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지 못하는 것을 초월할 수는 없나니, 자기자신을 뛰어 넘으려는 자, 자기 자신을 알아야 하리.
(스리 니사르 가다타 마하라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많은 사람들이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머물러 버리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쉽게 판단하고, 자기 감정이 불쾌하면 상대방을 비난하는 것으로 끝이 납니다. 그렇게 이해가 표층에 머물고 그 층을 뚫어내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는 내 마음에 귀 기울일 때, 전해지는 특유의 감정과 느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보여지는 감정과 느낌들을 뿌리치지 않고 그것 속에 머무를 때 그것들이 만들어진 배경을 내게 보여줍니다. 아니, 보다 정확히는 상대방의 '말과 행동'에 반응하는 내 감정과 느낌들의 배경을 보여줍니다. 내 기억의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던, 깊숙한 비밀로 감추어 두었던 것을 내 눈앞에 드러내 보입니다. 상대방의 행위에 반응하는 제자신의 내면에 주목함으로써 저는 자신에 대한 이해를 넓혀 갑니다.
65장. 대순에 이르는 길
예부터 도를 잘 닦은 사람은 백성들을 총명하게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리석게 만든다. 백성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그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나라를 해치는 것이요,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복이다.
이 둘을 아는 것이 또한 하늘의 법도이니, 능히 이 법도를 아는 것을 일컬어 현묘한 덕이라고 한다.
현묘한 덕은 심원하여 마치 세상의 이치와 반대되는 것 같지만, 마침내 대순에 이르게 한다.
●원래 정말 깊이가 있는 것은 '깊다'가 없습니다. 그래서 겉보기에는 깊어 보이지가 않습니다. 사실 크지 않고 깊지 않은게 커 보이고 깊어 보입니다. 그것이 참으로 삶의 아이러니입니다.
●대순, 크게 순종/복종한는 것, 무엇이 크게 순종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자기 자신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게 깨달음입니다. 이 깨달음을 얻으면 영원한 평화가 옵니다. '무거운 짐진 자들은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에서 이 '쉼'이 대순이고 영원한 안식입니다.
●진실한 자신, 참나가 된다는 것을, 지금 있는 자신과는 다른 따로 있다고 생각하기에 자기자신에게 순종하지 못합니다. 자식과의 관계, 직장상사와 후배와의 관계에서 뜻대로 되지 않을 때, 뜻대로 되지 않는 있는 그대로이 자신을 경험하고 싶지 않고, 대인관계를 잘 맺는 흡족한 자신을 경험하고 싶어합니다. '관계를 잘 맺는 자신, 평화로운 자신'을 쥐고 있으면 그렇지 못한 자신을 한탄하고, 그래서 그런 모습을 경험하고 싶지 않기에 항상 수행하고 도를 찾는, 딴짓을 하게 됩니다.
초월에 대한 열망과 깊이에의 요구에 근거한 모든 영적 여정은 껍데기를 벗어던지도록 우리를 꼼짝없이 몰아 세운다. 이때에는 우리의 벌거벗은 정신과 고통스럽고 심란하게 마주함으로써 크나큰 동요를 겪을 위험이 따른다. 그러한 탐색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정서적 빈곤을, 거추장스러운 잉여분을, 정체성의 공백을, 확신의 무게를, 우리 자신의 굶주림과 균열을, 가치관의 부질없음을, 우리의 태만과 허무를, 그와 동시에 아무렇게나 노출되어 있는 우리의 흉물스러운 내면을 보게 만든다. (자크 살로메)
'자기자신을 만나십시오'란 선생님의 말씀.... 지금의 저에게 비로소 새롭게 귀에 들어옵니다. 그것은 자신을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세운 다음 흉물스러운 자기 내면과 꼼짝없이 마주하게 하는 것이기에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의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이 용기가 그리 대단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습니다.) 마음의 모든 기능장애로부터 진심으로 벗어나고 싶어하는 마음, 그것이 곧 진정한 용기가 아닐지.....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순종하지 않습니다. '좋다, 만족스럽다'이것은 결국 사라집니다. 그런데 그 꼬꾸라지는 것을 막고 좋은 것만을 붙잡으려하는 것이 순종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가 되고 싶은 목표가 있어, 지금 올라오는 초라함을 멀리합니다. 그러나 내게 부족하고 초라한게 있어 불행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고 순종하지 않기 때문에 불행합니다.
●목마름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우울, 초라함이 자꾸 찾아오기 때문이 아니라, 지금 올라오는 것, 실재로 있는 것, '기쁨, 슬픔, 우울이 바로 참나이고 실재로 있는 것인데, 그것에 있지 않고 자기가 되고 싶은 것, 온갖 지식과 관념의 집합체인 머리, 사고와 욕망이 바라는 것을 추구하기에 그렇습니다.
●혼란스럽고 정리되지 않는 나가 어떻게 진정한 나야하며, 혼란스럽지 않고 정리된 자신을 찾아 가는데 그렇게 찾아가면서 정작 자기자신을 잃어 버립니다.
●고통과 메마름이 자기자신을 바로 보게 만듭니다. 그러니 이것이 진주이고 복입니다. 고통이 더 깊어지면 거기에서 질적인 비약이 일어납니다.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게 되고, 그래서 그 결핍을 통해 배우게 되고, 삶을 더 깊게 들여다 보게 됩니다.
●지금 현재 경험하는 것 말고 다른게 없는 것, 이것이 무아입니다. 저는 지금 굉장히 원초적인 것을 경험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그것이 초라함이라 생각되지 않습니다. 초라하고 벌벌떠는 자신을 경험하는데, 그게 저에겐 굉장히 신선합니다. 그것을 품은 내 마음이 더 넓어짐을 느낍니다.
저는 참 보잘 것 없는 사람입니다. 업무능력은 '중하'이고, 대인관계는 '절대하'이고, 수업은 '중하'이고, 진학지도는 '하'인, 외모는 머리가 많이 빠져나가는 중년의 노총각, 거기에다 바짝 마르기까지한.....그러나 강력한 힘 하나를 갖추었습니다. 자기성찰의 힘, 자기 내면을 들여다보는 힘 하나는 갖추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 삶이 나를 이끄는 그 가장 낮은 자리를 거부하지 않겠습니다.
●지금 올라오는 초라함을 자책하는 것은 목표 때문에 그렇습니다. 지금 올라오는 부족이 싫어서 저곳에 도달하고 싶어하는 그 목표 때문에 그렇습니다. 초라함속에 있어 보십시오. 그래서 묶여 보십시오. 지금 올라오는 초라함에 저항할때도 똑같이 묶이지만, 그 묶임과는 전혀 다른 묶임입니다. 그 초라함속에 있으며 그것에 저항하지 않고 묶일 때, 그곳에 묘한 공간, 틈, 쉼이 있습니다. 묶일 것 같을 때 묶여 보십시오. 결코 묶이지 않는 절대자유한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게시판에 보면 행인님 글이 있습니다. 이분은 20년 넘게 수행을 해 오셨는데, 그게 전부 무엇인가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 여러 가지 체험을 합니다. 그런 체험들이 자신을 진리에 더 가까이 다가서게하는 것같은 느낌을 주기에 더욱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그게 전부 착각이고 결국 꼬꾸라집니다. 그렇게 닿을 듯 닿을듯한데 결코 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닿아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부인이 인터넷을 하며 시간을 낭비하는 것같아 순간 '미움'이 확 올라옵니다. 이 소중하고 아까운 시간에, 진리를 추구하기에도 부족한 이 시간에 저것이나 하고 있는 아내에 대한 미움, 그와 동시에 아내를 미워하는 자신에게 '아, 나는 아직 멀었구나!' 사랑해야하는데 내 마음에서 여전히 미움이 올라오니 난 아직 멀었구나하는 순간, '앗!, 이것이구나'하고 비로소 알게 됩니다. 지금 올라온 아내에 대한 '미움', 이게 진아입니다. 지금 있는 것, 거기엔 내가 없습니다. 그런데 묘한 에고가 칼자루를 쥐고 이것을 베어버리려고 합니다(아, 난 아직 멀었구나, 사랑해야하는데 하는). 이전엔 하나(미움)가 올라오면, 그것을 못견뎌하는 것(에고)이 주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이것을 바탕으로 올라오는 것을 자꾸 통제했는데, 이젠 반대로 통제하려드는 그것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러면서 20년의 갈증이 한번에 뒤집어 집니다. 이, 단 한번의 순종이 전부를 뒤집습니다. 그렇게 되면 차츰 시간이 흐르면서 더 이상 헛짓을 하지 않게 되고 충만한 자신, 여러분 자신이 됩니다. 그렇게 여러분 자신이 되는 것, 이것이 진아입니다. 이놈이 사라지면 끊임없이 변화하는 것만 있습니다. 텅빈 쭉쩡이가 될 때 그것속에서 완전한 충만을 경험하게 됩니다. 여기에 진정한 맛이있습니다.
●제가 축제장소에 갔었는데 어느 래퍼의 자기고백을 들었습니다. 이 래퍼는 어린시절 'ㅅ'발음이 안되었고, 그래서 주위 사람들로부터 엄청난 놀림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ㅅ'발음을 고치려 엄청난 노력을 하게되는 과정에서 래퍼가 됩니다. 여래는 지금 있는 그대로입니다. 지금 위축되는것, 'ㅅ'발음이 되지 않는 것 그대로 부처입니다. 여러분, 있는 그대로입니다. 상처는 없습니다. 왜 꼭 가득해야 합니까?, 왜 꼭 반듯해야 합니까?, 한번 들어가 보십시오. 꼴보기 싫은 자신의 모습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있지도 않은 것을 찾아가지말고 지금 올라오는 것에 순종해 보십시오. 지금 오라오는 그 아무것도 아닌 것 속으로 들어가 보십시오.
●감정, 느낌, 생각 이것이 곧 부처입니다. 이 일상이 정말 귀합니다. 삶이 우리에게 끊임없이 대순의 길을 보여줍니다.
나라는 인격이 매일 벌어지는 일들에 휩쓸려 다니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체험한다. 그것은 바로 나와 더불어 살아온 나였다. 간단하게 말하자, 이 남자는 자기자신을 만난 것이다. (울리히 슈나벨)
어느때부턴가 깊은 열등감을 감추기위해, 두려움으로부터 멀리 달아나기 위한 행동과 말들이 보이기 시작했고, 저는 용기를 내어 그 행위들을 멈추었습니다. 아니, 그 행위가 보이자 저절로 멈추어졌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저는 제 자신을 비로소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멈춤을 통해 내가 무슨 짓을 해왔는지 똑똑히 보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그동안 달아나는 행위들에 의해 가려져있던 내 내면의 감정과 느낌들에 주목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하는 것이고, 자기자신을 만나는게 아닐지.......
●'예부터 도를 잘 닦은 사람은 백성들을 총명하게 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어리석게 만든다.'
떨고 긴장하고 망가지는 것 속에 있으십시오. 그 어리석음이 진짜 당신을 지혜롭게 만듭니다. 허허로운가요? 그럼 더 허허로우십시오. 우울한가요? 그럼 더욱 우울해 하십시오. 이게 정말 큰 지혜이고,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은 진리가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입니다.
●'백성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그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결심, 실천, 다짐, 온갖 마음을 다 동원하는 것, 그것이 지혜가 많은 것이고, 그 지혜는 멈출 줄을 모릅니다. 그래서 다스리기가 어렵습니다. 이미 평화로운데 평화로워지려 자꾸 무엇인가를 하려합니다. 에고가 그리는 깨달음, 겉으로는 커보이고 지혜로운 것 같으나, 이게 진정으로 어리석은 짓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쉽게 내려놓지를 못합니다.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지 않는 것이 나라의 복이다.'
멈추고,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지혜로써 나라를 다스리려하지 않는 것 이것이 '복'입니다.
●'현묘한 덕은 심원하여 마치 세상의 이치와 반대되는 것 같지만, 마침내 대순에 이르게 한다.'
'벌벌떠는 것' 이것이 무슨 '심원'이고, 깊고 오묘한게 있겠습니까? 그러나 이게 심원합니다. 크게 충만한 것은 마치 텅빈것같습니다. 심원이란 지금 이대로입니다. 받아들인다도 엄밀히 말하면 틀립니다. 이미 이것이니까요. 이미 이것이기에, (이미 와있기에 받아들일 필요도 없는) 분별심(저항)을 내려놓기만하면 됩니다.
●내가 이것을 경험하는데 전혀 그것에 물들지 않습니다. 대순, 진리에 이르러보면 지금 그대로 자신입니다. 진실로 얻은 바가 없는, 본전입니다. 여러분, 자기자신 하나는 제대로 찾고 죽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오늘 비가 내리고 산중턱에 걸려있는 구름, 그리고 무언가 진동을 느끼고자하는 열린 마음의 여러분, 여러분은 이미 대순하고 있습니다. 지금 올라오는 것에 저항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일상을 살아가다보면 일어나는 한마음 한마음, 하나의 본성, 그것이 펄쳐지도록 두는 것, 이 삶속에서 대순의 그 길을 직접 경험하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사람들이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외톨이로 여겨지는 것'이다. 당신은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라 혼자 있지 못해서 외로운 것이다! 루소는 "사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사람들 사이에서 혼자 사는 것보다 훨씬 덜 힘들다."라고 말했다. 외로움은 주위에 아무도 없을 때가 아니라, 사람들과의 관계 속에서 있을 때 엄습한다. (마르실라)
업무에서 버벅대고, 아이들이 수업을 듣지 않을때면 거부당했다고 느끼게 되고, 별로 말이 없기에 좁은 학년실이라는 공간에서 한참을 말없이 있다보면, 내 안에서 지금 다른 분들은 서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렇게 말없이 있다가 나만 외면당하는 것은 아니가?하는 두려움이 엄습하고, 그러다보면 다른분들의 모든 말과 행동들이 나를 외면하는 것처럼 보이게되는, 그런 어떤 버려짐에 대한 기운들이 내 몸을 가득 채웁니다. 그런데 이런 체험들이 제 자신을 보다 명료하게하고 깨어있게 하고 제가 제 삶에 보다 중심을 잡게 해 줍니다. 그리고 보너스로, 제가 좀 잘났다는 생각을 붙잡으려할때 그것은 어김없이 찾아와 저를 꺽어 버립니다. 그러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속에서 엄습하는 외로움이 제게 나쁜 것이겠습니까?, '외톨이로 여겨지는 경험을 하는 것'이 꼭 나쁜 것이기만 하겠습니까?
<질의 응답>
○이 공부를 계속하다보면 나를 세상에 알리고 싶은, 나를 드러내고 싶은, 공부가 깊어지면 그런 마음이 없어져 문학/음악/예술 이런 것들도 모두 없어질 것 같은데....
●오해가 있습니다. 꿈과 욕망을 혼동하고 계신 듯합니다. 고흐는 그림을 통해 자기자신을 드러내었는데, 그것은 남과는 다른 특별한 것을 드러내고 싶은 욕망 이전의 것입니다. 그 길을 갈 수밖에 없는 자가 그린 예술입니다. 그런데 많은 경우, 이 고흐와 같은 길이 있음에도 자기자신의 길을 찾지 못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기심/질투/투사 이런 것들로 인한, 그런데 이 공부를 하면 마음이 맑아져 진정한 자신의 길을 볼 수 있습니다. 마음공부를 하다보면 내가 가는 이 길이 남에게 잘 보이려고 가는 길이었구나를 알게되고, 그것을 깨달으면 그 길을 멈추고, 진정한 자신의 길을 따라 갈 것입니다. 저는 제가 무엇을 해야할지 전혀 몰랐었는데, 내가 누구인지를 알게 되었고, 그러면서 이게 나라는 인식이 사라지고, 그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 무엇으로도 규정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되면서 삶이 저를 이끌어 갔습니다.
○깨달음이란 깨달음을 먼저 구하는 마음(수행/노력/수고를 통해)이 있어야하지 않습니까?
●목표와 추구 이전에 현재 삶의 목마름과 고통이 자유를 추구하게 합니다. 그러니 그것은 목표와 추구이전입니다. 결핍이 깊은 사람은 그 길을 아무리 가도 결코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알기에, 제 말 한마디면 즉시 깨어나게 됩니다. '구하고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하고 많은 사람들이 그 말대로 하는데, 이미 문은 열려있기에 두르려서는 결코 다가설 수 없습니다.
○'백성을 다스리기가 어려운 것은 그 지혜가 많기 때문이다.' 이때 '지혜'는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백성'은? 이게 왕에게 하는 이야기입니까?
●얕은 지혜, 우리 영혼을 자유롭게 하는 참된 지혜가 아니라,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는 온갖 방법과 기타 수행들을 의미합니다. 저는 목말랐고, 이 괴로움에서 어서 벗어나고자 온갖 효과적인 방법을 찾았는데, 사실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했고, 사실 이게 절망이었습니다. 이게 머리에서 나온 얕은 지혜입니다. 이 머리(에고)가 만들어 내는 지혜로는 절대 자유를 알 수 없습니다.
왕은 바로 당신입니다. 임금, 통치자가 아니라, 이건 전적으로 우리의 마음을 밝히는 이야기입니다. 에고는 지혜가 없습니다. 자신을 다스리려하지 말고 내버려 두십시오. 이때 가만히 있는다는 것, 내버려 둔다는 것은, 마음은 죽끓듯한데, 그때 그 마음을 정리하려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내버려 두는 것, 그 이치가 참된 지혜입니다.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파동 안에 머물렀다. 그 가장 끝 맨 나중에 그려지는 동심원이 토성 주위의 고리처럼 우리를 오목하게 감쌌다. 아주 오래전, 어머니의 뱃속에서 만난 그런 박자를, 누군가와 온전하게 합쳐지는 느낌을 다시는 경험할 수 없을 줄 알았는데, 그것과 비슷한 느낌을 줄 수 있는 방법 하나를 비로소 알아낸 기분이었다. 그건 누군가를 힘껏 안아 서로의 박동을 느낄 만큼 심장을 가까이 포개는 거였다. 순간 눈물이 날 것 같아지만 나는 아버지를 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김애란, 두근두근 내 인생)
○왜, 어떤 사람들은 이 모임에 오고, 어떤 사람들은 오지 않을까요? 이 좋은 것을 남들에게 좀 더 알리고 싶은데....
●사실 깨닫고 나면 깨달음이 없고 전달할 무엇이 없습니다. 제대로 알면 따로 안게 없고, 그냥 있는 그대로일뿐입니다. 모든 사람들을 절대 평등하게 봅니다. 비로소 그저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었기에 다른 사람들도 있는 그대로 보게 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할 때 아는게 있게되고 또 전할 무엇인가가 있게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전달할 무엇인가가 있을 때 전달하는 자와 전달 받는자, 나와 남을 구분지어 버립니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도 따로 비판할 것은 없습니다.
○도를 닦는다하면, 저는 세상과 담을 쌓고 그 무엇도 느끼지 못하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저는 번뇌가 너무 죽끓듯하니까 깨달음을 얻으면 그 어떤 것에도 여여할 것으로 착각했었습니다. 현재의 자신을 부정하고 여여한 어떤 것을 추구하는데, 그게 에고가 하는 짓입니다. 이 진실을 알게되면 이 격랑 그대로가 절대 고요입니다.
○내려 놓아야 한다고 한는데 도대체 무엇을 내려 놓아야 합니까?
●내려 놓으려는 그 마음을 내려 놓아야 합니다. 마음으로는 자유를 얻지 못합니다. 욕심을 내려 놓으면 좀 평화로워질 것 같은데,그게 내려 놓아집니까? 사실 내려 놓을 것이 본래 없습니다. 실상을 알게되면 그저 자기를 살뿐 그 어떤 것에도 저항하거나 내려 놓을게 없습니다.
●예수, 부처를 목표로해서 추구하다가 저는 그저 제 자신이 되었습니다. 저는 그저 작은 꽃이되었습니다. 부처와 예수는 잎이 크고 꽃도 아름다워서 사람들의 주목을 더 많이 받는데, 저는 향이 많이 나지 않고, 또 벌 한 마리만 날아와도 휘청거립니다. 그러나 그렇게 위대해 보이는그들이 그렇게 위대해 보이지 않고, 그저 그들을 그들로 보게 되고 저도 그냥 이대로 저 이더라고요.
'아버지' 그 복잡한 이름......
확실히 엄격한 아버지에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거나 학대를 받은 사람들 중에는 대인 관계에서 긴장이나 불안을 느끼고 자기자신을 억압하는 성격이 많다. 아버지에게 품었던 긴장감을 타인에게도 고스란히 품게 되는 것이다. 인간에 대한 공포와 적대감의 원천으로써 '최초의 이물질'인 아버지의 역할은 무시할 수 없는 존재라 할 수 있다. 이렇게 아버지로 인한 상처나 고통을 안고 있을 때 인간은 그것 말고 다른 생각은 할 수 없다. 그는 자신을 지키는 데만 필사적이된다.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거나 자신의 잘못을 돌이켜보는 것보다 자기방어를 우선하고, 자신의 잘못조차도 정당화하는 논리나 신념을 자연스럽게 갖게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타인을 적이나 라이벌로 인식하고, 자신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들이 악의를 품었기 때문이라고 여겨야 마음이 편하다. 그래서 이들은 결코 마음을 주지 않은 채 우위에 서서 타인을 조종하려 한다.(오카다 다카시)
예, 정확히 저의 이야기네요. 끊임없이 긴장하고, 자신을 지키는 데만 필사적인, 말도 안되는 신념을 지녔고, 타인을 지배하려드는......
○아들에게 제가 잔소리를 했습니다. 네가 이렇게 해야 성공할 수 있다고 잔소리를 많이 해 왔습니다. 재수를 한다기에 그보다는 사회에 나가서 경험을 해보라고 했는데, 그 이야기하는 자리에서 자리를 박차고 저를 내버려 둔채 밖으로 나가버렸습니다. 그때 제가 참 무안했습니다. 제가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 아들. 그러면서 제 자신을 좀더 깊숙이 들여다 보았습니다. 저는 어렸을 때 부모가 어려울 때 만사를 제쳐놓고 부모님을 도왔습니다. 큰형님이 사고를 많이 치고다녀서 저라도 저렇게 하면 안되겠구나, 나만이라도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살아왔는데, 아들의 모습(반항)을 보며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을 보았습니다. 제가 어릴 때 제 자신이 반항을 속으로 참고 살아왔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반항을 참고 부모에게 인정받고 사랑받고 싶어서 그렇게 부모님을 도왔고,그것이 또한 제가 외로움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들여다보게 되었습니다. 그런 삶을 살았던 자신, 그런 모습을 지금껏 외면해왔다는 사실을 알게되었습니다. 그러면서도 항상, 가치있는 삶, 좀더 나은 삶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그걸 추구하고 살아왔습니다. 어느때는 계를 지키고 무소유의 깨끗한 삶을 살고 있는 스님들을 보면서 제 자신이 참 부끄러워졌고 그래서 또 스님들같은 삶을 살고 싶어 그걸 추구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제 자신이 점점 더 답답해졌고, 그러다 선생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아들이 반항하고 그것을 계기로 제 자신을 돌아보고, 제 자신이 스스로 만든 견고한 틀에 제 자신을 가두고 또 가족들도 가두어 두려했던 내 자신이 너무나 잘못한것 같아 그것들에 대해 가족에게 진심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저의 잘못으로인해 아이들이 더이상 잘못된 길로 들어서면 안될 것같아 진심으로 사과를 했습니다. 앞으로 제자신을 더 많이 만나게 될것같습니다. 두려워서 제자신을 더이상 외면하지는 않을것 같습니다.
●저에게는 아버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없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어느날 아버지가 나타나니, 엄마가 '아버지다 인사드려라', 그러자 아주 어색해하며 수줍게 인사를 드렸었는데, 3~4일에 한번씩 찾아오셨고, 한번도 같은 이불속에 자본적도 없고, '아버지'하며 살갑게 불러본적도 없는, 이렇듯 저는 부모님과 제대로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보니 삶이 괴로웠고 그래서 도를 찾아다녔고, 눈떠보니 제 앞에 아들이 떡하니 있었습니다. 최근에는 56년동안 있어왔던 깊은 뿌리의 것을 보았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다른 사람에게서 받으려 척/체하고, 한번도 진실해 본적이 없었던 내 자신을 새롭게 보았습니다. 49살에 어쩔 줄 몰라하고 혼비백산하는 저를 보았는데, 최근엔 이런 모든 것의 토대, 나는 없고 모든 것을 다 남에게만 맞추려고 하는 나를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와 아들의 관계가 보였습니다. 아들은 제게 내가 아빠여서 자랑스럽다고 말합니다만, 저로인한 상처가 참 많을 것입니다. 내 감정을 제대로 다 표현하지 못해서 받은 모호함들....분명한 내 감정을 드러내지 못한 것이 아들에게 상처를 주었을 것입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김광섭)
저렇게 많은 중에서
별 하나가 나를 내려다본다
이렇게 많은 사람 중에서
그 별 하나를 쳐다본다.
밤이 깊을수록
별은 밝음속에 사라지고
나는 어둠 속에 사라진다
예, 그렇게 어둠속으로, 심원(심연)속으로........
감사합니다. 11월에 뵙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