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원주민 이야기
페이지 정보
작성자 전희경 (218.♡.224.91) 댓글 5건 조회 6,804회 작성일 06-08-10 17:26본문
인디언 사회는 가정과 살림은 여성과 어르신들 중심으로, 그리고 사냥과 전투는 남자들 중심으로 조직되어 있습니다. 역할이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는 것이지요. 그래서 남자들은 가사에 간섭하는 일이 없습니다. 티피 안의 모든 일은 여성들이 결정합니다. 물론 중요한 일은 남편과 상의하지만, 최종 결정은 여성들이 내립니다.
그래서 인디언 여성들은 물긷고, 살림하고, 옷짓고, 빨래하고, 땔감하는 것은 물론 곡물을 기르고 채집하는 것, 남자들이 사냥해온 동물의 고기를 말리는 것, 가죽을 무드질하는 것, 살림에 필요한 바구니 등 도구를 만들고, 모카신을 만들고, 옷이나 장신구에 수를 놓는 것, 그리고 계절에 따라 티피를 옮기는 것 등 일이 아주 많습니다. 게다가 아이가 7,8세에 이를 때까지 교육도 책임집니다.
이런 이유로 일부 여성운동가들은 인디언 사회에서 여성들이 혹사당했다고 말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오해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인디언 여성들의 일이 많은 것은 사실이나 그렇다고 과거의 다른 전통사회에 비추어 특별히 인디언 여성들의 일이 많다고는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전통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일일이 손으로 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자연히 여성의 일이 많아질 수밖에 없는 거지요.
그런데 흥미로운 사실은 이렇게 전통시대 인디언 여성들의 일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디언 여성들의 사회적 지위가 매우 높았다는 사실입니다. 남성들은 여성을 매우 공경했습니다. 그래서 인디언 사회에서는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는 인디언 남성을 두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이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성을 공경할 줄 모르는 사람은 결혼할 자격이 없다는 뜻이지요.
다코타족 출신의 작가인 엘라 델로리아는 19세기 다코타족 여성들의 삶을 소재로 <수련>이라는 소설을 썼습니다. 엘라 델로리아는 <신의 피부는 붉다(God is Red)> 등의 책을 쓴 유명한 인디언 학자 벨라 델로리아의 이모되는 사람으로, 20세기 전반에 프란즈 보아즈, 루스 베네딕트 등 당대의 대표적인 인류학자들과 함께 대평원의 인디언에 대한 자료를 정리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입니다. 그녀는 백인들이 인디언 사회를 남성중심의 전사집단으로 인식하는 것을 보고 인디언 여성들의 삶을 알리기 위해 이 소설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은 다코타족의 두 여성, 즉 파랑새와 그녀의 딸 수련의 성장과 결혼에 얽힌 이야기를 중심으로 가족 내에서 여성의 역할과 인디언 사회에서의 여성의 위치 등을 자세히 그리고 있습니다.
파랑새의 남편은 의처증이 있는 성실하지 못한 남자였습니다. 그는 아름다운 아내가 다른 남자들과 만나는 것은 아닌지 늘 노심초사했습니다. 그러다가 끝내 견디지 못하고 마을의 축제가 있던 날, 사람들 앞에서 공개적으로 선언했습니다.
“물을 긷거나 땔감을 해올 여성이 필요한 사람은 누구든지 내 아내를 데려가도 좋습니다.”
사람들은 모두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아내 파랑새는 정숙한 여자였을 뿐 아니라 갓 태어난 딸을 돌보느라 축제에도 못나올 만큼 가정에 헌신적인 여자였기 때문입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남자들이 아내를 공개적으로 버리는 일 - 곧, 이혼 - 은 드물긴 하지만 종종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 남자의 말을 모든 사람이 신뢰할 때, 그리고 그의 아내가 부도덕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인정할 때만 가능했습니다. 그러나 파랑새의 남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또 그의 아내에게 문제가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당황해서 슬슬 그 자리를 빠져나갔고, 마을 축제가 벌어지는 마당에는 그 혼자만 남았습니다. 인디언 사회는 명예를 그 무엇보다 중요시하는 사회입니다. 결국 마을 사람 아무도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자, 그는 수치심과 부끄러움에 휩싸여 스스로 마을을 떠나고 맙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남편이 아내와 헤어지는 방법은 딱 한 가지입니다. 마을사람들이 모인 공개적인 자리에서 아내와 도저히 살 수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입니다. 그때 마을사람들이 “그래 정말 네 아내와는 같이 살 수 없겠다”고 인정하면 아내는 그 마을을 떠나 본가로 들어가거나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합니다. 그러나 마을사람들이 인정하지 않으면 위의 경우처럼 오히려 그가 마을을 떠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만큼 남자들이 여성을 버리는 일은 어렵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여성들이 남편과 헤어지는 것은 아주 쉽습니다. 남편의 옷가지와 사냥도구들을 챙겨 티피 밖에 내놓기만 하면 그것으로 모든 게 끝입니다. 그런 경우 남자는 티피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대개 그 길로 마을을 떠나기 마련입니다. 그만큼 인디언 사회에서 여성들의 위치는 확고합니다. 뿐만 아니라 결혼상대자를 결정하는 것 역시 철저하게 여성들의 몫입니다. 여성들이 원치 않는 결혼은 성립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현대여성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여성들이 존중받는다며 일은 왜 그렇게 많은 걸까? 남성들이 그 부담을 좀 줄여줄 수는 없었을까?”
당연한 질문입니다. 그런데 이에 대해서 인디언 여성들은 전혀 문제를 제기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것은 현대의 인디언 여성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치프와족의 레니 세노글리는 말합니다.
원주민 여성과 백인 여성운동가의 차이는 백인 여성운동가들이 그들의 권리에 대해서 말하는 반면, 우리는 우리들 자신의 책임에 대해서 말한다는 것이다. 여기에는 아주 커다란 차이가 있다. 우리의 책임은 이 세계에서 가족과 이웃을 비롯해 우리를 둘러싼 모든 존재를 돌보는 것이다.
따라서 인디언 여성들의 시각은 현대 여성운동가들의 시각과는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여성은 태어나면서부터 완전한 존재입니다. 내부에 <생명의 불꽃>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여성은 아이를 낳고 기르는 존재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그에 대한 지혜를 갖고 태어나지요. 여성이 없으면 ‘생명의 원’은 계속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인디언들은 여성을 신성한 존재로 여깁니다.
그에 반해서 남자들은 불완전한 존재로 여겨집니다. 내부에 <생명의 불꽃>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밖에서’ 자신의 영혼이 가야 할 길에 대한 지혜를 가져와야 합니다. 인디언 남자들이 신명탐구를 하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벌판이나 산에 홀로 가서 구덩이를 파고 앉아(또는 서서) 그들은 위대한 신령께 기도합니다. “저는 누구입니까? 어디서 왔습니까? 왜 이곳에 보내졌습니까? 제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입니까? 제게 주어진 임무는 무엇입니까?” 그렇게 묻고는 그 답을 기다립니다. 만일 위대한 신령으로부터 답을 받지 못하면, 그는 여전히 불완전한 존재로 남게 됩니다. 때문에 그는 몇 번이고 다시 신명탐구를 해서 신의 가르침을 구합니다.
인디언 사회에서 남자들이 사냥과 전사의 일 외에 가장 많은 시간을 헌신하는 것이 바로 영적 수련입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신성한 임무가 무엇인가를 알 때 그의 삶은 완성될 수 있고, 비로소 한 남자로서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인디언 여성들이 자신들의 일은 <가족과 이웃과 자신을 둘러싼 모든 존재를 돌보는 것>이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은 어느 면에서 남자들이 그들의 영적 탐구를 완성하여 성숙한 사람이 되도록 하려는 배려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인디언 사회는 여성들의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마치 우리가 어머니 대지의 가슴에 둥지를 짓고 살듯이. 어머니 대지가 주신 곡식과 열매와 과실들을 먹고 살듯이. 그래서 인디언 부모들은 사내아이들에게 단단히 가르칩니다. 여성에게 함부로 대하는 것은 곧 우리가 발을 디디고 서있는 어머니 대지에게 함부로 하는 것과 같다고.
전통시대의 인디언 사회에서 여성과 어머니에 대한 가치는 그만큼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인디언 남성들은 인디언 여성들의 그와 같은 헌신적인 배려 속에서 한 사람의 온전한 남자로 거듭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인디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내적 균형과 평화를 삶의 최고의 가치로 여겼으며,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헌신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인디언들이 보호구역에 갇혀 그들의 전통적인 방식을 잃어버린 뒤로 인디언 남성들은 그들 본연의 역할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백인들은 그들을 멸시하고, 천대하며, 차별했습니다. 때문에 인디언 남성들은 백인들이 지배하는 현대사회에서 또 다른 패배자로 살아가야만 했습니다. 이런 현실을 도저히 인정할 수 없는 인디언 젊은이들은 술과 마약에 빠졌습니다.
조상들이 가르친 대로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봉사하는 삶을 살고자 해도, 백인들이 모든 것을 지배하는 사회에서는 그런 삶을 살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이런 현실을 보다 못한 인디언 여성 레지나 브레이브는 이렇게 외칩니다.
우리는 절망에 빠지고, 알콜에 중독되고 자살을 하거나 범죄를 저지르는 우리의 남자들을 보는 데 지쳤다.
우리는 아이들을 길렀지만 우리의 언어와 관습과 문화를 파괴한 백인들에 의해 세뇌되고 말았다.
우리는 남자형제들과 아들들을 보는 데 지쳤다. 전쟁터에 나갔다가 집에 돌아와서는 끝내 미국정부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 땅에 백인들이 온 지 483년 - 우리는 병들고 지쳤다.
그렇지만 우리는 우리의 남자들 곁에 바짝 붙어 섰다. 그리고 우리의 젊은이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곳 전쟁터에 섰다.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게 우리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누리던 자유를 알게 하기 위해.
우리의 젊은이들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의 미래는 우리의 과거 속에 있다.
오늘, 우리는 잃어버린 영성을 되살리고 빼앗긴 위엄과 주권을 되찾기 위해 나서야 한다.
우리는 원주민 여성들이다!
1976년에 인디언 신문 <와칸사스네>에 실렸던 글입니다. 인디언 사회의 반쪽인 남자들이 무너지고 있는 현실을, 그래서 이제는 인디언 여성들이 나서야 할 때임을 절절하게 토로하고 있는 글입니다. 켄트 너번의 책 <상처받은 무릎, 운디드니(Neither Wolf Nor Dog)>에도 비슷한 내용이 나옵니다. 오지브웨족 댄 할아버지의 손녀인 대널은 켄트 너번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백인인 당신은 이해하지 못해요. 당신이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에요. 지금 인디언들에게는 우리 여성들이 희망이라는 사실을.... 우리 문화가 사라지면 우리도 없어져요. 우리 어르신들이 절실히 추구해왔던 것, 우리 조상들이 목숨을 걸고 지켜왔던 모든 것이 사라질 거라구요.
보세요. 우리 할아버지와 같은 남자들을요. 그들은 아직도 싸우고 있어요. 하지만 이제는 우리 차례입니다. 우리 인디언 여성들의 차례란 말입니다. 남자들은 지쳤어요. 그들은 200년 동안이나 싸워왔어요. 이젠 우리 차례입니다.
그들은 전사였어요. 그들은 우리를 위해 나가서 싸웠죠. 하지만 당신네 백인은 수가 너무 많았어요. 그래서 우리 남자들은 싸움에서 졌고 모두 패배자가 되었어요. 그들은 분노했고 지독한 수치심을 느꼈습니다. 그 분노와 수치심은 지금도 그들의 핏 속에 흐르고 있어요. 그들은 계속 노력했어요. 하지만 이제 그들의 전쟁은 끝났습니다. 명예를 소중하게 여기는 우리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결코 지지 않았어요. 그리고 우리는 여전히 강인하고다고 할 수 있어요. 하지만 명예는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도 그들은 싸우려고 노력합니다. 할아버지가 언어를 가지고 싸우고 있듯이... 하지만 역시 그들은 패배자입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빼앗겼어요. 당신네 백인들이 한 짓이지요. 당신들은 인디언 남자들의 정신을 빼앗아가고 수치심만 남겨주었죠.
우리 여성들은 가슴 속에서, 그리고 두 손 안에서 모든 것을 살려서 지켜왔어요. 백인들은 우리를 무시했지요. 그동안 우리는 한낱 여자일 뿐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문화를 살리고 지키는 건 언제나 우리 여자들 몫이었죠. 그게 우리가 여자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할 일이었습니다. 늘 그래왔지요. 우리는 아직도 옛날 방식으로 요리를 하고 바느질을 합니다. 이웃의 노인들에게 음식을 해드리고 따뜻하게 보살펴 드립니다. 이제 우리는 아이들을 가르칠 수 있어요. 남자들은 패배했는지 몰라도 우리 인디언 여자들의 마음은 변함없이 강해요.
그래요 인디언 보호구역에서는 폭력이 많이 발생하죠. 물론 술에다 그 원인을 돌릴 수도 있어요. 하지만 좋은 가족들도 아주 많습니다. 당신네 백인 가정보다 훨씬 더 사랑이 넘치고, 여러 세대가 함께 살고 있고 모두가 서로를 존중하는 그런 가족들 말입니다. 내가 우리 인디언 여성들의 시대가 왔다고 말하는 건 바로 그런 의미예요. 우리는 항상 중심에 있어 왔어요. 인디언 가정은 하나의 원과 같아요. 그 중심엔 언제나 여자가 있죠. 우리가 할 일은 우리의 남자들을 자유롭게 해주는 겁니다.
우리 여성들은 밖으로 나가 백인들과 함께 일하고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밤에 집으로 돌아온 뒤에 우리들 자신을 팔아치웠다는 그런 기분을 느끼지 않을 수 있어요. 그렇게 일한다고 해서 우리의 명예가 훼손되는 건 아니니까요. 하지만 남자들은 그렇지 못해요. 일을 하기 위해 백인들에게 가면 그들은 치욕을 느낍니다. 말로 하지 않더라도 말입니다. 그 치욕을 떨쳐내려면 자신의 피를 포기하고 백인이 되는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러기를 원치 않아요. 그러나 그들이 인디언 보호구역에 남아있으면 일자리가 없어요. 일자리가 없으면 가족을 먹여살릴 수가 없죠. 가족을 부양할 수 없으면 거주지를 떠나거나 술을 마시거나 분노에 사로잡힙니다.
그리고 우리 여성들을 사랑하면서도 우리에게 화를 내지요. 당신들은 오로지 폭력과 술만 보죠. 우리의 침묵과 몸에 난 멍들만 봅니다. 하지만 우리가 보는 건 망가진 원이에요. 우리는 그 원을 다시 온전하게 되살려낼 겁니다. 이건 남자와 여자에 관한 문제가 아니에요. 하나의 전체로서 우리 문화와 우리 조상들과 우리 후손에 관한 문제예요. 그것이 우리 인디언 여성이 하는 일이에요. 우리는 지금 새로운 문화를 건설하고 있는 겁니다. 그것이 우리가 해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지금이야말로 우리 인디언 여성들이 나서야 할 차례라고 말하는 이유입니다.
확실히 인디언 여성들은 현대여성들과 다릅니다. 그들은 가족과 이웃과 민족을 위해 자신들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는 것입니다. 온갖 억압과 차별과 멸시 속에서도 인디언 사회가 지금껏 전통을 보존하고 영적인 가르침을 실천해오고 있는 것은 바로 이와 같은 인디언 여성들이 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가 비단 북미 인디언 여성들만의 문제일까요?
현대의 남성들은 피말리는 경쟁에 내몰려 있습니다.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을 짓밟고 올라서야만 합니다. 그러는 동안 안으로 무너져갑니다. 아버지로서의 위치도 점점 잃어버리구요. 이 잘못된 경쟁과 이기주의의 문화를 바꿀 힘은 이제 남성들에게는 없습니다. 오직 살아남기 위해서 일해야 하는 이들에게 잘못된 사회의 틀을 바꿀 새로운 창조적 힘을 기대하기는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백년동안의 고독>을 쓴 남미의 작가 가르시아 마르께스는 지금은 여성적 가치의 녹색권력이 필요한 시대라고 말합니다. 여성들은 남성과 달리 경쟁과 갈등보다는 공존과 평화와 화해와 협동의 가치를 더 소중히 하는 이들입니다. 때문에 모성적인 가치를 실천하는 여성들이 나설 때 경쟁과 갈등으로 찌든 우리 사회는 비로소 치유될 수 있으며, 오직 그때에만 미래의 희망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장 2004년 4월호에 게재했던 글입니다.)
댓글목록
알라뷰너님의 댓글
알라뷰너 아이피 (61.♡.21.169) 작성일
너무 길다. 내용에 비해선.
지금은 여성의 자제와 자숙이 오히려 필요한 시기는 아닐까?
예전의 그런 모성애라면 몰라도...
너무 독해지고 있는 부분이 많다,내 경우에는 더욱 심각하다 !
하나씩 양보하다보면 결국엔 피박에 ,판쓰리 !
킨폭스님의 댓글
킨폭스 아이피 (222.♡.243.84) 작성일i kin ye 로 통하는 글입니다.
민들레님의 댓글
민들레 아이피 (211.♡.53.180) 작성일제가 어제밤 이영화를 떠올리면서 `늑대와 함께 춤을 `추었습니다. 두마리의 늑대였습나다...
알라뷰너님의 댓글
알라뷰너 아이피 (61.♡.21.173) 작성일
우리의 역사에서는 그보다 몇배의 지혜가 있는데,왜
문화도 생소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곳에서 찾으려 애쓰는지....
등잔밑부터 보시길...
우리 것을 모르는데 남의 것을 어찌 알리오.
인디언님의 댓글
인디언 아이피 (221.♡.155.226) 작성일참 소심한 국수주이요. 우리의 조상이 인디언에서 왔다는것을 모르시나본데.... 문화인류의 원류를 큰 줄기에서찾아가는 방법도 우리것을 알아가는 한 방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