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장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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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8.4) 댓글 0건 조회 5,427회 작성일 08-02-11 23:06본문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는 말장난
기독교인들의 상당수는 ‘행위’를 통해서는 구원받지 못한다고 주장한다.
이는 우선 그들이 교회 내에서 ‘오직 예수를 믿습니다’는 말로 이뤄낼 수 있는 ‘구원’을 굳이 번거롭고 힘겨울 사회적 실천을 통해 실현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 게으름 때문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큰 이유는 그들의 믿음의 시조가 주장한 바에 대한 오해 때문인 듯 하다.
한때 카톨릭의 경건한 사제였던 마르틴 루터는 사제로서 고해에 의존한 금욕적인 생활을 청산하며 교황권에 반발하던 시기에 ‘현실 속에서의 행위 없이 믿음만 있으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 종교개혁의 대부가 ‘행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고 말했음에 보통사람들은 신체, 감각, 경험을 초월한 마음-영의 작용을 통해서만 올바른 구원을 얻을 것으로 착각한 듯 하다. 이에 대한 후세인들의 혼란과 착각은 과대망상 수준을 초월했지만, 개신교의 실질적인 시조인 루터가 ‘행위’와 ‘믿음’에 대한 개념을 명확히 하지 않고 떠났음에 그 해석은 작위적으로 귀에 걸리고 코에 걸려졌다. 하지만 신께서 내려주신 두뇌의 우수한 기능은 우리가 잠깐의 시간을 할애함으로 루터가 주장한 바에 대한 올바른 이해 방향을 가도록 길을 틔운다.
‘행위’와 ‘믿음’의 개념을 우선 명확히 해보자.
우선 행위를 통해서 구원받을 수 없고 ‘믿음’만 있어서 된다면 과연 그 ‘믿음’이라는 것이, 순수한 마음의 작용’만을 말하는 것인가?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그들의 사회적 실천하지않음의 게으름을 합리화시키기 위해서도 ‘그렇다’고 고개를 끄덕일 것이다. 하지만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는 교회를 갈 필요도, 성경을 읽을 필요도 없이 마음속으로 예수만을 그리는 ‘순수한 믿음’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야 할 것이다. 문제는 이 때의 예수를 향한 ‘순수한 마음의 작용’은 모순되게도 기존의 ‘경험’ ‘감각’에 근거한 ‘예수관’까지를 제거해야하기 때문에 예수라는 대상 자체가 인지될 수 없고, 성경과 기독교리에 말하는 바와는 전혀 상관없는 ‘믿음’이 될 것이고, ‘구원’ 조차도 의미 없는 것이 된다.
따라서 이러한 불이익?을 경계한다면 루터가 주장한 ‘행위 없어도 믿기만 하면 구원을 얻는다’는 말에서의 ‘행위’를 극히 좁은 의미로 해석해야 한다. 사실 ‘행위의 필요없음’은 루터가 로마교황청 면죄부 구입을 통한 구원(행위를 통한 구원)을 반대하고 신과 인간의 중간에 낀 ‘사제’(교황)들을 부인했던 과정에서의 ‘매개적 행위’가 필요 없음을 역설한 것이지, 말 그대로 일상에서의 올바른 믿음의 길을 가기 위한 일상에서의 모든 행위자체가 의미 없다고 했던 것은 아님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루터 자신이 천명한 것처럼 인간 각각이 사제이기에 신과 인간의 온전한 관계회복을 위해 행해야할 ‘행위’ 자체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 더군다나 예수께서도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을 하셨음에 일상의 실천 행위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행위’의 개념에 대한 축소에 의해서 상대적으로 ‘믿음’의 범주가 넓어진다.
따라서 ‘오직 예수에 대한 믿음’ 이라는 것도 몇몇의 빗나간 광신도들이 주장하는 바대로 타종교를 배척하고 일상을 내팽개치고, 행동과 실천을 얕보며, ‘예수님만 외치라’는 관념적 부추김이 아닌, 내 자신의 중심에는 물론 천지에 고루 존재하는 예수-신성을 이웃과 사회와 자연에 대한 사랑으로 실천하라는 말로 해석할 수 있다. ‘나는 어디에도 있느니라’ ‘이 땅에 천국이 있다’ ‘네 안에 내가 있다’는 성경의 말씀은 이를 실현케 하기 위한 교두보이다.
하지만 ‘오직 예수에 대한 믿음’을 믿겠다며 예수의 우상을 만들어 놓고 편협한 관념의 껍데기 속에 안주하고 ‘행위’를 등안시 하는 이들은, 이율배반적으로 하나님께서 ‘잘 경영하라’고 명하신 세상을 망가트리는데에 ‘실천적’으로 일조하고 있다. ‘오직예수’만 외치다 보니, 현실 속에서의 (신께)‘비움’과 ‘낮춤’할 시간이 없어서 그렇게 끝없이 채우고 높아지려고 욕망하는 가운데 세상을 망가트리는 것이다.
그들은 대중소비사회에 적응해오는 중에 자연스럽게 ‘자본과 권력’을 향한 욕망을 갖게 되고 자신의 생활에서 얻고자 하는 것들을 지배하고 착취하는데 안간 힘을 쓴다. 주일에 교회 가서 일상에서 억눌린 문제들을 신께 풀어 놓으면서 그들의 표현대로 ‘영광’을 얻기 위한 발버둥을 치는 이유도 이러한 ‘괴리’를 마음 구석에서 절감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다보니 그들의 겉으로 보이는 온화한 표정에는 신의 은총이 가득하지만, 그들의 일상적 삶의 작용은 극히 이기적인 편협성을 띈다.
과연 그들 중에 현대 인간이 소비하는 에너지가 과거 300년 전에 비해서 평균 2000배 이상이 많다는 것을 알고 이를 경계하는 이들이 몇이나 있는가? 우리가 현재와 같은 생산, 소비, 소유구조를 유지하기 위해서 각국과 각 민족과 각분파가 끝없는 전쟁을 하고, 환경을 파괴하고, 반세기 후의 후손들의 존립마저도 위태롭게 한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있는가? 우리의 일상적인 행태 자체가 세상을 잘 경영하라고 이르신 신의 명령을 위배하여 세상을 파괴하는 원동력이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을까?
그런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럴 고민과 숙고와 그에 따른 행위를 해보일 필요조차 없어하는 듯하다. 그들의 지상 소임은 현실 ‘행위’를 등한시 한 ‘오직 예수’만 외치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은 지금 성경을 인간이 아닌 개에게 내려주지 않았음을 후회하고 있지 않을까?
이에 대한 반성으로 고개를 든 무리들이 ‘예수에 대한 맹목적 믿음’이 아니라, ‘예수가 믿었던 믿음’을 추종해야한다고 역설하고 있지만, 그릇된 망령에 사로잡힌 이들은 해를 가리키는 손가락을 해로 믿을 것을 고집하면서 공멸을 자초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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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실천의 문제가 필요없다면서 '도'만 운운하는 이들도 이하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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