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신 수행은 깨달음을 방해한다.(끼란과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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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공유 (211.♡.76.2) 댓글 11건 조회 8,046회 작성일 09-02-14 23:20본문
김태완 번역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라.
나 역시 그랬습니다. 나는 그의 바로 앞에 앉아 있었습니다. 나는 수년 동안 그의 강의를 듣고 있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깨달음이라는 목표에 도달하리라는 희망을 가지고 그가 제시하는 것들을 따랐습니다. 나는 1981년 그가 미국으로 떠나기까지, 그에게 완전히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나의 영적 삶과 세속적 삶은 그와 함께함으로써 완전히 확실하고 안전했습니다. 나는 잠에 빠져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미국으로 가버렸을 때, 나는 갑자기 그러한 안락함으로부터 깨어났습니다. 그것이 나의 깨달음의 시작이었습니다.
내가 1967년 처음으로 오쇼를 만났을 때, 나는 열정에 불타고 있었고 진리를 향한 나의 갈망은 매우 강했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에게 더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 나는 서서히 서서히 잠들어 갔습니다. 그러나 오랫 동안 나는 내가 잠이 들었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습니다. 그가 미국으로 떠나고 나서야 비로소 나는 이러한 사실에 눈을 떴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굳은 결심을 가지고 다시 시작하였습니다.
점차로 나는 추구한다는 것에 무언가 잘못이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늘 무언가를 뒤쫓는 것이 잘못이라고 나는 느꼈습니다. 나는 바깥 어디에서 무언가를 찾음으로써 잘못을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누군가를 찾아가고, 길을 묻고, 누군가의 발 아래에 앉고, 무슨 일이 일어나기를 기다리고, 정신 수행과 노력의 도움을 통하여 깨달음이 일어날 것이라고 갈망하고 하는 등의 일들이 모두 잘못을 범하는 짓임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나는 단순히 나 자신을 관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나의 마음을 관찰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나의 내면에서 발생하는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습니다. 그리고 아주 아주 서서히 나는 갈망, 노력, 실천, 수행 등이 실제로는 나의 평화를 파괴하고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깨달음의 추구가 깨달음의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실천과 노력을 놓아버려야 한다고 오쇼는 우리에게 자주 말했습니다. 오쇼는 우리가 결코 그것(깨달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그것은 이미 우리의 본성이라고 말했습니다. 그의 바로 앞에 앉아서 나는 수없이 그런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잠이 들어서 꿈을 꾸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우리 모두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고 있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잠이 들어 있었고 그래서 오쇼의 말을 듣지 못했던 것입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나는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지를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나는 잠을 깨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한 첫 번째 일은, 어딘가에 도달하기 위한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목표를 성취하기 위한 나의 모든 실천과 수행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단순히 보통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는 직업을 가지고 일을 하였고, 내 가족을 돌보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어딘가에 도달하려고 갈망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더 이상 무엇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있는 그대로, 있는 그대로. 내버려둬, 내버려둬. 나는 신경쓰지 않아.”하고 나는 말했습니다. 그러나 나의 내면에서의 갈증은 그대로 있었습니다. 내면의 갈망은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나는 그것과 관련하여 아무 것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이 내가 지난 10년 동안 오쇼와 만나지 않은 이유입니다. 오쇼가 미국으로부터 푸나로 돌아왔을 때, 나는 아쉬람으로 찾아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홀로 있으면서 나에게는 모든 것이 안정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문득 나는 추구가 끝났음을 느꼈습니다. 나의 모든 추구는 저절로 사라져버렸던 것입니다. 나는 존재를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나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하였습니다. 나는 있는 그대로의 나 자신을 인정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어떤 변화도 원하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 무엇이 되려고 욕구하지도 않았던 것입니다. 나는 더 이상 깨달음을 바라지 않았습니다. 나는 나 자신만으로 편안해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나는 현재 이 순간의 나로서 행복했고, 평화로웠고, 편안했습니다. 나는 나 자신에게, “좋아. 훌륭해. 나는 지금과 다른 어떤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아. 나는 어느 곳으로도 가고 싶지 않아.”하고 말했습니다. 그리하여 오쇼가 푸나로 돌아왔을 때, 아쉬람으로 그를 찾아가고 싶은 열정이 나에게는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모든 의문이 사라졌던 것입니다. 모든 의문과 추구가 간단히 끝나버렸습니다.
수년 동안 나는 우리집 여기 이 의자에 혼자 묵묵히 앉아있기만 했습니다. 수년 동안 나는 침묵과 홀로 있음 속에서 나 자신과 본성을 즐기기만 했습니다. 나는 이것이 깨달음인지 아닌지를 따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나는 모든 추구가 끝이 났고 모든 의문이 사라졌음을 분명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나는 더 이상 질문할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완전히 안정되었고, 자신에게 아무 문제가 없었습니다. 나는 고요가 나에게 찾아왔음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서서히 서서히 나는 녹아내리고 있었습니다. 내가 스스로 아는 바로는, 나는 다만 사라지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나는 나의 고요 속에서 존재에, 모든 것에, 모든 사람에게 밀접해 있음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나는 모든 것과 더불어 하나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어떤 것도 내 자신 속의 평화를 방해할 수 없었습니다.
1993년 1월부터 사람들이 나를 만나러 오기 시작하였습니다. 이것은 나에게도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찾는 자가 누구입니까? 우리는 ‘나는 누구인가?’를 묻고 있습니다. 누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까? 질문자가 누구입니까? 당신이 이 질문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 자신이 누구인지를 당신이 알고 싶어하기 때문에 당신은 이런 질문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모순입니다. 당신이 어디에서 사라진 것이 아닌데, 당신이 어딘가에서 당신 자신을 발견한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당신을 찾는 모든 노력과 모든 행위는 당신을 당신 자신으로부터 분리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깨어난 사람은 누구나 오직 모든 노력과 모든 행위를 내려놓은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목표를 향한 행위를 한다는 그런 기본적 실수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의식적이고 의도적인 행위는 마음에 의하여 만들어집니다. 마음은 의식적 행위라는 언어만을 이해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조용히 앉아서 아무것도 하지 마시오. 봄이 오면 풀은 저절로 자랍니다.” 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쇼는 이 말을 자주 하였습니다. 우리는 그가 그 말을 반복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조용히 앉아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말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어떻게 아무것도 하지 않을 수가 있는가?”하고 우리는 계속 묻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있어서 ‘아무것도 하지 않음’은 “무엇을 할 것인가?”하는 의미였습니다. 우리는 항상 ‘무엇을 해야 하며 어떻게 그것을 해야 하며 어떻게 그곳에 도달할 것인가’를 알고 싶어 합니다. 모든 이런 질문들은 마음이 묻는 것입니다.
우리의 탐구에서 우리는 마음 너머에 있는 어떤 공간을 찾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도달할 수 없는 공간입니다. 그 공간은 마음을 놓아버렸을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공간입니다. 실제로 그 공간은 마음이 녹아 사라졌을 때에 남아 있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마음은 틀린 도구입니다. 여기에서 그것은 전혀 쓸모가 없습니다. 마음이라는 도구를 써서 어떻게 그 공간에 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공간에 도달하는 데에, 마음은 도움이 되는 도구가 아니라 장애물일 뿐입니다. 명상수행, 심리치료, 집단수행, 기타 모든 그런 터무니 없는 짓거리들이 마음에 의하여 행해집니다. 우리는 그 공간에 도달하기 위하여 마음을 사용하려고 애를 썼습니다. 우리 모두는 동일한 실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오쇼의 면전에 앉아 명상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수행들은 실제로 깨어나는 데에는 장애물들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모든 노력을 그만두시오! 모든 의도적 행위를 내려놓으시오! 멈추고 바라보기만 하시오! 다만 지켜보시오! 단지 일어나는 일을 바라보기만 하시오! 무엇이 되겠다는 모든 욕망을 내려 놓으시오!” 당신이 당신의 모든 행위를 내려놓았을 때, 그 즉시 행위자가 녹아서 사라지기 시작합니다. 행위자는 바로 마음입니다. 마음이 해체되고 녹을수록, 존재는 더욱 그 자신의 작용을 나타내게 됩니다. 그리하여 어느 순간에 당신은 당신 자신이 자유로움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아아! 그것이 이런가? 이것이 그것인가? 이것이 그것이구나!”라고 당신은 스스로에게 말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웃음이 나올 것입니다. 당신은 모든 것을 보고 다만 웃을 뿐입니다. 그것은 너무 간단하고 너무 쉽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을 그렇게 복잡하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내가 당신에게 아무것도 하지 말라고 말하면, 마음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할 것입니다. 그것은 마음의 이해를 넘어서 있습니다. 당신이 당신의 마음을 사용하고 있는 한, 스승은 당신에게 무언가 할 일을 주어야 합니다. 스승은 당신에게 당신이 당신의 모든 노력을 통하여 절망하고 지쳐버릴 때까지 당신에게 무언가 할 일을 줍니다. 그러나 어느 지점에서 당신은 그 모든 노력들에서 손을 놓게 될 것입니다. 그 때에 당신은 당신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느끼고 알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완전히 절망하게 됩니다. 이 완전한 절망의 상태에서 당신은 완전히 포기하게 될 것입니다. 그 때 당신은 말합니다. “아! 아! 나는 더 이상 어떤 것도 할 수가 없다. 나는 끝장났다.” 이러한 완전한 포기에서 당신은 완전한 받아들임으로 나아갈 것입니다. 당신은 존재와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기 시작할 것입니다. 이 받아들임이 당신의 모든 의지적 노력에 영양분을 공급하고 있는 마음의 뿌리를 몽땅 잘라버릴 것입니다. 그 영양분이 없으면 자아(ego)는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당신 주의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지켜봄(witnessing)으로써 그리고 아무 것도 애써 하려 하지 않음으로써, 천천히 천천히 이러한 받아들임의 상태는 실현될 것입니다. 이제 모든 일은 다만 발생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이 구경꾼의 상태에 도달할 때에, 비로소 당신은 ‘그곳’에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오랜 구도(求道) 여행의 종착점에 있는 것입니다.
나는 내가 스승이라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나는 당신들을 도와주는 친구로서 여기에 앉아 있을 뿐입니다. 내가 당신들에게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의미에서, 또는 내가 당신들이 알지 못하는 무언가를 알고 있기 때문에, 내가 당신들을 도와주는 것은 아닙니다.
당신들은 마치 스스로의 눈을 감고서 “나는 빛을 볼 수가 없어!”하고 울부짓고 있는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그저 눈만 뜨시오. 그러면 그 빛이 바로 여기에 있음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도울 수 있는 방식입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말합니다. “그저 눈만 뜨십시오.” 당신들에게는 “눈을 뜨시오.”라는 말조차도 어떤 행위를 의미하는 듯이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어떻게 그것을 더 잘 설명할 수가 있겠습니까? “눈을 뜨시오.”라는 말이 행위가 아님을 내가 어떻게 당신에게 전달할 수가 있겠습니까? 나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깨어남이란 사실 눈을 뜨는 노력 조차도 아닙니다. 그것은 단지 깨어나는 것입니다. 마치 당신이 잠에서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나는 당신들 모두가 잠에 빠져서 꿈꾸며 울부짖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나는 단지 당신들을 흔들어서 깨우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깨어나세요, 울지 말고. 꿈꾸지 마세요.”
이것이 내가 여기에서 하고 있는 일입니다. 여러 해 동안 명상(冥想)한다는 버릇에 젖어 있는 사람에게는 명상실에 앉아 있도록 내버려 둡니다. 그들이 여전히 자기들의 꿈을 즐기고 싶어할 동안은 그들은 명상 속에 있을 것입니다. 나는 그들이 나와 함께 있기를 원합니다. 나는 그들이 도망가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을 방에다 앉혀둡니다.(웃음) 그러나 나는 그들을 때리고 반복해서 흔들면서 “깨어나시오.”라고 고함을 지를 기회를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내가 하고 있는 일입니다.(웃음) 나는 어떠한 방법이나 행위도 제안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곳에 앉아 있는 것을 즐긴다면, 그냥 둡니다. 그러나 나는 그곳에 앉지 않습니다.
그러나 내가 당신에게 말할 때에 나는 언어를 사용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내가 다음과 같은 세 가지를 제시하는 이유입니다. 첫째, 완전한 신뢰로써 존재에 내맡겨라. 둘째, 사랑으로써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여라. 셋째, 완전히 깨어 있음으로써 모든 일을 하라.
이것들은 사람들이 노력과 찾기를 그만두도록 하기 위하여 내가 계속하여 그들에게 말하는 세 가지 제안입니다. 내가 이러한 제안을 할 때에는 마치 어떤 방법이니 기술을 제시하고 있는 것처럼 생각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바로 이 순간 단순히 내 제안대로만 산다면, 당신은 당신자신에게로 즉각 되돌아 가고 있음을 알 것입니다. 그런 제안들이 당신을 당신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어머니가 집의 창문에서 아이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이리온 얘들아! 식사가 준비되었단다.” 어머니는 아이들이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아이들을 집으로 불러들이기 위하여 어머니는 음식이나 쵸컬릿을 가지고 그들을 유혹합니다. 나는 당신들에게 이와 꼭 같은 일을 하고 있습니다. 나는 당신들이 당신들 자신의 집으로 돌아오기를 원합니다. 나의 제안들은 당신들을 집으로 유인해 들이기 위한 미끼들입니다. 그 미끼들은 목적은 당신들을 스스로의 집으로 불러들이는 것입니다.
존재에 대한 내맡김 속에서 당신의 모든 노력은 자동적으로 떨어져 나갑니다. 오랫 동안 당신은 자아(ego)를 통하여 무언가를 성취하려고 애써왔습니다. 당신은 이 세계에서 당신의 지위를 표시하기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내맡길 때, 당신은 자신이 존재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존재 속에서 당신은 조그마한 점일 뿐입니다. 이 광대한 존재 속에서 당신 자신의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존재 속에서 모든 것은 다만 일어나고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자신이 원하기만 하면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만, 그것은 웃기는 생각입니다.
당신은 어디에 도달합니까? 인류는 달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쨋단 말입니까? 인류는 에베레스트의 꼭대기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쨋단 말입니까? 인류는 바다의 밑바닥에 도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어쨋단 말입니까? 위대한 성취라구요? 당신들이 인류의 위대한 성취라고 부르는 것들은 정신의 영역에서는 아무 가치도 없습니다. 그것들은 개미가 땅에서 마이크의 꼭대기로 기어오르는 것과 비슷합니다. 개미의 기어오름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인류의 성취도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아(ego)에게는 그런 일들이 커다란 의미를 가집니다. 이 광대한 존재 속에서 당신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전체 존재는 무한한 과거로부터 계속 작용하고 있습니다. 당신의 60년 혹은 80년 혹은 100년이라는 짧은 삶 동안, 당신이 이 존재에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겠습니까? 근본적으로 아무런 영향도 끼칠 수가 없습니다.
당신은 이 지구 위에서 당신에게 삶을 준 존재를 신뢰해야만 합니다. 신(神)이 당신에게 일어날 일을 결정하도록 버려두세요. 왜 방해하려고 합니까? 존재가 당신의 내면의 목소리로 말할 때에는 그것을 듣고 따르세요. 당신에게 가장 좋은 것을 존재가 알고 있다고 믿으세요. 존재가 당신의 운명을 결정하도록 버려두세요. 당신이 결정해서는 안됩니다. 신뢰로써 존재에게 내맡기라는 나의 제안은 이러한 ‘버려둠’을 가리킵니다.
외부 세계의 존재에 대한 내맡김은 세속적 성취라는 외적 여행을 줄여줍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내면을 향하여 걸어 들어가는 것입니다. ‘자기 자신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기’는 내면의 여행을 줄여줍니다. 당신은 내적 성장과 내적 성취에 대한 모든 요구를 포기합니다. 내면의 추구와 내면의 여행과 영적 성장 등을 제거하면, 사랑이 남습니다. 당신은 자신을 사랑하기 시작합니다. 미움은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다른 누군가가 되려고 하는 욕망에서 생겨납니다. 받아들이지 못함과 미움은 함께 하는 것입니다.
외면적으로 뿐만 아니라 내면적으로도 당신은 자신을 향상시키기를 원합니다. 당신은 증오, 분노, 질투 등과 같은 모든 마음의 병들을 제거하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당신은 치료 집단(therapy groups) 등과 같은 모든 그러한 종류의 무의미한 행위에 매달립니다. 당신은 마음을 씻어내는 일에 매달립니다. 모든 이러한 행위들은 내면적 추구의 일부분입니다.
나는 말합니다. “왜 시간을 낭비하고 있습니까? 그냥 있는 그대로의 당신 자신을 받아들이십시오. 당신의 내면적 외면적 추구를 완전히 버리십시오.” 받아들임은 사랑을 가져옵니다. 그렇게 되면 누구도 믿지 못할 기적이 일어납니다. 내맡김과 받아들임은 당신을 구경꾼(witness)이 되게 하고, 구경꾼이 되면 어떤 행위나 노력이나 수행이나 방법도 불필요합니다.
자신을 받아들임으로써 당신은 마음의 뿌리를 끊는 것입니다. 마음은 당신이 무엇이 되려고 할 동안만 살아 있습니다. 되어감이 없을 때에는 목표도 없습니다. 목표가 없는데 마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제 마음은 아름다운 도구일 뿐입니다. 늘 무엇이 되고자 투쟁하던 그 마음을 당신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순간, 무엇이 되고자 하는 싸움은 끝이 납니다. 이제 당신은 마음을 붙잡고 싸우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음을 이기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당신은 마음을 깨끗이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이 마음은 진흙입니다. 당신이 그것을 놓아두면, 마음은 저절로 가라앉기 시작합니다. 받아들임이 있기 때문에 진흙은 가라앉습니다. 어떤 노력이나 행위도 없을 때, 마음은 고요해지기 시작합니다. 노력을 통해서가 아니라 받아들임을 통하여, 마음은 가라앉고 고요해 졌습니다.
이것은 하나의 기적입니다. 당신의 마음은 그것을 수용하지 못할 것입니다. 마음은 물을 것입니다. “아무런 노력이나 행위도 없었는데, 어떻게 이런 평화와 고요와 기쁨이 가능한가?” 당신이 온갖 방법으로 추구해왔지만, 당신은 평화와 기쁨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내가 그것을 기적이라고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당신이 자신을 받아들이고 존재의 내면적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순간, 당신은 문득 구경꾼이 됩니다. 행위자인 마음은 사라집니다. 자아도 사라집니다.
당신이 단순히 구경만 계속한다면, ‘당신은 다만 보고 있을 뿐이고’ ‘모든 일은 다만 일어나고 있을 뿐임’을 문득 깨닫기 시작할 것입니다. 당신이 문제, 슬픔, 고통 등과 같은 모든 세속적 틀의 일부가 아니라 아름다운 전체 존재의 일부라는 사실을 문득 깨닫고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이제 당신은 일어나는 일들을 다만 구경하며 보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 당신은 다만 당신 내면의 목소리와 내면의 힘을 따라가고 있을 뿐입니다. 그 목소리와 힘이 당신을 어디로 데려가든 개의치 않고. 당신은 당신을 존재에 내맡김으로써 당신의 모든 속박과 집착을 제거한 것입니다. 당신은 일들이 발생하는대로 내버려 두고서, 사건들의 흐름 위를 떠 다닙니다. 당신은 헤엄을 치지 않습니다. 당신은 지금의 존재와 지금의 당신 자신을 받아들인 채로 떠 다니는 것입니다.
당신이 물 속에서 다만 긴장을 풀고 쉬어버리기만 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흐름은 스스로 원하는 곳으로 당신을 데려가고, 당신은 그것을 받아들입니다. 그 흐름에는 정해진 목적지가 없습니다. 이 흐름은 내면으로부터 흘러나오는 힘입니다. 당신은 내면의 목소리와 내면의 흐름을 따라서 계속 떠 있습니다. 그 목소리와 흐름은 항상 그 목소리와 흐름을 움직이고 있는 생명력에 맞추어져 있습니다. 이런 식으로 떠 다니는 것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당신은 어떤 노력이나 갈등도 없이 다만 떠 있기만 할 뿐입니다. 당신은 다만 보면서 구경하고 있을 뿐입니다. 지금 당신은 존재 전체를 즐기고 있는 것입니다.
당신이 마음의 짐에 짓눌리지 않고 쉬게 되면, 당신은 문득 커다란 기쁨이 샘솟아 오름을 알게 될 것입니다. 어떤 종류의 장애도 없기 때문에 고요함이 스며들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존재가 당신의 인간성을 통하여 자신을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어떤 노력도 하지 않았지만, 당신은 문득 고요해집니다. 당신은 갑자기 즐겁게 됩니다. 당신이 너무나 편안히 풀어져 있기 때문에, 기쁨이 솟아오르기 시작합니다. 사랑이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힘이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존재의 향기가 당신으로부터 흘러나오기 시작합니다. 즐거움, 사랑, 아름다움, 향기 등은 모두 존재의 성질입니다.
당신이 고요할 때, 당신은 당신 자신의 공간인 존재와 하나가 됩니다. 그때 당신은 당신 자신의 집으로 돌아온 것입니다. 당신은 당신 자신의 자연의 상태로 돌아온 것이며, 당신은 그곳에 영원히 머무릅니다. 존재와 하나가 되면, 즐거움과 사랑이 당신의 생활방식이 됩니다. 당신은 다만 한 순간 한 순간 살아 있을 뿐입니다. 당신은 매 순간을 기쁨으로 찬양합니다. 당신의 어디에도 갈등은 없습니다. 당신은 매 순간을 즐기고 있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길이 어디로 가건 그것을 즐깁니다. 이것이 바로 내가 함께 나누고자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들은 오쇼의 회상에서 수 년 동안 지내면서 오쇼가 제시하는 모든 종류의 명상을 다 한 사람들입니다. 이제 그들은 완전한 좌절의 지점에 도달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위대한 성취입니다. 자기자신에 관하여 솔직해져서 수 년 전의 자기와 지금의 자기가 여전히 꼭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은 커다란 용기를 필요로 합니다. 아무것도 바뀐 것이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은 커다란 용기가 필요한 일입니다. 나를 찾아오는 수행자들은 그들의 참된 상황을 인정할 만한 용기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자신들의 내면 깊숙이에서 그들은 자신들이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나머지 수행자들은 자신들의 얼굴을 숨깁니다. 그들은 정직하지 못하게 살고 있습니다. 그들은 불신(不信) 속에서 이렇게 물을 수도 없습니다 : “내가 그렇게 오랫 동안 오쇼와 함께 살아 왔는데도 아직 아무것도 얻지 못하다니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러나 솔직히 말하면 나는 전혀 바뀌지 않았어.” 나를 찾아 오는 사람들은 정직한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목적지 가까이에 있습니다. 그들의 정직함 때문에 그들은 그들이 찾는 목적지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정신 세계에서는 정직이 첫째 조건입니다. 당신은 자신에 대하여 정직해야만 합니다. 정신 속에서 당신은 스스로를 속일 수 없습니다. 만약 당신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면, 당신은 다른 모든 사람들도 속이고 있습니다.
깨달음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면 당신 자신에게 솔직히 “깨달음이 일어나고 있지 않다.”고 말하십시오. 만약 당신에게 변화가 없다면, 변화가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랫 동안 그렇게 많은 노력을 투자한 것은 어떻하고? 마음은 이렇게 말합니다 : “어떻게 내가 이것을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내가 그렇게 많은 시간, 돈, 노력, 믿음 등등 모든 것을 다 바쳤는데.” 만약 당신이 내일 아쉬람(선원)을 떠나 사람들에게 “나는 여전히 이전의 나와 같은 사람이다.”라고 말한다면, 사람들은 당신을 비웃을 것입니다. 당신의 정신적 환경에 의하여 조성된 아집(我執 ego)은 당신이 이런 상황을 받아들이도록 허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이러한 사실을 인정할 만큼 충분히 정직하지 못하다면, 당신이 깨달을 기회는 없을 것이고, 도리어 당신은 당신의 꿈 속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그것이 전부입니다.
반면에 언젠가는 당신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기 때문에, 당신이 정직하다면 당신은 깨어날 기회를 얻게 될 것입니다. 진실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여전히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압니다. 그런 사람들이 나에게 옵니다. 딴 사람들은 아마 그들이 스승에게 봉사함으로써 도를 추구하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은 나에게 오지 않습니다.
오쇼가 애쓴 목표는 아직까지 달성되지 않은 채 남아 있다고 나는 말하고 싶습니다. 만약 그의 문하인들이 의식하지 못한 채로 남아 있음으로써 그들의 꿈 속에 계속 남아 있다면, 오쇼의 꿈은 달성되지 못한 것입니다. 그것이 내가 바라보는 관점입니다. 만약 당신이 깨어난다면, 당신은 다른 어디로 가거나 다른 누구를 만나거나 ‘그것’을 찾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비록 당신이 깨어난다 하더라도, 당신은 아쉬람에 남아 있을 수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신(神)’에 도달치 못해서 신이 되지 못했다면, 그 사실을 인정하십시오! “나는 그렇게 오랫 동안 오쇼와 함께 있었지만 아무것도 변화된 것이 없다.”고 솔직하게 말하세요. 당신 자신에게 정직하십시오! 왜 가면을 쓰고 다닙니까? 왜 위장(僞裝)을 하고 다니면서 오쇼의 등 뒤로 당신의 얼굴을 숨깁니까? 왜 항상 오쇼를 마음 속에 그립니까?
댓글목록
수수님의 댓글
수수 아이피 (173.♡.103.156) 작성일
아름다운 끼란님을 소개해 주셔서 감사 합니다
근데 끼란님의 대화가 비원님의 강의를 듣고 있는 착각을 했습니다
아, 착각이 아니지
꿈을 깨고 눈을 번쩍 뜨신 분들은 같은 말씀을 하시지요
깨긴 깨었는데 선잠 깬 사람들이 그런 줄도 아직 모르고 먼저 가르칠려만 드니....
(ㅎㅎㅎ 저도 그랬었걸랑요)
완전한 포기에서 완전한 받아들임으로 나갈것 입니다
당신의 존재와 당신 자신을 받아 들이기 시작 할 것입니다
이 받아들임이 모든 의지적 노력에 영양분을 공급 하고 있는 마음의 뿌리를 몽땅 잘라 버릴것 입니다
그 영양분이(ego) 녹아 없어질 것입니다 (*)
먼저 완전히 죽지못하고 미래의 꿈을 꾸며
영광만 누리고자 하는 우리들의 고단한 수고를 봅니다
감사 합니다
그림자님의 댓글
그림자 아이피 (115.♡.93.56) 작성일
저도 전에 이 글을 프린트해서 여러번 읽고 또 읽었던 적이 있습니다.
김기태 선생님께서도 강의중에 끼란님에 대해서 소개를 해주신 적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네요.
좋은글 다시 읽을 수있도록 기회를 주셔서 감사합니다.
수수님 글....참 좋습니다.
글을 통해서 수수님의 성품을 대충은 짐작할 수있을 것 같아요...
두분 모두 오늘 흐린날이긴하지만 그래도 좋은 하루 되시기를 바래요...^^
대원님의 댓글
대원 아이피 (222.♡.10.123) 작성일
안녕하세요.그림자님.
어쩔수 없어서 방편[말]을 세워서 설명을 하는 것입니다.
그말[방편]을 실제로 알고 그것을 머리에 지고 다니면 천근 만근 무거운 것입니다.
있는 그대로를 아는것과 있는 그대로에 투철히 계합된 것은
하늘과 땅만큼 멀다오.
어떤 말이라도 그림자님이 간직하면은 그것은 지견으로 변해서 그림자님을
가두고 맙니다.
그래서 그냥 말로만 하는 그런 깨달음이 오는 것입니다.
이글에서 가르키는 것은 자신[아상]이 죽어야 새로운 나[본성]
이 드러난다고 하신 말씀입니다.
어떤 것을 추구한다든지 수행과 명상을 통해서 한다든지 이런것은
우리의 생각[의식]이 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내려 놓아야 본성이 드러난다고 하는 것입니다,
망상을 내려 놓으면 그대로 본성이란 말씀입니다.
안녕히
피리소리님의 댓글
피리소리 아이피 (210.♡.202.156) 작성일
먕상을 내려놓으라~ 선뜻 이해가안갑니다. .. 생각이일어날때 뚝 절단하라는건지..
대원님.. 그리고 과거생각이 쓸데없이많이 나는것은 왠일...ㅎ
수행하지말라하면 . 기존의불교 화두드는법이라든가 염불선등. 모두가 잘못된것인가요.
이래저래 도는 알아가지고 머리만 아프군요 .ㅎㅎㅎ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37) 작성일그림자님도 좋은 하루 되시기를 ...^^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37) 작성일갈망, 노력, 실천, 수행 등이 실제로는 나의 평화를 파괴하고 있음을 이해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깨달음의 추구가 깨달음의 장애물이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실천과 노력을 놓아버려야 한다고 오쇼는 우리에게 자주 말했습니다. 오쇼는 우리가 결코 그것(깨달음)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며, 그것은 이미 우리의 본성이라고 말했습니다.[글 내용중] 수행과 명상 뿐만 아니라 발심도 놓으라고 하네요.
그림자님의 댓글
그림자 아이피 (115.♡.93.56) 작성일
전 처음에 내 마음중에서 어떤 마음이 에고이고 어떤 마음이 본마음이지? 하면서 몹시 궁금했던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고의 마음을 알아야 그것을 버릴 것 아닌가...ㅋㅋ 그렇게 생각했었어요.
그런데 김기태선생님 강의 중에 모든 것이 다 에고다...에고 아닌것이 없다...그러시더라구요..
어? 그럼 고민할 것도 없네..? 전부 에고라면...그럼 어떻게 해야 본마음을 알수가 있는가?...하는 질문이 남더군요.
피리소리님의 망상을 어떻게 내려놓는가...라는 글을 읽으니 문득 그 생각이 나서요.
망상을 내려놓을 방법이 없다고 합니다.
방법이 있다면 그건 조작이라고 하네요.
그럼 방법도 없고 어쩌란 말인가..무척 답답해지겠죠.
그런 답답함이 가슴속을 가득 채워야 한다고 해요.
그것을 의단이라고 한답니다.
답답함이 있어야 통하는 체험도 오는 거래요.
저도 그동안 들은 바는 있어서 그냥 머리속에서 말은 잘 나온답니다.^^
머리가 아프면 길을 잘 못들은 것 같아요.
체험이 아직 오지 않았더라도 어쨌던 가야할 방향정도는 드러나는 것 같더라구요.
전 체험이라는 말때문에 오히려 더 그 관념에 매이게되는 것 아닌가 의심한 적이 있었는데
다른 분들 보니까 그건 아닌가봐요..
여기 게시판에 글들이 자주 올라오니까 저도 자주 들어와보게 되는군요.
피리소리님 글도 더 자주 볼 수있으면 좋겠습니다.^^
피리소리님!
늘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감사합니다.
그림자님의 댓글
그림자 아이피 (115.♡.93.56) 작성일
전 나름대로 대원님이 경계하신 그 문제에 대해서 늘 염두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는데....대원님이 보시기에 그러한 점이 좀 염려가 되셨던 모양이네요. 저도 좀 놀랬습니다. 아...그런면이 보였었구나...
이래서 옆에서 누가 알려줘야 발전이 있는거구나...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고맙습니다. 대원님...
대원님의 글을 보면서 나름대로 아!..이런 취지의 글을 쓰신거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하고는 그냥 넘어갔었는데 아! 그게 아니라 그냥 내 생각속에 사로잡혀 다른분들의 글의 진정한 의도를 알아채지 못한 점도 많았을 수 있었겠구나..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작은 거지만 좀 신선함으로 다가왔어요...
앞으로도 지적 많이 해주세요...^^
피리소리님의 댓글
피리소리 아이피 (210.♡.202.156) 작성일
그림자님..반갑습니다. 원주면 많이생각나는곳입니다.
언제뵙날잇겟지요. 저보담은 고수이시군요. 일찍이 무심의경지에서 사는게 좋타는것을
이렇케 느낍니다. 요즈음대원님.또여러분들의글만읽어도 마음이정리가되고 편해지고 자신감생기고
역시 저는도판체질인가봅니다.ㅎㅎ 요즘음 참여기가재미있네요.
수많은관념을탈피하는 돌파구를주시네요.
구름같은산이앞에잇고 장막이가로막혀잇다하더래도 두려움없는경지로 살고프네요.ㅋㅋ
그림자님.앞으로 좋은글써주세요. 저도 왔다리 갔다리 ~.. 여기에이순간에있는걸모르고 `~``
감사합니다.
그림자님의 댓글
그림자 아이피 (121.♡.199.193) 작성일
^^
예전에 게시판의 어떤 분이 도가 통하는 것은 매직아이와 비슷하다는 말씀을 했던 것 같아요.
저는 매직아이는 볼 줄 알거든요.^^
근데 초등학생인 우리아이는 아직 그걸 볼 줄 몰라서 매우 답답해 하더라구요.
그러면서 대충...이거 아니에요?...하고 묻는 거에요.
그럼 제가 웃으면서 야..그게 안보이니... 하면서 놀려준답니다.^^
그냥 비유겠죠.
어쨌건 도에 관심을 가지시는 분들은 제 생각으로는 선택받은 분들 같아요.
수많은 사람들이 살지만 제각각 자기안에 갇혀서 지내는데 거기에서 적극적으로 벗어날 궁리를 해보는 극소수의 사람들이니깐요.
피리소리님 글 참 진솔하고 좋은 것 같아요.
저도 초보자라 많이 듣고 배워야 한답니다.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가실님의 댓글
가실 아이피 (222.♡.106.214) 작성일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