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가의 깨우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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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8.4) 댓글 0건 조회 9,082회 작성일 08-04-01 14:16본문
아침에 '반짝'하는 마음에 쓰기 시작하여 잘 다듬어지지 않은 글인데,
부적절한 비약은 '적절'하게 지적바랍니다.
1-1 석가의 깨우침
석가는 상당히 예민한 사람이었던 듯하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냥 쉽게 보고 지나쳐야할 상황에 몰입했었다. 아마 이는 그의 내향적인 성격이 ‘외적인 삶’에 대한 무심함을 고조하면서 점점 더 그의 에너지를 내적으로 집중시킨 이유인 듯하다. 어린 시절 밭에서 지렁이 꿈틀 거리는 모습이 각인된 후로 이를 끝없이 되 뇌이며 그 고통을 자신의 것으로까지 여길 정도였다. 이러한 그의 성격은 아마 집착과 강박 증세를 만들어 냈을 것이다. 끝없이 꼬리를 무는 관념의 사슬은 그를 지치게 만들어 냈고, 결국 그는 이 해법을 찾기 위한 ‘자기를 찾기 위한 여행’에 돌입한다. (그의 왕국을 떠났다는 표현보다는 자기를 찾기 위한 여행을 시작했다는 표현이 적절하다.)
석가가 삶 자체가 ‘고통’이라고 정의 내리고 이의 해법을 찾기 위해서 그리 몰입했던 것도 그 자신의 끝없이 되 뇌여지는 집착적이고 강박적인 관념이 그를 쉴 수 없게 만들어낸 이유였다. 어쨌든 석가는 그러면 그럴수록 더더욱 치열하게 수행했고, 사선의 경계를 넘나드는 중에 ‘득도’를 하게 된다.
석가의 ‘득도’는 자신을 여지껏 괴롭혔던 집착적이고 강박적인 관념으로부터의 해방에서 시작되었다. 그간 부여잡고 있었던 그 집착적이고 강박적인 관념은 기실 따져 보니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이었다. 다만 다채롭게 어우러진 여러 현상들의 복잡한 중첩만이 있을 뿐이었다.(무상) 부처는 이를 간파했던 것이다. 이러한 관념을 자유롭게 풀어주자 그 관념의 끄트머리를 치열하게 부여잡고 있었던 ‘나’라는 개념도 퍼트려지기 시작했다.(무아) ‘나’에 대한 인식은 자신이 잡고 있던 ‘관념’이 만들어낸 부산물에 불과했던 것이다.
이렇게 세상이 ‘무상’하고 스스로가 ‘무아’함에 대한 설법은 자연스럽게 ‘공’사상을 이끌어 냈다. 즉 존재가 그 자립함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오직 인연의 관계를 통한 상호 작용에 의해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공‘에 대한 올바른 실현은 ‘열반’과 등가였다.
가뜩이나 혁명적이었던 것은 석가가 제안하는 ‘열반’은 이전의 권위 있는 경전을 한 장도 펼쳐볼 필요 없이 그 자신의 마음을 잘 들여다봄으로 인해서도 가능할 듯한 뉘앙스를 풍겼다는 것이다. 그도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 진화의 과정에서 세계의 원리를 그 안에 함축해낸 것이 인간의 마음이고, 그 반대로 인간의 마음은 세계에 투사될 수 있는 되는 작용이 가능했기 때문이었다.
하여간 이렇다 보니 (일도하고, 밥도 먹고 똥도 싸고 인간관계도 가져야 하고, 사회생활도 해야 하는 등으로 현실 속에서의 구체적인 실천이 필요했음은 당연했지만) “그간 잘 못 개념화 되었던 존재의 원리를 바로잡고 자유하기 위해서”는 ‘원리상’으로 “마음만 잘 들여다보면 된다”는 얘기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자신의 집착과 강박의 고통을 끊기 위한 수행의 끝에 부처는 이렇게 거대한 발견을 하게되고 이를 세인들에게 전파하게 되었는데, 문제는 이 만유의 조화를 이뤄낼 수 있는 철학과 방법론이 집약된 석가의 설법은, 그 이후로 ‘강박’과 ‘집착’증에 시달리던 대중의 필요에 의해서 ‘민간정신치료요법’ 정도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1-2 강박관념의 문제
석가가 깨달은 진리를 일반대중이 강박증세 치료요법으로 격하시켰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좀 구체적으로 따져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강박심리는 인간이 존재를 위한 필연적 기재이기 때문에 대중들이 이러한 강박심리로 인한 부담감을 떨쳐내기 위해 어떻게 석가의 가르침을 적용했는지를 아는 것은 좀 더 올바로 석가의 가르침을 이해할 길을 마련해주기 때문이다.
가령 넓은 의미에서 볼 때 밥을 보고서 먹고 싶은 심정이 들어 침이 삼켜지는 것이나, 편안한 생활을 지속적으로 동경하는 것도 강박 심리로 볼 수 있다.
즉, 인간이 접하는 특정한 현실에 대해서 그의 생존에 유리할 수 있게끔 ‘개연성 있는 사물과 현상에 대해서’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심적 자극을 가능케 하는 것 자체가 강박심리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만약 그러한 심적인 기제가 작용되지 않으면 우리의 존재자체가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러한 ‘강박적인 심리’는 생명이 존재하기위해서 가장 필요한 심리적 기재일 수가 있다.
이는 인간이 물을 박차 올라 육상에 거주하고 네다리로 걷다가 두발로 직립하는 진화상의 과정에서 그가 생존하기 위한 ‘필요의 요구’를 좀 더 수월하게 ‘무의식’차원에 심어 둔 결과인 것이다.
몸에 수분이 부족할 때 목마름으로 인해서 ‘물먹고 싶다’는 생각이 지속적으로 되 뇌여지는 것, 단식수련 해본다고 한 두 끼 굶을라 치면 오직 눈앞에 밥상이 둥둥 떠다니면서 마음의 평정을 흐트려 트리는 것 등은 가장 기본적인 강박심리의 예이다. 이러한 원초적 욕망이 사회적인 욕구로 변형되면 ‘자동차를 사고 싶다’ ‘시험을 잘 보고 싶다’ ‘사람들의 존경을 받고 싶다’는 등의 사회적인 강박심리로 전환되면서 좀 더 복합적인 문제를 발생시키게 된다.
물론 항시 문제는 이의 ‘정도의 차이’이다. 이 강박심리가 (인간적 평균에 맞는)‘적정’ 수준이 아니라, 넘쳐나거나 부족해버리면 삶을 살기가 버거워지게 되는 것이다.
문제는 인류가 자연상태에서 벗어난 사회적 삶을 사는 중에 강자에 의한 압박과 경쟁의 스트레스를 받으며, ‘강박심리’의 조절에 ‘사회/문화적인 차원의 (집단적)실패’를 맞보고 있는 중이라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석가의 가르침은 ‘무상’ ‘무아’의 온전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 만유의 조화와 해탈까지를 가능케 하는 ‘공’ 사상의 실현으로 이어지지 못하고, 다만 ‘민간강박치료정신요법’ 쯤으로 격하되어 있는 상황인 듯 하다. 이는 이를 믿는 이들이 극히 자기 안위적 차원에서 석가의 가르침을 도용하고 있음을 통해서도 살필 수 있다. (심리적 압박감(공황증, 공포증)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이들부터, 성공한 삶을 살게 해달라고 공양드리는 이들을 거쳐, 무한 행복을 갈구하는 이들에 이르기까지...)
물론 심각한 ‘집착’과 ‘강박증세’를 가진 이들의 치료를 위해서 그러한 가르침만 집중적으로 전하는 스승은 분명 필요하기는 하고, 그에 대한 극심한 고통을 받는 이들의 정신은 해방을 위해서 석가의 가르침을 이용할 권리도 있다. 하지만 석가의 가르침이 이렇게 개인의 강박적 정신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만 해석-축소되어 쓰여지는 것이 유행이 되다시피 번지다 보니 문제가 발생한다. 그 (개인성에 안주한)반쪽짜리 석가의 믿음이 석가 자신이 바랬던 온전한 세상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여지껏 석가를 믿어 왔던 이들의 믿음의 상당수가 ‘반쪽짜리’임은 석가의 행적을 통해서도 구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석가는 ‘모든 것이 내 마음으로부터 생겨남을 알아 내 마음을 다스림으로 번뇌가 끊김’을 알았다. 하지만 그렇게 ‘세상으로부터의 번뇌를 끊어’ ‘열반’할 수 있음을 알았던 석가는 세상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렇게 하여 ‘열반’에 다다르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개인’의 문제이고, 다른 중생들이 여전히 필요 없는 것을 붙잡고 있음을 안타깝게 여겼기 때문이다.(자비심)
이렇기에 석가는 ‘무턱대고 열반할 것이 아니라 이를 좀 늦춰서 다른 이들이 열반하게 할 수 있는 기회를 돕는 것이 진정한 자비의 행위’라고 이야기를 했던 것이고, 끝없는 장정의 길 속에서 포교를 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석가의 관점에서 봤을 때 이는 ‘타인’을 위한 행위가 아니라 결국은 그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대아적 나’를 위한 일이었던 것이다.(석가의 실천행위는 ‘개인성’의 개념과 대비되는 ‘사회적 실천’이라고도 표현할 수 있다. 물론 굳이 구분하자면 그렇다는 것이지, ‘공’ 사상의 측면에는 ‘관계’와 ‘작용’만 있을 뿐이다.)
하지만 2500년의 역사를 통해서 대중의 필요에 의해서 재단되어온 현대의 석가사상은 이러한 ‘공’성, ‘자비심’ ‘대아적통찰’을 모두 걷어내고, 오직 ‘강박의 누그러트림’ ‘안락’ ‘풍요’를 향한 ‘개인의 필요’에 의한 반쪽짜리 믿음에 집중되어 있는 듯 하다.
이들이 스스로 ‘무아’하고 있다고 떠벌리고 있는 것과는 정 반대의 모습을 보이는 것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이들의 ‘무아를 향한 집착’은 세계와의 자연스러운 작용을 통해 이뤄야할 조화로운 관계마저 거부하며 극단적인 개인화의 구렁으로 스스로를 몰아 넣고 있는 듯 하다. 하지만 이러한 사실의 분별의 필요성조차를 느끼지 않는 이들은 ‘마음에 모든 정답이 있다’는 감상적 자위행위에만 다시 몰입함으로 스스로의 믿음을 더욱 견고히 한다. 그들은 또 하나의 ‘강박’증을 앓고 있는 듯 하다.
‘2 예수의 깨우침’
‘3 양자의 차이와 공통점’은 밥먹고 쓰겠습니다. ㅠㅜ
점심 반찬에 따라서 내용과 주제가 달라질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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