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 11. 산청모임(66. '왕'으로서의 삶을 회복하는 길)
페이지 정보
작성자 여름가지 (183.♡.203.138) 댓글 2건 조회 8,943회 작성일 16-11-15 19:32본문
말도 행동도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될 뿐 아니라 그렇게 하면서도 진심으로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그녀는 충격받았다.<오카다 다카시>
저도 그렇습니다. 그 사실에 충격받고 있습니다. 제가 발견한 사실이 있습니다. 내 안에서 불쾌한 느낌이 들 때 그것은 상대방의 약점(열등함)때문이 아니라, 그 약점을 숨기려 드는 상대의 태도에 있다는 것을.......
●저의 사회적 위치, 저는 높을까요, 낮을까요?
비교하지 않으면 그냥 이 위치이고, 사회적 눈으로보면 저는 아무것도 가진게 없는 자이지만, 그냥 나로보면 저는 정점에 다다른 자입니다. 저는 그냥 이 자리에 있고,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습니다.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여러분이 도달할 수 있는 정점에 도달한 사람들입니다. 그냥 존재일 뿐입니다. 이 존재 자체가 절대자입니다. 고통과 행복은 자기가 창조합니다. 자기 마음이 창조합니다. 정말 내 눈에는 더 가야할 목적지가 있는 듯이 보이지만, 실상을 보면 그냥 이대로입니다. 실상이 그렇습니다. 손에 잡히고 눈에 보이는게 다가 아니고, 실상에 눈뜨면 이 상대의 세계에서 절대를 볼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의 모습이 여러분이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큰 크기입니다. 오직 이 하나밖에 없기에 완벽한 크기입니다. 저는 참으로 부족한 부분이 많지만 어떨때는 스스로도 대견할만큼 큰 부분들도 있습니다. 이 마음이라는게 원래 이렇습니다.
●제가 삶이 참 괴로워서 도를 찾아 다녔는데, 그래서 부처, 예수 이런분들이 참 커보였고, 또 그분들의 삶이 자신만을 위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을 위하는 삶을 살았는데, 그래서 그들처럼 되고 싶었고, 그렇게 되는게 삶의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제가 눈을 뜨고나서 저는 단지 제 자신이 되었는데, 그후론 그들이 더이상 커 보이지 않았고, 저도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이고, 작아 보이지도 않았습니다. 부처나 예수는 잎과 꽃이 크고 화려해서 멀리서부터 사람들이 찾아오는데, 저는 들에 핀 아주 작은 들꽃입니다. 제 꽃향기를 맡고 작은 벌이라도 한 마리 저에게 날아들면 저는 그 무게에 휘청거립니다. 그렇더라도 저는 제 가슴에 간직한 꿀을 그들에게 줄 수 있고, 작은 뿌리이지만 여러 미생물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이처럼, 그냥 서로 다를 뿐, 크다/작다는 없습니다. 자기가 왕이라는 사실을 모르기에 사랑을 구걸하는 거지가 되는, 그래서 무엇인가를 찾아가는 이게 전부 꿈이고 착각입니다.
●제가 예전에 관상을 보았는데 그분이 저를 보더니 첫마디가 혀를 끌끌차며 귀가 조금만 더 컸더라면합니다. 제가 그 사람 말처럼 귀는 작아도 귓구멍은 큽니다. 그래서 남의 말에 참으로 많이 흔들렸었습니다. 자존감이 없기에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젠 제가 제 위에 우뚝서니 남이 하는말에 흔들리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위에 우뚝서면 어디를 가더라도 흔들리지 않게됩니다.
우리는 마음이 상했음을 주관적으로는 무력감, 분노, 경멸, 실망, 그리고 고집 같은 반응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런 반응들 뒤에는 고통과 불안, 수치심 같은 감정이 숨겨져 있는데, 많은 경우 당사자 자신은 이것을 알아채지도 못하고 표현하지도 못합니다. 이런 감정들은 마음 상하는 상황에서 표현되기는 커녕, 거의 또는 전혀 감지되지도 않습니다. 이런 감정들은 암시되기는 하지만, 복수심과 분개, 무력감, 실망, 반항심에 의해 은폐됩니다. 이것들이 말하자면 당사자가 의식적으로 지각하지 못한 채 진짜 감정 위에 겹쳐지는 대체감정들입니다. 대체감정들은 우리를 고통스럽거나 불쾌한 감정으로부터 지켜준다는 이점이 있습니다. 그러나 진짜감정을 경험하지 못하면 피해자의 처지에서 벗어나지 못합니다.<베르밸 바르데츠키>
제가 아는 A라는 사람은 가끔 만나면 늘 B를 비난했습니다. 제가 아는 B라는 사람은 일을 합리적으로 하고 그렇게까지 비난받을 만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늘 그 이유가 궁금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 B라는 사람과 같이 근무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내가 B와 근무할 때 몇번 B로부터 내 내부를 깊숙이 찌르는 말을 들었고 그로인해 하루종일 내 자신이 부족하다는 느낌과 그로인해 버림받을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수치심)에 잠긴 경험을 했었습니다. 저는 B의 말과함께 제게 온 그 수치심을 거절하지 않았고, 그 수치심은 시간이 흐르자 저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다시 저는 편안해졌는데, 그 경험으로 인해 저는 내게 험한 말을 한(B는 물론 제가 그의 말에 정서적 충격을 입은 것을 전혀 모를겁니다.) 그 사람과 엮이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냥 그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볼 수 있게 되었습니다. 아, B는 인상이 날카롭고, 또 가끔 상대방에게 배려없이 그냥 함부로 말을 하기도 해, 그로 인해 다른 사람들과 종종 다투기도 하겠어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를 비난하고 싶은 마음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A는 아마도 B와 이야기하다 그로부터 수치심을 자극하는 어떤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수치심을 감지(지각)하지 못했기에, 피해자가 되었고 자기에게 수치심을 준 B에 분개하고, B의 단점을 찾고 복수하고 싶은 마음을 그렇게 그를 비난하는 것으로 표현했던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애초에 느꼈을 수치심의 감정을 찾아 그 감정속에 머무르게 할 수 있다면 그는 복수심, 비판(대체감정)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제가 제자신이 되고나서 믿음이 무엇인지 알게 되었습니다. 자유, 평화, 행복이 다 이해되었습니다. 지금은 남이 어떻게 감히 할 수 없는,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는 자가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다 가졌다고 하면 사람들은 특정한 이미지를 떠올립니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고 할 때 사람들은 '할 수 없는 것이 없다'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못하는 것'도 대단한 능력입니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못하는 것'도 포함하는 것입니다.('할 수 없는 것이 없다'는 '못하는 것'은 배제하기에 '모든 것을 다 하는 것'은 아님.)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은 모든 것을 다할 수 있다를, '할 수 없는 것이 없다'로 오해해 '못하는' 자신을 정죄합니다. 그러나 못할 수 있는 것도 능력입니다. 제 이야기가 어거지로 들릴지 모르지만 저는 실상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왕입니다. 여러분은 모든 것을 다 가졌습니다. 밖으로는 절대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없지만, 우리 내면으로는 다 가질 수 있습니다. 인간이 한 존재로서 온갖 감정과 느낌을 다 가졌습니다.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못하는 것'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못나고, 잘나고, 서고, 무너지고, 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못나고, 무너지고'를 뺀 것이 아닌... 저에겐 무너지고, 못나고가 초라해 보이지 않고, 서고, 잘나고가 대단해 보이지 않습니다.
●'당당함'이란 무엇입니까?
내가 긴장할 때 긴장할 수 있는게 당당함입니다. 이걸 알지못하니까 긴장하는 것을 빼내어버림으로써 당당해지려 하는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마음, 모든 것을 다할 수 있고 또 다 가지고 있습니다. 지금 이대로의 여러분이 왕이고 하나님의 아들이고 참나입니다. 서고, 무너지고, 긴장할 수 있는 능력, 외로움이 왔을 때 외로워 할 수 있는 능력, 그것이 참으로 대단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 왕이 왕으로 살지 못합니다. 실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고, 좋다, 나쁘다로 나누어 거지로 살아갑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이 왕입니다. 구걸하고, 자기의 수고와 노력을 통해 얻는게 아니라, 본래 있는 것을 찾아 쓰면 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에는 빈틈이 있어요. 그 틈으로 빛이 들어오죠.
(There's a crack in everything. That's how the light gets in.)
●노자가 왕의 길을 회복하는 방법을 말합니다. 강, 바다가 왕이 될 수 있는 것은 자신을 맨 아래에 두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강과 바다는 자신을 제일 아래에 두기 때문에 모든 것을 다 받아 들입니다. 이 강과 바다는 절대 분별하지 않습니다. 더럽다, 깨끗하다 분별하지 않고 몽땅 다 받아들입니다. 우리 안에도 많은 골짜기를 지니고 있고 거기에서 물이 흐릅니다. 감정, 느낌, 생각, 천천히 흐르다가 때로는 격렬하게 흐르고, 맑았다가 탁해지는데 그 전부를 받아들이라고 말합니다. 만약 여러분이 마음이란 원래 그런 것이고 내뜻대로 바꿀 수 있는게 아니라고, 그래서 그냥 그 모든 것을 다 받아들이면 왕으로써의 삶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제가 34년간 거지로 살았습니다. 척,체하고, 남들에게 인정과 사랑을 받으려 하고, 그래서 늘 목마르고 고통스러웠던...저는 쪽팔린다 싶으면 바꾸려했고, 늘어진다 싶으면 타이트하게 하려 수고하고 노력했습니다. 보다 '완전한 나'라는 목표를 정해서 그걸 추구했고 또 그런 내가 되었을 때 보다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 목표를 추구하면서 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을 빼내어 버릴려고 할 때 그것을 절대 빼내어지지가 않았고, 또 그렇게 빼내어지지 않는 것을 빼내려하기에 자기삶의 에너지를 전부 소모하게 됩니다. 여러분이 여러분 마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습니다. 자기 자신을 온전히 가진자는 자유와 행복을 모두 누릴 수 있습니다.
●삶의 질적인 변화는 앎속에 있지 않고 삶속에 있습니다. 무너짐속에 있어보고, 외로움속에 있어 보는, 현실의 삶속에서 이것을 해 볼 수 있겠습니까? 진짜, 이 길밖에 없습니다. 이 길을 놔두고 다른 무엇인가를 하려들면 정말 식겁하게 됩니다. 그래서 자기가 하는 것으로 스스로 구속되고 묶여 버리는, 그 모습이 안타까워 하늘이 그 길을 가지마라고 잘못된 길을 가는 자의 건강을 빼앗아 버리는, 제가 드리는 이 이야기는 이론이 아닙니다. 오직 이 길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이 여러분을 버리기에 괴롭습니다. 여러분 자신밖에 없습니다. 고요하고 어지럽고 혼란스러운 자신.... 제 이야기를 여러분의 삶속에서 실천해보면, 이 아무것도 아닌 것이 정말 위대하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저는 자유롭습니다. 제가 제 내면의 백성들 위에 바로 섰습니다. 그런데 백성들이 무겁게 여기지를 않습니다. 왜냐하면 제가 그것 자체가 되었기에 그렇습니다. 내가 된다는 것은, 서고 무너지는 그것이 되는 것입니다. 깨닫고 나면 깨달은 바가 없습니다. 그저 내 자신으로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내 안에서 좋고 나쁨, 다툼이 사라집니다. 지금 저는 여러분의 이야기를 한 것입니다. 저의 말을 믿어 주십시오. 여러분의 느낌, 감정을 믿어주십시오.
강진읍과 강진만 풍경.
평생 영업에 종사한 사람으로서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게 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제가 실수했습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보다 중요한 건 없습니다. 솔직함과 개방성은 우리 삶의 어떤 분야에서든 성공의 열쇠가 됩니다.<마음가면>
'솔직함과 개방성'은 그냥 오는 것이 아니고, 자기안의 두려움을 직면하고 그 두려움을 허용하는 과정을 거친이후에나 오는 것 같습니다. 좋은 가정 환경에서 사랑받고 허용적인 분위기속에서 성장했다면, 긍정적인 면은 물론이고 부정적이고 나쁜측면까지 허용되었을 것이기에 솔직함과 개방성은 그 개인의 자연스러운 표현일 것입니다. 그러나 저와같이 비난과 무관심한 가정환경에서 성장했다면 실수했을 때 분명 비난 받았을 것이고, 비난받지 않기 위해서라도 당연히 자신의 잘못을 숨겼을 것입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실수하면 사랑받지 못하고 버림받을 것이라는 두려움은 더욱 증폭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니 저와같은 사람은 반드시 그 두려움을 직면하는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질의 응답>
○저는 어려서부터 늘 친구가 없었고 외로웠습니다. 그리고 그 밑바탕엔 '내가 잘났다'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로부터 늘 너는 양반이다는 말을 들어왔고, 그래서인지, 무엇을 하든 늘 부족하다 느껴졌고, 자책하는 삶이었습니다. 남편은 불우한 사람인데, 제가 그 사람을 잘 보살펴서 훌륭한 사람을 만들어야지하는 생각으로 결혼을 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늘 최선을 다해 남편을 보살폈지만, 남편은 늘 부족하다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아이들에게도 저는 헌신해야만했고 그럼에도 늘 해야할 일들만 늘어났습니다. 해도 해도 일이 끝이 없었고, 그렇게 가족과 주변사람들에게 헌신했지만, 저에게 들려오는 말들은 늘 부족하다는 불평뿐이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다가 7 여년전 위암에 걸려 위를 전부 잘라냈습니다. 그런 육체적 어려움을 겪으며 저는 제가 삶을 잘못 살아왔구나, 뭔가 새로운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그러면서 참선수련과 요가를 하며 무엇인가를 조금씩 알게 되었습니다. 죽음을 앞에둔 공포속에서 이대로 죽는건 정말 싫었습니다. 암치료를 하면서 간절하게 부처님께 기도를 했었고 그러는 과정중에 엄마, 아이들, 남편에게 쌓았던 것들을 모두 쏟아 내놓으면서 하나하나씩 정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가 내 자신을 들볶았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동안 늘 남탓을 해왔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원래 세상이 이랬던가하는 삶이 참 편안해지고, 선생님강의가 내 삶을 전부 다 말해주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건강도 좋아졌습니다. 잘못된 삶을 살다가 위암이라는 큰 병이 들었는데 그것을 고쳐나가면서 비로소 제 인생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게 너무나 감사합니다. 요즘의 삶이 너무 행복하고, 내가 하지 못하는 것은 하지 못한다고 말해버리는.... 전화위복, 새옹지마가 무슨 의미인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젠 제가 제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남이 원하는 것을 하는 삶, 자기의 삶이 없는 삶, 바보 멍청이로 살았는데, 지금 이 자리에서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할 수 있는, 나의 삶을 살아간다는게 너무 좋습니다. 저는 항상 '착한'사람이어서, 엄마걱정, 애들걱정을 많이해서 병이 났다고 생각했었는데, 실은 내가 내 삶을 살지 못해서, 밥 한그릇 더 먹고 싶어도 밥 한그릇 더 달란 소리를 못한 삶이어서, 잘못된 삶을 살아서 그 길을 돌이키라고 병이 나에게 온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불균형이었습니다. 나를 위해서는 한번도 살아본적이 없는, 남을 위해서만 살아왔는데도 불구하고 더욱 불평만 듣는 삶, 그러면서 제게 암이 왔고, 그 큰 병으로 인해 내가 잘못된 삶을 살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래서 남을 위해 사는 것을 스톱하고 나를 위해 살아보자하는, 그러면서 요가를 하고 신체의 균형을 찾고 정신의 균형을 찾은, 남들에게 일방적으로 맞추는 삶을 살았던 불균형의 삶에서 자기자신의 삶을 사는 영적인 균형을 찾은 삶으로.....
정작 힘든 것은 고통 자체보다도, 내가 겪는 고통의 의미를 발견할 수 없는 시간이 계속되는 일, 한계 상황에 부딪히고 나서야 마음의 눈을 떠 거울을 보고 나를 응시한다.(회광반조)
●육체적 불균형이 있다면 그것은 곧 정신의 불균형이라 말씀하셨는데, 몸의 불균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것이 곧 균형입니다. 영적인 힘이 육체적인 힘을 앞섭니다. 쏠림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 몸이 쏠리지 않는-거기에 묘한 균형이 있습니다.
아이가 부서진 장난감 때문에 슬퍼한다고 가정해 보자. 아기의 감정을 적절하게 반영하려면 아이를 품에 안고 "네가 얼마나가슴이 아픈지 엄마도 알 수 있어. 같이 한번 고쳐볼까?"라고 말한다. 반면에 "뭘 그런 걸 갖고 슬퍼해? 소꿉놀이 그릇이 깨졌다고 울 필요는 없잖아?"라며 슬퍼하지 않아야 할 이유만 강조하며 다른 장난감을 내미는 것은 반영을 이끌어 내지 못하는 행위다. 아이는 장난감이 부서져서 분명 슬프다. 하지만 엄마의 말을 듣고 보니 자신의 감정을 따라야 할지 엄마의 말을 따라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 빠진다. 마음속에 생긴 진정한 느낌이 반영되지 못하거나 가족의 이데올로기로 인해 부인될 경우, 그 감정은 분해되어 버리고 상대방의 마음에 들기위해 억지로 꾸며낸 행동이 그 자리에 끼어들게 된다.<베르밸 바르데츠기>
어릴적 부모님이 단지 내 마음을, 내 감정을 단 한번만이라도 인정하고 공감해 주길 바랐습니다. 그랬다면 모든 것은스스로 자리잡아갈 터였습니다. 동네 어른들에게 인사도 더 잘하려 스스로 노력했을 것이고, 내 생활도 좀더 바르게 하려 애썼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어린아이의 감정을 알아준다는 느낌은 없고, 오직 자신들의 생각만을 강요했을 때 전 반항했고 고집부렸습니다. 어찌보면 부모님은 저를 사랑했습니다. 하지만 거기엔 내 마음을 진정으로 이해해주는 공감이 없었습니다. 그렇게 소통은 단절되고 끊임없이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는 부모에게 미움만이 커져갔을 뿐입니다.
●선, 지금 있는 일, 이걸 사고를 가지고 파고들면 절대 알지 못합니다. 단지 의문하나만 들고 가면 됩니다. 그렇게 가다보면 '뻥~'하고 터지는 날이 옵니다.
●길위에 이미 서있기에 길을 벗어날 수 없고, 길을 잃었을지라도 그것 조차도 길위에 일어나는 일입니다.
○'나(에고)'가 죽는 것에 대해,
손아래 도반이 나를 가르치려 드는데, 그 순간 제 자존심이 무척 상했습니다. '감히 나를 가르치려 들어'하는 마음이올라왔습니다. 그동안 내 마음이 참 편안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 올라오는 감정에 내가 이정도밖에 안되나하는 마음이 들었고, 그게 여러날 갔습니다. 또 언제 죽어도 한번은 죽을텐데하며 별로 죽음을 걱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 지진에 정말 깜짝 놀랐고, 그 죽는다는 두려움이 참 오래갔습니다. 그런 일들을 겪으며 제 스스로 생각해보니, 여전히 '나'가 강하게 있는.....
●지진이 났을 때 '엄마야~~하며 벌벌 떠는 것', '여여할 줄 알았는데 아직도 이렇게 두려움에 쩔쩔매다니....', 저도 이번 지진에 참 놀라고 공포가 확 몰려왔었습니다. 석가모니가 말했습니다. 깨달은 자는 두 번 매이지 않는다고(이 말은 한번은 매인다는.)손아래 도반이 가르치려드는 것에 자존심이 상했을 때 한번 매인 것입니다. 깨달은 사람도 한번은 매입니다. 그런데 내가 아직도, 언제까지 이러나 하는게 두번 매인 것입니다. '자존심이 상하는 것', '지진에 죽을까봐 공포에 떠는 것', 그것이 법입니다. 다만 그럴 때 그럴 뿐.......
○공감한다는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남들과 소통이 안되는 이유는, 자기자신과 소통이 안되기 때문입니다. 자신의 진짜 마음을 들여다보지 못하고 있는. 자기다운 삶을 찾아가고자 하는 그 애틋한 맘은 가상한데, 조금만 좀더 정직하게 자신을 들여다 보려하는, 무너질 때 그냥 무너지면 되는 것인데, 그 무너짐을 통해, 내가 지금 무너지면 곧 괜찮은 사람이 되겠지하는 의도가 있습니다. 직장 상사가 잘못했다고 하는데, 그것은 직장상사가 잘못했다기보단 그 직장상사를 보는 자신의 자기규정에 의한 판단일 수 있습니다. 그러데 그 자기규정은 보지 못하고 자꾸 눈이 밖으로만 향하는.....
●합리화할 때, 그때 자신이 합리화하고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래서 그것을 인정함으로 인해서 오는 '고통'까지도 받아들이면 됩니다. 지리산 골골에 정말 도사들이 많습니다. 그런데 끝까지 가는 사람은 적습니다. 그것은 곧 권력욕을 원하는 사람은 많지만,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적다는 것입니다. 진실을 추구하는 사람은 합리화하는 자신을 자각하면서 그때 오는 그 고통까지 받아들이고 감내합니다. 그러나 진실하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을 거부합니다.
○감내한다는게 무슨 말인지?
우리는 서로에게
과도한 기대로서 존재한다.
그러지 않으려면
자신을 사랑해야 한다.
연말, 맛있는 케익이 기대되는 12월에 뵙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댓글목록
본심님의 댓글
본심 아이피 (49.♡.241.138) 작성일
마음에 그런 것들이 보이네요.
생각 하나가 빚어낸 우리에 현실이 먼길을 돌고 돌아 지금 이 순간에 오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행착오와 눈물을 흘려야 했는지
이젠 왕이되어 그림자에 속지 말아야지 다짐하며
완숙함이 보이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여름가지님의 댓글의 댓글
여름가지 아이피 (183.♡.203.138) 작성일
본심님,
늘 좋게 봐주어서 감사합니다.
가끔 가다 올라오는 본심님의 글들~,
마음속으로 가시는 길, 늘 응원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