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필드에 대한 김기태 선생님 답변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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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김영대 (211.♡.9.67) 댓글 6건 조회 11,508회 작성일 06-02-10 19:12본문
>> ... 님이 쓰신 내용 <<
안녕하세요 김기태 선생님. 궁금한 질문이 하나 있는데, 선생님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다름이 아니오라, 요즘 도덕경 모임에 가면 종종 붓다필드 회원들이 참석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선생님 또한 그곳 사무실에 들러 붓다필드의 여러 가르침들을 듣고 그곳 분들과 대화를 나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저 또한 그곳의 멤버이기도 했었지요.
넓게 보면 마음을 열고 각자의 영역을 교류하는 아름다운 영성인의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도덕경과 붓다필드는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 근본적인 것에서 다른 관점을 가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가르치는 내용뿐만 아니라 방법 등에 있어서도 그렇지요. 이러한 여러 상이점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조화와 수용이 이루어질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요. 이와 관련, 몇 가지 의문이 드는 것에 대해 선생님의 견해를 듣고 싶습니다.
첫째, 붓다필드는 스승이 제자에게 견성인가를 해주는 독특한 제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견성인가라는 것에 대한 김기태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둘째, 붓다필드에서는 에고 따로 본성 따로 구분하기도 하여 생각의 주인이냐 노예냐를 대단히 강조합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한 생각에 불과하며, 그 생각보다는 그 생각을 만들어낸 나를 자각하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가르침에, 선생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셋째, 그곳의 여러 오컬트(신비적인)적인 ― 사후세계, 유체이탈, 여러 초능력, 초탈, 스푼벤딩, 전생 읽기, 의식과 상념의 힘, 순간이동 ― 등의 체험과 가르침에 대해 선생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붓다필드 회원들과의 대화에서 전체적인 그곳의 인상은 어떠하신지요 .
탁 깨놓고 갈만한 곳인지 아닌지, 가르치는 내용이 알맹이가 있는지…. 아직 충분히 검토할 시간이 없어서 답하기가 곤란해요 요러시면 실망해요^^ 애매함의 환상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용~ 화끈한 설명 부탁해요^^ 기면 기다 아니면 아니다 우린 이런 단순한 걸 조아해요^^ 다소 질문이 애매한 듯 보이나, 그래도 선생님이 직접 그곳 분들을 접해 보았기 때문에 나름대로 질문의 뜻이 전달되었을 것으로 알며, 많은 영성인들의 의문에 선생님의 견해가 도움이 되기를 바랍니다.
* * *
안녕하세요, ...님.
그동안에도 잘 계셨는지요?
질문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지난 수요일 부산 김영대 선생님댁에 갔다 와서는 곧바로 답변을 드린다는 것이 그 다음날인 목요일에는 일본으로 전시회를 떠나는 네 사람을 김포공항까지 짐과 함께 태워다 주고 또 저녁에는 밤늦게까지 정기모임 강의를 하느라, 금요일엔 종일 컴퓨터앞에 앉아 '질의응답' 방의 <상처에 대하여>라는 글을 탈고(脫稿)하느라, 토요일엔 아침 일찍부터 발목 인대가 늘어나 석 달 열흘간을 고생하고도 여전히 제대로 걷지도 못하고 있는 집사람을 좀 멀리 떨어진 용하다는 한의원까지 태워다주고 하는 등으로 종일 집안일을 돌보느라, 일요일엔 장성한 아들이 셋인 어느 가족과 함께 여섯 시간에 걸쳐 '가족 상담'을 하고 또 저녁엔 멀리 안면도에서 온 사람을 만나 밤 12시까지 얘기를 나누느라 이제서야 ...님의 질문에 답변을 드립니다. 질문을 하신 지 이미 여러 날이 지났음에 죄송한 마음을 전하면서, 이제 님의 질문에 조목조목 답변을 드리고자 합니다.
(1) 요즘 도덕경 모임에 가면 종종 붓다필드 회원들이 참석하는 것을 목격합니다. 선생님 또한 그곳 사무실에 들러 붓다필드의 여러 가르침들을 듣고 그곳 분들과 대화를 나누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넓게 보면 마음을 열고 각자의 영역을 교류하는 아름다운 영성인의 모습이기도 하겠지만, 도덕경과 붓다필드는 주장하는 내용이 서로 근본적인 것에서 다른 관점을 가지는 걸로 알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이점이 존재하는데, 어떻게 조화와 수용이 이루어질까 하는 의문이 드는 것이 사실이지요.
☞ 저도 올 해 초부터인가 몇몇 사람들이 '붓다필드'에 대해서 얘기를 하면서 저보고 아느냐고 묻기도 하고 또 홈페이지 주소도 가르쳐 주면서 그 글들을 한 번 읽어보라는 말들을 하는 것을 곧잘 듣고는 있었습니다. 더구나 지난 95년에 하늘이 맺어준 내 동생 성희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더니 그곳에서 '미키'라는 아이디로 활동하면서 잘 살고 있다는 말들도 들었지만, 성희의 글을 읽어보려고 몇 번 그 홈에 들어간 게 다일 뿐 사실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두어 달 전에 서울 미내사 강의에 갔을 때, 제 책을 읽은 '설악산 자연학교' 교장 선생님과 또 다른 선생님 한 분이 저를 만나러 왔고, 그 분들을 통하여 '사바리'라는 사람을 만났는데, 새벽 4시까지 나눈 이야기들 속에서 평생을 수도(修道)하신 그 분의 얘기가 참 많이 공감되었더랬습니다. 그래서 '아, 또 이렇게 좋은 사람을 만났구나…'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두 번짼가 만났을 때 갑자기 그리고 익살스럽게 그 분이 '붓다필드'에 같이 회원 가입을 하자는 겁니다. 새로 만난 좋은 인연이 하자는데 굳이 안 할 것도 없고 해서, 저의 붓다필드 '회원가입'은 그렇게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그렇게 회원가입이 되고 보니, 어떤 사람들이 거기에 오는가가 문득 보고 싶어졌습니다. 그리고 어떤 가르침을 펴는가도 알고 싶었구요. 더구나 오래 전 박석 교수님 모임에서 인연된 조내과 원장님이라는 분이 거기에 계신다는 얘기도 들었고, 어쩌면 오랫동안 못 본 성희도 볼 수 있겠구나 싶었던 것이지요. 그런데 성희는 볼 수 없었고, 조내과 원장님과는 정말 오랜만에 반갑게 만났습니다. 아, 그분은 분명 변해 있었고, 편안해 보였으며, 무언가 큰 짐 하나를 내려놓고 있었습니다. 참 보기가 좋았습니다.
그런데 다른 '붓다'들과는 사실 참 많이 부닥쳤습니다. 대구에도 사무실이 있다기에 두어 번 가봤는데, 거기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습니다. 무어랄까, 하여간 그들이 설정해놓은 어떤 틀 안으로 들어가지 않거나 그 틀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대화 자체가 아예 되지 않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틀' 이전에 '사람'인데, '사람'은 없고 '틀'만 있는 느낌 같은 것 말입니다. 이 점에 대해서는 ...님의 다른 질문들에 답해나가다 보면 또 얘기가 되어지리라 생각됩니다.
(2) 붓다필드는 스승이 제자에게 견성인가를 해주는 독특한 제도가 있습니다. 이러한 견성인가라는 것에 대한 김기태 선생님의 견해는 어떠신지요.
☞ 견성(見性) 혹은 깨달음은 다른 누군가의 인정이나 인가를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스스로> 알게 되는, 자존(自存)하며 자명(自明)하며 자증(自證)하며 자족(自足)한 무엇입니다. 엄밀히 말해 '견성 혹은 깨달음'이라는 말과 '인가'라는 말은 서로 양립할 수 없는 말입니다.
옛적에 석가모니가 깨달음을 얻고 난 뒤 다시 속가(俗家)로 내려올 때의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그가 한참을 내려오다가 문득 맞은편에서 걸어오던 어떤 수행자와 마주치게 되는데, 그 수행자도 공부를 많이 한 듯 석가모니를 지나치다 말고는 돌아서서 이렇게 묻습니다.
보아하니, 무척 공부를 많이 하신 분 같습니다. 당신에게서는 향기가 납니다. 감히 묻자오니, 스승이 누구십니까?
석가모니는 조용히 그 사람을 바라보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일체지자(一切知者)요, 일체승자(一切勝者)입니다. (나는 모든 것을 아는 자요, 모든 것을 이긴 자입니다.) 나에게는 스승이 없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은 이상하다는 듯 물끄러미 석가모니를 바라보더니,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그냥 지나쳐 갑니다. 그는 '스승이 없이는 깨달을 수 없다'는 믿음을 가진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가진 관념 때문에 진리를 알아보지 못했던 것이지요.
이 이야기는 단지 석가모니와 어떤 수행자만의 이야기가 아니요, 석가모니의 말 또한 단지 석가모니의 말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 모두에게 해당되는 진실이기도 합니다. 즉, 깨달음은 스스로 알게 되는 무엇이라는 말이지요. 왜냐하면, '내'가 이미 '그것'이니까요. 그런 의미에서, '스승'이란 본래 존재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제자'라는 것도 없지요. 다만 먼저 된 자와 나중 되는 자가 있어서 ― 그 둘 사이에 본질적 차이는 없습니다 ― 먼저 된 자가 나중 되는 자를 잠시 도와줄 뿐이지요.
(3) 붓다필드에서는 에고 따로 본성 따로 구분하기도 하여 생각의 주인이냐 노예냐를 대단히 강조합니다. 이렇게 세상 모든 것을 그저 자신이 만들어낸 한 생각에 불과하며, 그 생각보다는 그 생각을 만들어낸 나를 자각하라는 방식으로 설명하는 가르침에, 선생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 붓다필드의 방법은 대단히 '효과적'이기는 합니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과 관념들에 끊임없이 치이며 이리저리 끄달리다가 어느 순간 문득 그 모든 것들은 '내'가 아니라 내가 만들어낸 나의 '피조물'들이며 나는 그 창조자라고 자각하는 것은, 그리하여 나는 그 모든 것들이 아니라 그 모든 것들을 선택할 수도 버릴 수도 있는 자유의지를 가진 주체자라고 자각하는 것은 대단히 강력한 '의식의 전환'을 가져다주어, 일순간 자신을 힘들게 하고 지치게 하던 그 모든 것들과의 확연한 분리와 함께 커다란 자유와 평화와 안식(安息)을 맛볼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깨달음'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깨달음은 '의식의 전환'도 아니요, 창조자로서의 나를 '자각'함도 아니요, 완벽한 초연함과 함께하는 '자유'도 아닙니다. 그냥 지금 여기에서 자신의 생각과 감정에 치이기도 하고 끄달리기도 하며, 그렇게 번뇌와 함께 범벅이 되어 살아가는 이대로일 뿐입니다.
그러나 또 다른 한 편으로 보면, '깨달음'이란 게 무에 그리 중요한 것이겠습니까. 제가 붓다필드에서 만난 사람들 중에 오랜 세월 진리를 찾아, 자유를 찾아, '나'를 찾아 헤매고 헤매다가 '붓다필드의 방법'을 만나 다행하게도 자신의 그 모든 방황과 구속으로부터 벗어났을 뿐만 아니라, 붓다필드와 그 방법으로부터도 자유케 되어 마침내 진정한 자신의 자리를 되찾은 사람도 있었습니다. 제게 있어 소중한 것은 바로 이 점입니다. 중요한 것은 '나'의 자유요 해방이며,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나의 본래의 자리를 되찾아 주어진 '현재'를 열심히 사는 것이지, 붓다필드도 다른 그 무엇도 아닙니다. 그러나 진정으로 그렇게 되는데에 도움이 될 수 있었다면 붓다필드든 그밖의 다른 단체나 종교든 제게 있어선 모두가 선(善)입니다.
다만 많은 경우, 붓다필드도 마찬가지이지만, 자유의 모양은 있지만 자유는 없고, 해방의 모양은 있지만 진정한 해방은 없는 것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붓다필드의 방법과 그에서 비롯된 해방과 자유함의 체험은 분명 있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거기에 갇혀버리거나 그것에 덧씌워져서 또 다른 모양으로 자신의 자리를 잃어가는 아이러니를 미처 깨닫고 있지 못한 경우가 많더라는 것이지요. 제가 붓다필드에서 많이 부닥친 것도 바로 이런 부분이었습니다.
그러나 또한 모든 것은 '과정'일 수 있습니다. 생명의 본질은 자유인 바 결국엔 그 자신의 본질을 발견하고, 자기 자신과 만천하에 드러내고야 말 터입니다. 저는 언제나 그것을 믿습니다.
(4) 그곳의 여러 오컬트(신비적인)적인 ― 사후세계, 유체이탈, 여러 초능력, 초탈, 스푼벤딩, 전생 읽기, 의식과 상념의 힘, 순간이동 등의 ― 체험과 가르침에 대해 선생님의 의견은 어떠신지요.
☞ 사람들은 곧잘 그러한 것들에 관심을 가지고, 그것이 무슨 깨달음과 높은 경지에 대한 증거라도 되는 양 여기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은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사람들은 왜 그러한 것들에는 '신비'요 '기적'이라는 이름을 붙여가면서까지 주목하고 대단하게 여기면서도 그것보다 더 큰 기적이요 신비인 ― 밤에 잠들었다가 아침에 다시 깨어나는 것, 배고픔을 느끼는 것, 이야기를 할 때 '생각'이 목의 울대를 울려 소리가 되어 타인에게 그 뜻이 전달되는 것, 아무런 불편함이 없이 눈을 깜박일 수 있는 것, 땀이 나는 것, 배설하는 것, 감정이 있어 느끼고 사랑하고 미워하고 때때로 화나 짜증이나 불쾌감을 나타낼 수 있는 것, 기뻐하거나 슬퍼하거나 때로 마음이 무거워 괴로워할 수 있다는 것, 아! 그리하여 '내'가 여기 이렇게 숨을 쉬며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죽을 수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는 것, 바람이 있다는 것, 하늘이 있다는 것, 나무와 새와 별이 있다는 것, 구름과 눈부신 햇살과 수채화 그림 같은 그리움이 있다는 것, 아! 꿈처럼 날아가는 민들레 홀씨가 있다는 것 등에 대해서는 왜 그리도 사람들은 무심할까요. 기적과 신비는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 여기 있는 그대로의 우리네 삶이 곧 신비요, '내'가 곧 기적입니다. 저는 이보다 더 큰 기적과 신비를 보지 못했습니다.
붓다필드에서는 또한 전생과 윤회와 사후세계에 대해서 많은 말들을 하지만, 아뇨, 지금 여기에서의 '나'를 알고 '자유'를 알고 모든 것의 진실 곧 '깨달음'을 얻는 데에 있어 그러한 관념은 전혀 필요치 않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그림이며 색깔일 뿐입니다.
'나'는 시간의 연속선상에 존재하는 그런 존재가 아닙니다.
그래요, ...님.
그밖에도 ...님은 몇 가지의 질문을 더 주셨지만, 지금까지 말씀드린 저의 답변들 속에 그 질문들은 포함될 수 있다고 봅니다. 제대로 답변이 되었는지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은 '나'의 자유입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진실로 진실로 그 '나'의 자유를 발견케 하고 깨닫게 하고 누리게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쓰임>이 되고, 그리하여 마침내 자유케 된 '나'는 또한 나 자신과 세상과 모두를 위하여 진실로 진실로 감사와 사랑으로써 <쓰임>이 될 수 있다면, 그것이야말로 오직 서로간의 <쓰임>밖에 없는, 생명과 존재의 진정한 축제요 축복이 아닐는지요.
고맙습니다.
댓글목록
이디아님의 댓글
이디아 아이피 (221.♡.146.116) 작성일
깁샘님!!! 나 눈 돌아가는 소리 들리지요?
뭐요? 해운대에 오셨다고요? 세상에 시기 질투 나보다 못하는 사람 있음 나와보라 해요.
누군가 게시판에서 나더러 질투의 화신 이디아라고 하던데, 앞으로 샘 조심하세요..
조용히 흔적없이 다뇨가시면 지금 알리지 마셔야죵.
영대님! 해운대 사람 끼끼리 차별맙시다
김영대님의 댓글
김영대 아이피 (211.♡.9.67) 작성일하하 이디아님, 이글은 이전 홈피의 질의응답방에 2005년 8월 16일 날 올려진 답변글입니다. 단단히 오해하셨네요. 이제 오해 풀리셨나요.
이디아님의 댓글
이디아 아이피 (222.♡.10.172) 작성일아. 난 또 어쩌지? 당장 영대님께 전화 하려다 참았죠. 내가 핸드폰은 폼으로 들고 다니나 ? 지금 해야지 하면서 말예요. 근데 영대님 부인 생각하며 참았죠. 밤중이라서.ㅋㅋ
공자님의 댓글
공자 아이피 (218.♡.67.226) 작성일
붓다필드하면 성희가 젤 생각이 나는군요.
붓다필드의 한 200명되는 사람들앞에서 법문을 펼치던,,,
여기서나 이름을 부르지.
그곳에서 감히 이름을 부르거나 반말이라도 하면 생경하게 쳐다보던 사람들의
그썰렁했던 분위기..
이른바 혜안이 열렸다는 그녀.
가까이 하기엔 너무멀었던...
그녀의 여정에 축북이 있기를 ..
이디아님의 댓글
이디아 아이피 (221.♡.14.60) 작성일
맞아요. 여기서나 우리 김샘님께 나 같이 말을 막 친구처럼 대하지요, 다른곳에 스승님은 어림반푼치
도 없는소리죠. 도통견성했다는 분들 한결같이 신비의 존재죠.
그래서, 함께 마구 어우러질수 없는 불쌍한 님들...
정말 지금 여기서 함께 이 순간을 웃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축복하며 살수없다면 난, 견성해탈바가지
반납하겠수....
김영대님의 댓글
김영대 아이피 (211.♡.9.67) 작성일
공자님 왈.
도덕경모임에서는 성희야하고 가깝게 불렀다.
그런데 붓다필드에 가서 혜안이 열렸다.
그래서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당신이 되어 버렸다.
지가 보기엔 인간 성희가 붓다필드가서 박제된 성희가 되어 뿌렸네요...
혜안이 열리면 더더욱 인간 성희가 되어야 하지 않나요????
지도 눈뜨지 못해서 잘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