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님 갈켜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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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58.♡.138.174) 댓글 11건 조회 6,732회 작성일 09-02-25 18:12본문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앞선 논의의 연결선상인데요.
공유님은 세상에 대한 관심과 실천을 이루는 일은 진리에 다다르는 것과는 별개의 일이라는 식으로 말씀 하신 듯합니다. (공유님은 극단적으로 이 양자를 나누는 분이 아님으로 그나마 대화가 약간은 통할 수 있는 듯한데요.)
견성하는 것과 사회적 활동을 하는 것은 다른 차원이라고 말씀 하신 듯 합니다.
물론 저도 ‘능동적’ 의미에서의 상대방의 행복을 위해서 ‘앞서 나아가서 하는 사회적 실천’의 경우에는 견성의 차원과 별도로 이루워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견성 되었는지와 상관없이 자유자제로 이룰 수 있는 능동적 활동 말이죠.
그런데 문제는 ‘수동적’ 의미에서 사회적 실천의 필요성이 요구되는 일이 있습니다.
가령 모델을 극히 단순화 해보겠습니다. 지구상에 사면이 절벽으로 이루워진 단 한 평의 생존의 공간이 있고 그 속에 단 두명이 살아가고 있는데, 그 중 한명은 호위호식하고 쓰레기를 남발함으로 인해서 나머지 한명의 생존을 위태롭게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그 잘 먹고 잘사는 그 한명이 나머지 한명의 생존을 위태롭게 만드는 문제에 대한 ‘간접적인 실천(나눔, 비움, 쓰레기 줄임)의 책임’을 갖지 않고도, 과연 ‘깨달음’이라는 것이 가능하다고 생각하시는지요.
다시 말하자면 상대편을 죽음으로 이끄는 파괴적 삶을 살면서도, 자신의 삶의 사회적 작용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러한 생물학적인, 사회적인 삶의 문제는 깨달음이랑 상관없다”고 말하며 ‘진리의 성취’?를 위해서 나아갈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1. 설혹 그것이 ‘성취’되었다고 한들 그것이 온전한 것입니까?
갈켜줘요.
댓글목록
babo님의 댓글
babo 아이피 (118.♡.122.202) 작성일
개인적인 내면의 깨달음과
사회 전반에 대한 깨달음은 다만 시차(時差)가 있는 게 아닐까요?
개인적인 깨달음이 있다고 해서 다 사회를 향한, 이웃을 향한
대아적인 입장을 취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죠.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령, 누군가가 개인적 내면이 밝아졌다해도
아직 그 밝아짐을 어떤 방식으로 나누어야 할 지에 대한
경험이나 분명한 인식이나 이해가 다 자라지 않았을 수도 있다고 보거든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나 종교적 모순 혹은 정치, 환경 등의 문제에 대한 인식과 깨달음은
다시금 사회 전반에 대한 충분한 인식과 이해 뒤에라야 깨닫게 될테고...
이를 위해서는 깨달은 자도 배우고 이해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야만 또 자기 그릇과 인연에 맞도록
자발적이고도 구체적인 실천도 따르리라 보아지는데요,
누군가가 이런 사회적 문제나 환경적 문제, 이웃과의 나눔 등에 대한 실천을 말하고 요구할 때
이것이 분명 먼 별나라 얘기가 아니라 당장 우리주변의 일이고 이웃의 일이고 내 일임이
깊이 이해되고 동감되고 피부로 절감하게 된다면 깨닫지 않은 자라해도 깨닫고 동참할 것입니다.
둥글님은 늘,
관념주의적 견성이나 도 부류의 아상에 빠진 자아도취의 무리들을 향해,
내몰라라하며 눈만 감고 앉아 내면의 안락만 추구하는 작태를 향해
늘 경각심을 주고 계십니다.
정말 필요한 일입니다...
하지만 한 순간 100% 만족된 기대는 어렵지 않을까요?
개인마다 속도가 다르고 앎이 다르고 시차가 다를테니까요...
사회적 깨달음을 위해 애쓰시는 님께 박수를 보냅니다.
사회적 깨달음과 개인적 깨달음이 다르지 않다고, 실천 또한 다를 수 없다고 하시는 말씀은
어쩌며 우리 모두의 시차가 최대한 좁혀졌을 때, 버번쩍, 하고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바로 그 점입니다.
초월적 견성과 도를 추구하며 현실 작용을 거세하는 '관념론'을 많은 이들이 '진리'라고 얘기하는데,
과연 그것을 '올바른' 도, 견성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죠.
여지껏은 이에 대한 논의조차도 없어왔던 것 같습니다.
도를 추구하는 이들은 마냥 그 길을 따랐고, 이에 반발하던 이들은 마냥 '도가 어딨냐?'고 비판만했죠.
문제는 도와 견성을 이야기하는 '전제' '근거'가 무엇인지를 '스스로' 명확히 밝혀야 한다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분들은 이에 대해 아무런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무조건 믿으면 돼'라는 식의 맹신의 입장을 취하지만,
문제가 그렇게 간단한 것은 아닌듯 합니다.
쉽게 말하자면, '도'를 깨닫는 문제를 따로 하고, 현실의 문제를 따로하는 식으로 '도'의 문제를 관념화시킬 것이 아니라, 도를 관념적으로 이격시키지 않고 현실의 문제까지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로 통합 할 수 있는 길도 있다는 것입니다.
이는 '통합해야만 진리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게 통합될 수도 있고 통합안될 수도 있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믿고 있는 '도' 개념은 현실과 이격되어 있는 것이 의심할 여지 없이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다는 것이지요.
이렇다 보니 '실천의 문제'를 운운할 때 늘상 반발이 있어온 것이지요.
이는 앞서 말했듯이 '철저한 관념론-초월론'을 맹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생각입니다.
이런 사변적 관념론-초월론은 서양 철학에도 많이 있어왔는데, '도'관념은 그게 다만 '우리'가 사용하는 철학이고, '우리'가 옳다고 믿고 있기에 그것들(서양의 관념론)보다 훨씬 가치있는 것이 될까하는 것은 의문입니다.
'관념주의적 견성이나 도 부류의 아상'의 문제를 따지려 함은,
그것이 단순히 '사회적 실천'으로 이끌어지지 못함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그렇게 고립된 관념론-초월론이 과연 '진리인가?'에 대한 근원적인 물음이라고도 할 수 있죠.
뭐 아님 말구요. ㅠㅡ
* 참고로 '견성' '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분들이 모두 초월적이고 관념적인 지향을 가지고 있다는 표현은 아닙니다. 그런 깨달음을 추구하는 분들 중에서 압도적인 다수를 차지하는 '관념지향성'을 가진 분들의 일반적 성향을 말씀 드림이죠. ㅎㅎ
** 참고로 흔히 말하는 '깨달음'과 '대아심'이 서로 다른 것임에 대해서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언제 그에 대해서도 한번 풀어보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요. ㅎㅎ 그런데 '흔히 말하는' 깨달음과 대아심은 서로 달라도 앞서 말씀드린데로 '도'를 관념화 시키지 않고 현실과 통합을 시킨다면, 그 지점에 깨달음과 대아심이 하나로 합쳐지는 듯 합니다. 이것을 하나로 합쳐야 하는지 말아야 하는지가 개인의 취향의 문제로 두어야할 것인지, 아니면 진리임을 가르는 기준선인지는 모르겠습니다.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59) 작성일
그렇게 현상에서 대아 깨달음이라는 거창한 관념을 실현하는 것이 바로 공산주의고 둥글이님식으로 하면 원시제국인 것입니다.
'현실의 문제까지를 설명할 수 있는 원리로 통합'이 바로 관념지향적인 말입니다.
그런 관념은 '정치'나 '사상'이 될 순 있지만 조사선의 깨달음은 되지 못합니다.
깨달음을 무엇으로도 구속할 수 없는 이유는 궁극적 깨달음의 성질이 바로 그렇기 때문입니다.
마치 H2O라는 성질은 얼음,물,수증기를 초월해 있는데 H2O를 깨달으면 수증기를 추구해야 한다고 짜맞추고 조작하더라도
그런 추구와 조작이 H2O 자체와는 본래 아무 상관이 없는 것과 같습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공유님의 말씀은 단지 동어반복적인 말씀일 뿐입니다.
'조사선의 이야기는 진리니까 진리이다'는 식의 말씀은 종교적 확신을 되풀이 하는 것일 뿐이지요.
누군들 그런 얘기를 못합니까.
저는 '맹목'을 확인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맹목하고 있는 믿음의 구조가 과연 온전한 것인지를 여쭙는 것입니다.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59) 작성일
님의 주장과 다르다고 맹목이라고 하면 대화가 안됩니다.
다른 사람이 보기에는 둥글이님의 주장이 관념적이고 맹목적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저는 조사선의 믿음의 구조가 어떤 원리인지 밝힌 것이고요.
온전하고 온전하지 않고는 각자 사람의 가치관에 달린 것이지 그걸 누가 정해놓습니까?
단지 조사선의 온전한 추구는 불생불멸이고 그것의 실천법은 무위법이지
다른 조작법과는 무관하다는 점을 밝힌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생물학적인, 사회적인 삶의 문제는 깨달음이랑 상관없다라는
견해를 가지고 있는 것과는 맞지 않습니다. 무위법에서는 견해를 추구하지 않습니다.
깨달음과 사회윤리과 뒤섞일 수 있는 문제는 아니고, 사회윤리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또한 사회윤리를 어기면서 막행막식하면서 깨달을 수 있다는 것에 조차도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저는 근본적인 차원에서 사회윤리와 깨달음의 관계를 풀은 것입니다.
요컨데 사회윤리와 어떤 관계를 가져다 붙이더라도 모두 관념론에 불과해지는 것입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아... 죄송합니다. 정정하겠습니다.
다른 분들이 말씀하셨던 조사선의 방법론에 가치판단이 많이 들어가 있었기에,
저도 모르게 그분들의 주장까지를 공유님이 하신 것으로 싸잡아서 말씀드리다보니,
억지주장이 있었던 듯 합니다.
아무리 정신 차리려고 해도 잠깐 해찰하면 말짱 꽝입니다. ㅋㅋ
-그렇다면 조사선의 온전한 추구는 불생불멸이고 그것의 실천법은 무위법이라고 하셨는데,
저는 '조사선'관련한 말씀을 하시는 분들이 이를 통해서 '견성' 하고 '진리'를 체득하여,
모든 만물의 원리까지를 모두 통달하는 듯한 어감을 주는 것이 심히 불편히 여겨졌던 탓입니다.
공유님 역시 그 방법을 통해 그러한 완벽한 깨달음에 다달을 수 있다고 생각하시는 것인지요.
아니면 조사선 방법은 불생불멸이고 그것의 실천법은 무위법이라만 국한하시는 것인지요.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5) 작성일
조사선관련한 말씀하시는 분들중에 만물의 원리까지 통달하는 듯한 어감을 준사람이 있는지는 모르겠는데,
불생불멸속에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기는 합니다.
그러나 불생불멸의 실천법은 무위법이기 때문에
무위법을 가지고 전지전능한 현상적인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유위법에 대한 주장까지 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가장 근본적이고 중요한 문제이기에 전념할 뿐입니다.
물론 이 문제에 전념한다고 해서 사회윤리나 법규를 무시할 필요는 없습니다.
사회윤리를 잘 지키는 것은 그것대로 중요한 문제입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불생불멸의 실천법'에 대해서 좀 알고 싶습니다.
그리고 왜 불생불멸의 실천법을 원하는 것인가요?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5) 작성일
실천법을 원한다기보다 불생불멸에 관심이 있을 뿐입니다.
실천법 문제는 곧 말씀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8.♡.138.174) 작성일
공유님과는 견해는 안통하는 줄은 몰라도 대화가 통하니 참 좋군요. ^^
그럼 공유님이 관심을 가지고 계신 불생불멸이란 어떤 것인가요?
그리고 왜 관심을 가지고 계신 것인지요.
공유님의 댓글
공유 아이피 (211.♡.76.3) 작성일
불생불멸보다 중요한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이건 논리보다는 직관의 문제입니다.
요즘은 한글번역 `전심법요`, `완릉록`을 검토중이라 실천법에 대한 자세한 설명은 나중으로 미루고..
요점만 말하자면 실천법은 곧 무위법이고 제가 그 동안 쓴 글에도 충분히 설명이 나와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