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에서 목격되지만 나 자신으로 인정하기 싫은 모습들, 그래서 내 삶의 영역에서 빼어내 버리고 싶은, 의식의 영역에서 배제되어 저 깊숙한 무의식의 영역으로 밀려나버린, 열등한 인격인 '그림자'
어느날 제가 일혜님께 말했습니다. '난 준비됐어, 이걸 치루어낼 준비가 됐다고 생각해'하며, 한숨도 자지 못하고 울었습니다. 아마도 그것이 무척이나 힘든 작업이 될것을 알고 있었나 봅니다. 그리고나선 제 몸은 단풍나무잎이 타들어가듯 그렇게 불타올랐고, 전 제 자신의 그림자를 하나하나 만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끊임없이 수백볼트의 전류가 저를 감전시켰습니다. 하루 온종일 슬픔이 나를 집어 삼켰고, 몇날 며칠동안 감전된 상태에 있다보면 그때에야 비로소 제가 스스로 속여왔던 어떤 작은 비밀하나를 선물처럼 건네기도 하고, 어느때는 며칠씩 제 몸에서 비명이 빠져나갑니다. 며칠동안 자리에서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지내며 온통 회색빛뿐인 세상에 절망하며 부들부들 떨기도 하고, 어느 때는 몸이 부셔져 버릴 것 같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 있기도 했습니다. 그것은 참 고통스러운 작업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 진심으로 제 자신을 만나길 원했고, 내 주변사람들도 진심으로 대하길 바랐습니다. 제가 분명히 말할 수 있는 단하나는 제가 내 안의 그림자들을 만나길 진정으로 원했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진실한 마음을 내었고, 전 제가 풀어야할 숙제의 일부를 해냈습니다.
밝은 것을 상상한다고 밝아지지 않는다. 어둠을 의식화함으로써 밝아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불쾌하고 그래서 인기가 없다.-융-
매화꽃과 산수유가 많이 피어나고, 또 대구에서 고속도로에 진입하는데 버드나무 수액이 올라와 그 푸릇푸릇한 기운을 보게 되니 제 가슴이 참 벌렁벌렁해집니다. 아, 봄이구나, 날씨는 아직 차갑지만, 차창밖으로 보이는 아련한 햇살은 분명 봄임을 알립니다. 꽃샘추위가 우리를 웅크리게 하지만, 곳곳에 봄이 왔음을 숨길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제가 안솔기에 진입해 언덕배기에 주차를 하려들면, 제 운전석 창문에 늘 걸리는 가지가 있어 조금 위에 주차를 하는데, 그게 무슨 나무인지 몰랐는데, 오늘 보니 수양매화가 예쁘게 피어났네요. 참 좋습니다. 이렇게 온갖 꽃이 피어나기 시작하는 좋은 계절에 우리가 이처럼 만나 노자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우리 안의 보물,(우리를 전적으로 행복하게 하는 것은 소유나 밖의 대상에 있지 않습니다. 무엇인가 좋다 싶어 소유하게 되더라도 그것은 금방 익숙해져 버리고 식상해져 버립니다. 그러나 우리 안의 넉넉한 보물, 그것을 발견하기만 하면, 지금 내 삶이 불편하고 힘들어 해답을 찾아 밖으로 밖으로 찾아 헤매지만, 우리안의 보물은 단 한순간도 내 곁을 떠난적이 없고, 또 수고와 노력, 애씀을 통해 얻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우리 안에서 발견하기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를 영원히 편안케 하는 보물이 밖이나 소유가 아니라 여러분 안에 있다는 것을 노자선생님은 경전을 통해 정확하게 알려 줍니다. 소유하지 않고서도 삶을 넉넉히 누릴 수 있는 그 길을 노자선생님의 말씀을 통해 따라가 보겠습니다.
봄은 생명이다.
생명이다.
봄은 시작이다.
시작이다.
봄은 느낌이다.
느낌이다.
봄이 우리에게 주는 생생한 감동을 단백하고 간결한 문장으로 잘 전달하고 있는 시입니다.
도덕경 58장. 그 다스림이 어수룩할수록
그 다스림이 어수룩 할수록 백성들은 더욱 순박해지고, 그 다스림이 빈틈이 없을수록 백성들은 더욱 일그러진다.
재앙이여! 복이 기대어 있는 바요, 복이여! 재앙이 그 아래 엎드려 있구나, 누가 그 끝을 알겠는가? 기실 정해져 있는 것은 없다. 바른 것은 다시 기이한 것이 되고 좋은 것은 다시 요상한 것이 되나니, 사람들의 미혹됨이 참으로 오래 되었구나!
그러므로 성인은 방정하되 나누지 않고, 깨끗하되 상처주지 않으며, 곧되 함부로 하지 않고, 빛나되 눈부시지 않는다.
●'그 다스림이 어수룩할수록'
'어수룩하다'의 의미를 제가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았습니다. '하는 짓이나 말이 약삭빠르지 않고 숫되고 너그럽다. 또 되바라지지(지나치게 약삭 빠르다) 않고 좀 어리석은 데가 있다.'
논어에서 공자가 말했습니다. '덕으로서 다스리는 것을 비유하자면, 북극성은 제자리에 가만히 있되, 모든 별들이 북극성을 중심으로 질서정연하게 돌아가는 것과 같다.'
'북극성은 가만히 있되'는 곧 다스리려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가장 이상적인 정치는 다스리려하지 않는 것, 그리고 그렇게 할 때 스스로 자리잡아갑니다. 그래서 우리가 우리마음을 다스리려 하지 않을 때 그것이 가장 잘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신을 다스리려 하지 마십시오.
사실 깨달음은 지금 여러분 마음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부대사(당나라)가 말했습니다.
밤이면 밤마다 부처를 껴안고 자고,
아침이면 아침마다 다시 함께 일어난다.
부처가 간 곳을 알고자 하거든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거기에 머물러라.
'말하고 침묵하고 움직이고 고요한 거기'는 모든 것이 지금 현재에 일어나는, 딴생각을 하더라도 그것은 지금 이순간에 일어나고,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이 모두 지금 이순간 일어납니다. 곧 지금 이순간에 있으라는 말입니다. 깨달음은 지금 이순간 여러분의 마음을 떠나 있지 않습니다. 지금 이순간은 단순하고 또 그것은 늘 변화합니다. 부처님도 이를 일러 '제행무상'이라 말했습니다. 지금 이순간의 마음, 기쁘다가 느닷없이 슬픔이 찾아오고, 편안했다가 우울해지고, 한없이 넓은 마음이었다가 송곳하나 꽂을 수 없을 만큼 속이 좁아지기도 하는, 매순간이 그때그때 일어납니다. 기쁨이 일어날 때, 그 기쁨이 지속되었으면 좋겠다고 바라지만 그것은 지속되지 않고, 또 편안하다가 갑자기 외로움이 몰려와 거기에 사로잡히고, 질투하는 모든 감정, 느낌, 생각들은 지금 이순간 일어나고, 이 모두가 곧 도이고 자유이고 깨달음입니다. 이것이 진아입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진아가 아니었던 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니 진아는 노력을 통해서 얻을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이 모두가 진아이니) 다스릴게 있겠습니까? 여기엔 다스릴 것이 없습니다.
●편안했다가 불안해지고, 한없이 넓었다가 좁아지고, 사랑했다가 미워하는 이게 '질서'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게 질서가 아니라고 착각하고 따로 진리를 구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진리를 구하면서 자기자신을, 진리를 잃어 버립니다. 우리는 단 한순간도 목마른 적이 없었는데, 목마르다 착각해 물을 찾으면서 목말라져 버립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를 다스리려 합니다. 왜? 자기안에 모범답안과 잣대/기준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에 맞추어 자신을 통제하고 질서잡고 다스리려합니다. 질투하고 미워하는 자신을 목격할 때, 이런 초라함이 올라오면 잣대를 들이댑니다. 자기가 생각하는 기준에 미치지 못하면 자신을 비난하고 거부합니다. 이 착각 때문에 완전한 자유속에서도 무질서하다 여기고 자유를 찾다가 자유와 질서를 잃어버립니다. 깨달음으로 가는 가장 빠른 길은 힘을 빼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힘을 잔뜩 주면서 스스로 자유를 잃어버립니다.
●프로크루스테스는 케피소스강가에 살고 있었는데 힘이 장사였습니다. 자기집에 침대를 가져다 놓고 지나가는 나그네를 데려다가 침대보다 크면 잘라 죽이고, 침대보다 작으면 늘려 죽였습니다. 그리스로마신화의 이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는 우리 마음안에 있습니다. 우리의 감정, 느낌, 생각이 곧 나그네입니다. 그래서 침대라는 기준에 맞지 않으면 그것을 자르고 늘려서 통제하려하거나 없애버리려 합니다. 자기안에서 삿되고 나쁜 생각과 느낌이 올라오면 생각자체도 삿된 생각이 없는 사람이 '완전함(침대, 기준)'이라 여겨 그것을 없애버리려 합니다. 이게 착각입니다. 우리가 없애고 치워버려야 하는 것은 '삿된 생각'이 아니라 침대라는 기준입니다. 그렇게 판단하고 분별하는 그것을 치워버렸을 때 우리 안에서 일어나는 생각, 느낌, 감정은 더 이상 좋거나 나쁜 게 없게 됩니다.
●자기 통제, 자기 조절을 통해 평화를 얻으려는 노력은 놓아버리고, 이유와 조건을 붙이지 말고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그것을 허용하기 시작할 때 비로소 우리는 우리 삶을 누리기 시작할 수 있게 됩니다.
●일체법(내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지고 변화하는 것)을 취하지도 말고 버리지도 않을 때(다스리려 하지 않는 것) 본래부처인 자신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장차 마음을 가지고 마음을 쓸려고 하니 어찌 큰 잘못이 아니겠는가?
미혹하면 고요함과 시끄러움이 생기지만, 깨달으면 좋아함과 싫어함이 없다.<승찬스님>
수행하고, 결심하고, 마음을 닦아 도를 얻으려하는, 자기 마음으로 자기를 어떻게 해보려하는 것이 큰 허물이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다스리려하고 어떻게 하려 하는 것, 저도 예전에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으려했었습니다. 그래서 남들 앞에서는 수행자인척 고결한척 했지만 집에 혼자 있을 때는 게으름과 무기력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나중에 깨닫고 알게 되니 그게 참 불가능한 몸부림이었습니다. 이 미혹함(어리석음)이 가리키는 방향을 통해 깨달음으로 가려할 때(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기쁨이 있으면 짜증이 있고, 이것은 둘이 아니고 하나입니다. 그런데 미혹하면 이게 둘로 보이게 되고, 하나는 버리고 하나는 취하려 듭니다.), 그것이 가능하겠습니까? 좋아하고 싫어하는 그 마음이 사라지는 것을 이름하여 깨달음이라 합니다. 찾는 그 마음이 허구임을 아는 것, 깨달음은 비로소 자기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뭔가 고요한게 참나인 줄 알았는데, 참나는 지금 이순간 이대로입니다. '나'라는 것은 참 모호합니다. 지금껏 배운 것, 지식, 자라오며 입은 상처 등등이 허구의 나를 구성합니다. 이 거짓된 나로 진실을 찾으려 하니 찾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그 무엇이든, 취하거나 버릴 것이 아니고 만나고 경험해야할 대상입니다. 이렇게 자신을 만나고 경험하기만 하면 됩니다.
*이깟 꽃샘추위가 봄을 가릴 순 없습니다. 안솔기에 피어난 봄꽃을 찍고 들어왔는데, 제 목도리에 예쁜 홍매화가 한잎 달려 따라왔습니다. 녀석을 보며 기분이 어찌나 좋던지~~~~
●'그 다스림이 어수룩하면 할수록 배성들은 더욱 순박해지고,'
순박해지고, 더욱 우리 자신의 모습으로 돌아오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 자신을 기쁘게 하고 행복하게 하는 것은 취하고 유지하려 합니다. 그런데 이것은 금방 사라집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라졌지만 마치 그렇지 않은 것처럼 꾸밉니다. 행복한 척, 자신감 있는 척합니다.
●집에 개를 키우는 데, 하루종일 집에서 혼자 심심해하다가 제가 귀가하면 반가워서 환장~을 합니다. 꼬리를 흔들고, 앞다리를 들어 바지에 대기도 하고, 핥기도 하고, 컹컹 짖기도 하고, 가볍게 깨물기도 하는, 그런데 고양이는 주인이 와도 가까이 오지도 않습니다. 그저 어쩌다 주인의 다리에 제 등을 스윽 스치고 지나갈 뿐, 이 모두가 제 본성대로 살아갑니다. 참새들은 하루일과를 끝낸 저녁무렵이면 가시덤불에 서로 모여 쉼없이 수다를 떱니다. 그런데 강가의 왜가리는 어떻습니까? 마치 고요한 수행자같습니다. 그런 모습, 자기본성대로 있는 게 왜가리입니다. 쥐들은 또 어떻습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먹이하나 들고서도 제대로 먹지를 못하고 한번 깨물고 나선 주위를 살피기 위해 고개를 듭니다. 이게 온갖 동물들이 자기 모습대로 살아가는 것입니다. 모든 존재들이 그렇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에크하르트 툴레는 이런 동물들의 모습을 보고 '모든 동물은 위엄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미움, 질투, 쪼잔한 마음이 올라올 때 그것을 외면하고 통제하면 그것은 주눅듭니다. 그리고 평화스럽고 넓은 마음이 올라올 때 그것을 붙잡아 유지하려들고, 행복한 척, 편안한 척하면 그것은 또한 불편해 합니다. 이런 짓을 그만두고, 통제하려하는 게 사라지면, 쪼잔함, 질투, 미움 등은 자기 그대로 존중받게 됩니다. '미움, 질투, 쪼잔함'이건 에너지 자체인데, 이렇게 존중해주면 그 에너지를 100%허용하는 것입니다. 내 안에 일어나는 모든 것들이 존중받지 못하고 외면당하면 한을 품게되고 그러면 그것은 한이 풀릴때까지 계속해서 나를 찾아옵니다. 그러나 내가 그것을 존중해주고 전적으로 허용해주면 그것은 한이 풀리게 되고 내게서 떠나갑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가면서 나를 존중해주어서 고맙다고 떠난 그 자리에 기쁨과 희열과 평화를 남겨둡니다. 그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살아보면 삶이 정말 풍요로워집니다. 하늘에는 매번 온갖 구름들이 지나가지만 하늘 자체는 그것에 물들지 않습니다. 그와 같이 내 마음안에 온갖 것들이 지나가지만 내 마음은 그것에 물들지 않습니다. 이처럼 자기자신을 존중하는 것은 아무것도 아닌것이지만 정말 모두를 무조건 살립니다. 그러니 자기자신을 존중하고 믿어주십시오.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살 때 질투가 저절로 사라집니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그것을 살면 희한하게도 게으름, 질투,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것들이 저절로 사라집니다. 깨달음, 우리는 우리인생을 통해 깨달음을 한번은 얻어야 합니다. 내가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했을 뿐인데, 목마름, 숨기려 드는 것, 게으름이 사라집니다. 그런데 이렇게 살다보면 내게 오는 것도 있습니다. '억압되었던 분노, 외로움'이런 것들이 찾아오는 건 내가 살아있다는 것입니다.
●진실로 외로워보면 자신이 진정 외롭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여러분이 처음부터 답입니다. 해야할 일은 단지 여러분 자신으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그 다스림이 빈틈이 없을수록 백성들은 더욱 일그러진다.'
제가 대학다닐 때 참 좋아했던 작가가 있었는데, 자신의 게으름을 용납하지 않았고, 삶이 밋밋해지면 자신을 견디지 못했고, 자기자신이 생생하게 살아있어야 한다는 그런 글들을 썼었고 저는 그런 부분이 참 좋았었습니다. 그런데 깨닫고 나니 그분이 자살할 수밖에 없었겠구나하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보면 진정으로 남을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늘 풍요한 척, 있는 척, 행복한 척하면 이게 얼마나 긴장되고 에너지를 소모하는지 모릅니다. 얼마나 불편한지 모릅니다. 이렇게 에너지를 소모하는 데 상대방을 진정으로 만날 수 있겠습니까?
●'재앙이여! 복이 기대어 있는 바요, 복이여! 재앙이 그 아래 엎드려 있구나'
우리 눈에 좋아 보이는 것, 그래 보이니까 자꾸 그걸 취하는데 그 밑에는 엄청난 에너지 소모와 목마름이 있습니다. 이 말을 달리 표현해보면 재앙도 복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여러분안에서 올라오는 것 모두가 다 좋은 것입니다. 여러분 안에서 올라오는 것은 전부 좋은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버리려 하지 마십시오. 성경에서도 '모든 것이 하나님 보기에 좋았더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상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그것을 보니 참으로 보기에 좋았다. 여러분 안에서 지금 올라오는 것이 창조이고 그 모두가 좋은 것입니다. '정견', 바로보는 것, 여러분 안의 모든 것이 좋은 것이고 그렇게 보는 것이 '정견'입니다. 온통 좋은 것밖에 없습니다.
●김태완선생님의 설법을 늘 듣는 분이 있었습니다. 늘 들어도 도통 무슨말인지 이해를 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뜰앞의 잣나무'이 말에 다 드러나 있다(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대뜸 문자를 따라가서 이해하고 해석하려듭니다, 이게 뭐지~하며), 혹은 손을 펼쳐보이며 '이겁니다'하고, 또 문자를 따라가지 마십시오하고 말하면 도통 이해할 수가 없더랍니다. 그러던 중 운전하면서 설법을 듣고 있는데 문득 '이렇게나 쉬운 거였나!'라는 이해의 전환이 오게 됩니다. 그냥 소리가 날뿐인데, 우리는 냉큼 문자를 따라가 해석하려 듭니다. 마음이 그려낸 그림을 따라가서 슬프고 우울하다생각해 그것에서 벗어나려 무슨 행동인가를 하려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마음이 그려낸 그림이 아닌, 그것을 만들어내는 마음으로 돌아오면(회광반조) 이게 전부 내 마음이 만들어 낸 마음의 표현임을 알게 됩니다.
*참지혜는 사람들에게서 아득히 떨어진 채 절대 고독속에 은거하는데, 이 참지혜에는 오로지 고통을 통해서만 이를 수 있다. 버리는 것과 고통스러워하는 것만이 세상으로 통하는 마음의 문을 열게 할 수 있는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조셉 캠벨 '신화의 힘'>
제겐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두려움이 두렵진 않습니다!!.
<질의 응답>
○화가 날 때, 화를 내는게 시원하긴 한데, 그러고 나면 자책이 올라오고, 또 상대방이 내게 반응해서 다투게 됩니다.
●모든 순간이 기회입니다. 화를 냈다가 자책이 일어날 때 그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것 조차도 기회입니다.
○다스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차를 타고 오면서 순간적으로 소외감이 들었습니다. 그때 그 소외감을 받아들이고나니 없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와같이 하라는 것인가요? 이야기를 하는데 편안했는데 순간적으로 불안이 일어나고 절망스러웠습니다. 이때 다스리지 않는다는 것이, '어색하고 불편하구나'하고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것인가요?
●진리는 참 단순합니다. 있으면 있다하고 없으면 없다하면 됩니다. 소외감을 느꼈을 때 그때 그 올라오는 감정을 시인하고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순간 '있는 것을 있다'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사라지는데, 사람들은 또 '사라진다'를 잡아 버립니다. 그러지 말고 그냥 그것을 인정하고 존중하십시오. '왜, 사라지지 않지~ 혹은 사라지겠지~'하지말고 거기에서 멈추십시오. 그냥 그럴뿐입니다.
○저는 제게 올라오는 것을 인정하긴 하는데, 은근히 이게 빨리 사라지길 바랍니다.
●빨리 사라지길 바라는 그 마음도 받아들이십시오.
●제가 어떤 분에게 '당신은 답답함이 더 깊어져야 합니다'하고 말했습니다. 그랬더니 그분이 어떻게 해야 답답함을 깊어지게하고 항상 그것을 붙잡고 있을 수 있느냐?하고 묻습니다. 사람이 일부러 답답함을 붙잡아 그것이 깊어지게 하기는 참 힘듭니다. 단지 살아가다보면 어느 순간 답답함이 올라올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때가 기회입니다. 질문을 했던 그분은 답답함이 올라올 때 늘 책을 붙잡거나 누군가를 찾아가거나 명상처를 구해 수행을 했습니다. 그런 행동들만 그치면, 답답함이 올라올 때 딴짓하려는 몸짓만 멈추면, 그것이 올라오는 답답함을 허용하는 것이고, 그것이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그순간 있는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수행자의 함정은 '보면 사라진다'하는 말을 붙잡아 버리는데 있습니다. 그러데 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지금 올라오는 것을 외면하는 것입니다.
●진리는 생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생각자체, 망상자체가 진리입니다. 생각이 없는 상태가 진리라면, 생각이 일어날 때마다 그 생각과 싸워야합니다.
●난 바보인가하는 자기자신에 대한 회의, 뒤에 따라붙는 감정들, 고민, 이런 것들을 가지고 있는게 좋습니다. 자신의 쪼잔함을 목격할 때, 내가 조금 양보하면 될텐데 내가 이것밖에 안되나하며, 가치지향적인, 내가 좀 더 폭이 넓은 사람이 되어야할텐데 하는, 이런 가치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면서 그런 삶을 살지 못할 때 갈등하게 되는데, 그 갈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게 중요합니다. 가치지향적인 삶을 추구하면 사람들은 늘 거기에 도달하지 못하는 자신을 목격하게 되고, 그 순간 여러 감정과 느낌들이 일어나고 그것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이 우리를 진실로 이끕니다. 이렇듯 갈등 없는 사람이 되려하지 말고, 갈등이 일어날 때 그 갈등에 좀 더 주목해 보십시오.
*저는 제가 지금 정말 풍요의 대지위에 서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저는 걷는게 좋습니다. 등산화를 신고 산에 오를때, 발바닥으로 전해지는 밟고 있다는 느낌, 등산화가 내 발을 단단히 붙잡아주고 있다는 느낌, 그 느낌들이 참 편안하고 좋습니다. 그리고 내 피부에 와닿는 그 차가운 공기가 너무나 좋습니다. 집에 혼자 있을 때면 가끔 요가를 합니다. 자세를 깊숙하게 잡아보면, 거기에 통증이 있고 또 시원합니다. 그리고 깊은 고요도 있습니다. 요란하지 않은 다만 깊디깊은 고요가 있습니다. 야간자율학습을 하고 11시넘어 집에 들어와서 피곤해 누워자다 조금 늦게 일어나면 모든 것을 서두릅니다. 하루종일 마실 찻물을 끓이고, 샤워를 하고, 커피를 내리고, 사과를 깍고, 화장실에 들르고, 짐을 챙겨서 차의 시동을 거는, 그 과정속에 깊은 평화가 있습니다. 아침에 교실에 들어와 학생들의 얼굴표정을 살피고 이야기꽃을 피우는 그들, 그 속에도 깊디깊은 고요가 있습니다. 그러니 이게 풍요가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 때 꼭 그 일이 일어납니다.
●사람들은 무엇인가 일어날 것같은 예감이 실제로 일어나고 그것을 몇 번 경험하다보면 자신에게 예지능력이 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붙잡으려 합니다. 예전에 어떤 아줌마는 꿈만 꾸면 그것이 현실에서 실제로 일어났습니다. 이렇게 되면 결국 어떻게 될까요?, 결국 꿈꾸기가 두려워지고 잠자리에 들 수가 없게됩니다. 꿈은 단지 꿈일 뿐입니다. 무엇인가가 일어날 것같다는 불길한 예감과 실제로 일어난 일 사이에는 아무런 연관이 없습니다. 불길한 예감과는 전혀 상관없이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 둘에 어떤 연관관계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불길한 예감에 연이어 실제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 때, 이 몇 번의 일치를 생각으로 연결시키고 그것의 무게를 증가시킵니다. 그러니 그것에 무게를 두지 마십시오.
또 이렇게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일어날 때, 오냐 이번에도 진짜로 이 일이 일어나나보자하며 마음을 내어보는 것입니다. 이때 중요한 것은, 이전에는 불길한 예감이 일어나고 나쁜 사건이 일어나는 그 과정을 자각을 가지고 보지 못했는데, '오냐 이번에도 진짜로 일어나나보자'하는 것은 그 일어나는 과정을 자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를 할 때 알고하는 것과 알지 못하고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또 이렇게 해 볼 수 있습니다. 불길한 예감이 올라올 때 그것을 인정하고 시인해 보십시오. 지금까지는 불길한 예감이 올라올 때마다 불행한 일이 일어났고 또 일어날까 두려웠는데, 그래서 그 예감을 피하려하고 그것에 저항하려했는데, 그러지 말고 그 불길한 예감을 더욱 허용해보십시오. 예전에 제가 꿈에 이빨이 다 빠지고 잇몸에 이끼까지 끼는 불길한(?) 꿈을 꾸었는데, 그 이야기를 들은 어떤 분이 그것은 대단히 불길한 꿈이다, 누군가 죽게 될 것이다고 제게 말했습니다. 이때 제가 어떤 마음을 내었냐면, '오냐, 그럼 누가 죽나보자!'하며 은근히 기대했습니다. 이와같이 일어나는 느낌을 허용하고, 반복된 경험에 사로잡혀 두려움에 함몰되지 말고, 용기를 내어 불길한 예감이 들 때 그것을 더욱 허용해 보십시오. 그렇게 할 수 있을 때 그 불길한 예감에 깨어있을 수 있게 되고 묘하게 그 느낌에 함몰되지 않게 됩니다.
●제가 아는 한분은 동생과의 사이가 너무나 좋지 않았습니다. 평생 안 볼 수 있으면 좋을텐데 명절때는 어쩔 수 없이 동생을 보게 됩니다.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동생에 대한 미움이 올라올 때, 그래도 저 동생이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데, 참 고마운 일인데 내가 이렇게 동생을 미워하면 안되느거 아냐?하며 제게 고민을 물어왔습니다.
받아들이려고도 하지 말고 그 속에 있으려고도 하지마라(받아들이거나 그 속에 머무르는 게 안되는 사람들에 대한 또 다른 방편). 미움과 분노가 올라올 때 어떻게 해결하거나 그것을 받아들이려하지 말고, 단지 그것이 이렇게 나를 계속찾아오는 것은 내게 할말이 있나보다, 내가 그 미움이 전하고자하는 이야기를 꼭 들어주겠다, 가슴을 열고서....하는 마음을 내보는 것도 좋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은 관심을 지금 올라오는 그 분노, 미움에 두는 것입니다. 그렇게하면 그것이 내게 숨겨진 정보를 보여줍니다. 이런 마음을 내었을 때, 그것은 시간이 조금 걸리긴하지만 결국 지금 올라오는 그것에 주목하게 해 줍니다. (결국 자기자신에 주목하는 것은 당신입니다. 저의 설명이 혼란스럽다면, 제 방법보다는 당신의 느낌을 따라가십시오. 그것이 더 좋은 것일 수 있습니다.)
○어떤 순간에는 의심이 들었다가 또 이해되었다가 다시 의심됩니다. '보는자와 보이는 대상' 이게 자꾸 혼란스럽습다. 또 '나는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감정은 내가 아니다'이 말을 읽어 알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선생님의 말씀을 들으니 혼란스럽습니다. 그래서 선생님의 받아들이라는 그 방식으로 하면 제가 올라오는 감정에 함몰되는 것 같습니다. 제가 '무경계'라는 책을 읽었는데 그분의 말씀대로할까, 선생님 말씀대로할까 혼란스럽습니다. 그분은 보이는 대상과 보는자가 다르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래서 이 혼란 때문에 가끔 선생님께 화가 나기도 합니다.
●나중에 가면 보는자와 보이는 대상의 구분이 없게 됩니다. 당신이 불안을 받아들이면 그것이 더욱 커집니다. 그럴 때 사람들은 두려워서 자기자신을 지키려하는데 그것을 놓아버리십시오. 아이들이 성장해 갈 때 과정이 있습니다. 금방 자기인생의 주인이 되는게 아니라 겪을 걸 겪으면서 성장해 나가게 됩니다. 받아들이는 게 너무 힘들면 도망가도 괜찮습니다. 자기 성향, 방식대로 하기마련인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번 시도해 볼 수는 있습니다. 두려움을 받아들일 때 그것이 점점 더 커지게 되는데 그때 한번 어찌하려는 그 마음을 놓아 버리십시오. 자유는 자유의 모양으로 오지 않습니다. 구속, 엄청난 고통의 모양으로 오기도 합니다.
○가끔 한번씩 제가 저를 지켜보는자를 느낍니다.
●저는 저를 지켜봅니다. 그런데 그냥 지켜봄만 있을 뿐, 지켜보는자는 없습니다. 저는 보려하지 않지만, 모든게 섬세하게 보입니다. 그런데 당신도 지켜보는자 없이 그냥 지켜보는 것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지켜 보는자와 지켜보는 대상'이라는 틀 속에 자신을 집어 넣지 마십시오. 또 제가 지켜보는 것은 지금 올라오는 감정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경우에 따라 다릅니다. 도망이 아닌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 다릅니다.
우리는 의식이라는게 있습니다. 사람이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쓰는 의식이 있습니다. 이것만 있느냐면, 또다른 의식층이 있습니다. 이게 열리면 '본다'는 의미를 알 수 있습니다. 저는 부모로부터 사랑받지 못한 결핍이 참 컸습니다. 그러다보니 그걸 채우려는 욕망이 있었습니다. 남들로부터 인정받고, 남들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저는 남들로부터 사랑과 인정받음으로써 제 존재를 확인받고 싶어했습니다. 제가 남들로부터 인정과 사랑받기위해 끊임없이 남들을 의식하고 눈치를 보았습니다. 제가 도를 닦는다고 하동에 갔을 때 버스정류장에서 지리산가는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버스 오는 시간이 4시간 후라 그 시간동안 다방에 있으려고 다방에 들어갔습니다. 이때 저는 다방에 들어선 순간부터 창가쪽에 앉으려고 창가쪽으로 다가서는데, 그때부터 저는 다방레지가 '어머, 저기 멋진 사람이 창가쪽으로 걸어가네'라고 생각하겠지라고 생각을 하면서 폼을 잡고 걸어갑니다. 그렇게 처음 들어서는 그 다방에서 조차 저는 다방레지를 의식하면서 행동하는데 그때 저는 제가 그런지를 몰랐습니다. 그렇게 내가 다방레지를 의식하는지도 모르고, 내가 생각하는 것이 진실인줄 알고 자기세계에 갇혀 살았습니다.
제가 지리산에서 어떤 분과 이야기를 하다가 제 인생의 첫단추를 제대로 끼웠습니다. 그렇게 그분과 이야기하며 저는 제가 무슨짓을 하는지를 제대로 '보았'습니다. 그분이 저를 찾아왔고, 사흘동안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했던 이야기들은, 끊임없는 자기자랑이었습니다. 도를 구하기 위해 교사라는 안정적인 직장도 버린사람이 나라는 둥, 정말 삶의 진실하나 알기위해 애쓰며 살아왔다는 등등, 나중에 보니 이 사람이 아주 작심을 하고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제가 에고가 너무나 크다보니 그것을 깨주고 싶어서.....이분이 저의 이런 말도 안되는 자랑이야기를 한참 듣다가 어느 순간 자신의 내밀한 비밀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가까운 친척의 음독자살과 그로인한 충격으로 인생의 의미가 무의미해지고, 그대부터 그 무엇을 해도 이거해서 뭣하나하는 회의를 하게 되고, 그때부터 자기는 삶의 진실을 찾기 시작했다는, 그분이 남들에게 터놓기 어려운 비밀스러운 개인적 이야기를 하니, 저도 그게 참 고마워 제 개인적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게 아버지에 대한 증오였습니다. 그때 이분이 확 안면을 바꾸며 자기아버지조차 증오하는 사람이 무슨 도를 구하겠다고 여기에 와있느냐고 저를 나무랍니다. 그러면서 지금과 같은 개인적인 이야기를 더 해달라고 요구합니다. 그래서 제가 저의 이야기를 계속하게 되었는데, 그게 전부 또 제 자랑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자랑이야기가 하나 끝나면, 그분은 또 없냐고 묻습니다. 그러면 저는 또 제 자랑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면서 저는 점점 뻥튀기도 하고, 속으로 나와같은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는 당신은 정말 인생의 영광인줄알아!하는 생각까지, 정말 점입가경이었습니다. 그렇게 제 자랑이야기를 끊임없이 하다가 운명의 시간이 다가왔습니다. 이번에도 제이야기를 다 듣고나선 그분이 또 없습니까?하니까, 제가 당연히 또 있지요!하다가 딱하니 제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가 30년동안 단 한번도 진실한 적이 없었고, 언제나 남들을 의식하고 제 자신을 꾸미고 살았다는 것을. 그런 거짓의 나를 그때 보아버렸습니다. 그때 전 이게 진짜 나란말인가, 내가 이렇게 살아왔단 말인가하면서 밤새 통곡을 하며 울었습니다. 저는 제가 참 인생을 진실하게, 평생을 진실만을 추구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온통 거짓투성이의 제 자신을 보아버렸습니다. 그렇게 새벽이오고 아침이 와서 그분이 떠나고 그분을 배웅하고 나서 뒤를 돌아 제 토굴을 보면서 저는 구토를 했습니다. 저는 저처럼 더러운 인간이 진실을 추구한다고 다시 토굴로 들어간다는 게 지리산을 온통 더럽히는 것 같아 다시 토굴로 돌아갈 수 없었습니다. 너무나 부끄러워 그길로 대구로 도망쳐 와버렸습니다. 그렇게 대구에서 1주일정도 머물다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토굴로 돌아와서 제가 한일은, 제가 살아오면서 있었던 일들을 글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아버지로부터 거부당하고, 내침을 당한 그 상처가 너무나 컸고, 그로인해 자존감이나 자신감이 제로이고 너무나 제 자신이 못나보였고, 이 못난 상처가 드러나 다른 사람들이 나를 다 떠나면 어떡하나하는 두려움 때문에, 그 공포에 의한 행동, 거부당하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꾸미고 살아온 거짓의 나가 그대로 보였습니다. 저는 그렇게 45일간 적어 나갔습니다. 그렇게 쓰는데 제 모습이 너무나 더러웠습니다. 너무나 더러워 지금 이 자리에서도 밝힐 수가 없습니다. 그렇게 한번을 적고나니 다시 적었던 사건과 사건사이에 숨겨진 일들이 생각났고, 또 그다음엔 그 사건들 이면의 감정과 느낌까지 보였습니다. 그렇게까지 하고나니 더 이상 글이 쓰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그렇게 제자신이 거부당할까봐 포장하고 꾸미고 살았었는데, 제가 꾸민다는 것을 몰랐었는데, 그때부터 제가 꾸미고 포장하는 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30년동안 살아온 습관이 있어, 자동적으로 포장하고 꾸미는 행동을 하게 되고, 제가 그런 제 모습을 보면서 참 많이도 비참해했었습니다. 그 기간이 약 3년이었는데, 그게 진참회였습니다.
●본다는 것은 내가 나를 보는 것입니다. 그것을 배울 수 있는게 108배입니다. 놀며 장독깨듯이 108배를 하는 것입니다. 그냥하되, 하나의 조건이 있는데 그것은 몸의 동작을 의식하면서 하는 것입니다. 무릎을 구부릴 때 그 동작을 의식하는 것, 손을 올리거나 내릴 때 그 동작을 있는 그대로 의식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루도 빠뜨리지 말고 1달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다보면 필연적으로 망상에 빠지게 됩니다. 그러면 이때 자신이 망상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다시 몸의 동작으로 돌아오면 됩니다. 망상에 빠졌다고 한탄하지도 말고 그냥 아무런 의도없이 그 동작을 1달간 반복해 보는 것입니다. 동작에 의식을 두었다가 망상하고 다시 동작으로 돌아오는 그 행위들의 반복. 이렇게 한달간해보면 이것이 내게 엄청난 에너지를 줍니다.
*토토와 시지프님이 마음을 내어 커피를 가져오셨습니다. 다른 분들도 곶감과 과자를 가지고 오셨는데 제가 확인을 하지못해 이자리에서 소개하진 못하겠습니다. 아무튼 이런 소중한 마음들이 결국은 자신을 살린다는 것을 저는 제 경험을 통해 압니다. 소중한 마음 감사히 받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얼마전에 힘든일이 있어 힘듬속에 있어보려 했습니다. 그런데 이러다 내가 미친사람이 될 것같은 두려움에 그만 두었습니다. 정말 입체적인 강력한 두려움이었습니다.
●네, 많은 사람들이 그 고비를 넘기지 못합니다. '미친사람'이 될 것같을 때, 그때 한번 더 허용해 주십시오. 제가 예전에 머릿속에서 한생각이 끊임없이 반복되었습니다. 머리가 터질 것같았습니다. 그때 전 그것에 저항하기보단 그래 '돌아라'하며 그 반복되는 생각을 한번 더 허용해 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이 끝이 났습니다. 지금 일어나는 것이 법입니다. 에고입장에서 이게 정말 돌아버릴 것같습니다. 그런데 그때 한 번 더 허용해 주십시오. 허용이란, 진정한 주인의식을 가지고 하는 행위입니다. 그것에 함몰되면 미쳐버리겠지만, 내가 알고서 참된 주인이되어 그것을 허용해주면 절대 미칠 일은 없습니다.
●자꾸 반복되는 그것을 힘들어 하는 것은 반복되는 그것에 대한 저항이 있기 때문입니다.
●'본다'는 것을 달리 표현하면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입니다.
○내면아이가 올라와서 힘들었지만 더욱 깊어졌다고 하셨는데?
●저는 34살에 깨어났고 그때 다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깨닫고 나서 어느 때 제가 주례를 보게 되었는데, 그 전날부터 굉장히 불안했습니다. 주례를 하면서도 긴장을 하게 되고, 잘 못하게 되고, 떨고, 그러다보니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닌지 다른 사람들 눈치를 살피게 되고, 그러면서 정말 식은땀을 흘렸습니다. 주례가 끝나고 나서도 상대방의 반응에 눈치를 보게되고, 신부의 아버지와 악수를 하는데도 그 신부아버지의 눈치를 보았고, 그 자리에서 밥을 먹는 것도 너무나 불편했으며, 택시를 타고 가려고 누군가가 택시를 잡아주는데 그 순간마저도 너무나 힘들었습니다. 그런 것들을 경험했지만 저는 그게 무엇때문인지를 잘 몰랐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고나서 저는 경명여고에 기간제 교사로 채용되었습니다. 거기에서 3달간간제교사로 계약을 했는데, 성실하게 일하다보니 계약기간이 3년으로 늘어났고, 거기에서 3년간 근무를 하게됩니다. 제가 도덕경강의만 했다면 제 안에 있는 내면 아이를 만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도덕경강의를 하게되면 제 강의를 들으러 오는 분들은 모두들 제강의에 참 주의를 기울여 듣습니다. 그런데 경명여고에서는 제가 잘 모르는, 자본주의나, 철학 이런 이야기를 수업중에 해야하고, 또 수업시간에 아이들이 수업을 듣기보단 엎드려 자거나 또는 다른 책을 꺼내보거나, 또 한쪽구석에서 저희들끼리 떠들고 놉니다. 저는 거부에 대한 두려움이 있어 아이들을 나무라지 못했습니다. 또 아이들의 눈빛하나에 벌벌 떨었습니다. 아이들이 떠들면 조용히 시켜야함에도 불구하고 '좀 조용히 떠들어 줘'라고 벌벌 떨며 말했습니다. 완전한 직무유기였고, 어떤 학생들로부터는 정말 선생님이 떠들지말라고 말도 못하고 조용히 떠들어가 말이되냐는 항의까지 들었습니다. 교실안에서 그런 상태이다 보니 교실밖의 교감선생님이 또 저를 쪼입니다. 저는 이렇게 안과 밖으로 커다란 문제에 봉착했습니다. 그러다가 제 수업시간마다 자는 학생이 있었습니다. 교실이 무너지고, 제 자신이 거부당한 것 같고, 그 매시간 자는 학생으로부터 제가 무시당한 것같아, 어느날은 이 학생을 꼭 깨우고 말리라 다짐에 다짐을 1주일간 하다, 수업시간에 그 학생을 깨우려 손을 펼치며 저저~~(벌벌떨며)하다가 문득 보았습니다. 어려서부터 아버지에게 거부당하고, 자라면서는 내 자신으로부터 거부당했던, 쩔쩔매고, 다가가지 못하고, 소심하고, 자신감없고, 그런데 제가 성장하면서 이런 초라한 모습이 너무 싫어 이것을 그토록 잔인하고도 빈틈없이 짓밟았던 그 아이, 50년동안 비난당하고 거부당한 그 아이가, 어마어마하게 큰 차가운 콘크리트 안에 웅크린채 벌벌떠는 그 내면아이를 딱하니 보았습니다. 네가 이렇게 벌벌떨며 갇혀 있었구나!, 미안하다, 나도 모르게 내가 너를 잔인하게 짓밟았구나!, 그 이후부터는 여전히 쩔쩔매지만, 눈빛하나에 다 무너지지만, 다른 선생님이 김선생 밥먹었어라고 묻는 말에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몰라 혼비백산했지만, 그래도 그 모습들이 다 이해가 되었습니다. 정말 내가 이럴 수박에 없을 다 이해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더욱 적극적으로 그 아이를 만나갔습니다. 이렇게 한번 자신을 만나면 한번 치유가 일어납니다. 저는 정말 지옥같은 시간을 보냈는데, 그것은 내안의 아픈 아이를 치유하기위한 시간을, 경명여고라는 장소를 하늘이 그렇게 마련해 준 것입니다. 50년동안 억압된 그 아이의 한이 얼마나 크겠습니까? 그것은 정말 예고된 시간없이 느닷없이 올라옵니다. 내가 학교에서 누군가에게 인사를 하는데, 마침 그사람이 다른 일로 고개를 돌린다면 저를 못보고 제 인사를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제가 거부당했다고 여기고 그렇게 얼어붙고 다음에 그 사람을 만나더라도 불편해합니다. 그리고 저는 그게 나니까 그냥 그럴뿐입니다. 그냥 얼음덩어리상태로 얼어붙고, 불안해하고, 숨막혀 할 뿐입니다.
○남편이 무슨 일로 집을 나설 때 그때 저는 제가 버림받은 것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런 마음이 들면 그런 자신을 얼른 달래고 다른 즐거운 일을 하면되지 하고 바로 다른 일을 찾아합니다. 이런 나를 보면서 엄마와 어릴적 기억을 더듬어 그때 이야기를 해보기도 하고 원인을 찾기도 합니다.
●과거의 기억까지 찾아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또 그렇게 자신을 다독이고 다른 일을 찾아하는 것은 그 버림받는 느낌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버림받는 느낌이 있습니다. 그걸 직면하기가 너무 힘드니까 그것을 달래서 얼른 편안해지려고 하는 몸짓들이 전부다 그 느낌으로부터 도망가는 것입니다. 빨리 그 버림받는 느낌을 달래서 편안해지려는 마음을 내려놓고, 그 지옥같은 느낌 그 상태 그대로 있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있어보면 머릿속에서 이러다 내가 아프면 어떡하지하며 온갖 도망갈 궁리를 하며 또 그런 타당하게 보이는 이유들을 만들어 내기도 하는데, 그러면 그때 그 생각까지도 의식하면서 실피는 것이 마음공부를 해나가는 것입니다.
●불편하거나 불안할 때 그것을 모면하려는 특정한 행동을 하게 되는데, 그 행동을 그때 멈추는 것과, 또 그렇게 불안을 피하려 어떤 행동을 했을 때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음을 인정하고 시인하는 것 둘다 방법이 될 수 있습니다.
●제가 29살 정화여고에 있을 때 극도의 대인공포가 있었고, 49살의 경명여고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두 순간이 모두 상황이 같습니다. 정화여고에 있을 때 등교를 할 때 학생이 인사를 하면, 어떻게 인사를 받아야 선생다운지를 몰랐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평생을 남들 눈치를 보며 살았기에 제 자신으로 한번도 살아본 적이 없었습니다. 단 한번도 제 느낌, 제 감정대로 살아본 적이 없었으니, 모를 수밖에요. 그래서 그게 너무나 두려웠습니다. 그래서 그 인사를 받으면 어떻게 해야할지를 모르니 아예 인사를 받지 않으려 크고 가까운 길을 놓아두고 골목골목 학생들 없는 길을 찾아서 등교했습니다. 이처럼 모든 순간 남들을 의식하고 산다는 것은 그 자체로 지옥입니다. 버스를 타고 가는데 의자에 앉은 학생이 가방을 들어주겠다고 하면, 전 제가 가방을 그대로 들고 있어야하는지, 아니면 그 가방을 학생에게 맡겨야 선생다운것인지,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습니다. 이처럼 정화여고 때나 경명여고 때나 대인공포인 상황은 마찬가지였지만, 다른 게 하나있습니다. 정화여고에 있을때는 끊임없이 피하고 달아났습니다. 그러나 49살의 경명여고에선 도망가지 않고 그냥 초라했습니다. 정화여고에선 초라함을 견디지 못했지만, 경명여고에선 그냥 그 초라함을 마주하고 경험했습니다.
●'약사면 약사답게, 장녀는 장녀답게~'하는 이런 것은 없습니다. 그냥 지금 이순간이 있고, 한존재가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아버지-아들'의 관계지만, 단지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있을 뿐입니다. 자신이 아닌 남이 되려하지 마십시오.
●내가 하는 행동이 상대방에게 사랑받기위해서 하는 행동임을 알지만, 알면서도 자동적으로 그 행동을 하게 될 때 그게 참 비참합니다. 정말 하루종일 비참하게 됩니다. 그러나 저는 제가 그런 것들을 경험할 때 '이게 언제 끝나나'하는 이런 게 없습니다. 그냥 그 순간 받아들임만 있습니다. 하다못해 처음보는 다방레지에게 잘 보이려 폼잡고 앉는 그런 자신을 발견할 때 정말 비참함이 올라오고 전 비참함을 경험합니다. 다만 그럴뿐입니다. 이게 언제나 끝나나하는 이런 것은 제게 없습니다. 그러니 비참하지 않는 존재가 되려하지 마십시오. 비참함이 올라오면 그냥 끊임없이 비참하십시오.
○자신을 만난다는 건 알아차린다는 것입니까?
●거울은 지나가는 모든 것을 다 비추이고 보입니다. 이와같이 하는 것입니다. 단지 비추기만하면 됩니다.
●내면아이를 안아주면서 이 아이가 사라지길 바라는데, '안아주다보면 이 아이가 사라지겠지'하는 그 마음, 그 의도를 내려 놓으십시오. 그 힘을 빼십시오. 제가 또 이렇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되 의도를 놓아라고 계속 말하는 이유는, 지금 올라오는 이것자체는 도대체가 껴안을 수가 없는 것이잖아요. 너무나 비참하기에.... 그런데 그 도저히 껴안을 수 없는 그것을 껴안을 때 내 안에서 치유가 일어나면서 동시에 사랑을 배우게 됩니다. 우리가 왜 이렇게 비참하고 초라한가하면, 그것을 통해 진정한 사랑을 배우게 하기위해서 그렇습니다. 그래서 지금 올라오는 초라하고 뒤틀린 그것이 참으로 소중한 것입니다.
○아이가 초등학교 3학년인데, 아이 노는 모습을 보니 아이가 계속 술래만하는 것입니다. 제가 생각하기에 이것도 일종의 학교폭력입니다. 제가 너무나 속이 상합니다. 제가 어떻게 해야할까요?
●밖을 보는 것과 동시에 자신을 볼 수 있어야 합니다. 제 딸이 어느날 펑펑울면서 옵니다. 누가 자기를 때렸다고 합니다. 그래서 저는 그때 무조건 딸아이의 편이되어 주었고, 딸아이를 때린 아이를 찾아갔습니다. 그 아이를 만나 왜 딸아이를 때렸는지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녀석이 '때리고 싶어서~'라고 말합니다. 그 대답을 듣고 나니 그 순간에 솔직히 내가 어떻게 해야할지 모르겠더라고요. 그래서 단지 다음부턴 때리지말아하고 말하고선 돌아서 왔습니다. 기껏 다음부턴 때리지마란 말한마디밖에 못하고, 이와같이 아이에게 어떻게 해야할지 모를 때, 모른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그 혼란과 같이 가십시오. 그리고 그렇게 하는 것이 자신에 대한 믿음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할 때 눈이 자기자신에게로 자연스럽게 향합니다. 그렇게 그 모름을 받아들이면 그 모름을 통해 자신이 어떻게 해야할지 알게 됩니다. 눈에 드러나고 보이는 것만이 해결책이 아니고 부모의 삶을 통해 자식들은 느끼고 배웁니다. 그리고 그런 부모의 모습이 아이에게 신뢰와 믿음을 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