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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스터데이 원스 모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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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몽 (210.♡.107.100) 댓글 0건 조회 5,984회 작성일 07-10-30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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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준 것은 조그만 거울곽이었다.
아이새도우 화장품 곽처럼 생긴 둥그런 모양의 금곽 바깥에는 모네의
파라솔을 든 여인이 코팅되어 있었다. 밝고 화사한 태양빛을 배경으로
여인의 얼굴이 파라솔의 그늘 속에 살짝 감추어져, 파아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여인의 치마결이 파선(波線)을 이루고 있다.
거울곽을 열면 조그만 거울과 양각으로 새겨진 장미, 하아트 무늬가
파진 홈에는 약간 고개를 갸우뚱하고 웃는 듯한 그녀의 사진이 들어있다.
그리고 조금 빠른 듯한 리듬의 뮤직박스 음악이 자동적으로
흘러나오는데 아마 빛을 감지하는 어떤 센스가 곽에는 숨겨져 있으리라.
그 거울곽 속의 여자는 술에 취해 꿈결처럼 말했다.
제발 옛사랑을 말하지 마세요. 여자는 지금의 사람만을 생각한답니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왼쪽 어깨에 기대어왔다. 거울곽에서 나오는듯한
향수 내음이 코로 다시 스며 들어왔다.
비린내 나는 수산센터를 지나 남항등대에 서서 바라다 보는 밤 바다.
밤의 깊은 어둠 속에 외항선의 불빛이 깜박이고 차가운 해풍의 바람결에
낮은 저음의 엔진소리가 실려오고 작은 어선이 퉁퉁거리며 물살을 가르고
항구로 들어온다. 선박의 갑판 위에 선원의 그림자가 순시선 탐조등의
불빛에 비쳐 실루엣의 그림자로 나타났다.
영도는 빛을 곱게 뿌린 듯 고요한 밤의 적막 속에 흔들거렸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오늘 그녀와 헤어져 비행장을 돌아 숙소로 돌아올 쯤 흰눈이 조금씩
희뿌옇게 내리기 시작했다. 막차의 차창에 김이 가득 서려 밖의 풍경이
몽롱해져 갔다.
이곳 외딴 타지로 옮기고 난 후, 산다는 것이 정해진 노선이 없이 그냥
흘러가는 것 뿐이였다. 흐르고 흐르다 또 흐르는 그녀와 만났다.
나이에 비해 앳띠고 순진한 얼굴을 한 그녀는 세상의 의지와 부딪쳐
흐르기에는 가날픈 허리를 가지고 있었다.
이곳 내륙에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큰 댐과 저수지가 많아
늦가을에는 짙은 안개가 피어올랐다. 헤드라이트 불빛에 안개가 출렁거리고
차량은 깊은 바다 밑바닥을 기어가는 잠수정 같았다.
성애 낀 차창을 살짝 문지르자 인가의 불빛이 스쳐 지나간다.
다시 떠오르는 풍경들.
용두산 공원을 오르면 화려한 남포동의 네온싸인을 등지고 천마산, 고갈산,
영주동의 산복도로 집들이 무수한 등불이 되어 병풍처럼 시내를 휘감고 돈다.
그 작은 불빛 하나 하나가 가날프게 타오르는 정념의 불꽃이 되어 부산의 야경을
이룬다. 그 불꽃은 환한 대낮이 되면 욕설과 땀과 비린내와 거친 삶의 바닥이 되어
도시의 날숨을 내뿜는다.
밤이라 수평선 너머엔 출항을 앞둔 오징어잡이배의 백열등이 조명탄 불빛처럼
작열하여 욕망의 밤하늘을 바다 끝까지 태우고 있었다.
그녀는 산비탈 길을 오르며 가픈 숨을 내뿜었다.
숙소 입구로 난 길을 걸어 갈 때에는 밤은 칙칙한 어둠 속에 숨겨져 불투명한
힘을 눈으로 쏟아내고 있었다. 첫 눈이다. 서울과 광주에서 내려온 일행들이
어울려졌다. 모두가 가방 한 두개를 손에 잡고 있었다. 서로 인사를 건넸지만
말을 나누기에는 밤이 깊어 서둘러 발길을 재촉해야 했다. 잎을 벗은
잔나무 가지가 바람에 흔들렸다. 그녀와 함께 나눈 술이 싸악하게 입김으로
흘러나오고 등에 땀이 배였다.
영도다리를 걸어면 차량 불빛에 그림자가 찢겨 진동처럼 몸이 흔들거린다.
그래도 연인들은 서로에 취해 난간 위 밤하늘에도 갈매가 날아가고 있다는 것도
저 수면 밑바닥 깊은 어둠 속 해초가 흐느적 거리는 것도 알지 못한 채 희희덕
거리며 서로의 살을 그리워한다. 영도다리 아래 흐르는 해수의 물결 속에
수많은 얼굴이 통발처럼 주리주리 가슴에 매달려 갇힌 고기처럼 아직 몸부림
치고 있었다.
왠지 거울 속의 그녀는 이 모든 것과는 잘 어울리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소금끼가 하얗게 말라 자신의 피와 엉겨붙어 그려내는 비린한 무늬.
그 무늬 사이로 어지럽게 흩어지는 갯강구와 짓이겨져 터져버린 갑각류의 썩은 석회 냄새.
그녀는 바다를 모른다.
숙소로 돌아와 몸을 씻고 잠이 들기 전 거울곽을 열어보았다.
<예스터데이>의 멜로디가 흘러 나왔다. 오늘이라는 시간 속에 정지된
과거의 시간이 튀어 나온다. 그 어제라는 흔적을 부지런히 주워모아
현재의 자신을 모자이크하면 중요한 부분이 어딘가 빠져 있는 것이다.
내부의 어떤 이가 말소해 버린 기록들. 지워버리고 싶은 어제의 기억들.
오늘을 살아가기에 부담스러운 고통의 순간들.
어제, 과거에 집착하는 것 처럼 어리석은 사람은 없다고 한다. 바로 지금의
순간에 집중하라고 한다. 그러나 어제를 믿고, 어제의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정직하게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오늘의 나는 거짓처럼 보인다.
오로지 어제를 바로 바라보기 두려워하는 오늘의 나가 있을 뿐이다.
오늘의 시간과 그녀를 이 조용한 거울곽 속에 넣고 하루를 자면 어제가
될 것이라는 꿈을 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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