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04. 산청모임(도덕경 71장. 병이 병인줄 알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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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여름가지 (117.♡.172.26) 댓글 0건 조회 8,959회 작성일 17-04-10 16:05본문
학교앞 골목에서.....
고통은 당신을 더 깊은 곳으로 데려간다. 역설적이게도 고통의 원인은 형상과의 동일화이지만, 그 고통이 형상과의 동일화를 무너뜨린다. 고통의 많은 부분은 에고에 원인이 있지만, 결국에는 고통이 에고를 부순다. 단, 고통에 의식적으로 깨어 있을 때만 그 일이 가능하다.
고통은 고귀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이 그것이다. 당신이 고통에 저항하는 한, 의식의 진화와 에고의 불태움은 더디게 진행된다. 그 저항이 불태워 버려야할 에고를 더 많이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통을 받아들일 때, 깨어 있는 의식으로 그 고통을 경험함으로써 그 과정이 과속화된다. 깨어 있는 의식으로 고통을 경험할 때, 변화는 이미 일어나고 있다. 고통의 불꽃은 의식의 빛이 된다. <에크하르트 톨레>
'좋아하거나 싫어하지만 않으면 통연히 명백해진다'고 누군가 말을 했는데요, 그렇더라도 저는 좋아하거나 싫어하겠습니다.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이 제게 올라오고 그 감정을 따를 때 저는 어떤 내적인 경험을 하게 되는데요, 다만, 그때 올라오는, 그 내적인 경험을 좋아하거나 싫어하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를 인간적으로 좋아하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현상인데요, 저도 그렇습니다. 관계를 맺다 보니 상대가 그냥 좋아져서 잘해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잘해주는데, 저는 참 내성적이라, 잘해주고 싶고 친해지고 싶은데, 안에서 가로막는게 있습니다. 또 어느날 농담을 하는데, 내가 지나치게 한 것은 아닌가하는 한 생각이 올라와서 전 당황했고, 느닷없이 어색해졌습니다. 그러면서 그 어색함이 상대에게 전해져 상대가 불편해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하게되고, 상대를 더 의식하게 되었습니다. 상대를 자꾸 의식하게되다 보니, 상대가 나를 미워하는 것은 아닐까하는 생각까지 하게되고, 그때부터 슬슬 상대의 눈치를 보게되었습니다. 상대의 무심한 행동들이 전부 저를 거부한 것처럼 생각되고, 내가 무엇인가 크게 잘못한 것 같다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저는 지속적으로 스트레스를 받았는데, 그때까지 이게 도대체 무엇인지 몰랐고, 그래서 내 자신에게 물었습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스트레스 받게하는게 무엇인지, 그 실체를 보여달라고 속으로 내 자신에게 요구했습니다. 그러자 그것은 다음날 내게 자신을 보여주었습니다. 가슴에서 뭉글뭉글한 통증이 올라왔고, 그것은 아침부터 저녁까지 지속되었는데요, 내면아이였습니다. 사랑받고 관심받고 싶은데, 그러지 못했을 때 아이가 느낄만한 그런 어떤 통증인듯했습니다. 전 그 아이를 가슴에 품고 수업을 하고 때론 벤치에 앉아 있기도 했고, 그때 누군가 다가와 1시간 넘게 제게 말을 하고 가기도 했는데요, 그 모든 과정 중에서도 저는 늘 그 아이를 주목하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전체는 참 고통스러웠는데요. 누군가에게 좋은 감정이 생겨나면서 일어난 이 경험, 지금도 일어나는 고통스러움, 그러나 전 이런 내적 경험을 싫어하지 않겠습니다.
●우리 내면의 세계는 밖과 안이 같이 화려하고 아름답습니다.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고 벌이 날아드는 것은 기적같은 일인데, 우리는 이게 너무 익숙해 그냥 지나쳐 버립니다. 조금만 생각해보아도 기적과도 같은 일인데 말입니다. 우리안의 세계도 이와같은 기적들의 세계가 있습니다.
71장. 병이 병인 줄 알면
모른다는 것을 아는 것이 최상이요, 모르면서도 안다고 여기는 것이 병이다. 대저 오직 병이 병인 줄 알면 이로써 병이 되지 않는다. 성인은 병이 없나니, 병이 병인줄 알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병이 없다.
●공자의 제자중에 '자로'가 있습니다. 이 자로는 성질이 급하고, 머리에 깃털을 꽂고 다니고, 돼지껍떼기로 만든 주머니를 차고 다니는 야인이었습니다. 이 자로가 공자를 만나기전, 어느 무리의 우두머리였었고 무리지어 다니며 늘 다른 사람을 해코지하고, 비아냥거렸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똑같이 공자에게도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의 반응은 다른 사람들과 달랐습니다. 자신의 비아냥과 해코지에 전혀 반응하지 않고 겁도 먹지 않았습니다. 여러차례 그런 공자의 의연한 반응에, 자로는 '이 공자에게 무슨 힘이 있어 꼼짝도 하지 않는가?'하며 어떤 범접할 수 없는 힘을 느끼며, 공자에게 그 설명할 수 없고 범접할 수 없는 힘을 배울 마음을 내게 됩니다. 그렇게 자로가 굴비 2마리를 가지고 공자를 찾아갑니다. 지나갈 때마다 자로는 공자를 비아냥 거렸지만, 자로가 진심으로 배우러 온 것을 보고 공자는 반갑게 맞이합니다. 그렇게 자로는 공자에게 배우기 시작합니다. 그 누구보다 열심히 배우고 그 배운바를 실천하지만, 여전히 나서기를 좋아하고 거친습성을 지니고 있으니, 어느날 공자가 자로를 따로 부릅니다. 그러며 '내가 너에게 안다는 것이 무엇인가를 가르쳐 주겠다'하며 말합니다.
아는 것을 안다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 하는 것,
이것을 안다고 한다.
진리는 원래 단순합니다. 이렇게만 되어도 인생은 참 편안한데, 사람들은 지켜야할 '나'가 있기에, 모르는 것도 아는 척하며 자신을 지키려 듭니다. 병으로부터 낫는 것, 내 마음의 참된 평화를 얻는 방법은, 내가 모르는구나하고 아는 것입니다. 아, 사실은 내가 모르는 자이구나를 깨닫기만하면 방황이 끝이나고 평화가 옵니다. 노자의 말을 우리 자신과 결부시켜서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여러분의 삶에서 가장 원하고 이루고 싶은게 있다면 그게 무엇입니까?
'보기 좋은 떡이 먹기에도 좋다'라는 말이 있는데요, 그 말로 다 담기에는 부족한 비주얼과 사랑이 있었습니다. 야마꼬님께 두 손 모아 감사를 드립니다.
●늘 마음이 평화로웠으면 좋겠다, 진정으로 나답게 살아가고 싶다. 고통과 문제에서 벗어나는 깨달음, 해탈을 얻고 싶다. 우리가 이런 것을 추구한다는 것 자체가 지금이 불만족 스럽다는 것이고,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것이며, 아직 부족하다는 느낌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기에 다른 것을 추구합니다. 부족하고, 미진하고, 뭔가 더 채워야할 것같은 느낌이 들 때 추구하게 되는데, 삶이 메마르다여기기에 깨달음, 해탈, 충만한 것을 구합니다.
●사랑이 무엇입니까? 마음의 평화가 무엇입니까? 어떻게 되는게 평화입니까?, 당신은 지난번에 자유를 원한다고 했는데, 자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니, 걸림없이 사는 것이라 대답했습니다. 지금 느끼는 불편함과 구속이 사라지고 없는 것이 자유라고 생각하고 추구합니다. 사실 사람들에게 자유가 무엇이냐고 물으면, 자유가 무엇인지 모르고 그냥 짐작한 것으로 대답할 뿐입니다. 지금 자기삶이 나답지 않은 것 같으니까, 나답게 사는 것을 짐작하고 상상합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되면' 나다운 삶이 될거야하는 답을 가지고 있는데, 과연 그렇게 되면 진정한 자유와 해탈이 올까요? 지금 삶이 힘드니까, 부족하고 불만족스러우니까, 이런 모습이 되면 완전해질거야 하고 상상하는데, 사실 그게 또다른 부족일 수 있습니다. 지금 부족한 자는 완전함을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목표삼고 다가가는, 미래에 완전한 모습이 되려면, 시간/노력/방법들이 필요하게 되는데, 이게 사실 엄밀히 말하면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자신이 안다고 생각해 목표를 추구합니다.
●사실 사람들은 나다운 삶이 어떤 모습인지 모릅니다. 아까 당신은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는데, 진짜로 모르면 그때 진정한 평화가 옵니다. 그런데 그 모름을 견디지 못하고 알려고 하기에 고통받습니다. 사실은 전혀 모르는데 자신이 짐작한 자유를 찾아 수행합니다. 자신이 목표로 한 길을 가는 것은 사실 다가갈 수 없는 신기루를 찾아가는 것입니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그 길을 고통을 받으면서도 갑니다. 그리고 그 길이 병입니다.
●진정 나다운 삶이 진짜 무엇인지 모르면, 지금 현재의 구속, 답답함, 이것 이외의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고 추구가 끝이 날 것입니다. 구속을 견디지 못하기에 자유를 찾아가는데, 사실 자유를 구하면서 스스로 구속됩니다. 그러니 지금 구속이외의 다른 것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면, 자유를 구하는 마음을 내려 놓으면, 그때 내게 구속감을 주는 이런 저런 것들에 주목하게되고, 있는 그대로의 자기자신에 대한 배움과 성장이 있게 됩니다. 자유를 구하는 마음을 내려 놓은 채, 지금 올라오는 자기내면의 것을 진정으로 만나게 되는, 그래서 지금 이대로의 자신을 만났을 뿐인데, 어느새 편안함과 자유가 있는, 흔들리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내면의 힘을 느끼게 되는.
●사실 진리는 미래에 있지 않습니다. 진정 나다운 삶이 노력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착각 때문에, 자신의 착각과 상상이 만들어 놓은 자유를 찾기에 그렇습니다. 진실로 모르면, 추구가 끝나고 자기자신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모르면서도 자꾸 알려하기에 진정으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닫아버립니다.
72장. 진정한 위엄
사람들이 위엄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진실로 큰 위엄이 설 것이다.
그 거하는 곳을 업신여기지 말며, 그 일어남을 싫어하지 말라.
대저 오직 싫어하지 않으면 진실로 싫어하지 않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성인은 자신을 알지만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며,
자신을 사랑하지만 자신을 높이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저것을 버리고 이것을 취한다.
●에크하르트 톨레가 말했습니다. 모든 동물에게 위엄이 있다. 이 위엄은 그냥 자기자신으로 존재할 때 있는 설명할 수 없는 어떤 힘입니다.
●4월은 참 좋은 계절입니다. 아침에 눈을 떠서 바라보는 햇살, 그 햇살에 따라 달라지는 정경, 창밖을 나가고 싶은 충동에 가슴이 벌렁벌렁 거리고, 그렇게 매일 걷다보면 조금씩 변해가는 꽃들의 잔치, 온갖 꽃들이 눈부시게 피어납니다. 우리의 눈에 제일 먼저 띠는 화려한 꽃, 또 그 아래 이름모를 작은 꽃, 새순, 이 모두가 생명덩어리입니다. 그 꽃의 모양과 향기, 이루 말할 수 없는 잔치가 벌어집니다. 부드러워진 흙을 뚫고 올라오는 수많은 생명들, 이 식물들만이 아니라, 또 개미가 집을 짓는데, 개미가 집을 짓기위해 물어다 놓은, 그 작은 알갱이들이 쌓여있는 것을 보는데, 비가 오거나 사람들이 지나가다 밟으면 그것으로 끝이 나버립니다. 그럼에도 원망이나 원한이 없는, 매화가 이제 다 졌는데, 그 매화꽃이 진자리에 앙증맞고 귀여운 매화열매가 달렸습니다. 생명의 씨앗이 나왔습니다. 온통 기적이고 생명인데, 또 다른 하나의 꽃이 바로 여러분이고, 이 세상에 단 하나밖에 없습니다. 단 하나밖에 없기에 비교를 넘어선 절대의 아름다움이 됩니다.
●여러분 안에서도 온갖 꽃들이 핍니다. 진실은 나는 그냥 나입니다. 자기 믿음이 없기에 비교합니다. 이 세상 어느 꽃도 비교하지 않습니다. 이 세상은 기적입니다. 벌이 작은 꽃을 찾아가면 그 꽃은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휘청거립니다. 그리고 그 휘청거리는 작은 꽃도 꽃입니다. 그리고 이 작은 꽃은 비교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하기에 위엄이 있습니다.
●개가 장닭을 쫓으며 장난을 치는데, 장닭이 갑자기 자신의 날개를 활짝 펼치며 개를 위협합니다. 그것에 놀라 개가 자기 등을 바닥에 대고 배를 드러내며 깨갱거리는데, 그러다 그 상황이 끝난며 자리에서 일어나고 '아 쪽팔려'하는 것없이 잊어 버립니다. 그리고 그 과정 전체가 위엄입니다.
●내 마음의 땅에서 피는 온갖 꽃들이 있습니다. 기쁨, 슬픔, 분노, 질투.......이것들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기쁨이 전할 수 없는 그 무엇을 슬픔이 전해 줍니다. 외로움에서 벗어나려하면 절대 외로움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진실로 외로움을 받아들여보면 어떤 안도감, 위로가 전해집니다. 어떤 수행으로도 채우지 못했던 위로가 외로움속에 있습니다.
●진실로 모름을 받아들이면, 모르는데 모름이 더 이상 문제되지 않게되고, 모르는데 그때 어떤 지혜가 올라올 수 있습니다. 잡생각도 꽃입니다. 밖으로 구하면 지금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힘들어 집니다. 고요하려 하기에 잡생각이 힘들어집니다. 고요함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고요함을 구하기에 그렇습니다. 이대로가 해탈인데 중생이 되는 이유는, 지금 이것아닌 다른 것을 구하기 때문이고, 사실 그 다른 것을 모르면서 안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추구하기에 병이 되는 것입니다.
●매화꽃이 피었다가 지니 그 자리에 열매가 달립니다. 모든 것들은 일어났다가 사라집니다. 일어남을 거부하거나 외면하지 말고, 내 안의 꽃, 망상이든 불안이든, 이 모든 것들은 일어났다가 곧 사라지는데, 이 일어나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더니, 이 꽃이 떨어지면서 열매를 맺습니다. 설명할 수 없는 평화, 꽃하나를 꺾지 않았더니, 그 꽃을 온전히 경험하면 그 꽃은 저절로 지는데, 그때 더 이상 다른 것을 추구하지 않게되는, 매순간 있는 그대로 존재했을 뿐인데 설명할 수 없는 만족감, 생로병사를 넘어선 만족감이 생겨납니다.
●기쁨, 슬픔, 멍청함이 올라올 때 그 자체가 가지는 에너지가 있는데, 그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그것을 외면하거나 거부하지 않으면 됩니다. 기쁘면 기쁨의 에너지, 슬픔이 오면 슬픔의 에너지, 이 세상에 밝음만 있으면 인간은 고통받습니다. 어둠을 통해 인간은 위로 받습니다.
●마음안에서 끊임없이 많은 것이 올라오는데, 슬픔/외로움/초라함을 업신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질투가 일어나는 것을 싫어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그것을 싫어하지 않으면 진실로 싫어하지 않게 됩니다. 모든 것이 다 나라는 것을 깨닫게 되고, 비로소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게 됩니다. 어두운 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하게 됩니다.
●전부가 나이기에 드러낼 자신이 없습니다. '난 이런 사람이야'할 수가 없게됩니다. 높일 나가 없게됩니다.
●사랑이란 목표를 정해서 자신을 닦달하는 것일까요? 사랑은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바라봐주고 허용하는 것입니다.
●내 마음의 땅에서 끊임없이 피었다 지는 꽃들, 그것이 지면 열매가 맺지만, 그것을 꺾어 버리면 난 항상 남들을 의식하게 되고, 뭔가를 지키려 듭니다. 어떤 것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면 놀라운 충만이 나타납니다. 자기 안에서 일어나는 것을 만나고, 그것을 외면하지 않으면 내 자신안에서 비교하지 않으면, 밖의 세상에서도 비교하지 않게 됩니다. 내 안에서 끊임없이 작은 꽃들이 피어납니다. 감정, 생각, 느낌이라는 꽃들이 피어나고, 그 어느 하나도 꺾지 않으면 넘치는 평화를 선물받게 됩니다.
진정한 관계는 상대방을 향해 열린 깨어 있는 관심이 있으며, 그 안에는 어떤 바람도 없다<에크하르트 톨레>
<야단법석>
●사람들이 잘 놓치는 부분이 있습니다. 당신이 처음 부산 모임에 왔을 때, 인사를 나누는데 말더듬이가 있어 자신을 소개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리고 말더듬이를 고치고 싶어 저를 찾아왔었습니다. 부산모임에 오고나서 몇주후 저에게 전화를 해서 과대표로서 앞에 나서서 발표를 해야하는데, 1주일동안 연습을 하고 마음을 졸았는데, 발표하루전 저에게 전화를 해서 어떡하냐고 물었습니다. 앞에서 쩔쩔매다가 말더듬이인 자신을 보고 사람들이 실망한 모습을 볼 때, 그 망가진 모습을 보여주기가 싫다고 말했습니다. 과대표답게 당당하게 말을 더듬지 않고 발표를 하게되면 좋겠지만, 말을 더듬더라도 그런 자신을 받아들이고 스스로 부끄러워하지 않을 때 사람들은 그것에 감동한다고 말했지만, 그런데도 불구하고 자꾸 걱정이 되어서 말을 하니, 제가 화가나서 전화를 끊으라하고 먼저 끊어버렸습니다. 그 다음주에 이 친구가 제 강의에 와서 하는 말이 '거침없이 살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말은 더듬겠지만, 마음이 거기에 함몰되지 않는, 말 더듬는게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 일이 있고 당신은 10년이 지나 다시 오늘 여기에 왔습니다. 사회적 역할이 커졌는데, 주변의 기대가 있고, 그들의 인정과 칭찬을 받을 수 있는 자신이 되고 싶어 다시 저를 찾아왔습니다.
사람은 사회적으로 강한자가 되려하는데, 자기안의 약함, 초라함을 시인하고 인정할 때, 초라함 그것을 통해 배우고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은 자신에게 있는 초라함이 드러날까 두려워 감추고, 겉으로 드러나는 강함만을 보여주려 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문제가 있는데, 문제 없기만 바라는, 자신의 약함을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시인함으로써 내가 더 깊어지고 더 섬세하게 자신을 느끼고, 더 깊이 들어가서 자신의 두려움과 상처들을 만나고 그것을 인정하게 되었을 때, 더 깊어지고 그러면서 더욱 편안해지고 강해질 수 있습니다.
이게 우리 모두의 착각인데, 자기안의 부족함을 만나지 않고 완전하려고 하면 자신이 원하는 모습을 결코 이룰 수 없습니다. 자기자신에 대한 솔직함,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인정할 때 힘있는 모습으로 살아갈 수 있는데, 마침 지금 그 흔들릴 때 여기를 찾아와서 참 고맙습니다.
○연기와 투사와의 관련성이 궁금합니다.
●이것으로 인해 저것이 생겨나는, 이게 연기인데, 반야심경에서 연기가 부정됩니다. 이것은 하나의 인과인데, '불이나니 연기가 난다'고 우리는 이해합니다. 그런데 불이나는 것과 연기가 나는 것 둘 사이에 연결이 없습니다. 아무 연관없이 불과 연기가 존재할 뿐입니다. 이 연관없는 것을 우리가 이해하기위해, 우리 지식이 연결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릴 때 상처입었기에 지금 외롭고 힘들다, 그래서 과거로 돌아가 원인을 밝히고 치유하려 하는데, 그럴 필요없이 지금 올라오는 이것만 만나면 과거와 미래의 모든 상처가 치유됩니다.
내 안에 있는 상처가 상대방의 말을 오해합니다. 그러면서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되는데, 이 투사로 인해 참 많은 문제가 생기게 됩니다. 내가 내 자신을 제대로 보게되면 그래도 투사가 많이 줄어들게 됩니다. 내 상처가 상대의 말을 오해하고 투사하게 됩니다. 그래도 저는 투사도 괜찮다는 배짱이 생겨 났습니다. 이 투사도 괜찮구나. 이 투사를 통해 굉장히 많은 것들을 배웠기 때문입니다. 이 투사를 통해 더욱 섬세하게 자신을 보게 되고 성장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인간이 곧 투사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투사가 우리 삶에서 없어지겠습니까?. 투사는 밖으로 향하지만, 자기자신을 보는 내면의 눈이 있으면 그 투사를 통해 배울 수 있게 됩니다.
○저는 최근에 저에게 연속성이 없어지는 것을 느낍니다. 지나간 시간이 연속되지 않습니다. 연속된 시간이 없습니다. 학교에서 제가 잘못한 일들이 있었는데, 그것에 대해서도 이차적인 감정이 생각되지 않고, 그래서 그냥 그 순간뿐인. 어릴 때 엄마가 나를 구박해서 지금 자존감이 낮고 불행하다고 생각해왔었는데, 지금은 그것이 그저 머릿속의 생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고, 그러면서 연속성이 떨어져 나가고, 어떤 사건을 경험할 때 2차적 감정이 들지 않고, 또 지금 내가 경험하는 이것이 내 영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면서 내 자신이 대견해 질때도 있습니다. 오는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어떤 것은 정말 어떻게 해볼 방법이 없고 그래서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내가 그냥 그럴분인데, 그래서 그냥 지금 이것뿐이다라는, 최근에 그런 것들이 많이 느껴지는데, 그게 연기와도 연결되는 것 같습니다. 연기가 없는, 받아들인다/아니다도 없는......
●생각이 사건을 연속시키고, 또 그렇게 연결해야 이해가 되기 때문입니다. 서울에 한 친구가 있는데 이친구가 자신의 강박을 받아들이면서 삶의 다른 많은 부분들을 해결해나가는 친구인데, 이처럼 하나가 해결되면 다른 것들은 자동적으로 해결되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친구가 기태선생님은 받아들이라고 말하는데, 이 말이 틀렸다, 받아들이는게 아니라, 그냥 그것일뿐이다라고, 맞습니다. 사람들은 혼란스러움, 우유부단을 견디지 못하는데, 그냥 그 속에 있어보면 그것이 스스로 정리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내 삶을 다른 각도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생겨나게 됩니다. 내게 나약함이 있다는 것은 남이 가지지 못한 선물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을 피하지만 않는다면......
올해도 안솔기에 튤립이 예쁘게 피어났습니다.
좁은 실내에서 양조위와 장쯔이가 무술 대결을 펼치는데, 장쯔이가 실내여서 좁다고 하니, 양조위가 말합니다.
'쿵푸는 섬세합니다. 우리의 대결에서 무엇이라도 하나 깨지면, 그것은 저의 패배로 하겠습니다.'
<일대종사, 양조위, 장쯔이 주연>
사람들과의 관계는 섬세합니다. 그 관계에서 무엇인가 문제가 생기면 그것을 저의 공부처로 삼겠습니다.
●제가 어느 모임에서 말했습니다. 저는 34년동안 내가 내 자신에게 한번도 진실해본적이 없음을 문득 깨닫고 밤새도록 울었었다고, 그랬더니, 거기 모임에서 한분이, 선생님 말을 들으니 슬프다고, 난 가급적 다른 사람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좋은게 좋은 것으로 여기며 살아왔다고, 내가 좀 손해 보더라도 좋은게 좋은거니까, 이렇게 살아온 내가 선생님 삶의 이야기를 들으니 울렁증이 일어난다고. 그래서 제가 그분께 말했습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을 항상 피해왔다. 힘들고 싫으면 다른 생각을 통해 빠져나가고, 항상 당신은 당신 자신을 외면해왔다. 그렇게 평생을 살아온 당신이, 진리산 토굴에서 끊임없이 남들에게 인정받고 사랑받으려했으며 자신에게 단 한번도 진실해본적이 없는 자신을 깨닫고 하루종일 펑펑울었다는 나의 이야기가 당신에게 울렁증을 일으킨 것이다. 당신 자신의 영혼의 억압이 그런 슬픔과 울렁증으로 온 것이다. 우선은 그렇게 피할 때 괜찮을 수 있다. 그러나 언젠가는 당신에게 감당할 수 없는 상실과 절망으로 오게 될 것이다. 자기자신에게 무책임한 당신에게 책임을 지게하는 그것이 당신에게 올 것이다. 그러니 지금 책임질 수 있는 것은 지금 만나고 책임을 지라고 말했습니다.
○이렇게 살아온 내가, 내가 왜 그렇게 살았을까하는, 그게 너무 가슴이 아픕니다. 왜 그렇게 미련하게 살았을까하는, 그러면서도 지금도 여전히 감정들이 무엇인가 부딪히면 올라오는.......
●'다시'올라오는 것은, 사실 처음이고 태초입니다. 이것을 '다시'라고 말하는 것은 생각이 연속성을 부여하는 것이고, 과거의 연장선상에서 해석하는 것입니다. '다시'라고 연결시키지 말고, 이것 이대로 만나면 그것이 귀한 배움이 됩니다. 인간의 모든 고통의 원인은 사랑의 결핍입니다. '다르게 살 수도 있었는데'하는 회한, 그러나 그때는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때 어떻게 자기삶의 주인이 될 수 있었겠습니까?,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받아들이면, 그래서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자신을 위해 울어주게 되면 회한이 사라집니다. 그렇게 살 수박에 없었던 자신을 품으면, 그 어쩔 수 없는 사실을 품어주면, 회한이 끝이나게 됩니다. 그리고 그게 자신과의 만남이고, 그 진정한 만남이 지금을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힘을 낳게 됩니다.
●지금을 받아들이면 이 아픔의 원인들이 보여집니다. 이 아픔을 외면하는 동안에는 보지 못했던 상처와 기억들이 떠오릅니다. 그리고 그때 이것 때문에 내가 이토록 힘들었구나하며 그 원인들을 원망하는게 아니라, 누구를 탓하거나 원망하는 마음이 생기는게 아니라, 그냥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허용하게 됩니다. 자신을 받아들이면 '원인을 찾아서 누가 잘못했네'하는게 아니라, 진실로 아팠던 자신을 껴안고 울어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이 아이가 받았던 한을 내가 풀어주게 됩니다. 그러면서 현재의 마음이 풀어지게 됩니다.
●모든 것이 해결되어야 한다는게 미망입니다. 해결되지 않음, 이것속에서 섬세하게 우리는 배워나갑니다.
○상대방이 어떤 말을 저에게 할 때, 나를 지적하는 것 같은, 그래서 미워하는 감정이 올라옵니다. 또 혼자 있을 때는 너무 외롭게 느껴집니다.
●외로움이 참 좋은 것입니다. 외로움이 올 때 이 외로움을 밀쳐내는게 먼저 옵니다. 서러움과 한탄, 그때 자각을 해서 외로워보자, 더 외로움속으로 들어가 보자하며 외로움과 소통해 보는, 외로움이 올 때 '살기싫다, 죽고싶다'하는 이것도 하나의 회피입니다. 이런 외면과 회피를 통해서는 마음의 평화를 결코 얻을 수 없습니다. 이 외로움을 통해서 사랑받으려는 욕구를 영원히 내려 놓을 수 있습니다. 외로움이 올 때 한탄하는 것, 그것은 어린아이가 하는 짓입니다. 내가 얼마나 외롭게 살아왔는지 알아하며 한탄하고 남들에게 적당히 위로 받으려하는데, 그러지 말고 그 외로움을 자신이 책임져 보는 태도가 필요합니다.
'게을러 터진 녀석' 아버지는 내게 말했다.
'평생 게으름뱅이로 살 녀석!'
그러자 이런 생각이 들었다. 게으름뱅이로 산다는 게
이 개새끼와 정반대로 사는 거라면,
앞으로 꼭 그렇게
살아야겠구나.<찰스 부코스키>
삶은 늘 엉뚱하고 예측 불허인것 같습니다.
○아버지에 대한 서운함. 다른 사람이 볼 때 아버지는 모범적인데, 제가 봤을때는 서운함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항상 오빠가 먼저였고, 오빠만을 생각하고, 지금 중년이 지난 나이인 제가 그런 아버지에게 서운함이 있습니다. 이런 서운함을 느끼는 '내'가 나쁜 사람일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남편에 대한 느낌도 아버지와 같습니다. 한번씩 이런 느낌이 올라옵니다. 남들은 아버지, 남편을 모범적으로 보지만, 저는 많이 서운합니다. 아버지는 항상 남편편을 들고 또 남편은 시어머니편만을 듭니다. 그럴 때 저는 정말 서운 합니다. 그러나 저는 정말 모르겠습니다.
●당신은 서운할 수밖에 없습니다. 한번도 어릴적부터 존중받지 못했기에, 늘 외면 당했기에 서운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왜 이렇게 서운하지하고 묻지 말고, 억울하고 서운한 것이 올라오면 그 감정을 탓하지 말고, 그 감정을 허용하십시오. 부모가 부모역할을 온전히 못했는데, 내가 잘못한게 아닌가하며 자기탓으로 돌립니다. 그러면서 서운함을 가진 자신을, 그런 자신이 잘못한게 아닌가하는 자기탓으로 돌립니다.
올해 제가 거듭 다짐한게 '사랑받으려는 모든 의도와 행위를 놓아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자 그것은 내게 자신의 내면아이를 보여줍니다.(삶이 참 신비롭습니다.)
저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겠습니다.
감사합니다. 5월에 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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