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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과 교회에 스며든 자본적 가치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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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8.4) 댓글 10건 조회 14,621회 작성일 08-02-24 13: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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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체로 교회에 비해서 성당은 길을 떠도는 나그네에게 상당한 휴식처가 되곤 한다.

이러한 성당의 일반적인 수용성과 개방성은 여느 교회의 폐쇄성과는 비견되는 모습이다.

이는 아마 그 각기의 종교가 자본을 받아들여 온 나름의 역사적인 차이에 기인하는 듯 하다.

기독교와 자본의 동거


독일태생 루터의 ‘종교개혁’이 개신교를 촉발시켰음은 말할 바 없다.

문제는 이 종교개혁은 ‘친자본적’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루터가 수도사로 있던 당시까지 로마카톨릭교회의 막강한 권력은
유럽의 전역에 교회를 세워놓고 엄청난 부를 축적하고 있었다.
중세시대 유일한 소득과 생산의 원천인 '토지'의 3분의 1이 교회의 소유였을 정도였다.

교회의 번성에 따라 생계의 원천인 토지를 빼앗기면서 농민 생활은 점점 피폐해졌고,

영주들과 국왕의 불만도 점점 가중되고 있었다.

왜냐하면 봉건시대의 '일하는 계급(농민)' '싸우는 계급'(기사) '기도하는 계급'(성직자)로 철저히 신분이 나눠져 있던 사회에서

제후들과 국왕은 장원에서 일하던 농민들의 노동의 결과물을 바탕으로 생활을 존속해왔던 것인데,

그 토지를 교회에 빼앗기고 농민들의 부역을 강요할 수 없다면, 자신들의 생존을 보장받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후와 국왕은 자연스레 교황과 대립하게 되었다.

이 시점에서 루터는 면죄부 판매를 문제삼아 '그러한 매개물 없이도 인간은 구원받을 수 있음'의 자신의 신학적인 의견을 개진한다.

면죄부만 문제를 삼던 95개조 반박문이 시간이 지나면서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하는' 로마교황의 무용론 까지로 발전하는데,

이러한 주장이 독일의 제후들과 농민들에게 대대적인 인기를 끌었음은 말할 나위 없고, 이는 곧 로마의 정치력에 좌지우지되지 않는 독자적인 '국가'의 성립을 부추긴다.

유럽 전역에서 서서히 봉건제에 균열이 가기 시작하면서 각기의 지역성과 민족성까지 나눠지고

중앙집권화된 ‘왕정’이 시작되었다. 권력자들에 의해서 ‘국가’의 정체성에 대한 고민이 시작되었고,

상업자본의 형성을 통한 ‘국부창출’(자본의확대)의지가 고취되면서

교황권의 통제는 구태의연한 것이 되어가고 있었다.

변화하는 시대에서 로마의 교황도 서서히 세력을 잃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인 욕구를 해소할 길을 연 것이 루터였던 것이다.

기실은 루터의 종교개혁이란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진 ‘자본가’ ‘권력자’ ‘신흥종교가’들의

‘권력의 재편성’의 다름이 아니다.


이는 ‘자본-권력’ 추종적인 성향을 가진 루터의 행적을 통해서 살필 수 있다.

루터는 과거 ‘위클리프’ ‘후스’ 등의 종교개혁가들이 귀족의

권력과 특권을 위협하며, 평등주의의 교리를 설파했음으로 인해서

당국의 반발을 사서 처형되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따라서 루터는 귀족과 자본가들을 비호하고 대변하면서,

생존권을 부르짖으며 반란을 일으킨 ‘농민’들을

‘목졸라 죽이고, 찔러죽여야..’ 축복을 받는다고 지주들에게 조언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남아있는 문서는 고스란히 루터의 포악함을 고증하고 있다.)

1517년에 내 걸은 95개조 면죄부 반박문에 대한 교황측에서의 문제제기는 기존의 종교개혁자들이 겪었던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이 사소한 것이었다.

루터는 별다른 위협과 공포 없이 자신의 집무실에서 95개조 반박문을 기획하고 제작하여,

낯익은 사람들과의 정겨운 인사를 주고받으며 광장을 가로질러 성당대문에 못 박은 것이다.

물론 루터에게 아무런 위협이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제후들의 든든한 보호와 국민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기에 루터는 자신의 주장을 계속 관철할 수 있었다.

그 3년 후에는 사랑하는 이와 결혼해서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며,

자신의 이해를 (힘없고 약한자들이 아닌)제후들에게 설명을 해주며 정치적인 세를 확장하면서

전국 각지를 여행하는 도중에 평안한 죽음을 맞이한다.

이 사건이 엄청난 ‘파장’으로 역사속에 기록되는 것은 루터 자신의 영웅적인 행위에 기인했다기 보다는

이를 계기로 유럽 각국의 ‘국부’ 유출에 대한 저항이 시작되고

이에 따라 각국의 ‘정체성’을 형성하기 위한 노력이 본 궤도에 올랐기 때문이다.

사실 루터 자신도 95개조 반박문 게시 이후에 그전까지 '당연히' 사용하던 (서유럽 공용어인)라틴어를 버리고,

독일어를 사용했고, 이례적으로 '독일국민'이라는 표현을 사용함으로 '국가의식'을 고취시켰는데,

루터를 '국가권위주의'의 창시자라고 까지 이야기 하는 것도 놀랄만한 일은 아니다.

하여간 차츰 흔들리고 있던 봉건제를 온전히 무너트리는 뇌관역할을 했던 이 종교개혁이

형성된 ‘상업자본’을 바탕으로 중앙집권화 된 '절대왕정‘시대를 여는

열쇄 역할을 한 것은 극히 지당한 역사의 수순이었다.

바야흐로 기존의 예수시대의 '청빈'과 '나눔'을 강조하던 교리를 유지해왔던 기독교는
이제 개신교로 탈바꿈 하면서 자본의 시대에 맞게끔 교리를 재편하기 시작했다.
청교도는 '합리적인 부를 얻을 기회를 이용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을 올바로 믿지 않는 것'이고 역설했고,
감리교는 '부자가 되는 길'을 권했으며,
칼뱅파는 '근면과 절약을 통해서 부를 이루도록' 권했다.
'토지에만 의존하던 봉건적 생산과 소비구조'에 대한 변화에의 열망...
개신교 탄생의 기반 자체가 그당시 성장했던 상업자본의 힘을 받고 있었기에 '친자본'적 성격을 띄었던 것은
어쩔수 없는 시대적인 현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개신교의 친자본적 성향은 그 후의 역사를 그대로 관통한다.

절대왕정시기의 각국은 조금이라도 더 많은 부를 쌓기 위해서

총칼과 대포로 무장하여, 식민지를 개척하여 잘살고 있는 토착민들을 쫓아내고 약탈, 유린, 노예로 팔았는데,

그들 앞에 '선교사'를 세웠음은 말할 나위 없다.

20세기 들어서의 세계 1차대전, 2차대전, 6.25, 월남전, 각종의 분쟁과 내란

21세기 들어서의 이라크전, 앞으로의 생태계 붕괴와 인류의 파국은

종교와 자본이 본격적 동거를 시작하면서 보여내는 일련의 사안들이다.


이는 인간이 채우고 나누고 공존하려는 길을 찾아내지 못하고,

자본과 권력을 자신의 것으로 무장하기 시작한 종교개혁기 전 후반의

‘욕망의 구체화’ 노력이 도미노화되면서 빚어 낸 ‘일련의 참상’인 것이다.


이렇게 개신교의 기원이 된 사건(종교개혁)이

‘자본과 권력의 집중화’에 쏠려 있고 '국가권위주의'적인 성경을 띄다보니 그 역사의 액기스를 이어받은

한국의 기독교계 대표들은 (루터가 그리했던 것 처럼) 힘 있는 세력에만

달라붙어서 전두환정권 찬양만찬회 등을 열고, 제국주의의 침략(이라크전쟁)에 환호하고,

헌금과 십일조만 있는 대로 긁어 모아 교회건축에만 집중할 뿐이지,

약자를 비호하고 두둔하는 모습을 거의 보이지 않는 것이다.

기껏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봤자 '사회적 약자를 끊임없이 생산하는 체제와 구조'의 문제는 관심갖지 않는

생색내기식의 활동에 불과할 때가 태반이다.

국내 대형교회의 목사들의 상당수가 ‘횡령’ ‘목사직세습’ ‘여자문제’ ‘비윤리적인 사업확장’ 등의 모습을 보이며

지탄받는 것 역시 그러한 '자본' 추구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들이 현실에서 보이는 모습 자체가 16세기 이후로 쌓여온

그들의 ‘자본’과 ‘권력’과의 야합의 결과이다.

더군다나 한국 교회가 이 모양이 되었음에도, 신도들이 오히려 그러한

목사들을 비호하고 찬양하는 것도 같은 맥락에서

그 ‘신도’들의 머릿속에 들어 찬 ‘자본과 권력’에 대한 지향성 때문이다.


그들은 그 개신교의 창시자인는 루터가 그리했던 것 ,

'약자들에 대한 무관심 내지는 탄압'에 기반한 자본/권력 지향성을 가지고 있는 이유로,

이러한 이해를 반영하고 있는 그들의 지도자(목사)을 무조건 비호하고 추종 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자본과 권력이 맞물린)국가시책, 국책사업'을 비호하는 일은 있을 지언정 이로 부터 착취당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노동자, 농민'의

궐기를 두둔하는 일이 드물다는 것도 이의 한 현상이다.

이렇게 기독교계 일반이 자본과 권력의 추종에만 몰입되어 있다보니,

나와 같이 길가는 나그네를 거지취급하면서 박대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무것도 내 놓을 것도 없는 나그네에게 그들이 뭔 이익이 생긴다고 잠자리를 내주겠는가?

더군다나 교회 내에는 훔쳐갈 수 있는 것들이 많아서 항시 보안장치를 해 놔야 함에야

어찌 떠돌이 나그네를 함부로 교회에 두겠는가?

(물론 개별적으로 훌륭한 믿음과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교회도 많다.)

성당과 자본 조합의 역사

반면 ‘성당’은 그나마 길가는 거지 대해서 관대하다.

이 역시 역사적인 괘적을 가지고 있다.

카톨릭이 루터에게 두들겨 맞은 이유 중의 하나가

면죄부 팔아먹는 이유에 있었던 만큼,

비록 카톨릭 성직자들은 그리 부당한 방법으로 굶주리는 농민의 돈까지 갈취해서

쌓아서 차곡차곡 성당에 쌓아 놓기는 했다.

하지만, 그들은 ‘교리적’으로는 ‘돈은 부정한 것’이고, ‘과도한 재산’을 비판했으며,

‘돈놀이’(이자놀이/은행업무) 등에 대해서 철저하게 배격하고

그리한 당사자들을 파문까지 시킬 지경이었다.

물론 이러한 '상업행위'를 비난했던 것은 '카톨릭' 자체가

'토지에 의존하는' 봉건질서에 기반되어 있기 때문에, 상업행위 자체를 할 필요에 없음에 의한다.

하여간 이는 교리로 굳어지고 설교 중에 신도들에게 강조되었다.

이렇게 '자본'(상업)의 입장에 대해서 카톨릭(천주교)의 교리와 문화는 개신교와는 상당히 다른 길을 가게 된 것이다.

이러한 역사가 있다 보니 국내의 천주교 교단에서

자본과 권력자들에 ‘노골적’으로 편 붙어서 (국가주의적)전쟁찬성 집회나

지역의 환경 파괴적 개발사업 등의 추진에 앞장서는 경우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이는 개신교도들과는 확연히 비교되는 모습이다.

이러한 교단의 교리와 원칙의 흔적은 수백년의 역사를 관통해

나그네의 피부에 전해지는데, 앞서 말했듯이 대부분의 교회가 박대로 일관하는 것과는 달리

천주교 성당의 대부분은 길가는 나그네에게 그 쉴 자리를 열어주고 있는 상황이다.

댓글목록

권보님의 댓글

권보 아이피 (210.♡.99.56) 작성일

둥글이님, 오랫만에 님의 글에 댓글을 달아봅니다. 님께서 지적하신 개신교와 구교간의 차이를 역사적 고찰과 함께 분석해주신 글 잘 읽었습니다. 그러나 님께서 보시고 또 경험하신 것이 전부는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저 또한 현재와 같은 개신교의 모습에 그리 호감을 가지기 어려운 부분이 있어서 구교쪽을 택하고 있습니다만, 저의 어린시절 교회에 대한 추억은 참으로 아름답고 좋은 추억들이었고, 저의 오늘이 있기까지 끼친 영향이 심대하기에 감사하는 마음 크답니다.

비록 님께서 지적하신 부족하고 안타까운 모습들은 많지만, 과거 구교가 거쳤던 부패한 모습을 딪고 일어서 오늘의 모습으로 거듭난 것처럼, 개신교도 스스로 자정과 개혁의 과정을 거쳐 보다 나은 모습을 찾아갈 것이라 믿습니다. 기다려주기가 참 어려우시겠지만, 차츰 정화되고 개선되어 나갈 것으로 보이니, 님께서도 함께 기다려보기를 권합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오랜만입니다. 추운데 잘 지내시죠.^^
조언의 말씀 감사합니다.

근데 제 글이 기독교를 비난-비하하는 것으로 비춰졌나 봅니다.
하기야 '자본과 얽혀진 기독교의 역사'라는 주제 자체가 일견 기독교를 비하하는 모습으로 보여질수 있죠.

하지만 이는 현재 개신교 내에 빚어지고 있는 '자정운동'의 연장으로 보시는 것이 적당하실 듯 합니다.
감리교단 문제의 자정에 나선 '당당뉴스' 등에 기고하는 목사님들의 글을 살펴보시기를 권합니다.
또한 '숭의교회'라는 (메스컴에도 종종 나오시는)곳에 김동호 목사님이라는 분의 비판적 주장에 대해서도
한번 들어보실 기회를 가져보시기를 바랍니다.

권보님이 말씀 하시는 바의 '과거 구교가 거쳤던 부패한 모습을 딪고 일어서 오늘의 모습으로 거듭난 것'은 절대로 '자연스럽게' 이루워진 것이 아닙니다. 뼈를 깍는 고통과 수많은 비판... 또는 (필연적으로 동반되었던)폭력에 기반했던 것입니다.

물론 비판과 공격만을 지향해서는 안되겠지만, 그러한 비판과 공격이 없으면 '자본과 권력을 향한 관성'은 결코 바꾸어지지지 않습니다.
현재 비판의 대상이 되고 있는 대형교회 목사들 보십시요.
오히려 기독교 연합회까지 동원해서 이를 비판하는 언론에게 몰매를 가하면서 대대적인 반격에 나서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예수를 믿는다는 이들이 이를 '부조리'로 인식하고 힘써서 '나서면' 현실은 바뀌는 것이고,
그렇지 않고 침묵하면서 '알아서 되겠지'라고 생각하면 결코 그 현실은 바뀌지 않습니다.
이는 카톨릭 변화의 역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는 사실입니다.

그렇기에 저는 권보님이 제안하시는 바대로의 '기다려 보자'는 입장에 대해서는 근본적으로 반대합니다.
물론 '마음을 평온하게 둠으로 타인을 비난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통찰과 다스림을 위해서 늘상 기도하는 심정으로 살아가는 것'도 중요하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개인적 생활의 소양'이지, '사회적차원의 실천'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제가 드린 말씀은 '모든 기독교가 문제가 있다'고 해서 쓴 말씀이 아닙니다.
제 다른 글에서도 많이 정리되어 있지만, (앞서 말씀드린 김동호 목사님 등의 목회자 말고도)훌륭한 목회를 하시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리고 전국 돌아다니면서 벌교, 부천 등에서 훌륭한 목사님들을 접하고 그들과 관계하면서도 늘상 이러한 문제에 대한 이해를 함께 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가 위의 글을 써낸 것은 캠페인을 다닌 중에 교회에서 유독 박해?를 많이 받았기 때문에
(기술한 바대로)'왜? 교회가 그렇게 배척적인 모습을 하고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갖게 된 것이고,
다만 그 사안에 관한 내용을 집중 조명해서 기독교의 역사를 짚으면서 풀어낸 것입니다.
(제가 교회에서 쫓겨난 일들이 궁금하시다면 1년 반전부터 시작된 제 유랑일지를 살펴보시면 됩니다.)
http://cafe.daum.net/my80go

한가지 붙일 말씀은 저는 이 '개신교도'들의 문제가 그들만의 문제가 아닌 '우리들의 문제'라고 생각하기에
함께 고민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단순히 종교적 믿음의 문제를 떠나서 정치, 군사적으로까지 깊숙히 관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는 그들을 '너'라고 경계지워서 '알아서 할일'이라고 여겨야할 것이 아닌, '우리들'의 고민의 문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따라서 저는 권보님이 기독교인으로서 고민하셨어야할 '자신의 문제'에대해서 답답함을 느끼고,
나이드신 후에는 카톨릭을 택하신 후에 '그들이 알아서 할일이다'라고 하시는 '조망적관점'에 대해서도 생각이 다릅니다.   

어쨋튼 권보님께서 우려하시는 대로 기독교 전반에 대한 비난을 한 것은 아니니 안심하시기 바랍니다. ^^
빙판길 조심하시고요~

무아님의 댓글

무아 아이피 (210.♡.89.252) 작성일

사람에게는 두 가지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믿고 기다려 주는 것, 그리고 그들을 돕는 것,

두 분의 글을 읽고 가만히 생각하니, 믿고 기다려 주는 것은 상대를 믿고 맡기며 가벼이 여기지 않는 것으로 반드시 필요한 것이고, 그들을 돕는 것도 그들이 삐뚤로 나감이 지속되어 더 잘못을 저지르기 전에 속히 정상으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살다보면 일이 터진 뒤에는 복구 불능한 것들도 많지요. 유비무환...^^

믿고 기다릴 것은 기다리면서 도울 것은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도와주는 것,
이것이 우리 일반 사람사는 데에도 반드시 필요한 양날개 아닌가 합니다.

두 분의 일리있는 글을 읽다보니 자연스럽게 드러나는 생각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무아님의 좋은 말씀 새겨 듣겠습니다~ ^^
그나 저나 오늘은 날씨 따뜻해서 산책하기 딱이군요~~~

무아님의 댓글

무아 아이피 (210.♡.89.252) 작성일

둥글이님, 요즘도 사방천지를 다니시나요?
어떤 때는 님이 부럽기도 합니다.
밥은 잘 챙겨먹고 다니나요?
잠자리도 불편한 데 누가 알아주지도 않고, 문전박대도 당하고 보면 서럽기도 할 것인데...
무엇보다 애쓰면서 좋은 일 한다고 다니는데 그 맘 몰라주고 그럴 때는 제일로 속상하지요?
누군가 그러더군요.
생이란 원래 그런 것이라고..
눈물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고는 생을 논하지 말라고...
모두가 자기 삶을 자신이 살다 가는 것이니 언제나 후회없는 삶이 되기를 바래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추위와 굶주림 때문에 잠깐 웅크리고 있습니다. 3월 하순부터 다시 움직여야죠.
그나저나 일꺼리가 없어서 죽을 맛입니다.
빨리 벌어야 스티커랑 만들어서 뿌리는데요...
(혹시 가정부 필요하시면 들여 놓으시죠 ^^')

그리고 눈물 젖은 빵을 먹어보지 않아서 저는 깊이 있게 생을 논하지 못할 듯 합니다. ㅠㅜ
비록 잘 못먹고 잘 못자지만, 그럭저럭 재미있어서 빵에 눈물 뭍히고 먹지는 않거든요. ㅋㅋ

하지만 후회없는 삶을 살기는 합니다.
제 살아오면서 가장 현명한 결정이 바로 과거적 삶을 청산하고 짐싸서 떠돌기 시작한
바로 그때 이뤄졌기 때문이지요.

혹시 찌끔이라도 부러우시면 숟가락 들고 따라오세요. ㅎㅎ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감사합니다.
우선 '기독교에 대해서 제가 생각하고 있는 바'를 권보님이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가 궁금하군요. ^^
그리고 위의 한국기독교개혁운동 정책실장은 본인 자신이 청산이 되어야할 대상인데,
청산을 얘기하고 있으니 참 숨이 막혀올 따름입니다.

이명박후보의 공약집을 봤거나, 한나라당 정강이라도 한번이라도 봤으면
'이명박후보가 서민을 위한 정치할 수 있는줄 알았는데 이건 아니다'는 따위의 얘기를 할 수가 없지요.
'어떤게 본인들이 정책공약집도 보지 않은 실수를 할수 있었는지'에 대한 통렬한 반성이 우선여야 했을 텐데,
중요한 걸 빼놓고 엉뚱한 얘기만 하는 군요.
그리고 그 나머지의 얘기는 극히 '지당한'얘기이구요. 

'이런 잘못에 대한 반성을 바탕으로 앞으로는 섣불리 정치운동 않고 교회개혁만이라도 열심히 하겠다'면서 구체적인 교회개혁안이라도 내놓았다면 좀 기뻐할 만도 한데, 그네들 홈페이지에는 그런 것을 눈을 씻고도 찾아 볼 수 없군요.  극히 '지당한'얘기만 써놓고 있습니다.

이런 이들을 행적을 보니 다음번 선거에서도 적당한 후보들을 낙점해서 '입김'좀 불어 넣을 것이 뻔할 듯 합니다. '이게 아니다'고 생각하면 또 '저놈이 우리가 원하는 놈이 아녔다'면서 다시 '지당한' 얘기들 늘어 놓으면서 자신들이 무슨 변화의 선두에 선 듯한 모습을 보이겠죠.

저는 궁금합니다. 이들이 '뭘?' 개혁한다고 하는지를 말입니다.
교회를 타락하게 하는 각종의 제도-문화-일상의 틀은 손도 안대고
이에 대한 신중한 사회-심리적인 고민과 성찰이 없이,
'막연한' 얘기로 '타락한 교회 더 이상은 안된다'는 얘기가 교회를 개혁하는 걸까요?

제가 전번에 교회 개혁을 위해서 활동하는 싸이트를 안내해 드렸습니다.
권보님께서 혹여나 그런 싸이트 정도나 들어가서 실로 '개혁적'?인 글을 퍼다가
올려주셨으면 (저의 수준에서의)희망을 느낄만도 하지만, 권보님이 올려주신 글에서는
제 수준이 낮아서 그런지 희망이 별로 느껴지지 않는 군요.


* 아님 위의 글은 '꼴보수짓 하던 조직'이 그나마 이정도의 반성은 한다는 사례를 들어보여주신건가요?
(만약 그러한 것이라면 나름의 '희망'을 찾아볼만도 하군요. ^^)

권보님께서 '언젠가는 그리될 것'이라며 기대하고 계시는 교회의 '변함'이란 또한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혹시나 위에 올린 저의 말씀이 '기독교의 개혁운동은 이렇게 실효성이 없다', 혹은 '둥글이가 주장하는 방식의 개혁방향만 옳다'는 내용으로 들리지 않았으면 합니다. 사려깊은 권보님이 알아서 잘 수용하시겠지만, 글로 쓰여진 주장 들은 늘 오해를 불러일으키곤 해서요.

권보님의 댓글

권보 아이피 (58.♡.81.78) 작성일

ㅎㅎㅎ 편안하게 생각하시고 말씀을 주고 받으시지요, 둥글이님.
옳다 그르다는 것이 아니고 동일한 문제를 받고 풀어가는 방식이 다르다는 정도로 서로를 존중하도록 하지요. 둥글님.

그리고 위의 글은, 글쓴이를 제가 잘 알지도 못하고 한나라당의 정강 정책을 잘 모르는 가운데, 개신교 내부에서도 저런 움직임이나 메아리가 울려나온다는 말씀을 전하고저 옮겨왔을 따름입니다. 그 많은 글들과 주장을 다 읽어볼 기회를 못가졌기에 둥글이님의 수준에 미달하는 글을 옮겨온 것이지요. ㅎㅎㅎ

하여간, 자정의 기능을 하는 맑은 샘이 작지만 곳곳에서 그 탁류를 향해 흘러들어가고 있음을 전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좋은 말씀과 정보들 감사합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4) 작성일

저 같이 즐겨싸우는 이들이 권보님과 같은 '너그러움'까지 갖출수 있으면 좋을 텐데요...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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