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분의 깨달음에 관한 한 생각(옮긴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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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물처럼 (211.♡.184.159) 댓글 5건 조회 12,394회 작성일 06-05-24 11:17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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옆에머물기님의 댓글
옆에머물기 아이피 (211.♡.246.8) 작성일많은분들이...스스로 깨어나고 계시네요 부럽습니다^^
바람님의 댓글
바람 아이피 (59.♡.165.221) 작성일
'깨달음을 직업으로 갖지 말구요.' 이 말씀에 많이 공감이 갑니다.
혹 깨달음을 얻은 사람이 그것이 직업(소위 성직이라고 이름지어 이야기 하는 것)이 되였을 경우, 자기자신도 모르게 그러한 위치나, 직업에 유리한 쪽으로 전하기 쉽고, 그렇게 되면 그것이 오히려 자기자신을 가리우게 하는 미망이 되기 쉽다. 이렇게 봅니다.
무무님의 댓글
무무 아이피 (211.♡.95.181) 작성일
스스로 '깨달았다' 비스무리 스타일로 나서서
(반대급부가 있건 없건) 답을 주는 것을 업으로 삼는 사람들보다
일상의 소소한 직업 열심으로 해내면서
묵묵히 사는 사람들 중에 진짜 깨달은 사람이 있음을 많이 본다.
농부, 청소부, 목수, 파출부, 우체부 중에도 그런 사람들이 많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선생님들보다 더 존경한다. 진짜루.....
청량산님의 댓글
청량산 아이피 (211.♡.153.92) 작성일
김연수님의 사이트입니다.
http://www.born2.net/bbs/view.php?id=peace&page=1&sn1=&divpage=1&sn=off&ss=on&sc=on&select_arrange=headnum&desc=asc&no=31
많이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너무좋은글들이 많습니다
사실은 이런글올리기도 조금은 망설여집니다
본시 마음공부란것이 좀 미련하게 앞만보고 가야하는데,괜시리
이것저것 쳐다보는것이, 결국 무기수,장기수,뺑뺑이도는 지름길이기에...
지금여기님의 댓글
지금여기 아이피 (210.♡.49.23) 작성일
송재광님이 누군지 궁금하다 찾다가 이걸 발견했음.그래서 그냥 남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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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달음은 따로 뭐가 있는 것이 아니고 그저 뇌가 유연해지는 것이다. 왜 유연해지느냐 하면 자기가 자기의 뇌에 스스로 채워놓았던 사슬을 풀기 때문이다. 그 사슬은 기억과 자아의 이기심으로 생기는데 진화과정의 부작용인 것 같다.
예를 들면 자기가 예전에 누구에게 부당한 대우를 받았다면 그로 인해 오랜세월 홧병에 시달리기 쉽다. 그런데 유연한 뇌로 생각해보면 그랬던 과거는 지금 이 우주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당한 대우' 자체가 지금 존재하지 않는다. 자기가 홧병을 공연히 만들어내고 있었음을 알아채고 홧병이 풀리는 것이다. 모든 것을 그냥 있는 그대로..사회학적 현상이든 자기마음이든..깨달음은 과학의 객관성을 직접 자기마음에 적용시키는 것이다.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보면 여러가지 불필요한 잡스런 흐름들이 보인다. 그런 잡스런 흐름은 기쁨을 주지 못하고 귀찮기만 하다. 그러니 그런것들의 실제를 보면 그것들은 그저 무시하게 되지만 그러면서도 그런것조차 어쩌다 자기에게 들어온 손님처럼 사랑스런 눈길로 지긋이 바라보는 것이다.
깨달음은 이렇게 단순한 것인데 왜 불교나 기독교..그리고 숱하게 많은 수행단체들이 생겼는가?
나는 그것이 두 가지 이유라고 본다.
첫째는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 때문이다.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기에 어떤 결여를 느끼고 종교를 창조하고 空을 만들고 無我를 만들고 구원을 만들고 하나님을 만들었다. 자기가 보지 못하는 것을 따로 만들었다.
둘째는 종교인이나 수행자들이 보상심리를 갖기 때문이다.
경제학의 매몰비용..이란 개념과 비슷하다. 그들의 인생은 구도의 여정에 많이 투자..혹은 낭비되었다. 이제 무언가를 알락말락 할때 그들은 자기들이 알락말락 한 것이 그토록 단순한 것에 아차! 싶기도 하고 허망하기도 하다.
그래서 그 알락말락 하는 상태의 것을 과대포장한다.
구원 공 무아 천국 열반 극락 지옥을 만든다.
그런 것들이 제도화된 것이 종교이고 기성종교들에 밀려서 조그맣게 집단화된 것이 각종 수행단체들이다.
부처님 예수님은 그 주위의 사람들을 가르쳤을 뿐이다. 그것도 묻는 사람들에게만.
그런데 부처님 예수님 아닌 사람들이 부처님 예수님 되지는 못하고 흘러간 세월은 답답해서 온갖 개념들을 만들어냈다.
깨달은 사람들은 제자가 생길까봐 두려울 것이다. 제자가 생기는 순간부터 오류가 생기니까 말이다.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 제자가 될 리 없고 자기를 잘 모르는 사람이 자기의 제자가 될 터이니 그때부터 오류가 오류를 부르고 거짓을 낳게 되니 걱정을 안할 수 없다.
자기를 이해하는 사람은 제자가 아니라 친구가 된다. 만약 자기가 스승이라 생각하고 누군가를 자기 제자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깨달음과 거리가 먼 사람이다.
그것은 도움을 주는 사랑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그것이 진정한 사랑일 수가 있을 까? 사랑은 '문득' 온다. 제도화되어 혹은 집단화되어 형태가 굳어질수록 사랑에서 멀어져간다.
깨달음은 없다. 그냥 뇌가 유연해진 것 뿐이다.
그럼 깨달은 자들이 말하는 체험은 무얼까? 그것은 우리가 달리기하면 몸이 가뿐하고 경치좋은 곳에선 마음이 편안하고 오줌누면 시원하고 무엇엔가 집중하다 갑자기 고개를 들면 시야가 확대되면서 자아가 확대되는 느낌을 느끼는 것과 비슷하다.
그런데 그런 느낌을 아 편안해! 아 시원해! 아 즐거워! 라고 이야기안하고 왜 법신이니 신과의 합일이니 무한의 허공이니 공이니 열반이니 하고 얘기하느냐 하면 스승이나 책이나 종교나 수행단체에서 그렇게 얘기하도록 배웠기 때문이다.
그래야 스승도 먹고 살고 종교도 먹고 살고 단체도 먹고 살지. 그리고 본인도 보람이 있지.
그런데 깨달음이 그저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이라 하여도 이 있는 그대로..를 설명하다보면 그게 또 수행이 되고 수행단체가 되고 수행법이 되고 종교가 되는 것이다.
그것이 아이러니칼하다.
있는 그대로 보는 것..은 무한한 감동이다.
해와 달을 있는 그대로 보면 해가 동그란 것은 너무너무 신기하고 달이 노란색이면서 모양이 변하는 것 또한 너무너무 신기하다.
다른 사람이 있는 것도 너무너무 신기하다. 나를 보고 웃고 나와 같은 말을 하고 심장도 뛰고 나와 손도 잡지 않는가?
가장 신기한 것은 '나'다.
손을 올리면 손이 올라가고 웃으면 웃고 어려운 계산도 하고 복잡한 철학도 생각하고 밥도 먹고 똥도 눈다. 이 얼마나 신기한 일인가?
그런데 아무리 신기해도 죽음은 두려울 수 있다.
그럴때는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이 우주가 뭔지 나는 모르겠지만 나도 우주의 한 조각 아닌가? 설마 나만 쏙 빼놓고 이런저런 일들이 벌어지진 않겠지? 신이 나를 세상에 나오게 했으니 죽은 다음에도 책임지겠지. 만약 안 그러면 정말 의리없는 신이다..
만약 그래도 두렵다면 이번에는 그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보면 된다.
나는 지금 왜 두렵지? 죽음? 죽음이 뭔데? 죽음? 그건 정말 이해하기 힘들어. 나는 지금 기쁘게 살고 있는데 왜 이해하기 힘든 것을 이해하려고 할까? 내가 왜 죽음을 이해해야 할까? 죽음없이도 나는 지금 행복한데..? 아하! 나는 죽음이 나의 행복을 가져갈까봐 두렵구나. 이 행복을 느끼는 내가 죽어서 없어지는게 두렵구나. 그런데 행복따로 나따로 인가? 내가 없으면 행복도 없고 행복이 없으면 행복해하는 나도 없는 걸? 그 행복이 나야. 그리고 그 행복은 지금 존재해. 있는 것은 지금 뿐이야. 죽음은 지금 없어. 그래서 죽음은 없어.
두려움을 있는 그대로 보면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