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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의 생명관을 통해 바라보는 줄기세포...(퍼온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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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파이 (211.♡.184.159) 댓글 4건 조회 7,205회 작성일 06-04-26 11: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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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이란 살아있는 생명체를 말한다.
생명체라고 하면 우리는 대개 인간과 동물의 생명만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인간이나 동물에게만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고
삼라만상의 모든 물질에게도 생명이 있다고 본다.
불교에서 물질과 정신에 모두 생명이 있다고 보는 것은
우주 전체를 생명체라고 보는 관점에서 기인한다.
불교에서는 정신계와 물질계를 모두 총망라하여 일법계(一法界)라고 한다.
일법계는 우주 전체를 말하는 것으로 천지(天地)가 생기기 전에도 존재하였고,
천지(天地)가 파괴된 후에도 존재하게 된다.
그러므로 일법계를 불생불멸 또는 부증불감의 법계라고 한다.
이와 같이 생멸이 없고 증감이 없는 일법계의 법체가 물질계와
정신계를 형성하는 뿌리가 되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우주 전체를 생명체로 보는 관점과 개체적인 생명
각각을 생명체로 보는 크게 두 가지 관점에서 생명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인간과 동물의 생명은 개체적인 관점의 생명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전제하에서 지금부터 불교의 생명사상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1) 총체적 관점의 생명
불교에서는 인연의 법칙에 의해서 모든 것이 생겨난다고 본다.
일체의 모든 생명체도 여러 인연이 화합해서 생겨난다.
여러 인연이 모이면 모습이 드러나게 되고, 인연이 흩어지면 모습이 소멸되게 된다.
이와 같이 모습으로 드러난 현상계가 인연법의 세계이다.
그것을 유식학적 표현으로는 의타기성(依他起性)이라고 한다.
반면 인연이 소멸되면 모습이 사라지게 되는데 그것은 본바탕으로 돌아간 것을 의미한다.
이렇게 영원한 생명체의 본바탕이 되는 것을 진여(眞如)라고 한다.
또한 진여의 본성이 되는 것을 진여체(眞如體)라고 하며,
유식학에서는 원성실성(圓成實性)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학설에 의하면 이 세상의 모든 것은 모습이 있고 없고를 막론하고
생명을 지니고 있다.
마치 바닷물과 파도의 관계와 같다고 볼 수 있다.
바닷물의 입장에서 보면 모든 것이 영원한 것이며,
파도의 입장에서 보면 생겨났다가 소멸되기 때문에 모든 것이 허망한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물과 파도는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물과 파도는 전체적 입장에서 보면 둘이 아닌 것이며 그렇다고 하나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관계를 불일불이(不一不異)의 세계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생명의 세계를 총칭하여 일법계(一法界)라고 한다.
불교에서는 우주 전체를 유기적 관계의 생명체로 본다.
유기적 관계의 생명체는 눈에 보이는 작용과 눈에 보이지 않는 두 가지 작용에
의해서 유지된다고 볼 수 있다.
지구 전체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생명을 유지해간다는 ‘가이아’의 가설처럼
우주 전체가 살아있는 유기체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지구뿐만 아니라 우주 전체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체로 변하고 있는 것이다.
변한다는 것은 살아있다는 의미이며, 새로운 생명체로 진화하고 있다는 뜻이다.
삼라만상의 일법계는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생명활동을 계속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간은 단 한순간이라도 숨을 쉬지 않으면 목숨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인간이 숨을 쉬고 살아갈 수 있도록 뒷받침해 주는 것이 공기이다.
공기 속에는 수많은 기체들이 활동하고 있으며 또 그 속에서 적당한 분량의
산소를 유지해야 생명을 유지할 수 있다고 한다.
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들은 동물이나 식물이 생명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라고 한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미생물의 분해 작용은 땅을 살아있게 하고,
나무나 식물들이 자랄 수 있도록 하는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또한 인간의 몸속에도 수없이 많은 미생물들이 살고 있으며 그것으로 인해서
인간이 생명활동을 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물의 영장이라고 자처하는 인간도 우주 전체의 유기적인 관계를 떠나서는
생명을 유지할 수 없게 된다.
불교에서는 물 한 방울에 팔만사천충이 있다고 한다.
물 한 방울에도 수없이 많은 생명체들이 살고 있으며,
그러한 물의 작용으로 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체들은 생명을 유지해 나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렇듯 생명체가 유지될 수 있는 것은 보이는 것들과 보이지 않는 것들의
끊임없는 상호관계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우주 전체가 유기적 관계에서 생명을 유지해가는 것이다.


2) 개체적 관점의 생명
물질과 정신은 뗄래야 뗄 수 없는 분가분리(不可分離)한 관계를 지니면서 생명을
유지하고 있다.
불교에서는 이것을 색심불이(色心不二)라고 한다.
물질과 정신은 각각 자체의 성질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전체와 개체가 유기적인 관계를
지니고 생명활동을 하고 있다.
물질계와 정신계의 생명체가 어떻게 생겨나고 유지되는가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1) 물질의 생명체
물질계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네 가지 성질(四大)에 의해서 생겨난다.
지(地)는 견고한 성질(堅性)을 뜻하는 것으로 물질의 형태를 유지하게 된다.
수(水)는 물의 습한 성질(濕性)을 뜻하는 것으로 자연계와 인체가 생명을 유지할 수
있도록 순환시키는 역할을 한다.
화(火)는 불의 따뜻한 성질(煖性)을 뜻하는 것으로 체온을 유지하게 하는 역할을 한다.
풍(風)은 움직이는 성질(動性)을 지니고 있으며 끊임없이 변화함으로써 생명을
유지하도록 하는 역할을 한다.
이와 같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의 사대(四大)는 모든 물질을 형성하는
근원이면서 물체를 창조하는 공능을 지니고 있다.
결국 모든 물체는 이 네 가지의 성질이 화합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사대(四大)에 의해서 생겨난 물질은 성주괴공(成住壞空)의 과정에 의해서 생겨나고 소멸된다.
일법계의 삼라만상이 모두 이와 같은 성질을 지니고 있다.
우리 인간을 비롯한 모든 동물의 몸도 물질로 이루어진 것이다.
자연계의 삼라만상도 모두 물질계의 생명체이며, 우주에 펼쳐진 무수한 천체들도
물질계의 생명체이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삼천대천세계(三千大天世界)라고 한다.
이렇듯 물질의 생명체가 우주 안에 가득 차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주가 텅 비어 있는 줄 알지만 사실은 불가사의한 물질로 꽉 차 있는 것이다.
그와 같은 우주의 기운과 하나가 되면 무한한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2) 정신의 생명체
정신은 곧 마음을 말하며 우리 마음은 본래부터 청정한 깨달음의 성질(覺性)을 지니고 있다.
물질과 정신은 분리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 정신은 물질을 대상으로 인식하고
판단하는 성능을 지니고 있다.
그러므로 마음은 물질에 의지하면서도 몸을 움직이게 하는 성능을 지니고 있다.
마음은 모든 행동의 주체가 되기 때문에 이를 만법유식(萬法唯識)이라고 한다.
또한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내기 때문에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고 한다.
그래서 마음에 의하여 극락세계도 이루어지고 지옥의 세계도 이루어진다.
욕계와 색계와 무색계의 세계도 마음의 업력에 따라 건설된 것이다.
마음이 건설한 세계에 의지하여 사는 것을 정신적 생명체라고 한다.
정신적인 생명체는 마음의 업력에 따라 다양한 생명체가 이루어진다.
몸과 마음에 의해서 이루어진 행위는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이라는 마음에 보존되어진다.
우리 인간은 아뢰야식에 보존된 업력에 따라서 삼계육도(三界六道)에 윤회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의 마음에서 천국과 지옥 등 삼계육도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이다.
정신계가 형성되어지는 과정을 태아의 정신형성에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3) 인간의 생명체
첫째 인간으로 태어나려면 전생의 생명체인 아뢰야식이라는 영혼과 어머니와 아버지
삼자가 화합하여야 출생할 수 있다.
즉 아뢰야식은 인(因)이 되고, 부모는 연(緣)이 되며, 인과 연이 화합하여야만
태아라는 과보(果)를 출생시킬 수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생명은 여러 인연의 화합으로 말미암아 어머니 태내에 탁태하여
출생하게 된다.
불교에서는 태아가 출생하여 성장하는 기간을 다섯 주간으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이것을 태아오위설이라고 한다. 태아가 형성되는 과정을 유식학에 의하여 설명하고자 한다.

① 태아의 정신 형성
태아는 아뢰야식이라는 생명체가 어머니 모태에 탁태되자마자 총체적인 과보를 발생하게 된다.
이와 같은 총체적인 과보를 총보(總報)라고 한다.
인간은 과거의 생부터 지금까지 쌓아온 총보(總報)에 의해서 정신과 육체가 이루어지게 된다.
윤회의 주체인 아뢰야식은 지금까지 자신이 지은 모든 과보를 모두 지니고 있다.
이때의 아뢰야식이 첫 번째 정신계를 형성한다고 해서 초능변식(初能變識)이라고 한다.
이 아뢰야식에 의거하여 말나식(末那識)이라는 마음이 두 번째로 정신계를 형성하게 된다.
그래서 말나식이 형성되는 것을 제이능변식(第二能變識)이라고 한다.
세 번째로 의식(意識)을 비롯한 육식(六識)이 형성되면서 태아의 정신계가 완성되는 것이다.
이것을 제삼능변식(第三能變識)이라고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태아는 보고, 듣고, 맛보고, 냄새 맡고,
느낄 수 있는 능력을 지니게 되는 것이다.
태아는 이러한 세 차례의 정신적 변화를 통해서 팔식(八識)이 형성되면서 마음으로
모든 것을 인식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신계는 세 차례에 걸쳐서 완성된다.
인간의 정신과 육체는 아뢰야식이 주체가 되어 형성되고 변화되기 때문에 아뢰야식을
이숙식(異熟識)이라고 한다.
이숙(異熟)은 진화한다는 뜻이다.
인간은 끊임없이 진화하면서 생명을 유지시켜 나가는 것이다.

② 태아의 육체 형성
태아의 정신계는 아뢰야식을 중심으로 하여 세 차례에 걸쳐서 형성되면서
동시에 육체도 형성된다.
이렇게 형성된 몸을 이숙생(異熟生)이라고 한다.
육체적인 몸이 형성되는 과정은 하나하나 따로 따로 형성되기 때문에
별상(別相)이라고 한다. 태아의 육체는 10개월에 걸쳐서 형성되어진다.
불교에서는 태아의 정신과 육체가 형성되는 기간을 오위(五位)로 나누어 설명하고 있다.
첫 번째 주간의 태아는 처음 태아가 모태에 잉태되는 순간부터 일주일의 기간을 뜻한다.
이 첫 번째 기간의 태아를 응활(凝滑)이라고 한다. 응활(凝滑)은 응고된 액체라는 뜻이다.
두 번째 주간의 태아는 얇은 피부가 형성되는 기간이라고 해서 박피(薄皮)라고 한다.
세 번째 주간의 태아는 혈관과 육체가 형성되는 기간이라고 해서 혈육(血肉)이라고 한다.
네 번째 주간의 태아는 견고한 육체가 형성되는 기간이라고 해서 견육(堅肉)이라고 한다.
다섯 번째 주간의 태아는 견고한 육체가 형성된 이후부터 출생할 때까지의 태아를 말한다.
제오위의 기간에는 팔 다리 등의 사지(四肢)와 오장육부가 모두 형성되는 기간이라고
해서 지절(支節)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걸쳐서 태어나게 되고 또한 이 세계에서 살다가 본바탕으로
돌아가게 되는 것이 인간의 일생이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모든 생명체는 물질과 정신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생명이 유지된다.
우주 법계의 물질계와 정신계는 뗄 수 없는 관계로 생명을 유지해가고 있으며,
인간의 정신과 육체도 뗄 수 없는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면서 생명을 유지해가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명현상을 종합해 보면 인간은 정신만으로 살 수 없고 또한 물질만으로도 살 수 없다.
우리 인간이 물질과 정신을 잘 조화시키면서 살아갈 때 마음의 본바탕인 진여에 도달할 수 있게 된다.

불교의 생명사상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적으로 큰 논란거리가 되고 있는
줄기세포연구와 관련해서 필자의 생각을 피력해보고자 한다.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총체적인 입장에서 생명을 바라보면 우주에 놓여진
모든 것이 생명 아님이 없다.
인간과 동물은 물론 눈에 보이지 않는 미생물까지도 모두 생명에 속한다.
인간의 생명을 총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정자와 난자는 모두 생명체이지만
개체적인 입장에서 보면 정자와 난자는 생명체라고 볼 수 없다.
불교적으로 보면 정자와 난자는 아뢰야식이 태아의 인격체를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연(緣)에 해당한다.
인간의 생명체가 형성되는데 있어서 그 주체는 아뢰야식이며,
정자와 난자는 조력자에 불과하다고 보는 것이 불교적 입장이다.
불교에서는 태아의 생명은 아뢰야식이 중심이 되어 시작된다고 본다.
아뢰야식은 과거의 모든 생에서 지은 업과 현재의 업을 모두 모아서 유지하고 있다.
그것을 총보(總報)라고 하는데 인간이 태어날 때에도 그 총보에 의해서 윤회하게 된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아뢰야식이 중심이 되어서 인간의 생명체가 탄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불교에서는 아뢰야식(中陰身)이 정자와 난자와 결합된 순간부터
인간의 생명체로 인정하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정자와 결합되기 이전의 난자는 개체적인 생명체로 볼 수 없다.
난자의 활용에 대한 문제는 개인의 권리이자 개인의 윤리적인 판단에 맡길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필자의 생각을 피력해 본다면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난자를 활용하여
많은 사람들의 고통을 덜어주고 삶의 질을 높일 수 있다면 그것은 오히려
불교의 보살정신에 합당하다고 본다.
고통은 나눌수록 작아지고 기쁨은 나눌수록 커진다는 말을 실천하는 것이
불교의 자비정신인 것이다.

댓글목록

유님의 댓글

아이피 (125.♡.123.88)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파이님의 댓글

파이 아이피 (211.♡.184.159) 작성일

고맙습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참ㅠ,ㅠ님의 댓글

참ㅠ,ㅠ 아이피 (210.♡.139.166) 작성일

'정당하지 못한' 연구, '정당하지 못한' 난자 수급, '정당하지 못한' 논문을 발표한
한 연구자(? 정치가?)를 살리기 위해 자비의 가름침까지...

'정당한 방법'으로 획득한 난자를 활용하여?

하루 종일 신발 공장, 옷 공장에서 노등을 하는 10살도 되지 않은 제삼세계 어린이들의
노동력도 세계 굴지의 회사들이 '정당한 방법'으로 구매하고 있지요...

실험을 위한 대량의 난자를 확보하기 위한 '정당한 방법'이 있다면
그 '정당한 방법'을 동원하여 '인간으로 부터 생산된 자원'을 구매하려는 측이
말씀하신 것 처럼 불교의 자비행을 하려고 그런다고 생각하시는지?
'정당한 방법'을 통하여 '인간으로 부터 나온 자원'을 제공하는 사람들은
누가 될 것이라고 생각하시는지?

'정당한 방법'이 있다고 할 때,
우리가 우리보다 열악한 환경에 있는 사람,
어린이들을 노동력으로,
여성들을 난자 제조 공장으로 바라보게 될까봐 두렵기까지 합니다.

우리가 '매혈'의 경험을 통과해 온 세월이 그리 길지 않은 듯 합니다만...

연구윤리마저 가볍게 무시한 연구자(?)를 살리기 위해 사용되는
국익이라는 '이름', 부처님 이란 '이름', 생명이라는 '이름', 자비라는 '이름' 들...

그 거창한 '이름'들 때문에
스러저간 뭇 생명들...

'이름'들을 어디에 붙이실려고 하는지...

참 슬프네요.

정말 참 ㅠㅠ님의 댓글

정말 참 ㅠㅠ 아이피 (125.♡.123.88) 작성일

참다운 진실이 무엇인지

神처럼 과연 알수있을까?

왜 모두 神이 되길 원하며 심판하려는지...

그 거창한 '이름'들...

'이름'들을 어디에 붙이실려고 하는지...

정말 참 슬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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