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여기의 심각한 오류에 대한 볼터치.
페이지 정보
작성자 소오강호 (123.♡.189.175) 댓글 1건 조회 5,176회 작성일 07-08-02 01:03본문
노자는 말하네...
세상에서 말하여지는 도라는 것이
참도와 같다면
잃음은 잃음이라고 말하여지는 것을 얻어서 기쁘다고 말하네...
잃음이 얻어서 기쁘다고 말하네.
이러한 비웃음에서 자유로운 분들이
아직도
고요하고 깨끗한 레파토리에 놀아나니
15장에서 말한 옛날에 참도를 잘 딲은 선비는
6번째 비유로써 흐릴탁하고 했는데
눈멀어 보고도 보지 못하니
흐릴탁한것을 고요히 하여서 서서이 맑게 할 이 누구냐고 한다.
ㅋㅋㅋ 아직도 무조건 맑게 하는 것이 좋은줄로 여기는 고정관념에 있는가.
숙능탁 이정지서청
서서히 맑아지는 것을 고요히 하여서 그 누가 탁하게 할 수 있겠는가?
맑음과 고요는 노자의 잃을실과 같은 비웃음이니
이것이 기우가 아니었구나.
맑음과 고요는 비슷한 뜻으로써 , 같은 패턴의 반복을 나타냄이니,
서원반에서 돌이키지 않고,
인연만 달리하여 같은 패턴의 영원한 반복은 그것이 바로 땅옥이다.
땅옥속에서는 그 누구도 경험고를 영원한 천국고로 고정시킬 수 없음이니,
당연히 희노애락의 윤회고에 떨어지리라.
벗어나는 열쇠도 땅옥으로 드러난 고정틀에 있음을 명심하라.
신령스러운 불성이
양지양능하는 불성이
인간의 참된 정으로 내재하여
인연따라
애기에서 아이에서, 초딩에서, 중고딩, 대딩을 거쳐서 지금여기의 나로 왔다.
아이의 한 단면도 참이요,
초딩의 한 단면도 참이니,
지금여기의 흐름속 한 단면의 나도 또한 참이다.
인연에 걸려들면 그림자가 잡히니, 그것이 패턴이다.
수많은 인연속에서 수많은 패턴을 축적하여 가니
그것이 나의 몸과 마음이다.
마음심은 신령점이 인연의 비유로써 들이민 사각틀안에서의
드러남이니
마음은 인연속에서 생겨야 당근인것.
싣달타의 깨달음도 , 예수의 개달음도, 노자도, 그 누구의 것도
뒤선이에게, 혹은 다른 이의 바벨탑에게는
하나의 전식이 될 수 밖에 없음이니
변환을 해줘야 한다. 팔만사천경문이나 공자왈처럼.
숭상치말고, 잘 멕이고, 보리처인 지금여기의 현실을 외면치 못하게해야한다.
뒤서서 오는 놈들의 뜻을 강하게 하여서 지금여기의 현실에 갇히게 해서는 안된다.
선악에서
하나의 인연속 패턴에서,
다시 고요와 깨끗함의 동일한 패턴의 반복인 그것이 지옥이요, 땅옥이다.
지옥과 땅옥속에서
변하고 화함, 춘하추동의 리듬감을 즐기며 증거해내니,
그것이 10년반복, 30년반복하면
패턴속에서 그 패턴대로 거대한 바벨탑을
각 개인개인마다가 몸과 마음으로 축적해 쌓아간다.
때에 이르러
스스로 이치를 증거해내니, 밝고,
스스로이치를 증거해낸 그 속에서 생겨난 믿음이란 것이
바로 잡아모아 멸할때 쓰는 보배롭고 신묘한 기물이니
스스로의 삶에서 만들어내야한다.
그리하여
때에 이르면
33장처럼 임계점에서의뜻이 생기니 그 조바심을 그 누가 참아내리요.
보리수아래49일로 가고, 광야의 40일로 스스로 뜻이 있어 가버리니
이 때가 바로 자신의 몸과 마음이라는 집틀에서
임계점까지 가고자 하는 발악이다.
그러하니
땅옥속에 바로 천국의 열쇠가 있고,
서원반하는 큰대의 원리가 그대로 투영되 있는 나의 바베탑속에서
큰대의 참도의 원리를 캐어올리는 것이니,
아직 그길에 이르지 못한 나의 변명은
공자는 인자요산 지자요수라고 했으니,
전식이라는 커다란 산을 만들어준다.
그것이 투영되니, 사회시스템이다.
모든 이들이 이 드넓은 산속에서 , 인연따라 드러내는 물의 흐름을 즐길 것이니
노래하듯 흥얼거리는게 여기서 끊기네,음.
지금여기의 이론적 방패막이나, 실천적 방법론도 참으로 우려스럽다.
2년전에도 그런 마음이었으나, 내가 말할 게재가 못되어 잠시 들러 공부하다 갔으나 이제말하려니 다시 노래모드로...
스스로 걸어온 그 길을 인정치 못하고
아이에게 감자탕과 소주의 묘미를 맛보려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아이는 사탕주고, 초딩은 미술, 음악, 체육, 국영수로
거대한 사회틀로 집어넣는다.
그러면 스스로의 경험속에서 불성의 등불을 밝히면서
몸과 마음으로 축적해내가니,
볼견한 소박한 출발점에서 원리를 볼시하려고 하는 때가 오니,
때때마다 그렇게 참도의 원리를 증거해내는 그들에게
갑자기
전식으로써 지금여기 그대로 있으라하니,
물론 이것도 하나의 방법이다.왜냐 어떤 인연속에서라도 불성은 죽일수 없으니
스스로
이뭐꼬, 이뭐꼬하면 된다. 그러나
전식으로써 이뭐꼬하는 스스로의 불성의 등불을 초라하게 만들었으니,
이뭐꼬가 쉬이 되지 않을 것이니,
그 속에서 스러져가는 모습이 안쓰럽다.
오직 스스로가 주인이다. 거대한 산속에서도 스스로가 두발로 걸어올라가는 주인이다.
뒤선이를 배려해주고, 앞선이를 숭상치말고 귀히 여겨주면 다 된것이다.
37장의 무명지박처럼,
모좀 할려고 하려는 데, 못하게 하려함도 없는 통나무로 때려준다.
즉 불성에 대한 믿음이니, 변하과 화하여, 또다시 욕작하려고 할때
그냥 내버려둔다이다.
고만하자.
잃을실의 비웃음에서 자유로운 그대들이여,
고요하고 깨끗한 레파토리에서 깨어나라. 그리고 좀 게으르지말라.
어떠한 한 생각에 고정되 있더라도 그것이 그대로 참이니,
이것이 흐름상에서의 커다란 보리처요, 에너지원이다.
못마땅해보이더라도, 안타까워보이더라도,
그 단면을 인정치 않을 수 없으니, 너의 지난 길을 돌아보면 인정하리라.
그런데, 이뭐꼬 이뭐꼬 열심히 열심히 면지면지 하면은
그 땅옥이, 그 개틀이 그대로 보리처이지만,
만약
그 단면의 패턴에 걸려들어서 , 똑같은 패턴대로
시절인연따라 그냥 게으르게 드러만 내면은
이것이 바로 술마시고 노래하고 , 결혼하고 애낳고 늙어 뒤지는 땅옥이다.
술마시고, 노래하고, 결혼하고 애낳고 늙어뒤지는
이 땅옥속에 천국의 문이 있음을 직시하고,
천국의 문을 두드리고 열어라.
이것은
그 누구도 대신 해줄 수 없으니,
알아서 해라.
저 먼나라 먼옛날 예기로 인세를 미혹케 하는 또라이 쉐끼들.
그 패턴을 그대로 사회와 가정에 투영하니
참으로 그대로 땅옥이다.
버금가는 먼나라에 가서 그대로 그들의 맹목적인 전식을 들이밀므로써
물론 이런 것도 흐름상의 한 단면으로쓰면 얼마나 멋진가?
그러나 쓰는 놈들이 최면에 걸려있으니
항상 지옥이다.
그러나 영원한 것은 없으니, 그 지옥도 영원치 못하리니,
한사람의
소박한 주체적인 생각의 발현에서
깨지리라.
그리하여 그대로 땅옥일 수 밖에 없는
지금여기에서
스스로의 불성의 등불을 인연따라 밝히면서 살아가리라.
아.쓰벌,^^
나는 무엇인가?
인간은 무엇인가? 생명체는 무엇인가?
하여튼 나에게서 나를 보아 극점에 이를 때, 그 때 그놈은 나에게 뒤진다.
참 여러분이 지금여기의 한 단면에서 아무리 잔머릴 굴려도 그대로 참이니,
정치가는 최대한 머릴 굴려서 거대한 산을 만들어주고,
여러분은
공부하는 인연속에서.
최대한 머릴 굴리세요.
그것이 무위입니다. 자연입니다. 스스로 그러함 입니다.
제발 열심히좀 하세요. 죽어라 열심히 생각생각하세요.
모 글이 길어졌고, 이정도면 그림자정도는 잡을 수 있을테지요.
여러분, 두달전에 출사푣던지고 놀러왔었는데. 이 글을 올리고 났으니,
다음 번 출사표 던지고 나서 한 번 더 놀러오지요.
그 때는
지금여기의 전식의
이론적 방패막이와 실천적 방법론이
스스로의 불성을 죽이는 게으름에 여전히 빠져있지는 않겠지요...ㅋㅋㅋ
댓글목록
송재광님의 댓글
송재광 아이피 (210.♡.248.129) 작성일
지금 환한 웃음 지을 수 있으면 좋은 것.
모든 말은 1
자신을 향한 말이다.
문제는 사회학적 체게 혹은 구조와 개인적 깨달음의 불협화음이다.
이 과정에서 여러 입장이 생긴다.
도덕경 63장에 도난어기이 위대어기세
도 참 좋은 말이다.
문제가 복잡하고 많지만 쉽게 쉽게 쉬운 길을 찾아 가고 조그맣고 조그만 것들에 충실하면 상황이 점점 나아진다.
그 와중에 어느 과정에서도 환한 웃음 지을 수 있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라면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