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 편하게 사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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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58.♡.138.174) 댓글 0건 조회 6,210회 작성일 09-02-03 20:26본문
마음의 짓눌림, 강박, 결벽, 집착 등등의 증세를 없애거나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평상시 본인이 가지고 있는 습관적인 사고와 관념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는 듯 합니다.
그렇게 마음을 무겁게 만들어내는 증세는 논리적인 분석과 과학적 통찰을 통해서 해소되는 것이 아니라, 뒤틀린 마음의 작용을 근원으로 되돌리는 방법을 통해서 치유가 가능할 것이기 때문이죠. 이런 때는 모든 지식과 논리를 내려놓고, 내면의 성찰을 통해서 본원적인 자기를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외의 문제들은 치밀한 이해와 숙고와 이에 따른 실천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온전히 다다를 수 없습니다.
가령 방바닥에 앉아서도 마음의 원리와 세상이 돌아가는 근원을 발견할 수 있지만, 문밖에 누가 와있는 줄은 알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런 때에는 ‘마음의 작용’이 아닌 ‘나섬의 행위’가 필요한 것이죠.
따라서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는 것과 세상의 문제를 이해하고 실천하는 것은 둘이면서 동시에 하나로 생활 속에서 작용되어야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런데 많은 분들이 앞선 ‘마음의 짓눌림’을 해소하는 방법을 마치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 할 수 있는 마냥 생각하시고 이것만을 권장하고 있는 듯해서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이것이 사회적 삶속에서 실천적 삶 속에서 하나로 어우러지지 않고, 나눠지고, 개체화(나의 문제로)되고, 전문화 됨으로 급기야 그 의미가 왜곡되는 상황에 이르른 듯 하기 때문입니다.
이들은 주로 ‘아포리즘’(가벼운 경구를 통한 이해의 전달)적 화술을 구사하는 분들로서 인생사 복잡다다한 현상들을 단순한 몇 개의 개념 속에 융화 시켜서 끝없이 이를 되뇌임으로 이를 통해 ‘현실’을 만들어 가고 있는 듯 합니다.
이분들은 외부의 복잡한 문제와 개념들을 자신이 가진 몇 개의 극히 단순한 논리로 환원합니다. 따라서 이들이 생각하지 않은 것들 외의 외부의 개념과 논리는 자신들이 가진 생각에 융화되거나 배척됩니다.
이들의 특이한 점은 ‘복잡한 논리와 개념이 필요 없다’고 얘기하면서 극히 단순한 몇 개의 핵심적 논리만을 끝없이 되뇌인다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자신이 사용하는 것은 논리와 개념과 지식인 줄을 모르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그것을 태연히 비판할 근거를 얻을 수 있는 것이죠.
이들의 정신작용의 실체를 좀 들여다 볼라치면 스스로 거는 최면과 다름이 없음을 알게 됩니다. 이런 분들과는 몇 마디만 대화를 해 보면 그 상태를 파악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주로 ‘구원’만이 능사라고 알고 있는 상당수 기독교인들과 ‘자기 찾기’에 몰입하고 있는 상당수 불교도-노장가들입니다. (물론 기독교인-불교도인 전부가 그렇다는 얘기가 아닙니다.)
색깔만 다를 뿐 이 양자의 정신작용의 원천은 같습니다. 이는 ‘관념주의’와 ‘유아론’입니다.
자기 생각에 갇혀 있는 아이와 같다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살면 세상 편하기는 합니다.
폭넓은 개념을 구사하며 끝없이 자기를 검증하고 늘 쇄신하는 역량이 훈련된 사람은 그나마 자기가 빠져 있는 개념의 실체를 확인하고 이로부터 빠져나오고자 하는 다각적인 노력을 기할 수 있습니다. 하자만 ‘자기 생각에 갇혀 있는 아이’들이 원하는 것은 끝없는 쇄신을 통해서 진리로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진리라고 믿고 있는 개념’을 잡고 있는 것임으로 자기 검증과 쇄신이 불가능합니다. 세상을 편하게 사는 대신 그 댓가를 받게 되는 것이지요. 물론 스스로는 절대로 그 작용을 알지 못합니다.
이렇다 보니 이들이 하는 것이라고는 자기 생각의 재 확인과, 자기와 생각이 다른 사람들에 대한 비이성적인 배척뿐입니다.
이들은 논리적으로 어떤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않고, ‘논리가 모든 것을 해결해주는 것이 아니다’는 전제 하에 ‘자기가 주장하는 바가 진리’임을 거듭 주장할 뿐입니다. 물론 논리가 진리는 아닐 터입니다. 하지만, 이해가 다른 특정 사안에 대해서 양자가 이해를 공유할 수 있는 마지노선인 ‘논리’를 배척하고 ‘네 논리는 틀리다. 논리로 문제를 풀 것이 아니라 내가 지금 마음으로 느껴서 말하는 바가 옳다’고 얘기한다는 것은 대화 자체를 포기하고 상대방의 존재성을 무시하는 태도임과 다를 바 없습니다. 왜냐하면 상대방도 마찬가지로 복잡한 논리를 집어 던지고 ‘내가 맞다’고 목소리를 높이는 순간 거기에는 더 이상 어떠한 대화도 불가능한 끝없는 대립과 갈등만이 조장될 뿐이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인간 사이에 존중되어야하는 기본적인 논리조차도 인정하지 않는 태도는 스스로의 무지를 가리기 위한 수단에 불과합니다.
기실 그것이 온전한 진리라면은 당연히 논리적인 기반위에서도 이야기를 풀어 낼 수 있을 터인데, 전혀 그렇지 못함으로 이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억지에 불과한 것이지요.
이러한 억지적 성향, 유아론적 경향의 ‘실증’은 그들의 다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특성이 필연적으로 충돌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가령 그 ‘구원’만을 위해 다른 이해를 배척하는 기독교인들과 ‘득도’만을 위해 노력하는 불교도들-도인들을 맞붙여 놓아 보십시오. 그곳에는 정말 애들 싸움 밖에 안 일어 납니다.
이들은 서로 빚어진 어떤 문제를 해결할 여력, 개념을 정리하고 비교하고 앞뒤를 따지는 역량이 없다보니, ‘내가 옳아’라는 소리만 끝없이 되뇌일 뿐입니다. 물론 그 양자의 분파 ‘수장’격 되는 사람들은 여기저기 주워들은 잡다한 얘기들과 거창한 서사구조가 있는 말들을 감동적인 연설로서 점잖게 풀어 낼 터이기에 뒤에 줄 서 있는 사람들은 그에 현혹되어서 앞에서 무슨 일이 빚어지고 있는지 명증하게 보지는 못할 것입니다.
결국 이들도 이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자기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무리에 뛰어들지 않습니다. 늘상 그럴 때는 ‘내가 가진 현명한 지식이 바보 같은 사람들에게 무시당할 것은 뻔해’라고 안위하곤 하죠. 하여 이들이 할 일이라고는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들에 둘러쌓여서 ‘그래 우리 생각이 옳아’라면서 끝없이 집단 최면을 거는 방법 밖에 없습니다.
‘진리’에 대한 문제의식이 작금의 인류사적-환경적, 시대적 문제와 연결되지 않고 구체적인 실천력으로 담보되지 않는 이상. 그러한 진리를 찾는답시고 나서지만 실은 주관적 만족을 위한 욕망의 산물들은 ‘자위행위’에 지나지 않는다고 판단됩니다. 흔히 ‘도’를 찾는 이들이 ‘구원’을 찾는 이들에게 손가락질하거나, ‘구원’을 찾는 이들이 ‘도’를 쫓는 이들을 폄하하곤 하는데, 이건 참 우스운 모습이죠. 자위행위하는데 왼손으로하든 오른손으로 하든 무슨 차이가 있답니까. 하지만 유독 이들 본인들은 그것을 모르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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