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삭 및 에서에 대한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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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석 (193.♡.64.203) 댓글 5건 조회 7,402회 작성일 06-03-24 02:08본문
지난 주일(3/12) 성경공부 시간에 못다 나눈 생각들을 좀 나누고자 합니다. 성경은 읽으면 읽을수록 숨어 있는 뜻이 새롭게 나타나는 경우가 많은 것 같습니다. 다른 분들도 공감하시리라 믿습니다.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성경공부 전날(3/11) 야곱과 에서의 탄생 및 성장 부분에 대해 묵상을 했었습니다. 이삭, 리브가, 에서, 야곱을 주인공으로 한편의 드라마를 그려보았습니다. 하다보니 아브라함과 사라에게까지 옮겨 가더군요. 신앙생활이 짧은 제가 묵상한 것이라 잘못이 있을 수도 있으나 같이 나누는 것도 좋을 것 같아 이렇게 옮겨 봅니다. 추려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이 삭
이삭은 좀 독특한 어린 시절을 겪었던 것 같습니다. 나이든 아버지, 어머니 사이에서 하나님의 계시로 태어난 이삭은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 했을 것입니다. 특히 이스마엘의 탄생으로 인해 상처를 받았던 사라는 이삭에 대해 매우 강한 집착을 보였을 것입니다. 아예 끼고 살았을 것입니다. 이삭은 이러한 상태에서 말 잘 듣는 마마보이 같지 않았을까요. 좋게 이야기하면 부모 말 잘 듣고 열심히 일하는 “모범생”이었을 것입니다. “돌아온 탕자” 이야기에서의 큰아들 같다고 할까요. 큰 어려움 없이 성실하게 컸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랑을 빼앗긴 이복 형 이스마엘의 존재는 이삭에게 항상 부담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려서 형을 좋아하고 따르던 이삭에게 엄마가 형과 놀지 말라며 주는 이상한 눈길을 이삭이 완전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더라도 감지는 했을 것입니다. 이 부담은 이스마엘이 집에서 쫓겨나게 되면서 더욱 커졌을 것입니다. 자신이 좋아하는 건장한 형이 자기때문에 좇겨났다는 죄책감을 평생 지니고 살지 않았나 싶습니다. 이러한 성장과정은 후에 야곱보다 에서를 더 사랑하게 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되었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이삭은 아버지를 따라 가는데만 3일이나 걸리는 긴 여행을 떠납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이제 나를 어른으로 대접해 준다고 생각하고 기뻐하며 설레는 마음으로 나섰을 것입니다. 3일간의 여정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겠지요. 온가지 생각이 마음 속에서 왔다 갔다 하던 아브라함과는 달리 이삭의 마음은 그저 즐거움뿐이었을 것입니다. 엄마 없이 아버지와 가는 단둘만의 여행은 이삭에게는 다른 세상 같았겠지요. 엄마한테서 탈출해서 이스마엘에게 느꼈던 남성성을 아버지와의 여행을 통해서 만끽하고 싶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상황은 이삭의 생각대로 전개되지 못합니다.
아버지의 사랑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이삭은 번제물을 준비하지 않은 사실이 이상하기는 했으나 자신이 제물이라는 생각은 눈꼽만큼도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이삭은 아버지가 자신을 묶고 칼로 찌르려 했을 때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아마 너무 놀라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차릴 수가 없었겠지요. 따라서 반항도 못했을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나중에 설명을 아무리 열심히 했다 하더라도 아뭏든 이 사건은 이삭에게는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아버지에게 배반감을 느끼지 않았을까요. 어린 이삭이 아버지의 깊은 믿음을 이해하기는 힘들었을 것입니다.이후 이삭은 사라에게 더욱 의존하게 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더욱 더 “모범생”이 되어 갔겠지요. 번제 이야기를 들은 사라는 더욱 이삭을 끼고 돌았을 것입니다.
이삭의 인생 전환점은 어머니의 죽음입니다. 자기를 그렇게 챙겨주던 어머니의 죽음은 이삭에게는 청천벽력이었을 것입니다. 삶의 중심이 사라진 이후 이삭은 갈피를 잡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결혼은 생각도 할 수 없었고 들에 나가 떠도는 시간이 많아졌겠지요. 그래도 심약한 이삭은 큰 탈선은 하지 못합니다. 아마 탈선을 유도할 친구가 없었을 가능성도 큽니다. 이삭은 어둠의 긴 터널 속에서 한가닥 빛을 찾아 헤매는 그런 상태가 아니었을까요. 누구에게 이야기하지도 못하고 답답했겠지요. 이러한 상황에서 모범생인 이삭은 자신의 장기인 뚝심을 발휘합니다. 하나님이 주신 은사가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래서 큰 일탈 없이 무엇인가를 기다리게 됩니다. 믿음, 소망, 사랑 중에 “소망”이지요.
이삭이 기다릴 수 있었던 힘의 원천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요? 그의 타고난 성품때문일까요? 아니면 성장과정에서 익힌 것일까요? 이삭이 성장과정에서 “기다림”을 배운 적은 없었을 것 같습니다. 타고난 성품과 아버지로부터 배운 믿음이 기다림의 원천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어머니의 죽음 이후 이삭은 깊은 묵상을 통해서 자기를 제물로 바치려 했던 아버지의 믿음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아버지가 그렇게 사랑하던 자기보다 더 귀하게 여겼던 것이 무엇이었을까 사색하게 됩니다. 그리고 발견하게 됩니다. “삶에는 무엇인가가 있다. 구하며 기다리면 온다.”
그렇게 기다리던 중 기적과 같이 리브가가 나타납니다. 물론 이는 하나님과 아브라함의 배려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지만 이삭이 기다리지 않았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이삭을 본 리브가는 한 눈에 남편감인 줄 압니다. 이삭도 리브가가 자신이 그렇게 기다리던 그 무엇임을 압니다. 사라로 가득 채워 있었던 이삭을 이제 리브가가 채워갑니다. 결혼과 함께 이삭의 생활은 바뀌어 갑니다. 마마보이에서 담대한 가장으로 성장해 나갑니다. 지혜로운 리브가의 역할이 아주 컸을 것입니다. 아이가 생기지 않는 가운데에서도 20년을 기도하며 기다립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좋은” 그런 생활이었을 것입니다.
이러한 생활은 리브가가 임신을 하면서 변화됩니다. 리브가는 자기 배에서 서로 싸우는 태아들을 감지하면서 불안해집니다. 20년을 기다린 아이들인데 벌써 싸움질이라니… 들었던 지난 이야기들 속에서 카인과 아벨의 이야기도 떠 오르고 형제들간에 불화가 있었던 일, 이스마엘의 이야기도 생각이 났습니다. 불안해진 리브가는 여호와께 기도하고 여호와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큰(먼저 난) 자가 작은(나중 난) 자를 섬긴다.” 이 말이 무슨 뜻일까요? 리브가는 이 말을 이삭에게 전합니다. 이는 이스마엘에게 죄책감을 느꼈었던 이삭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이스마엘의 망령이 다시금 이삭을 찾아들기 시작합니다.
해산한 두 아들은 같은 씨로 같은 밭에서 났다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달랐습니다. (그때는 몰랐겠지만 이를 이란성 쌍둥이라 하죠.) 왜 달랐는지는 중요한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달랐다는 사실이 중요하지요. 모든 사람이 제각기 다른 환경에서 다른 능력을 갖고 태어나는 법이니까요. 털이 부술부술한 에서는 용모부터 남성적이었고 건장하게 자랐으며 그에 맞게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성격도 담대하고 여자들이 잘 따르는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우리 말로 장군 감이지요. 반면 야곱은 정반대이었습니다. 생김새는 모르지만 성격은 소심하고 남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으리라 봅니다. 자연 장막에 거해 혼자 생각하며 보내는 날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잘 생기고 힘찬 형을 보며 일면 부러워하며 그렇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많이 한탄했겠지요. 야곱의 이러한 심정은 커 가면서 더욱 심해져 원망으로, 질투로, 욕망으로 변해갔을 것입니다. (이 부분은 에서 및 야곱 편에서 더 자세히 다루기로 합니다.)
이 두 아들을 바라보는 이삭은 어떠했겠습니까? 자신이 그렇게 그리워 하던 남성성을 갖고 태어난 에서가 얼마나 대견했겠습니까. 남들이 다 에서에게는 장군감이다 하고 야곱을 보고는 고개를 돌릴 때 이삭의 심정이 어떠했을까요. 마마보이 같았던 자신의 어릴 적 모습은 잊어버리고 어디서 저런 놈이 나왔나 갔다버리고 싶은 심정이 아니었을까요. 이는 야곱이 죽거나 없어지지 않는한 깨우쳐지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래도 에서가 있으니 충분하다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삭에게는 야곱을 극진히 챙기는 리브가가 이해가 안됩니다. 아마 리브가가 없었다면 이삭은 야곱을 갔다 버렸을지도 모르지요. 동물의 세계에서 자식들간의 경쟁을 통해 약한 새끼가 도태되게 두는 경우는 많으니까요. 이삭은 “큰 자가 작은 자를 섬긴다”는 여호와 말씀의 진정한 의미를 전혀 이해하지 못한 것 같습니다. 반면 리브가는 그 의미를 파악하고 야곱에 대한 사랑을 늦추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와중에 아버지 아브라함이 숨을 거둡니다. 후처들과 따로 살아오던 아브라함은 죽기 전에 이삭에게 모든 소유를 물려줍니다. 또한 앞날의 불화를 방지하기 위해 이삭의 이복 동생들에게 재물을 주고 다른 곳으로 이사가게 합니다. 이것으로 그동안 서먹서먹했던 부자 관계가 어느 정도 회복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브라함의 진심이 이삭에게 전달이 되었을까요? 이런 아버지의 죽음을 바라보는 이삭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아마 어머니의 죽음 때보다는 충격이 적었을 것입니다. 이보다는 아브라함의 죽음 소식을 듣고 달려온 이스마엘이 이삭에게는 더 충격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동안 보지는 못하고 풍문만을 전해듣던 이스마엘을 직접 보았을 때 이삭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반가움에 형제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을 것입니다. 그 이야기 속에서 이삭은 나이가 들며 더욱 강건해지고 멋있어진 이스마엘의 모습을 보지 않았을까요? 불쌍하게 쫒겨난 형이 성공해 돌아왔을 때 단순히 반가움만 있었을까요? 마음 속 깊은 곳에서는 질투의 불길이 오르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이는 이삭의 남성성에 대한 추구를 더욱 자극시켰을 가능성이 큽니다.
아뭏든 아버지의 죽음 이후 이삭은 자신의 특기인 기다림을 십분 발휘하여 가나안 땅에 근거(우물)를 확보하고 재산도 축적하면서 풍족한 생활을 하게 됩니다. 자식 문제만 빼고는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겠지요. 두 아들이 커 가면서 이들에 대한 이삭의 편견은 더욱 심해집니다. 죄가 죄를 낳는다고 이삭에게 야곱의 행동은 볼수록 못마땅하고 에서의 행동은 볼수록 흡족합니다. 에서가 이방여자들을 데리고 사는 것이 조금 염려가 되기는 했지만 리브가가 염려하는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이방여자와 살아본 경험이 없었던 이삭은 무슨 큰 일이야 나겠느냐며 그냥 넘어갑니다.
이러면서 이삭의 영적인 눈은 점점 희미해져 갑니다. 삶의 진정한 가치를 잊어버립니다. 리브가가 아무리 이야기해도 이삭의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나이가 먹어가면서 더욱 심해집니다. 이제 자기가 죽고 나면 리브가가 야곱을 장자로 삼으려 할지 모른다는 생각에까지 이르게 됩니다. 리브가 몰래 에서를 불러 사냥을 해 오라고 시킵니다. 에서를 공식적으로 상속자로 삼는 의식을 진행하려 합니다. 만인 앞에 공표하여 못박아 두자는 것이지요.
그러나 이삭은 이미 영적으로나 육체적으로 앞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감각기관도 모두 쇠퇴했습니다. 사망 상태가 된 것이지요. 그때 에서로 분장한 야곱이 이삭 앞에 요리를 들고 나타납니다. 목소리가 에서 같지 않아 살을 만져보고 냄새를 맡아봅니다. 결국은 에서인줄 착각하고 야곱을 축복합니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요? 이는 이제까지의 이삭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한 것이 아닐까요? 이삭의 삶은 남들이 보기에 정말 나무랄데 없는 것이었습니다. 부모를 잘 따랐고, 기다릴 줄 알았고, 성실했고, 한마디로 모범생이었지요. 그러나 내면적으로는 많은 갈등, 죄의식, 피해의식 속에서 살았습니다. 이삭의 삶은 에서로 분장한 야곱이었던 것입니다. 자신의 아픔(야곱)을 밖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멋있는 것(에서)으로 포장해 왔던 것이지요. 에서가 나중에 나타나 자신이 축복한 사람이 야곱이었다는 것을 아는 순간 이삭은 이를 깨닫게 됩니다. 이 순간에는 통곡뿐이 나올 수 없습니다. 이 통곡과 함께 자신의 지난날에 대해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집니다. 이제 더이상 자신 내면의 아픔을 숨길 필요가 없습니다. 이삭에게 에서는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이지요. 이것이 이삭이 에서에게 나누어 줄 복이 더 없다”고 고백하는 진정한 의미라고 생각됩니다.
이제 야곱에 대한 이삭의 시선이 바뀝니다. 내 것이 아니다 부정만 해 왔던 야곱에 대한 사랑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에서를 피해 외가집으로 떠나는 진짜 야곱(에서로 분장하지 않은 야곱)을 진정으로 축복하게 됩니다. 이삭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순간입니다. 이후의 이야기는 사족에 불과합니다. 진정한 회개가 이루어지는 순간 이삭은 명실상부한 상속자의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이삭의 삶을 묵상하면서 제 자신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모범생이고 성실하고 욕심없고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 듣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던 삶 이면에서 다른 사람에게는 보이지 않는 내면의 차가움, 능력이 떨어지는 사람에 대한 멸시, 나보다 더 잘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의 질투, 아이들에 대한 편견, 그리고 여과되지 못한 욕망들이 있었음을 알게 됩니다. 이삭이 회개하고 진정으로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이삭의 하나님을 여기서 다시 만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아멘…
에 서
에서는 성경에서 별로 주목받지 못하는 인물인 것 같습니다. 모든 조명이 야곱에게 향하는 만큼 에서는 야곱에 대한 악세사리 같습니다. 주인공이 위대해지기 위해서는 상대역이 비열해져야 한다는 할리우드식 영화에 익숙한 우리에게 분명 에서는 그냥 지나치기 쉬운 인물입니다. 그런데 에서에 대해 자꾸 생각이 가는 것은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습니다. 하여간 시작한 묵상의 물길을 따라가 봅니다. 여러분의 생각과 많이 다르더라도 이렇게 볼 수도 있다는 관점에서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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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서는 쌍둥이로 야곱과 함께 이삭과 리브가가 오랫동안 기다려오던 자식으로 태어납니다. 야곱과는 다르게 나면서부터 털이 부술부술한 에서는 남성적이고 건장하게 자랐으며 그에 맞게 사냥을 좋아했습니다. 성격도 담대하고 여자들이 잘 따르는 그런 스타일이었습니다. 우리 말로 장군 감이지요. 머리가 명석했는지는 분명치 않으나 우둔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재산이 많았으니 부자집 맏아들이었지요. 요즘 한국드라마에 잘 나오는 재벌 2세, 그 중에서도 능력있고 운동 잘하는 재벌 상속자라고나 할까요.. 천하에 둘도 없는 신랑감이지요. 에서는 외면적으로는 부러울 것 없는 그런 어린 시절을 보냈을 것이라 상상됩니다.
그러나 그의 내면은 어떠했을까요? 아버지 이삭은 그를 무척 좋아합니다. 그가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OK입니다. 그러나 어머니 리브가는 다릅니다. 자라면서 에서는 어머니가 야곱만을 끼고 도는 것을 느낍니다. 신체적으로나 능력 면에서 여러 모로 뒤진 야곱을 엄마가 더 사랑해 주는 것을 일면 이해할 수도 있었으나, 어린 에서가 감당하기에는 좀 벅찹니다. 에서에게도 엄마의 따뜻한 품이 필요했었을텐데 그곳에는 항상 야곱이 있었습니다. 이는 에서의 품성을 결정짓는 중요한 요소가 됩니다. 더욱 더 남성적이 되어 갔겠지요. “말아톤”이라는 한국영화에서 주인공의 어머니가 주인공에게 모든 힘을 쏟는 가운데 상처받는 주인공 동생의 모습이 생각납니다.
그러면 에서는 야곱을 어떻게 보았을까요? 쌍둥이로 같이 태어난 야곱을 에서는 이해하기 힘들었을 것입니다. 자기는 밖에 나가 그저 뛰놀고 싶은데 집안에만 머무르려는 동생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입니다. 세상과 삶의 다양성을 이해하기에는 아직 어렸을 것입니다. 그래도 야곱을 안스러워 하는 마음은 어려서부터 가지고 있었으리라 생각됩니다. 여러가지 전개되는 상황으로 보아 야곱에 대한 어머니의 편애때문에 에서가 야곱을 미워하고 질투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또한 야곱의 못남때문에 야곱을 멸시한 것 같지도 않습니다. 속으로는 어떠했을지 몰라도 적어도 밖으로는 표현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됩니다. 이보다는 무엇인가 동생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 주려고 노력했을 가능성이 큽니다. 같이 놀자고 권유도 해 보고, 여자 친구도 소개시켜 주겠다고 하고.. 그러나 소용이 없었겠지요. 태생부터 다른 것을 어린 에서가 어떻게 고쳐볼 수 있었겠습니까.. 조금 노력하다가 그만두었겠지요. 에서는 자신의 세계를 마음껏 펼쳐나갑니다.
어느날 에서는 한참을 밖에서 놀고 돌아와 심히 시장하던 차에 야곱이 죽(Stew)을 쑤고 있는 것을 봅니다. 좀 달라고 하자 야곱이 “장자권을 자기에게 팔면 죽을 주겠다”는 조건을 내 놓습니다. 애초부터 장자권에 대해서는 아무 관심이 없었던 에서는 “알았다” 대답을 하고 죽을 받아 먹습니다. 야곱의 심각한 제의를 아무 생각없이 받아들인 것입니다. 장자권이라는 것이 이렇게 팔릴 수 있는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겠지만 이 사건은 아뭏든 에서의 삶에 닥쳐올 사건의 서곡에 해당됩니다. 에서는 이를 눈치채지 못합니다. 그러면 에서는 장자권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야곱은 장자권에 대해 한을 품고 있었겠지만, 에서는 이에 대해 심각하게 생각해 본 적이 없었을 것입니다. 자기가 장자이고 아버지가 자신을 믿고 좋아하는데 다른 일이 생길 것이라고는 상상할 수가 없었겠지요. 또한 무엇을 가지고 있는 사람은 그것이 별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 쉽듯이 장자권이 특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자신의 능력으로 모든 것을 해 나갈 수 있다는 확신이 서 있었을 에서에게는 사실 장자권이 의미가 없었을 수도 있습니다.
에서는 커 가면서 집안에서보다 바깥에서 머무는 시간이 점점 더 많아집니다. 에서는 모든 일에 자신이 있었습니다. 어머니 리브가는 에서의 일에 무관심하거나 못마땅하게 여겼어도 아버지 이삭은 자신의 절대적 지지자이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아버지의 큰 도움이 필요했던 것은 아닙니다. 에서는 스스로 결정하고 스스로 행동합니다. 자신이 하는 일에 잘못은 있을 수 없다는 자만심까지 들었을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이 망나니 같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요즘 한국드라마에 나오는 재벌집 아들이면서도 생각과 행실이 제대로 박힌 그런 사람이라고 상상하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에서가 이방여자와 같이 살아 이삭과 리브가의 근심이 되었다는 내용도 여자문제로 방탕한 생활을 했다는 것보다는 결혼할 나이가 된 에서의 자신감에서 나온 행동이었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이방여자와 살아도 부모의 걱정과는 다르게 자신이 극복할 수 있다는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지요. 그리고 동족여자인 자신의 어머니가 자기를 차별하는 것을 느끼고 큰 점을 고려하면 에서가 동족 여자와 결혼하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이러한 에서의 생활은 야곱이 아버지의 축복을 가로채는 사건으로 위기를 맞습니다. 하나님이 개입한 사건이지요. 아브라함이 자신을 불러 사냥을 해 오라 했을 때 “아, 이제 때가 되었구나” 생각합니다. 그러나 마음 속에 큰 기쁨이 몰려오지는 않습니다. 당연한 수순이니까요.. 그러나 자신이 사냥을 해 돌아왔을 때 모든 것이 끝나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축복은 이미 야곱에게 주어졌습니다. 평소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장자권을 놓치고 나니 이에 대해 다시 생각을 하게 됩니다. 자신에게 “아버지의 축복” “장자권”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자신의 능력을 놓고 보았을 때 이들은 큰 의미가 없다는 생각은 듭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축복이 그 못난 자신의 동생 야곱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나에게 일어날 수가 있을까?” 에서는 이해가 안됩니다. “어떻게 아버지가 야곱을 자기로 잘못 알 수가 있었을까?” 경우는 다르지만 어떤 한국드라마에서 재벌 아들이 자기 약혼녀를 별 직업도 재산도 없는 남자에게 빼앗기는 사건이 생각납니다. 이럴 경우 여자를 진짜로 사랑하느냐보다는 “별볼일 없는 놈에게 빼앗겼다”는 자괴감이 먼저 들게 됨은 인지상정이라 할 수 있습니다. 대부분 사람의 한계이고, 또한 에서의 한계이기도 합니다. 세상에 태어나서 이런 경험은 처음입니다. 이제까지 살아온 자신의 모든 의미가 사라져버리는 것만 같습니다. 자신이 가진 능력이나 재산이나 모든 것이 야곱보다 더 나은 상태에 있다는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습니다.
리브가가 이 사건을 주도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서 에서의 감정은 더욱 부풀어 갑니다. 엄마가 원망스럽고 야곱이 죽이고 싶도록 미워집니다. 그래도 좀 봐 주면서 잘해 주려고 했는데 야곱의 배신에 치를 떨었겠지요. 야곱이 얼마나 장자가 되고 싶었으면 그렇게까지 했겠느냐는 생각은 멀리 사라지고, 아버지가 돌아가시면 야곱을 죽이겠다는 다짐까지 합니다. 물론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을 바라보며 “이러면 안된다”는 생각을 잠시 했을 수도 있으나 자기의 감정을 추스를 수가 없습니다. 이런 에서의 마음을 보고 이삭과 리브가는 야곱을 외가로 보내기로 결정하고, 에서도 이를 알게 됩니다. 에서는 야곱을 계속 끼고도는 부모에게 서운한 마음도 들고, 야곱을 혼내주지 못함에 분통이 터졌겠지만 일면 차라리 “잘됐다”고 생각했었을 수도 있습니다. 야곱이 떠나지 않았다면 카인이 아벨을 죽인 것처럼 정말 야곱을 죽여버렸을 지도 모르고, 이것이 에서가 진정 원했던 것은 아닐테니까요..
야곱이 떠난 이후 에서의 마음은 어느 정도 진정이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으면 자연히 감정도 식게 마련이니까요. 이전의 생활로 다시 돌아오기 시작합니다. 야곱이 떠난 사실 이외에는 크게 변한 것이 없습니다. 이 거운데 에서는 자기 부모가 왜 그렇게 야곱만을 배려하는지 생각해 봅니다. 부모와의 관계를 좀 개선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아버지가 좋아하는 것으로 생각한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합니다. 그러나 이때 이삭은 이미 변해 있었습니다. 야곱에 대한 축복 이후 이삭은 잘나고, 힘세고, 세상적으로 위대한 것에 대한 동경을 거두었습니다. 자연 이스마엘에 대한 동경도 사라졌습니다. 자연 이스마엘의 딸을 아내로 맞이한 사건은 에서의 뜻과는 반대로 부모의 걱정만 더하게 됩니다. 에서는 헛일을 한 것이지요. 뒷북을 친 셈입니다.
그러나 이런 일에 연연할 에서가 아닙니다. 이제 정말 자기 길을 예전의 자신감을 갖고 나아갑니다. 나름대로 성공해 재산도 모으고 자기 자손도 많이 두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감에 따라 모든 기억들은 멀리 사라져 갑니다. 그저 평화로운 나날들이 계속되었습니다. 부러울 것이 없는 세월이었겠지요. 간혹 야곱을 죽도록 미워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서 입가에 미소도 지어봅니다. “아무 것도 아니었는데 내가 너무 했었나” 생각도 해 봅니다. “야곱은 지금 무얼 하고 있을까, 그 못난 능력으로 잘 살고는 있을까, 여자가 잘 따르지 않았었는데 결혼은 했을까” 등등 야곱에 대한 걱정을 해보기도 하고, 문득 보고 싶다는 생각도 듭니다. 다 여유있는 자의 생각이지요.
이러던 중 야곱이 돌아온다는 소식이 들립니다. 이 소식을 들었을 때 에서의 심정은 어떠했을까요? 옛날 일이 다시 떠 오르며 혼내 주어야지 하는 생각도 들었을 것이고, 다 지나간 일이니 부모님과 함께 한 가족으로 잘 살아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입니다. 어떠했든 자신의 위세도 보이면서 야곱을 마중나가려 했을 것입니다. 그래서 휘하의 많은 사람들을 모았겠지요. 가는 도중에 야곱이 보낸 예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그리고는 야곱이 전하는 메시지를 전해 듣습니다. “아! 야곱이 재산을 많이 모은 모양이구나, 그런데 얘는 이렇게 안 보이나” 이런 생각을 했겠지요. 다시 한 차례 더 예물을 가지고 오는 사람들을 만납니다. 뭔가 이상한 생각이 듭니다. 전에 자신을 속인 것처럼 무엇인가 야곱이 자신을 다시 속이려고 한다는 것을 직감합니다. 다시는 속지 않겠다는 생각과 “이놈 아직도 정신을 못차렸구나” 혼내 주어야겠다는 마음이 용솟음칩니다.
그러나 이러한 마음은 야곱이 자신에게 일곱번 절하는 것을 보는 순간 거짓말 같이 없어집니다. 야곱의 변한 모습에 깜짝 놀랍니다. 야곱은 더 이상 지난날의 못난이가 아니었습니다. 재물만 모은 것이 아니라 자기가 넘볼 수 없는 무엇인가가 동생에게서 전해옵니다. 자기의 쌍둥이 형제로서 야곱을 보게 됩니다. 그래서 야곱에게 달려가 볼을 맞추고 기뻐 웁니다. 화해의 순간입니다. 야곱과 그의 가족들을 만난 것이 반갑기만 합니다. 자기의 마음이 왜 이렇게 갑자기 변했는지 에서는 알지 못합니다. 이러한 화해가 야곱에 대한 자신의 용서로 이루어질 것이라 항상 생각해 왔던 에서는 자신도 모르는 큰 힘이 작용하고 있음을 느끼고 일면 당황합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에서는 이 힘이 무엇인가 고민해 보지 않고 그냥 지나갑니다.
에서와 야곱이 같이 살게 되면서 점점 부유해지고 재산이 많아지자 에서는 야곱 휘하들과의 분쟁을 예방하기 위하여 다른 땅으로 야곱을 떠납니다. 마지막까지 에서는 정말 사나이다운 삶을 살아갑니다.
이제까지 따라온 에서의 일생을 살펴보면 흠을 잡기가 힘듭니다. 세상적으로 보았을 때 거의 완벽햇던 사람이지요. 완전 자수성가한 사람은 아니지만 부모의 큰 도움없이 성공한 사람이지요. 한때 동생을 죽이겠다고 열을 올린 적은 있었으나 잠시 후 가라앉았고, 실제로 아무 일도 없었습니다. 부모 걱정을 조금 시켰을지는 몰라도 누구에게 피해를 준 적도 없었습니다. 완전하지는 않지만 남을 배려하는 마음도 일부 있었습니다. 어느 누가 에서에게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도 에서의 삶에는 무엇인가가 모자란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에서가 그것을 눈치챘었을지 아니면 못 챘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완전에 가까운 자신의 용모, 능력, 성격
댓글목록
프렌드님의 댓글
프렌드 아이피 (210.♡.14.195) 작성일말씀 감사합니다. 야곱이 어떤 과정을 통해 변화되었는지도 궁금하네요 ^^
김재환님의 댓글
김재환 아이피 (211.♡.140.177) 작성일
조용하던 게시판에 나를 환기시켜주는 좋은 글이네요.
힘겹고 어려운 순간에도 삶을 긍정하고 살라는 하나님의 메세지로 받아들이 겠습니다.
제 경험상 게시판에다 수다를 많이 떨면 떨수록 정신건강에 무척 좋더라구요~
이왕 여기 게시판에다 발을 담구셨으니, 포기하는 심정으로 확 담궈주세요^^
자주 자주 좋은 글 올려주세요.
그나저나 공자형님은 제자들을 이끄시고 뜻을 이루려고 떠나셨나요?
게시판이 완전 절간이네~~~
윤 양 헌님의 댓글
윤 양 헌 아이피 (211.♡.55.83) 작성일
이광석님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모든 이들의 가슴 속에서
야곱과 에서가 자유롭게 춤을 출 것같습니다.
감사, 또 감사드립니다.
권보님의 댓글
권보 아이피 (211.♡.244.110) 작성일
우와~~~!! 아멘입니다. 정말 잘 읽었습니다. 좋은 글 감사 거듭 감사드립니다.
어느 때가 되었건 늦은 때는 없다는 말씀 아주 맘에 와닿습니다. 아멘~~!!
아줌마님의 댓글
아줌마 아이피 (59.♡.149.146) 작성일
성경이 살아서 숨을 쉬고 있네요.
같은 성경을 읽어도 이렇게 다르네요.
메마른 제 상상력에도 불구하고 님덕분에 살아있는 이삭과 에서를 만납니다.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