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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곱에 대한 묵상 (1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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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광석 (193.♡.64.203) 댓글 4건 조회 7,127회 작성일 06-03-30 18: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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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세기를 드라마로 찍는다면 누구를 주인공으로 해야 극적인 긴장을 유지하면서 재미가 있을까요? 아브라함이나 요셉보다도 저는 단연 야곱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만큼 야곱의 삶은 극과 극을 오간 파란만장한 것이었습니다. 극적인 요소들이 많지요. 하나님과 주위 사람들의 도움도 극적이고 야곱의 회심도 극적입니다. 어떤 배우도 매우 도전적이지 않고는 야곱을 연기해 내기 힘드리라 봅니다. 비뚤어진 외모와 내면에서부터 하나님의 상속자로까지 변해가는 큰 폭의 연기를 해야 할 테니까요. <?xml:namespace prefix = o ns = urn:schemas-microsoft-com:office:office />

야곱에 대한 묵상은 그리 쉽게 잡혀지지를 않았습니다. 누구나 자신의 삶과 비슷한 사람의 일생을 상상해 보기는 쉬우나 아주 다르다고 생각한 사람의 경우는 다르지요. 인생의 큰 파도를 별로 만나보지 못한 저에게는 벅찬 경우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삭과 에서가 먼저 생각났던 것이지요. 이삭과 에서에 대한 묵상을 거치며 야곱에 대한 생각이 조금씩 나타났습니다. 저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면서 야곱의 삶이 한 조각씩 조명되기 시작했습니다. 누구나 야곱과 같은 면이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야곱은 에서와 같이 쌍둥이로 태어납니다. 엄마 태 속에서부터 먼저 나오려고 발버둥을 쳤지만 결국 형의 발뒤꿈치를 붙잡고 동생으로 태어납니다. 에서 편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야곱은 정말 형과는 다르게 볼품이 없었습니다. 체구도 작고 얼굴도 별로고, 보는 사람마다 “그놈 잘 생겼네”라는 인사말도 나오기가 힘듭니다. 형 에서와 비교가 되기에 야곱의 못남은 더 잘 보입니다. 모두들 속으로 “큰애는 저렇게 잘 생겼는데 얘는 왜 이러나, 어디서 줏어왔나” 생각들을 합니다. 아무리 작은 아이라도 이런 시선은 아이 마음 속에 깊이 뿌리박히게 됩니다. 이런 야곱을 아버지 이삭은 너무나 싫어합니다.(이삭편 참조) 이삭이 한번이나 따뜻하게 야곱을 안아 주었겠습니까? 어려서 아버지와 함께 노는 것이 아이가 성장해 가는 과정 중의 하나이거늘 야곱은 이러한 행복을 누려보질 못합니다. 이웃 사람들 뿐만 아니라 아버지마저 이럴진대 아이가 받은 상처가 얼마나 컸겠습니까?

조금씩 자신의 실체에 대해 자각해 가면서 아이는 사람들과의 접촉을 피하게 됩니다. 자연히 장막 속에서 지내게 됩니다. 장막 속에는 그를 지켜주는 엄마 리브가가 있습니다. 엄마 리브가가 없었다면 야곱은 영원히 자폐증 환자로 남았을 것입니다. 아니면 사회에서 소위 왕따를 당했겠지요. 리브가는 그런 야곱이 안타깝습니다. 리브가는 “큰자가 작은자를 섬긴다”는 여호와의 말씀도 있었지만 엄마의 본능적인 모성으로 야곱을 지킵니다. 아무리 못난 새끼라도 내 몸으로 난 자식인데 눈에 넣은들 아픈 줄이나 알았겠습니까? 에서는 혼자서도 잘 크니 모든 정성을 야곱에게 쏟게 됩니다. 야곱에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용기를 북돋아 주어 야곱을 장막 밖으로 나가 놀게 내 보려 하지만 역부족입니다. 그러나 매몰차게 나가 놀도록 강제하지는 못합니다. 자연 둘이서 이야기하는 시간이 많아졌겠지요. 리브가의 지혜가 많은 부분 이때 야곱에게 전해지게 되었고, 혼자서 사색하고 궁리하는 야곱의 능력이 길러지지 않았나 싶습니다.

그러나 야곱은 몸은 장막에 거하면서도 마음은 항상 장막 밖에 있었습니다. 야곱은 형과 같이 사냥하고 친구들과 뛰어노는 상상으로 가득합니다. 상상 속에서 야곱은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능력을 발휘합니다. 자신이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로 돌아오면 그렇질 못합니다. 나가 놀자고 형이 제의해도 발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입이 떨어지질 않습니다. 남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두렵습니다. 아무리 하고 싶은 일이 있더라도 선뜻 나서지를 못하고, “그거 해 봐야 뭐해… 아무 소용 없을거야” 하고 그냥 주저앉고 맙니다. 이 모습은 제 어릴 적 모습 같습니다. 스케이트 배우러 친구따라 갔다가 남들이 보는 시선이 무서워 그냥 돌아오고, 친구들이 자전거 타는 모습이 그렇게 부러우면서도 배울 용기를 내지 못하고 (그뒤 배울 기회를 계속 놓쳐 저는 아직도 자전거를 못 탑니다), 친구들이 야구하는 모습을 그냥 멀리서 바라보기만 하던, 그리고 그때마다 “저거 해 봐야 뭐해” 그랬던 저의 모습이 떠 오릅니다. 지금 생각해 봐도 무엇이 그리도 어린 아이를 압박했었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장막 안에서 이것 저것 여자 아이들 하는 일을 하며 지냅니다. 한참 놀고 돌아오는 에서를 바라볼 때마다 속이 탑니다. 잘 생기고 힘찬 형을 보고 일면 부러워하며 그렇지 못한 자신의 신세를 한탄합니다. 질투가 납니다. 나에게는 왜 저런 모습과 능력이 주어지지 않았을까? 자기를 이렇게 나아준 부모가 원망스럽습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는지 몰라도 하나님이 원망스럽습니다. “계속 이런 모양으로 살아야 하나” 회의가 들지만 달리 어쩔 도리가 없습니다. 점점 “나는 별 수 없는 놈이다, 이 세상에 필요없는 놈이다” 열등감을 더해 갔을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는 안소니 퀸이 주연한 영화 “노틀담의 곱추”의 콰지모도가 떠오릅니다. 외모가 삐뚤어진 것이 아니라 야곱의 의식세계가 곱추같았던 것이지요. 야곱은 그러면서도 무엇때문인지는 모르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젠가는 형과 같이 되어 보겠다”는 욕망이 조금씩 싹트기 시작합니다. 콰지모도가 아리따운 집시 여인을 처음 보았을 때의 심정이 전해오는 듯 합니다.

이러한 환경 속에서 어떻게 이런 욕망이 생겨날 수 있었을까요? 모르지요. 하나님의 섭리라 할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생겨나는 그런 마음 있지요. 어느날 갑작스럽게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튀어나오는 생각들, 말들, 행동들 그것들이 어디서 나온다고 보아야 할까요. 야곱을 부추겨 주는 리브가의 계속적인 이야기도 효험이 있었을 겁니다. 자신도 모르게 자란 그러한 욕망은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온 어느 날 모습을 드러냅니다. 배가 고파있던 에서는 야곱이 끌이고 있던 죽을 달라고 합니다. 이때 야곱에게 어디서 나왔는지 알 수 없는 용기가 생깁니다. 에서의 장자권을 자기에게 팔면 죽을 주겠다고 합니다. 이는 오래 전부터 계획된 제안이었다기보다는 아주 즉흥적인 제안이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마음 속 깊이 있던 의식이 갑자기 튀어 나와겠지요. 어쨌든 중요한 것은 그 제안이 야곱에게는 매우 심각한 것이었다는 점입니다. 에서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야곱에게 장자권은 하늘의 별처럼 따지도 못하고 그저 쳐다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었을테니까요.

야곱은 이런 제안을 하면서도 당연히 에서가 “No”라고 대답하면서 자기의 제안을 일축하고 죽을 그냥 빼앗아 먹을 것이라 예상했었을 겁니다. 그러나 에서의 대답은 놀랍게도 팔겠다고 합니다. 저렇게 중요한 것을 어떻게 죽 한 그릇에 팔겠다니 이해가 되지 않으면서도 야곱은 한 줄기 희망을 잡은 듯 싶습니다. 에서의 위치나 장자권은 야곱이 넘볼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차지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야곱의 뇌리를 스칩니다. 이때부터 야곱은 변하기 시작합니다. 조금씩 자신감이 생겨나고 바깥 출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아직 세상에 본격적으로 나서기에는 겁이 납니다. 리브가는 야곱의 이런 변화를 눈치채고 이를 잘 살리려고 노력했겠지요. 야곱이 육체적인 장애아는 아니었지만 정신적인 장애아같았기 때문에 야곱을 살리는데 리브가는 혼신의 노력을 다 했을 것입니다.

이후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이삭이 에서를 불러 사냥해 오라 시키는 말을 우연히 듣게 된 리브가는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안된다는 생각을 합니다. 에서가 정식으로 이삭으로부터 상속을 받으면 야곱에게 돌아갈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리브가는 이제 조금씩 변화하기 시작한 야곱을 다시 주저앉힐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에서는 상속없이도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에서가 사냥에서 돌아오기 전에 이삭의 축복을 가로채기로 합니다. 야곱을 채근하며 계획을 짜고 실행에 옮깁니다. 야곱은 어머니의 채근에 따라하기는 하지만 형의 것을 가로챈다는 죄의식도 들고 아버지가 눈치 챌까봐 미리 겁이 납니다. 아버지의 축복을 받고 싶으면서도 그의 소심한 성격은 그의 발목을 붙잡습니다. 리브가가 용기를 북돋아 주며 채근합니다. 드디어 야곱은 에서로 변장하고 어머니가 만든 음식을 들고 아버지에게 들어갑니다.

의심하는 아버지 앞에서 야곱은 초조합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까지 온 바에야 할 수 없지” 하는 배짱도 조금 생깁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죄의식은 없어지고 아버지가 속아넘어간다는 사실에 일면 흥분해 하면서 “어떻게 이렇게 빨리 사냥을 했냐”는 말에 “여호와의 도움이 있었다”고 거짓말하는 여유까지 생깁니다. 에서가 돌아왔을 때 벌어질 일은 아직 생각에 없습니다. 오직 빨리 아버지의 축복이 있기만을 기다립니다. 아버지의 축복이 있었을 때 야곱은 쾌재를 부릅니다. 아버지의 축복이 진정 의미하는 내용이 무엇인지는 생각에도 없습니다. 그저 그동안 꿈꾸어 오던 것을 내 손에 넣었다는 기쁨과 만족만이 있을 뿐입니다.

아버지 방에서 나와 얼마 지나지 않은 뒤 야곱은 정신을 차립니다. 에서가 돌아오면 벌어질 일들이 걱정되기 시작합니다. 가만히 있을 아버지와 에서가 아닙니다. 야곱은 감당할 자신이 없습니다. 어디로든 피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밖으로든 어디로든 일단 숨었겠지요. 그리고 집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지켜보고 있었을 겁니다. 예상대로 에서는 흥분합니다. 야곱을 잡아죽일 기세입니다. 반면 이삭은 이미 벌어진 일이니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눈치입니다. 야곱은 일단 에서를 피해 다녀야겠다고 생각합니다. 리브가의 생각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삭을 설득하여 야곱을 자신의 친정으로 보내기로 합니다. 야곱이 떠나기 전 아버지 앞에 섰을 때 놀랍게도 아버지 이삭은 야곱을 혼내지 않고 도리어 축복해 줍니다.(이삭편 참조) 이는 에서인줄 알고 내렸던 축복과는 질이 다릅니다. 진정한 축복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야곱에게 힘을 주었을지는 아들이었던 분들은 다 이해하시리라 생각됩니다. 야곱은 이제까지 자기를 인정해 주지 않았던 아버지를 다시 보게 됩니다. 마음 속에서 지난 날의 자기 모습이 필름처럼 스쳐갑니다. 내가 왜 그랬었나 한탄이 나오지만 뭔가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이 앞섭니다. 확신은 없지만 자신감도 피어납니다. 야곱은 이제 새로운 삶으로 긴 여정을 떠납니다.

일단 에서를 피해 외가로 향하기는 했으나 이런 긴 여행을 야곱이 홀로 하기는 처음입니다. 자신감이 조금 생기기는 했으나 아직 대범하지 못합니다. 두려운 마음이 듭니다. 밤에 돌배개를 베고 잠을 자려고 하나 매일 어머니 장막에서 편히 지내오던 야곱은 잠이 오질 않습니다. 내가 왜 이런 일을 자초했나 후회도 듭니다. 앞으로 혼자서 어떻게 이 역경을 헤쳐 나가나 걱정도 됩니다. 에서, 이삭, 리브가의 얼굴들이 앞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그러다 잠깐 잠이 들어서 꿈을 꿉니다. 야곱은 꿈 속에서 하늘과 땅 사이 사닥다리로 하나님의 사자가 오르락 내리락하는 것을 보고 “너를 떠나지 않으리라”는 여호와의 말씀을 듣습니다. 야곱의 꿈에 여호와가 나타난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왜 에서가 아니고 야곱의 꿈에만 나타났을까요? 야곱은 어머니의 장막에 거하며 굳은 믿음을 가진 리브가로부터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에 대해 무수히 이야기를 들었을 것입니다. 앞날에 대한 두려움, 현실의 어려움으로 야곱의 깊은 의식 속에서는 어머니에게서 무수히 들은 하나님께 의지해야 한다는 간절함이 생겨났을 것입니다. 간절히 찾는 자에게 하나님은 바로 나타나십니다. 아멘.. (2편에서 계속 예정)

댓글목록

김영대님의 댓글

김영대 아이피 (210.♡.185.254) 작성일

저번 글에 이어 이번 글도 참 좋습니다. 감사히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성경이란 책이 읽는 사람의 눈높이만큼, 그사람의 수준만큼만 읽혀진다고 했는데 정말 맞는 것 같습니다.
이광석님의 글을 통해 성경을 좀더 재미있게 또 의미있게 읽을 수 있는 눈이 조금 열리는 것 같습니다.
거듭 감사드립니다. 2편이 기대됩니다.

김영대님의 댓글

김영대 아이피 (211.♡.9.67) 작성일

저는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왜 이런 무게 있는 글들은 인기가 없는 것일까?
참 좋은 글인데.............
??????????
이광석님!
계속 올려 주세요.
관심가지고 읽는 사람 따로 있습니다.
보통의 100마리 양보다 길 잃은 한마리 양이 더 소중합니다.

김재환님의 댓글

김재환 아이피 (211.♡.140.177) 작성일

참 궁금한게 있습니다.
아버지 이삭이 야곱에게 진정한 축복을 내린 이유가 뭔가요?
또 하나, 야곱을 그런환경에 처하게 하신 하나님의 뜻은 무엇인가요?
참 성경이 이렇게 소설책 읽히듯 쉽게 다가오는 게 신기하네요.
2편을 읽으면 그 의문이 풀리려나....
이런식으로 나가단 성경도 마스터하겠네요^^
동서양의 경전을 넘나드는 사태가 벌어지는건가~~
그럼 계속 기대하겠습니다!

이광석님의 댓글

이광석 아이피 (193.♡.64.203) 작성일

이삭이 야곱에게 진정한 축복을 내린 것은 이삭 편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이삭은 자기의 삶이 에서로 분장한 야곱과 같았던 것을 깨달은 것이지요. 통한의 회개 뒤에 이제 진정으로 자신의 못한 것들(야곱)을 진정 축복하게 됩니다. 제 짧은 소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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