 떠나가되 떠나간 것이 단 하나라도 없고, 더 가까이 하되 더 가까이 한 것이 한 하나라도 없는(부증불감)
그 모든 일체가 아닌가 합니다.
나그네는 날마다 떠나 갑니다. 그러나 주인은 날마다 떠남이 불가능합니다. 떠나도 언제가 그대로인 그 실존이 있을 뿐이니까요.
그러하기에 '따름과 거스름을 따로두지 말라'는 신심명의 말씀이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