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조어록 - 도에 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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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배경 (211.♡.76.142) 댓글 0건 조회 4,795회 작성일 07-12-10 00:21본문
* [ ~ ] 사이에 쓰여진 글은 김태완 선생님의 주해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어떤 중이 물었다.
“도 닦는다는 것은 어떤 것입니까?”
마조가 답했다.
“도는 닦는 것에 속하지 않는다. 만약 닦아서 얻는다고 한다면, 닦아서 이루어지는 것은 다시 부서지니 곧 성문[소승의 수행자를 가리키는 말로써 수행과 깨달음을 분별하여 세워 놓고, 깨달음을 향한 수행을 의도적으로 실천해 가기 때문에, 무엇을 성취하는 일이 있다고 하여도 부자연스런 분별조작의 결과물이 되어서 다시 원점으로 되돌아오게 된다.]과 같으며, 만약 닦지 않는다고 한다면, 곧 범부[애초에 깨달음과 공부에 대하여 아무 관심도 없이 습관적으로 분별의 세계를 살아간다.]와 같다.”
그 중이 다시 물었다.
“어떤 견해를 지어야 도에 통달할 수 있습니까?”
“자성(自性)은 본래부터 완전하여 모자람이 없다.
그러므로 다만 선(善)이니 악(惡)이니 하는 일에(선이니 악이니 하는 것은 하나의 프로그램일 뿐입니다. 도는 그 프로그램이 일어나는 배경이지요.) 막히지 않기만 하면 도(道) 닦는 사람이라 할 것이다.
선(善)에 머물고 악(惡)을 제거하며, 공(空)을 관(觀)하고 선정(禪定)에 들어가는 등은 곧 조작(造作)에 속한다.
다시 밖으로 치달려 구한다면 더욱더 멀어질 뿐이다.
그러므로 다만 삼계(우리가 경험하는 모든 의식세계)를 헤아리는 마음이 없도록만 하여라.
한 생각 망녕된 마음이 곧 삼계(三界)에서 나고 죽는 바탕이 되니, 다만 한 생각만 없다면 곧 생사(生死)의 근본(根本)을 없애는 것이며, 이것이 바로 법왕(法王)의 위 없는 보물을 얻는 것이다.
[견해를 내어서는 도에 통달할 수가 없다. 견해는 분별심으로 헤아리는 것일 뿐이다. 마음을 관찰하면 도에 통달할 수가 없다. 관찰하게 되면 이미 마음이 헤아려 경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선정에 들어가면 도에 통달할 수가 없다. 들어가고 나오는 것은 이미 마음이 헤아려 나타난 경계일 뿐이다. 마음에는 어떤 경계도 없다. 그러므로 헤아려 나타나는 경계는 모두 망상이다. 헤아리는 마음은 어떻게 없어질까? 헤아리는 마음이 없어야 한다고 헤아리지 말라. 헤아려도 망상이고, 헤아리지 않아도 망상이다. 어떻게 손을 써야 할까? 발을 뗄 수 없고 손을 쓸 수 없는 곳에서, 문득 통해야 하리라.]
그러므로 성문(聲聞)은 깨달은 듯하지만 도리어 미혹(迷惑)하게 되고, 범부(凡夫)는 미혹함 속에서 깨닫게 된다.
성문(聲聞)은, 성인(聖人)의 마음에는 본래 지위(地位)ㆍ인과(因果)ㆍ계급(階級)이 없다는 것을 모르고, 마음으로 헤아리고 망상(妄想)을 지어서 인(因)을 닦아 과(果)를 증득(證得)하려 한다.
텅빈 선정[空定]에 머물러 수만 겁(劫)을 지나 비록 깨닫는다고 하여도 깨닫고나서 도리어 미혹(迷惑)해진다.
모든 보살(菩薩)이 성문(聲聞)을 마치 지옥의 고통과 같이 보는 것은, 성문이 이처럼 공적(空寂)에 빠지고 막혀서 불성(佛性)을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미혹(迷惑)에 대응하여 깨달음을 말하니 본래 미혹이 없다면 깨달음 또한 있을 수가 없다.
일체 중생은 처음부터 법성삼매(法性三昧)를 벗어난 적이 없이 늘 법성삼매 속에서 옷입고 밥먹고 말하고 응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육근(눈ㆍ귀ㆍ코ㆍ혀ㆍ몸뚱이ㆍ의식)의 작용과 모든 행위와 동작이 전부 법성(法性)이다.
근원(根源)으로 돌아갈 줄 모르고 이름을 따르고 모습을 쫓으면 미혹한 생각이 망녕되이 일어나 여러 가지 업을 짓게 되지만, 만약 한 순간 돌이켜 비추어볼 수 있다면 모두가 성인(聖人)의 마음이다.
“도(道)는 닦을 필요가 없다.
다만 더럽히지만 말라.
어떤 것이 더럽히는 것인가?
분별하는 마음으로써 조작하고 추구하는 것들이 바로 더럽히는 것이다.
즉시 도를 알고자 하는가?
평상심(平常心)이 바로 도(道)이다.
무엇을 일러 평상심이라 하는가?
조작함이 없고,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으며, 취하거나 버리지도 않고, 끊어짐이 있다거나 끊어짐이 없다고 헤아리지 않으며, 범부도 아니고 성인도 아닌 것이 바로 평상심(平常心)이다.
다만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누우며 때에 따라 사물을 대함이 모두 도(道)이다.
왜냐하면 도(道)는 곧 법계(法界)인데, 온갖 작용이 모두 법계(法界)를 벗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이 모두 도이지만,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이 도라고 생각하는 바람에 도가 숨어 버렸다. 생각하지 않는다면 가고 머물고 앉고 눕는 것은 어디에 있는가?]
오랫동안 서 있었으니, 이제 쉬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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