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달음이란 무엇일까요?
페이지 정보
작성자 공자 (211.♡.79.29) 댓글 5건 조회 15,911회 작성일 09-02-25 08:14본문
글쓴이는 .... 젠타iN의 제니스님 정리는 쎄븐님이 해주셨읍니다.
다소 길지만 좋은글입니다 공자가 퍼온글은 믿고 읽으셔도 됩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요?
깨달음은 정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정의하는 즉시 진정한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똑같은 말을 노자는 道可道 非常道라고 했지요)
한편 깨달음을 정의하는 것은 깨달음에 대한 상(像, 相, 想)을 만드는 것인데, 이번에는 거꾸로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상에 매이게 되어,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상(=개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토마토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실물 토마토 그 자체가 아니듯이.
●충족될 수 없는 깨달음.
[내가 만난 스승들, 내가 찾은 자유 Teaching en Route to Freedom/손민규 역/정신세계사]라는 책을 쓴 마두카르 톰슨 (Madhukar Thompson)은 독일의 카토릭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 성공을 넘어 30세가 되기 전에 깨달음을 찾아 인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깨달음이란 무엇일까요?
깨달음은 정의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깨달음은 정의하는 즉시 진정한 깨달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게 되기 때문입니다(똑같은 말을 노자는 道可道 非常道라고 했지요)
한편 깨달음을 정의하는 것은 깨달음에 대한 상(像, 相, 想)을 만드는 것인데, 이번에는 거꾸로 깨달음에 대한 잘못된 상에 매이게 되어, 깨달음에 이르게 할 수 없게 되는 것입니다.
모든 상(=개념)은 잘못된 것입니다, 마치 토마토에 대한 어떠한 개념도 실물 토마토 그 자체가 아니듯이.
●충족될 수 없는 깨달음.
[내가 만난 스승들, 내가 찾은 자유 Teaching en Route to Freedom/손민규 역/정신세계사]라는 책을 쓴 마두카르 톰슨 (Madhukar Thompson)은 독일의 카토릭집안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전문경영인으로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세속적 성공을 넘어 30세가 되기 전에 깨달음을 찾아 인도로 여행을 떠났습니다.
그는 1980년 그가 구세주로 믿었던 오쇼 라즈니쉬 밑에서 헌신을 다하며 12년간 수행하였습니다. 그리고 오쇼가 죽자 다시 8년간 13명의 깨달은 스승들을 찾아다니며 헌신하고 수행했습니다. 그 스승들은 파파지Papaji(슈리 라마나 마하리쉬의 제자), 하라쉬 마두카르Harish Madukar, 강가지Gangji(파파지의 제자), 안나말라이 스와미Annamalai Swami(마하리쉬의 제자), 락쉬마나 스와미Laksmana Swami/마하리쉬의 제자, 라메쉬 발세카르Ramesh S. Balsekar, 란지트 마하라지Ranjit Maharaji, 기리다르Giridhar, 다다지Dadaji, 끼란Kiran, 유지 크리슈나무르티(U.G. Krishnamurti), 최기 니마 린포체(Choeky Nyima Rinpoche), 툴쿠 우르겐 린포체(Tulku Urgyen Rinpoche) 등이었습니다.
그 중에서 파파지 등의 경우에는 마두카르가 깨달음을 얻었다고 선언하고 인가를 해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스스로가 깨달았다고 확신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참으로 성실하게도 그와 같이 파파지에게서 인가를 받은 강가지Gangji에게까지 가서 가르침을 청하기도 했습니다.
결국 이 성실한 구도자, 수행자 마두카르는 20여년동안 14명의 스승을 찾아 온갖 헌신과 수행과 체험을 겪었으면서 깨닫지 못했습니다.
이에 비해 강가지Gangji는 미국에서 태어나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하고 1972년 30세가 되던 때부터 영혼의 갈증을 느껴 좌선과 위빠사나를 시작했으며 침술을 배워 1981--1987동안에는 침술원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1990년 그녀는 남편과 함께 파파지를 찾아갔으며, 그 만남에서 그녀는 깨달음을 얻었고 파파지는 그녀를 인가해 주었습니다.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일까요?
두 사람의 차이 중의 하나는 두 사람의 깨달음에 대한 상이었습니다.
그것은 어떤 점에서는 오쇼의 책임이기도 했습니다. 오쇼는 마두카르에게 <자신처럼 깨달은 붓다가 되면 그러한 황홀경에 영원히 머물 것이라고 했다>(위 책 p.25)
그러나 마두카르는 황홀경, 지복을 체험하였지만 그것은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경험하는 사람이 존재하지 않는 그러한 경험이었고 황홀경의 거대한 파도가 저를 감쌌습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다시 정상적인 상태로 돌아오자 저는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의문이 생겼습니다. 이렇게 의심이 그치지 않는데 어떻게 내가 깨달았다고 할 수 있을까>(위 책 p.187)
마두카르의 20여년간 구도의 결론은 그의 책 서문에 나와 있습니다.(위 책 p.17)
<마음은 본성을 알 수 없으며 본성은 그저 존재할 뿐인 것이다. 나의 두 번째 스승은 바로 그러한 영원한 평화의 행복을 인식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이후에 나는 그러한 지복의 경험을 여러 순간 맛보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나의 영적인 지혜가 깊어져야 한다는 필요성을 절감했다>
마두카르의 경우에는 오쇼가 씨를 뿌린 것이기도 하지만, <깨달음의 정의>에서 가장 기본적인 요건은 <지속되는 지복>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결코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안나말라이 스와미가 그것은 깨달음의 정의가 아니라고 일깨워주지만, 그러나 그는 지복을 놓아버리고,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깨달음, 즉 <과연 이것이 깨달음이다>라고 확신할 수 있는 것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마두카르의 경우에는 그의 서구의 비판적 지성에 기초하여, 그 지성이 요구하는 바의 깨달음에 대한 상은 결코 충족될 수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실재도 진리도 아닌 서구문명의 에피스테메(episteme)가 깨달음에 대하여 정립하는 환상이기 때문입니다.
●맛이 간 깨달음
마두카르와는 정반대로 전혀 엉뚱한 것을 붙들고 자신이 깨달음을 얻었다고 방방 뛰거나 남을 가르치기에 열심인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마두카르와는 정반대로 의심이 없는 사람들이며, 쉽게 믿는 사람들이며, 그것이 깨달음이 아니라면 자기 삶의 근본이 흔들리기 때문에 그것을 의심할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당신만이 아니라 누구라도, 하나의 위대한 신, 진정한 신을 믿으며, 그 신을 만나기를 간절히 바랄 수 있을 것입니다.
그 과정에서 당신은 그 신에 대하여 좀더 구체적으로 개성을 부여하는 정의를 할 필요를 느낄 것이며,
그리하여 점차 그 개념이 풍부해 질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날 당신은 그 신이 자신에게 강림하는 체험을 할 수도 있을 것이며,
그 신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는 체험을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체험도 가능합니다
그리고 당신은 바로 깨달음을 얻었다고 믿을 수 있을 것입니다.
다른 체험도 가능합니다
.
당신은 무아체험에 대하여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아체험을 간절히 원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은 무아체험에 대하여 상상을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무아체험을 간절히 원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날 당신은 당신이 상상해 왔던 무아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그 무아의 배경에 있는(즉 자아가 사라진 자리에 있는) 진여(眞如)를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드디어 당신은 온전한 깨달음에 이르렀다는 것을 선언하게 될 것입니다.
어느날 당신은 점차로 그 깨달음이 스스로가 만들어 낸 체험---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 아니었던가,
어느날 당신은 점차로 그 깨달음이 스스로가 만들어 낸 체험---바로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이 아니었던가,
내가 가진 개념의 장난이 아니었던가를 의심하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당신은 그 의심을 깊이 깊이 파묻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의심하게 되면 당신이 무너지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만약 그 깨달음을 스승으로부터 전수받은 것이라면 더욱 그것을 의심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왜야하면 그것을 의심하는 것은 당신을 쓰러트릴 뿐만 아니라 스승을 배신하는 것이며
교단을 무너지게 하는 것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또한 수많은 수행자, 사이비교도들(모든 사이비교도들 스스로는 정통이라고
이것이 또한 수많은 수행자, 사이비교도들(모든 사이비교도들 스스로는 정통이라고
자부하는 바)의 길입니다.
●원효와 의상의 공안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중국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도중에 비오는 날 산속에서 하룻밤을 묶어 가게 되었습니다.
원효는 한밤중에 갈증이 나서 어떤 그릇 비슷한 것에 담긴 물을 맛있게 먹고 잠을 잤습니다.
●원효와 의상의 공안
원효스님과 의상스님이 중국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도중에 비오는 날 산속에서 하룻밤을 묶어 가게 되었습니다.
원효는 한밤중에 갈증이 나서 어떤 그릇 비슷한 것에 담긴 물을 맛있게 먹고 잠을 잤습니다.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그것은 해골바가지였으며, 원효는 자기가 먹은 물이 해골바가지에 담긴 물이라는 것을 알고 구역질을 해 댔습니다.
원효스님은 그 순간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를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원효스님은 당나라에 유학까지 갈 것 없이 완전히 깨달았다고 선언하고 돌아섰습니다.
한편 의상스님은 원효로부터 자초지종을 모두 듣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의 일체유심조를 충분히 이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은 아직 깨닫지 못했다고 인정하고 당나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의상이 당나라에 가서 깨달음을 얻은 것 역시 그의 법성게가 가르치는 바와 같이 일체유심조를 그 핵심으로 하는 화엄의 깨달음이었습니다.
왜 원효는 아침에 해골바가지를 보고 즉시 돌아섰으며,
왜 의상은 그대로 길을 떠났을까요?
왜 원효는 그만하면 충분하다 하고 멈추고 끝낼 수 있었으며,
왜 의상은, 아니야, 이런 정도로는 깨달음이라고 할 수 없어, 깨달음은 좀더 심오한 것이야 하는 등으로 참구를 계속해야 했을까요?
그것은 결코 원효와 의상이 그때까지 실력이 차이가 있었기 때문은 아니었습니다.
<깨달음은 이러이러해야 해>하고 깨달음의 상을 설정하는 것은 도대체 무엇일까요?
당신이 설정하는 <깨달음은 이러이러해야 해>라는 것은 과연 객관적인 기준으로 정해지는 것일까요?
만약 그렇다면 깨달음의 기준---깨달음이 진리라고 한다면 진리를 판별하는 더 높은 차원의 진리-- 깨달음의 깨달음---진리의 진리는 무엇일까요?
그리고 그 <진리의 진리>가 과연 올바른가를 판별하는 다시 한 차원 더 높은 진리 즉 [<진리의 진리>의 진리]는 무엇일까요?
혹시 우리는 깨달음이라는 가면을 쓴 전혀 엉뚱한 것에 의해 우리가 놀아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비극의 강
오쇼 라즈니쉬가 죽기 6주일 전에 오쇼의 연인이었던 니르바노가 푸나의 아슈람에서 자살했습니다. 그녀는 거의 20년간 오쇼의 곁에서 생활했습니다. 그럼에도 그녀는 깨닫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고통과 괴로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오쇼와의 20년의 삶도 그녀를 자살로부터 구원할 수 없었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의 경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수년동안 마하리쉬를 수행하였던 한 제자가 있었는데, 그 제자는 언제나 스승 곁에서 지낼 수 있는 특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제자는 스승의 곁을 떠나 30키로미터 떨어진 숲 속으로 가서 그곳에서 혼자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라마나 마하리쉬는 몇차례나 그를 데려오라고 사람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 제자는 돌아오지 않았으며 목을 매어 자살했습니다.
깨달음이란 깨달은 자 오쇼와의 20년간의 삶도, 마하리쉬의 측근의 삶에서도 전해질 수 없는 것이고, 심지어 그들을 자살로부터 구원할 수도 없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단순히 깨달음이 당사자 자신의 문제이고 스승도 어찌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일까요?
오쇼의 20년의 연인, 마하리쉬의 최측근을 자살로 몰고 가게 한 그것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이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깨달음[ 즉 그들이 설정한 깨달음의 정의]는 도대체 무엇이었을까요.
(위의 책 p129--130 참조)
● 회양의 벽돌
마조 스님은 남악회상에서 좌선만 하면서 좌복을 일곱 개나 뚫었다. 좌에 집착되어 마치 죽은 사람 같고 또한 목석으로 만든 등상(等像)같았다.
그때 회양 선사(懷讓禪師)께서는 조금도 진전이 없는 것을 보시고 묻기를,
무엇을 하고 있는가?
하니 마조 스님이 답하기를
좌선합니다.
또 회양 선사께서 묻기를,
좌선을 해서 무엇을 하려는가?
하니 마조 스님의 답이
부처가 되려고 좌선합니다.
라고 하였다.
회양 선사께서는 암자 앞의 바위 위에서 벽돌을 갈고 있었다. 벽돌 가는 소리를 듣다 못한 마조 스님은 회양 선사에게 그 까닭을 묻되,
스님, 벽돌을 갈아서 무엇 하렵니까?
하니
거울을 만들려고 한다.
라고 대답하였다.
마조 스님은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벽돌을 갈아서는 도저히 거울이 될 것 같지 않아서 또 묻기를,
벽돌을 갈아서 어떻게 거울을 만들 수 있겠습니까?
하니 회양 선사는
벽돌을 갈아 거울이 안되면, 앉아 있어서 부처가 될 줄 아는가?
하시니 마조 스님이 묻기를,
어떻게 해야 옳겠습니까?
우차가 가지 않을 때에 소를 때려야 되겠는가, 수레를 때려야 되겠는가?
하는 언하에 마조 스님은 확철대오하였다. 이것이 바로 '언하대오(言下大悟)'인 것이다.
이 회양의 벽돌공안은 <깨달음의 정의>에 관하여 많은 가르침을 주고 있습니다.
앞에서 마두카르는 <깨달음이란 지속되는 지복이다>라는 정의를 설정하고 있었습니다. 인도의 깨달음의 문화에서는 지복이 대단히 중요시되기 때문에 마두카르가 이렇게 깨달음을 정의한 것이 이상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마두카르가 상정한 지속되는 지복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결과는 20년의 세월을 낭비한 것이었습니다.
마조는 좌복을 일곱 개나 뚫을 정도로 좌선에 용맹정진하였습니다. 그가 그렇게 좌선하면서 상정한 깨달음의 정의는 무엇이었을까요? 아마도 그의 말대로 좌선하고 있으면 어떤 정신적 육체적 상태에 변화가 일어나 부처가 되는 것으로 상정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깨달음이란 <부처가 되는 정신적 육체적 상태의 변화>라고 정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 참으로 위대한 마조의 스승 회양은 그것이 잘못된 길임을 벽돌을 가는 것으로 가르쳤습니다. 너는 깨달음의 정의를 잘못 설정하고 있다. 그러한 정의를 가지고 있는 한 <절대로> 깨달을 수 없다.
그리고 마조의 물음에 회양은 대답하였습니다. 우차가 가지 않을 때 소를 때려야 하겠는가 수레를 때려야 하겠는가?
이 말에 마조스님은 확철대오하였다고 합니다.
자, 중요한 것은 마조스님이 확철대오한 내용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회양의 <말 한마디>에 마조스님이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마조스님의 정신과 육체의 상태에 어떤 변화가 일어난 것일까요?
아닙니다.
마조는 무엇인가를 <알았다>는 것입니다.
회양의 <말을 듣고> 일어난 사건(즉 깨달음)은, 무슨 신비한 체험, 신비한 창조, 신비한 기적일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회양은 그냥 <말을 했을> 뿐이기 때문입니다.
상대방이 말을 했을 때 일어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 <아는> 것일 뿐입니다. 그래서 언하대오(言下大悟)라고 하였습니다. 깨달음이란 <앎>입니다. 그렇게 때문에 <말 한마디에> 바로 깨달을 수 있는 것입니다.
당신도 이처럼 말 한마디에 깨달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 제1장에서 <앎>을 좀더 강하게 <통찰>이라고 하였지요.
깨달음이란 지금 즉시(당신이 이 책을 읽는 지금 즉시) 일어날 수도 있지만,
20년을 수행해도, 평생을 수행해도, 아니 1000번을 윤회해도, 당신에게 깨달음이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이것은 당신의 문제입니다.
당신은 지금 즉시 깨달을 수도 있지만,
영원히 깨닫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수행자들에게 죄를 짓는 것을 덜하기 위하여, 나는 깨달음은 <앎>이라고 <정의>한 것이 틀렸다는 것을 첨가해야 할 것 같습니다. 당신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앎이라고 하여, 그것을 알기 위하여 수많은 책들을 읽고, 수많은 지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결심하였다면, 또는 특별히 신기한 지식을 추구하는 것으로 깨달음을 얻으려고 결심하였다면, 그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앞에서 말한대로 <앎>이라고 표현하는 즉시 틀려버리게 되는 문자에 구속되는 것입니다)
●깨달음: 꿈을 깨어 진리의 바다에 뛰어들다.
깨달음은 깨닫다에서 온 말이고,
깨닫다는 <깨다>와 <닫다>의 합성어입니다.
깨다는 <꿈을 깨다>, <알을 깨다>의 의미이며, 다
닫다는 달리다, 내달리다의 의미로 <진리를 향하여 달리다><진리에 뛰어들다>의 의미입니다.
깨닫다는 간단히 말하면
<꿈에서 깨어, 진리에 뛰어들다>로 해석할 수 있는데, 이 언어적 해석이야말로 깨달음에 대한 가장 훌륭한 정의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꿈을 깨는 것은 아래의 <매트릭스의 비유>로 설명하고,
진리에 뛰어드는 것을 아래의 <소금인형의 비유>로 설명하고자 합니다.
깨달음의 본질이 <앎><통찰>이라면, 그 앎, 통찰은 단순한 것이 아니고,
마침 꿈을 깨어 진리의 바다에 뛰어드는 것과 같은 앎이고 통찰이라는 것입니다.
●매트릭스의 비유
매트릭스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주인공 네오는 <매트릭스의 세계=사이버현실 cyber-reality>에 살고 있는 자신이 진정한 자신이고, 매트릭스의 세계가 당연히 현실세계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에게 있어 자신은 그 자신(사이버 네오) 하나 뿐이고, 그의 세계는 그 세계(사이버 현실) 하나 뿐이었기 때문에, 그것이 가짜라고 의심할 이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모피어스가 주는 빨간 약을 먹고, 네오는 <현실세계=배양기 속에 묶여 있는 자신의 육체>에서 깨어납니다. 그는 배양기에 연결된 전기선들을 뽑아버리고 탈출합니다.
결국 모피어스가 주는 빨간 약도 실제로는 가상현실세계에서 먹은 가상의 약이었군요.
깨달음이란 이렇게 네오가 빨간 약을 먹고 깨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네오처럼 가상현실이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진정한 현실은 따로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 이것이 깨달음입니다.(물론 이것은 비유입니다)
매트릭스에 비유하여 말하면,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
그리고 우리 자신이,
가짜라는 것을 알고, 진정한 나와 진정한 세계를 <아는 것>,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네오가 자신이 이제까지 살아왔던 세계와 자기 자신이 가상적 실재였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그 다음에는 모든 것이 달라져버리듯이,
깨달음도 가짜세상과 가짜자신을 <아는 것>으로 모든 것이 달라집니다.
이런 점에서 깨달음에서 <아는 것>은 그냥 지적으로 앎과는 대단히 다르지요.
그리하여 나는 제1장에서 그것을 <인식의 격변> <통찰>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가령 당신이 이제까지 당신 자신이라고 알아왔던 것이 사실은 <환상>이고,
당신이 움직일 수 없이 엄존하는 세계라고 알아 왔던 것도 사실은 <환상>이고,
실제의 당신은 <신>이고,
실제의 세계는 <자유>라면,
그것을 <아는 것>으로
당신과 함께 모든 것은 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겠지요.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거꾸로가 아닙니다.
당신은 신이 되고
당신의 세계가 자유로와졌을 때
당신은 깨닫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경로를 거칠 때, 당신은 당신이 설정한 신이라는 개념에 부합하는 신이 되기를 기다릴 것이며, 당신이 설정한 자유로운 세계라는 개념에 부합한 세계가 오는 것을 기다리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을 기다리다 당신은 마두카르가 되거나 또라이가 될 것입니다)
●이데아의 세계, 마야(maya), 꿈, 영화...
사실 매트릭스의 비유는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닙니다.
○플라톤은 이 세계가 감각의 세계와 이데아(idea)의 세계로 이루어져 있다고 하였지요. 생성하는 감각세계의 사물은 이데아를 본떠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진실한 존재가 아니고 이데아야말로 진실한 존재라고 하였습니다.
감각의 세계는 비누방울과 같은 존재들의 세계, 생성, 소멸, 분해되는 세계이며, 이 세계에 대해서는 확실한 의견을 가질 수 없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이데아의 세계는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 형상들의 세계, 형상들이 모여 있는 세계 ,감각으로는 보이지 않고 이성으로만 보이는 세계라고 합니다.
우리자신과 우리의 현실을 이데아의 세계에 대하여 상대적인 의미를 가지는 감각의 세계라고 한다면, 이데아의 세계와 매트릭스의 비유는 크게 다른 것이 아닙니다.
○인도의 사상에서 마야(maya)는 우리의 현실에 대하여 마치 그것이 네오의 사이버현실과 같은 취지로 마야라고 부릅니다. 환상, 환상을 일으키는 힘이지요.
우리는 이미 인도에서 매트릭스 영화 이상가는 사유들을 발견합니다.
우리는 여기에 대하여 다시 논의할 것입니다.
○또 다른 것으로 우리가 매일 경험하는 하나의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꾸는 꿈이지요.
우리는 두 개의 세계를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는 꿈의 세계이고 다른 하나는 꿈을 깬 현실의 세계입니다.
우리의 꿈의 세계는 네오의 매트릭스의 세계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가 꿈의 세계라면, 깨달음은 <꿈을 깨는 것>입니다.
또한 꿈을 깨는 것은 하나의 세계가 깨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새가 알을 <깨는> 것처럼, 알이라는 하나의 세계가 사라지고 더 큰 세계(전체세계)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깨달음은 깨는 것이고, 깨어서 닫는 것입니다. 즉 꿈을 깨어서 진실의 세계에 닫는 것이지요.
○우리가 자주 경험하는 것으로 영화가 있습니다.
우리는 영화를 보러 갑니다.
그리고 배우가 있습니다.
어떤 배우가 영화 속에서 왕의 배역을 맡았다고 합시다.
그런데 그 배우가 자신이 왕이라고 착각하고 있다면 우리는 또라이라고 하겠지요.
그러나 그가 또라이라고 하기 전에,
당신 자신이 진정한 자신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배우가 극중의 왕의 배역을 맡고 자신이 왕이라고 믿고 있는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자신이 왕이 아니라 배우임을 아는 것,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어떤 배우는 영화에서 거지역을 맡았는데, 그 영화는 대성공을 거두었고,
어떤 배우는 영화에서 왕의 역을 맡았는데, 그 영화는 대실패했다고 합시다.
그런데 왕의 역을 맡았던 배우가 거지역을 맡은 배우에게 거지새끼라고 멸시했다면 그 거지는 웃지 않을까요?
당신은 공포영화를 보고 놀라고 고함지르겠지만, 그것이 영화라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놀라고 고함지르는 것을 즐기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당신이 공포영화를 보면서 그것이 공포영화라는 것을 모른다면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마찬가지로 당신의 이 세상을 살면서 당신에게 생기는 번뇌는 깨달은 사람에게는 공포영화를 볼 때의 공포와 같은 것이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현실이라는 영화에서 깨어나 현실이라는 영화를 즐기고 있기 때문입니다.
●마야(maya)
아주 오랜 옛날, 인도에 나라다(Narada)라는 신과 같은 선지자가 살았는데, 그는 브라마 신의 직계손이었습니다. 그는 어느날 비쉬누신으로부터 한가지 소원을 말하도록 허락받았는데, 그러자 그는 마야(maya)를 이해할 수 있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습니다.
나의 마야를 이해해서 무엇을 어쩌려는 것인가? 차라리 생활의 부유함과 너의 사회적인 의무와 과업의 성취, 모든 부귀와 건강과 쾌락 그리고 당당한 아들을 허락하겠노라.
하지만 그는 말했습니다.
그것은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 엄밀히 말해서 제가 벗어나고 싶고 초탈하고 싶은 점입니다.
비쉬누는 그에게 마야의 비밀을 더 이상 케묻지 말라고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계속 고집하였습니다. 그러자 비쉬누는 말했습니다.
[저 편에 있는 물로 뛰어 들어가라. 그리하면 나의 마야를 체험하게 될 것이다.]
나라다는 연못으로 뛰어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한 소녀의 모습으로 다시 나타났습니다.
나라다는 베나레스 왕의 딸 수실라(Sushila), 즉 정숙한 자로서 뭍으로 걸어나왔습니다. 그녀가 젊음의 전성기에 있을 즈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이웃 비달바 왕의 아들과 결혼시켰습니다. 거룩한 선지자이자 고행자는 한 소녀의 모습으로 사랑의 기쁨을 만끽하였습니다. 그리곤 머지 않아 비달바의 늙은 왕이 돌아가시자 수실라의 남편이 왕위를 계승하였습니다. 아리따운 왕비는 많은 아들과 손자들을 두었으며 비할 데 없이 행복했었습니다.
그러나 오랜 시간이 흘러 수실라의 남편과 그녀의 아버지 사이에 반목이 생겼으며 이 일은 무시무시한 전쟁으로 발전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단 한 번의 커다란 전투에서 수많은 그녀의 아들과 손자들, 그녀의 아버지와 남편이 모두 칼의 이슬이 되고 말았습니다. 대학살의 사실을 알게 된 그녀는 비탄에 잠겨 도성을 떠나 전쟁터로 나아갔으며 거기서 장엄한 애도의 식을 올렸습니다. 그녀는 커다란 장례용 장작더미를 쌓도록 한 후 그 위에 그녀의 친족들, 오라비들, 아들들, 조카들과 손자들의 시신들을 뉘이고, 남편과 아버지의 시신을 나란히 누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녀는 손수 장작더미에 불을 당겼고 불꽃이 활활 타오르자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고 큰소리로 울부짓다가 불꽃이 요란하게 타오를 때, 그만 화염 속으로 몸을 던졌습니다. 화염이 이내 가라앉아 식고 맑아지자 장작더미는 변하여 연못이 되었습니다.
수실라는 물 한 가운데 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성자 나라다로서의 자기 자신을 발견하였던 것입니다. 비쉬누신은 성자의 손을 붙들고 그를 연못으로부터 이끌어 내었습니다.
신과 성자가 못 가에 닿은 후에 비쉬누는 묘한 웃음을 띠면서 물었습니다.
[네가 그다지도 죽음을 슬퍼했던 이 아들이 누구인가?]
나라다는 혼미하고 부끄러워 말을 멈추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애처롭고 음침하고 저주스러운 나의 마야의 모양이다. 연꽃에서 탄생한 브라마도, 어떤 여타의 신들도, 인드라도, 시바조차도 그것의 밑빠진 깊이를 잴 수 없다. 어찌하여, 또 어떻게 네가 이 불가사의한 것을 알려고 하느냐?]
(출전 : http://myhome.shinbiro.com/~kimjbum/Writer/indo.htm
그렇습니다.
깨달음이란 <마야를 통찰하는 것>입니다.
●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깨달음이란 앞의 신화에서 수실라(Sushila)가 자신이 나라다(Narada)임을 아는 것입니다. 그것은 동시에 수실라가 자신의 아버지, 자신의 남편, 오라비와 아들들의 시체더미 앞에서 이것이 마야임을 아는 것이지요. 그랬을 때 수실라는 어떠한 상태가 될까요. 그 상태를 표현하는 가장 적절한 말은 아마도 자유(自由)라는 언어가 적절할 것 같습니다.
마야를 앎으로서 자신을 되찾고 자유로와지는 것, 이것이 깨달음입니다.
그리하여 아마도 깨달음에 대한 가장 적절한 표현은 예수의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그 자유는 한편으로는 수실라처럼 번뇌로부터의 자유(흔히 해탈, 열반 등의 언어를 사용하지요)이고, 다른 한편 네오처럼 가능성을 실현해나가는 자유이기도 합니다. 네오는 그것이 가상현실이라는 것을 앎으로서 초인적인 능력(또는 사이버 네오를 초월하는 능력)을 발휘하게 되지요. 왜냐하면 그러한 능력을 막는 것은 다만 한가지, 자신의 관념(사이버 네오를 진정한 네오로 아는 것) 뿐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예수의 또 다른 말과 다르지 않지요. 내가 아니라 <네 믿음이 너를 낫게 하였다는 말> 말입니다.
●소금인형의 비유
한편 가상의 네오와 진정한 네오가 1:1로 대응한다는 생각하는 것도 잘못입니다. 매트릭스에서는 그렇게 1:1로 대응되어 있지요. 그러나 깨달음에서는 자신의 아이덴티티(identity)가 이와 다릅니다. 오히려 이러한 자신의 아이덴티티에 관한 문제는 소금인형의 비유가 적절할 것입니다.
류시화씨가 시를 쓰고 안치환씨가 작곡한 소금인형이란 시가 있지요.
바다의 깊이를 재기 위해
바다로 내려간
소금인형처럼
당신의 깊이를 재기 위해
당신의 피속으로
뛰어든
나는
소금 인형처럼
흔적도 없이
녹아 버렸네
류시화님이 번역한 `성자가 된 청소부`중에 이런 부분이 있습니다.
......언젠가 라마크리슈나(19세기 인도의 벵갈지방에서 살았다던 성자)가 말했다. 소금으로 만든 인형이 바다의 깊이를 재겠다고 나섰지만 바다로 내려가는 동안에 녹아 없어졌다...........
또는 소금인형이 우리나라의 짧은 전설에서 비롯된다는 말도 있습니다.
.......바다와 소금인형이 있었다. 소금인형은 처음 접한 바다가 무척이나 신기하여 바다의 모든 것을 알고싶어 했다. 그랬더니 바다는 자기에 대해 알고싶으면 바다에 발을 담그라고 했다. 그래도 소금인형이 모르겠다고 하니 더 들어오라고 했다. 이런 행동이 반복되어 소금인형은 모두 녹았고 바다에게 물었더니 나에 대해 알고 싶으면 이 정도의 희생은 각오해야 한다고 말했다.........
●함정
우리는 여러 가지로 깨달음을 정의하였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제일 먼저 한 말, 깨달음은 정의할 수 없다는 한계를 여전히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매트릭스의 비유를 곧이 곧대로 가상의 세계와 진실의 세계가 있다고 받아들인다면 그것은 완전한 오류입니다. 두 개의 세계의 문제라기보다는 부분세계와 전체세계, 즉 <부분과 전체>의 문제라는 것이 보다 나은 표현일 것입니다.
만일 두 개의 세계라는 관념에 고착되면 또 다시 돌아오지 않는 길로 들어서는 것이 될 것입니다.
한편 나의 아이덴티티에 대해 소금인형의 비유는 또 다른 함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흔히 불교의 무아(無我)라는 깨달음에 대하여 소금인형처럼 아(我)가 완전히 녹아없어지는 것이라고 상상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오해를 불러 일으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아(我)와 의식(意識)의 구분이라는 문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무아라고 하더라도 의식이 소멸하는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이 모든 문제들에 대하여 계속 다루게 될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깨달음을 원하는 자는 나름대로 <깨달음의 정의>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왜냐하면 그것이 수행의 전제이고, 방향성이기 때문에)
그 <깨달음의 정의>에 구속되면 즉시 함정에 빠진다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깨달음의 정의 그 자체도 깨달음으로 가는 여정의 뗏목이고 달을 가르키는 손가락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여행을 시작하기로 하지요.
댓글목록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8.♡.160.93) 작성일
젠타 사이트가 회원을 뽑음과 글열람에 있어서 제약이 있는 편이고
마지막 구절에서 '여행'을 염두해둔다는 것이 별로이긴 하지만
훌륭한 글이군요.
babo님의 댓글
babo 아이피 (58.♡.32.39) 작성일
와 ~
글, 잘 읽었습니다...
글이 좀 길긴 하지만
깨달음에 대한 오해를 한겹 풀어주는 내용이군요...^^
공자님의 댓글
공자 아이피 (211.♡.79.29) 작성일
아는 많큼 보인다고
안목들이 높은 분들일세 ^^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좋은 글 잘봤습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한 것이 이런 글을 봐야할 분들은 안본다는 사실이죠.
아마 우선적으로 그 '양'에 겁먹고,
이런 잡다한 글이 깨달음을 주겠느냐?
진실은 말에 있는 것이 아니다며 거들떠 보지도 않은 분이 많으시겠죠.
특히나 전-중반부는 '내가 가고 있는 길이 과연 옳은 길일까?'하고 한번이라도 고민해본 분들이 몇번을 되씹어 볼만합니다.
권보님의 댓글
권보 아이피 (125.♡.91.239) 작성일
공자, 고마우이... 좋은글.
그런데 여전히 모르겠어, 난 어쩌지? 여전히 방황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스럽게 예수가 이런 얘길 했다더군.
방황하는 자가 되라.
Jesus said, Be wanderer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