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우병 수입 소를 먹는 것 자체도 ‘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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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0.♡.211.184) 댓글 0건 조회 6,899회 작성일 08-05-10 11:05본문
‘나’라는 변수의 포기
현재 우리가 직면하는 현실은 그럴 수밖에 없기 때문에 보여지는 모습이다.
따라서 현재 미국산 광우병 의심 소 수입 추진절차가 진행되는 것도 그 자체로 온전한 현실이다.
기존의 ‘수동적이고 관념적인 도’를 하는 이들과 ‘무조건 하나님에게 의존하는 이들’은 여기서 딱 멈춰 서게 된다.
‘어차피 현재의 모습 그대로가 진리(하나님의 뜻)인데, 내가 나서서 뭐하겠냐?’고 말이다.
(이들은 같은 논리로 약자가 억눌리는 세상, 없는 이가 굶주리는 세상, 환경이 파괴되는 세상이 그 자체로 온전한 것인데 내가 나서서 뭐하겠냐? 고 말한다. )
이들이 이 상태에서 멈춰 서는 것은 그들 각자의 실존적 판단과 결정이기 때문에 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다. 하지만 이렇게 ‘있는 그대로’의 현실만 인정하는 것에 ‘그치는 것’은 ‘중요한 것’을 빼놓은 것이다. 그것은 바로 ‘나’라는 변수다.
각자들은 온전한 ‘도’적 이해에 다다르기 위해서는... 또한 온전히 ‘하나님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나’를 우선 버리라고 했다. 사실 그 말은 일견 맞는 말이다. 현대사회를 살아가기 위해서 극도로 집중되고 편협화 된 ‘나’(자아)를 깨트려야만 그 안에 ‘진리’ ‘하나님’을 채워 놓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렇기 때문에 ‘나를 버려라’ ‘나의 의지작용을 멈추고 수동적인 수용의 상태를 만들어 내라’는 가르침이 분명 필요하기는 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무턱대고 ‘나’라는 현실변수를 포기하고 무턱댄 ‘버림’과 무턱댄 ‘수용상태’만 쫓는 것은 올바른 ‘도’ 혹은 ‘하나님 믿음’일까? 이러한 무턱댄 ‘버림’과 ‘수용상태’의 추구는 혹시 현대사회의 번잡함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극히 (이기주의에 가까운)개인주의적 발상이 아닐까?
이러한 발상 자체가 ‘주관적 관렴론’ ‘수동성’의 계선상에 근접해 있는 것 아닐까?
‘나’라는 변수의 적용
세상이 나에게 적극적인 자극의 기회(먹을 식량, 삶의 기회)를 주듯이, ‘나’도 버리기기만 하고 수용만 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세상에 능동적 ‘작용’(식량 생산, 능동적 삶)을 해야 하지 않을까? ‘나’를 변수로 이용해서 올바른 ‘도’의 작용, ‘하나님의 믿음’을 이뤄낼 수 있지는 않을까?
물론 이때의 ‘나 자신의 작용’은 과거와 같이 ‘나’의 주관적 삶을 중심으로 집중되는 편협한 자아작용이어서는 안 된다. 인류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거대 자아로 확대되어야만 그러한 ‘자아작용’은 온전한 세계작용으로 이어질 것이다. ‘진리의 추구자’로서 또는 ‘하나님의 어린양’으로서...
이렇게 기존의 편협한 자아를 버린 상태에서 인류와 생명으로 확대된 자아를 갖춘 이들의 ‘능동적인 작용’은 일반적인 ‘도’의 전문가들이 말하는 ‘여성적 수용성’ 만큼이나 중요한 작용이다. ‘도’에서 강조하는 일방적인 여성성만이 아닌, 현실적으로 ‘남성성’도 존재함의 현실에서 볼 때 이러한 남성성(능동성)을 어떻게 잘 접목할 것인지는 시대적 위기에 처한 우리 각자의 고뇌여야 한다.
또한 이러한 확대된 자아를 갖춘 이들의 ‘능동적인 활동’은 일반적인 목사들이 이야기하는 ‘무조건 나를 버리고 하나님에게 맡김’ 만큼이나 중요한 현실적인 필요를 만들어낸다. ‘거지를 네 이웃과 같이 사랑하라’ 그리고 (검소와 가난의 삶이 요구되는 현대사회에서) ‘옷 두벌과 신발 두짝이 있으면 한 짝씩을 없는 이들 주고 나(예수)를 따르라’는 말에 복종하기 위해서는 수동적인 ‘믿음의 행위’만이 아닌, ‘능동적이고 실천적 활동’이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다.
하이튼 이러한 시점에서 기존의 극히 수동적인 의미로만 해석되던 ‘무위’ ‘믿음’이 온전한 ‘생명력’을 얻게 된다. ‘나’라는 존재가 눈에 보이는 현실을 그냥 ‘관찰’하고 ‘인식’하며 ‘수용’하는 존재로서만이 아니라, 능동적 ‘작용의 변수’로서 온전한 가치를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 무위의 오용에 대하여 참조
구체적으로 ‘광우병 문제를 비롯한 굶어죽는 인류, 사회적 약자의 억압, 환경파괴, 후손들의 존립의 위태로움 등의 세계의 문제를 그냥 ‘지켜보는 관찰자’(여성적인 수용성/연약한 어린양)로서만이 아닌, ‘작용하는 활동가’(남성적 능동성)의 측면과 접목해서 이의 개선을 위한 노력을 해야하는 것이다.
이러한 수동성(수용성-자기버림/하나님에게 맡김)과 능동성(실천적 활동성)의 접목은 편협한 인간의 개인성이 세계에 빚어낸 인위적인 작용의 노폐물들을 걸러낼 수 있을 것이다.
‘나’라는 변수를 포기하는 ‘수용적(수동적) 도 관념/ 믿음의 관념’
물론 이는 과거 ‘노장적’ 사고의 ‘주관적’ 측면만 강조하면서 ‘개인적 마음의 평안’을 쫓던 이들의 관점에서는 상당히 ‘부당한’ 발상으로 보일 수도 있다. 모든 문제의 근원이 ‘나의 내면’에서 시작되는 것인데, 어째서 나의 내면의 문제도 제대로 다뤄 낼 수 없는 우리 인간이 ‘세상’의 문제를 다루겠는가? 라고 말이다.
또한 ‘무조건 믿으면 된다’는 식의 수동적 믿음의 교리에 빠져 있던 기독교인들의 입장에서도 ‘하나님에게만 맡기면 되는데 내가 굳이 나설 필요가 뭐가 있느냐?’라는 반발을 살만 하다.
하지만 그들의 이러한 ‘발상’ 또한 하나의 ‘형이상학’(만들어진 관념)이 아닐까? 왜냐하면 ‘나’와 ‘세계’는 근본적으로 분리해서 따로 생각할 것이 아닌 것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하나이면서 둘’이다. 노자와 장자, 석가, 예수가 했던 수 많은 말씀에서 이 요점은 드러난다.
다만 우리의 피부로 경계지워진 ‘개체성’과 이를 통한 ‘자기인식’이 ‘나’와 ‘세계’를 둘로 나누고, ‘나의 마음이 중요하다.’ ‘나는 하나님만 믿으면 세상의 일은 알아서 해주신다’는 식의 이분법적인 이해를 조장하는 것이다.
표현적으로는 ‘세상은 없다. 오직 나의 마음만이 있다’ ‘나는 하나님에게 맡기기만 하면 된다’는 식으로 애매모호하게 개념을 정리하지만, 기실 그들은 철저한 이원론자들이고 이를 통해서, ‘사회적 실천’의 필요성 자체를 무시하는 ‘주관주의’에 귀착하곤 한다. 그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해서 그들은 현실 문제에 관심 가져야 할 필요성을 제거한다.
수용(수동)적인 ‘도’ 관념을 갖고, 기도와 찬양만 통해 ‘예수’ 믿는 이들이 현재 광우병 사태에 대해서 대처할 수 있는 아무런 ‘이론적’ ‘사상적’ 기반이 없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그들은 그냥 가만히 앉아서 ‘모든 세상의 분란은 내 마음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라는 말을 읊조리거나, ‘하나님이 모든 것을 처리해 줄 것이다’고만 읊조리가만 하면 된다. 그러한 이해와 믿음을 가진 이들이 현재의 광우병 사태에 ‘발끈’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들 자신이 가진 이해에 대한 배신의 다름이 아니다.
노장-석가-예수의 ‘공’사상과 실천적 능동성
하지만, 노자와 장자 그리고 석가모니, 예수는 ‘나의 마음의 문제만 매달려라’ ‘믿기만 하면 모든 것이 해결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나와 세상이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이라는 관계성’의 문제에 고민하고 실천하라고 이르고 했다. 이는 말하자면 ‘공’의 개념의 다름이 아니다.
이러한 (모든 것이 맞물리는 세계상)‘공’의 개념을 바탕으로 ‘나와 세계가 하나이면서 동시에 둘이다’는 이해에 다다를 수 있고, 이에 따라 ‘현실 참여’의 필요성을 감지할 수 있다. 즉 ‘세계’는 ‘나’의 일부분이기 때문에 세계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 (내가 내 마음의 어떤 잘 못된 문제를 정화하는 것처럼) 나서서 세계를 바꿔낼 필요성이 여기에 생기는 것이다. 물론 ‘공’의 사상을 온전히 체득한 이들에게 있어서의 이러한 세계에 나서는 ‘실천적 활동’은 기존의 편협한 자아의 활동과는 질적으로 차이가 있기 때문에, 그 나섬의 행위는 자기 자신은 물론 세계에게도 좋은 활동이다.
즉 ‘나’의 활동이 ‘나이면서 내가 아닌’ 세계에게도 도움이 되고 내 자신에게도 긍정적으로 작용되는 것이다. 이를 통해 기존의 극단적으로 수동적인 세계인식으로부터 삶은 좀 더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그 무엇으로 작동되기 시작한다.
왜곡된 세계인식
더불어 한마디 하지면 세상의 문제를 개선한다고 나서는 이러한 모든 활동이 ‘나’와 ‘세상’에게 좋은 활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앞서 말했던 대로 기존의 편협한 자아의식을 깨트리고, 인류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온전한 세계의식 없이 나서는 활동은 그 자신에게도... 그리고 세계에게도 아무런 득이 되지 않는다. 이번 광우병 사태에 대한 상당수 대중들의 저항은 그 단편적인 모습이다.
왜? 이러한 광우병 사태가 만들어지는지, 왜? 미국에서 그런 소가 만들어지는지고 수입되는지에 대한 이해 없이 무조건 광우병 쇠고기 수입만 반대하는 것은 그 자신이 지금 당장 안 먹을 수 있는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을지는 몰라도, 근원적으로 더 큰 부조리를 파생시킬 수 있다.
이러한 문제가 빚어지는 것이 결국 현재의 우리 자신의 ‘많이 쓰고 많이 소유하려는 의지’가 감자 덩쿨처럼 얽혀져 있는 사건의 한 단편 인지를 염두하지 못하고, 즉 우리 각자의 욕망이 빚어낸 ‘현재적 사건’인지를 확인하지 못하고, 이러한 문제까지를 있게 한 우리의 욕망을 들여다보고 난 후에 ‘가난’과 ‘검소’를 자처할 의지를 갖지 못한 상태에서 ‘미국산 소고기 안먹는다’는 식의 무턱 댄 저항만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이기적인 발상이기 때문이다.
이 말은 다시 말하자면 ‘세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이 중요해’라고 얘기하면서 그 전부터 세상에서 빚어지는 부조리에대한 비 관심을 경주해왔던, 수용적(수동적) 도 관념을 가진 이들이과 ‘하나님만 믿으면 땡이다’는 식의 믿음을 가졌던 이들이, 광우병수입소를 반대하는 것은 극히 이기적인 발상이라는 것이다.
이는 비록 표면적으로는 부당한 ‘사회문제’에 대처하는 활동인 것은 분명하지만, 그것이 인류와 생명을 품을 수 있는 탈각한 자아에 의해서 추동된 활동이 아니라, 단지 ‘나는 저런 소 먹을 수 없어’라는 편협한 자아들의 이기적인 외침이라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라는 것이다.
물론 이번의 기회를 통해서 우리는 스스로의 세계인식을 넓히고 ‘인류’와 ‘생명’을 품에 안을 수 있는 길을 틔워 낼 수 있다. 이러한 하나하나의 활동을 통한 ‘훈련’을 통해서 기존의 주관적이고 관념론적인 세계인식을 탈피해서 세계와 온전히 작용하는 기회를 본격적으로 얻을 수 있다. 이를 통한 인류와 생명에 대한 꾸준한 관심과 실천은 밀가루 반죽 다져지듯이 현실 속에서 ‘체현’되어 우리가 보다 온전히 이 대지에 발 디디게 설 수 있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렇게 새로운 이해에 발을 디디기 전에 우리는 이전까지 매몰되어 있었던 편협한 관점에 대한 통렬한 반성을 선행해야 한다.
맺으면서...
이러한 장황한 이야기를 들어본 바 없는 이들은 ‘진리는 단편적인 통찰을 주는 이야기(경구)들 속에 존재한다’는 편의적인 이해(아포리즘)에만 매몰되어 이 장황함 자체에 대한 거부반응을 보이곤 한다.
하지만 편견을 걷어내고 보면 위의 기술된 이야기들은 그냥 ‘온전히 자유로우라’는 말을 그냥 구체적인 표현으로 사용한 것 뿐이기에 그 ‘양’과 ‘장황함’에 무턱대고 고개 돌릴 일은 아니다.
정리해 보자면 광우병소가 현재 수입되는 것은, 연 4천만명이 굶주려 죽고, 생태계 파괴가 진행되고 있는 것처럼 그 자체로 ‘도’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이다.? 하지만 이때의 ‘도’(하나님의 뜻)는 ‘나’라는 존재의 ‘능동적 변수’를 고려하지 않은 ‘수용적(수동적)’ 관점 지향의 도이다(소승불교적 차원의 도). 이런 도(믿음)를 하고 있는 이들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을 반대할 필요 없이 그냥 먹어주면 된다. 그러면서 ‘이것 자체도 있는 그대로의 현실이다. 세상은 내가 나서서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내 마음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뜻이다.’는 그들 나름의 진리를 읊조리면 된다. 이들의 입장을 논박할 근거는 세상에 없다. 그들에게는 광우병 소를 먹는 것도 ‘도’이자 ‘하나님의 뜻’이다. 그러한 ‘수용적(수동적)’ 도 관념과 믿음을 가지고 있는 이는 나름의 높은 이해의 경지는 존중해줄만하다.
하지만 수용(수동)적인 현실 인식만이 아닌, ‘나’라는 존재를 ‘변수’로 이용해서 능동적으로 세상을 살아내고 싶은 이들에게는 다른 방법의 ‘도’와 ‘믿음’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광우병 소에 대해서 인간과 생명을 감싸 안으려는 대아적인 관점에서 이를 막기 위해 노력하는 것 자체도 ‘도’와 ‘믿음’이 되는 것이다.(대승불교적 차원의 도) 물론 이러한 이들은 광우병 소 만이 아닌 인류사에 주워진 수 많은 난제에 대한 책임을 자신의 것으로 여길 것이다.
사실 ‘평화의 시대’와 ‘순환의 시대’(이놈이 권력 차지했다가 저놈이 권력 차지하는...)에는 수용(수동)적 / 주관적 / 관념적 ‘도’(믿음)는 개인의 취향쯤으로 권장될 만도 하다. 왜냐하면 ‘평화의 시대’에 자유롭게 자신이 원하는 사상을 취할 수 있음은 말할 나위 없지만, ‘이놈이 권력을 차지했다가 저놈이 권력을 차지하는’ 순환의 시대에는 어차피 세상이 이렇게 바뀌나 저렇게 바뀌나 아무런 차이가 없을 것이기에 ‘수용적-주관적-관념적’ 도(믿음)에 한세상 파 묻혀서 나무그늘 아래서 바둑 두는 것으로 세월 때우거나, 찬양에 시간 보내는 것도 그 나름의 운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는 인간의 과도한 욕심이 불러일으키는 자원고갈과 환경파괴로 ‘공멸로 치닫고 있는 시대’이다. 현재적 위기 상황에 우리가 적극적 대처를 하지 않으면 우리 자신은 물론이거니와 생태계와 후손들의 존립 가능성 자체가 불가능해진다. 더군다나 문제는 그러한 ‘수용(수동)적-주관적-관념적’ 도(믿음)를 하는 이들의 ‘일상적 삶’의 수준 자체가 환경과 생태계를 파괴하는 역할을 하고 있으니, 기존의 수동적 도 관념(믿음)을 전환하여 보다 적극적이고 능동적으로 세계를 인식하고 작용할 필요가 대두된다.
귀가 있는 이들만 들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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