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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존재의 원리서) 이해의 길 - 1 (8절 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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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7.16) 댓글 12건 조회 6,502회 작성일 06-08-21 1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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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경(존재의 원리서) 이해의 길


도덕경은 그 태생조차도 불분명한 ‘노자’라는 분이 쓴 책으로 ‘존재의 원리’를 다루고 있다.

이 책은 은유적이고 비유적인 표현과 도약적 논리, 기존의 가치의 경계를 파괴하는 시도와 함께 ‘없음과 있음’ ‘높음과 낮은’ ‘아래와 위’ 등의 존재와 현상 자체를 통합하려는 시도하는 책이다.


문제는 그 내용 자체가 너무 추상적이고 총론적이다 보니, 이를 해석하는 이들의 기질과 관점에 따라 해석이 되고, 사람에 따라서는 극단적인 회의론이나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자극제가 되곤 한다.


가뜩이나 ‘교’로서 발전하게 된 경전역할을 하는 서이기에 이에 대한 무분별한 맹목적인 수용은 커다란 해악으로 작용할 여지마저 있다.


따라서 도덕경 이해의 맥락이 올바로 짚어져야할 필요가 있다.


1. 도덕경은 신이 쓴 책이 아니다.

도덕경은 말 그대로 신이 쓴 책이 아니고, 사람이 쓴 책이다. 노자가 삶의 원리를 훤히 꿰뚫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 나름의 한계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염두에 둬야 한다.

그 표현되는 개념과 이해가 발끝만 바라보며 독단적인 삶에 매몰되어 왔던 각자에게 엄청난 해방과 자각의 기회를 부여하기에, 그 ‘환희’의 감정이 너무 지나치면 그 이해에 지배를 당하게 되고 필연적으로 심리적 함정에 빠지게 된다.


인간은 ‘경향성’의 동물인지라, 접하는 현실을 특정한 방식으로 보기 시작하면 그 현실을 한 발짝 물러나서 객관적으로 조명하기 전까지는 그 방식으로 밖에 인식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도덕경에 표현된 비유적인 문장 등에 대해서도 그러한 ‘경향성’이 해석에 인위성을 가하고 혹여나 발견되는 문제의식조차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 수 있기 때문에 이를 경계해야 한다.


도덕경의 ‘나를 비우는 것이 도다’는 식의 이해만 주절거리면서 그것을 진리라 믿어 추호도 의심치 않을 수 있지만, 이는 ‘죽고 나면 천사가 뛰노는 바로 그 에덴동산에 갈수 있다’고 믿고 추호도 의심치 않는 것과 똑같은 인간의 ‘경향성’에 의한 것임을 간파해야할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인간 내면의 심리작용을 통해서 세상을 꿰뚫는 도덕경적인 발상을 그대로 적용해 보면 그러한 ‘추호도 의심치 않고 그 이해에 매몰되는 경향’속에서 노자가 했음직한 실수도 예상해야 한다.


이렇게 도덕경을 접하면서 빚어내는 인간의 ‘경향성’이 만들어내는 함정은 ‘사이비종교’에 빠진 이들의 그것과 정확히 ‘같은 선상’의 심리적인 현상이다. 종종 도덕경의 원리를 기술적으로 받아들여서 기계적으로 적용하려고 하는 ‘광신자’들이 생겨나는 것은 바로 그 이유이다.

(그들은 특히나 자신들의 기질이 쫓는 ‘몇몇 구절’에만 매달려 있기 때문에 더욱 자신들의 이해에 집착한다)


우리는 도덕경을 ‘관조’해야지, 그에 일방적으로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믿으려고 하기에 앞서서 ‘진정 무엇이 보이는가?’를 숙고해야 하고,

그 이전에 ‘어디에 서서보고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자신의 꼬리를 먹어 들어가는 뱀의 낭패를 당할 수도 있다.


2. 도덕경은 ‘총론’의 의미를 지닌 책이다.

인생에 있어서의 세부적인 삶의 원리와 행동규칙 같은 것이 정리된 것이 아니라, 말 그대로 ‘존재 법칙’의 총론을 정리해 놓았다.


도덕경에서는 구체적인 ‘생활의 방식’내지는 ‘생존을 위해서 필요한 밥’을 구할 수 있는 방식을 설명하지 않는다.

따라서 우리는 도덕경에서 다뤄지지 않은 ‘생물학적 생존의 문제’를 별도로 다뤄서 자신의 가치체계 안에 포섭을 해야지, 무조건적으로 도덕경의 총론에만 매몰되어서 ‘어차피 없는 것과 있는 것은 하나이고, 위와 아래는 하나이로다’는 식의 관념론적인 발상에만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도덕경적인 깨달음이 부족한 빵을 견디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를지언정, 없는 빵을 만들어내게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에서의 실천임을 알아야 한다. 구체적 생존과 실천의 문제는 ‘다른 책’과 ‘경험’을 통해서 배워야 할 것이다.


3. 도덕경을 올바로 응용해야 한다.

도덕경은 ‘국가’개념도 불분명한 상태에서의 지속가능한 자연생태가 유지된 상황에서 쓰여진 책이라, 현대의 자본주의와 세계화가 촉발시킨 ‘에너지위기’ ‘환경위기’(인류적 위기상황)를 대처하기 위한 기술과 논리는 전혀 제공하지 못한다.


노자가 추구하는 [무위]는 자연법칙에 따라 행위하고 인위적인 작위를 하지 않는다는 얘기인데... 이것은 자연법칙이 정상상태일 때의 이야기이고, 인간이 엄청난 인위를 가해서 자연의 질서와 인륜의 질서가 파괴된 현재상태에서 ‘무위’하라는 얘기는 그냥 그대로 죽어라는 얘기 밖에 안된다. 우리에게 있어서 ‘무위’는 인위적으로 뒤틀린 질서를 다시 바로 잡은 후에 의미있는 얘기이지, 현재의 상태에서의 ‘무위’는 ‘자멸’의 다른 이름이 아니다.

아마 노자가 현대시대에서 도덕경을 다시 쓴다면 ‘에너지위기’와 ‘환경위기’를 틀림없이 다뤘을 것이다. 이는 과거 한번씩 돌던 ‘전염병’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 인류와 생명 자체를 멸종시킬 수 있는 작용으로 촉발되는 현실을 불러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도덕경 30,31장의 반제국주의 62장의 국가권위주의의 파괴 등의 발상이 응용되면 현재의 ‘에너지 위기’와 ‘환경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근거를 얻을 수 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응용되어야만 가능한 이해이기에 우리가 진정 스스로가 머물러 있는 현실에 책임 있게 임하고자 한다면 도덕경에서 ‘시대적’으로 혹은 ‘논리적’으로 다룰 수 없었던 문제를 별도로 고민해서 그 안에 통합시켜야 할 것이다.


이에 동반한 ‘치국’의 내용을 담은 수 많은 장들을 살펴 볼 때에도 도덕경을 올바로 섭렵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현재 ‘무위’하고 있는 것은 커다란 착오를 하고 있는 것일 수 있다.


4. 도덕경은 ‘맞춤복’이 아니라 ‘기성복’이다.

그렇기에 그 ‘기성복’에 자신의 몸을 맞게 줄이던지 넓히던지 해서 입어야한다.

도덕경은 각 개인의 기질과 심성과 때에 맞게 최적화된 맞춤화 된 지혜의 서가 아니라, 그야 말로 판박이로 찍어져서 그에 맞게 우리가 몸을 맞춰야 하는 기성복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 기성복을 자신의 관점에서 가치와 기질에 맞게 해석하 줄이거나 넓힐 것이 아니다.

다만 세상의 누구도 이 기성복의 칫수에 맞는 사람이 없고, 기성복의 칫수를 정확히 얘기할 사람이 없다 보니, 그 기성복을 우리의 몸에 맞춰왔을 뿐이다.


우리는 스스로 ‘자각’할 수 있는 적절한 자극과 기회를 통해 도덕경에 적응하는 길을 택해야지, 자신의 기질과 가치가 이끄는 도덕경의 몇몇 문장에만 집중하고 매몰되어서는 안된다. 그랬다가는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으려 했다가는 아마 바지 엉덩이 터지는 일을 겪을 것이다.


문제는 엉덩이 터진 옷을 입고 다니는 사람들이 그 옷을 벗어서 옷걸이에서 걸어놓고 보기 전에는 그 사실 자체를 알 수 없듯이... 우리가 도덕경을 억지로 자신의 이해에 꿰어 맞추려 했다가는 똑같은 일을 당하고도 스스로 그 사실 자체를 알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말은 우리가 어떤 현상을 접하면서는 각자의 [심리적인 성향]과 [경험]과 [가치]를 투사 시켜서 그 내용과 해석과 그 해석에 대한 해석 자체를 몇 번씩 굴절시키는 과정을 겪게 되기 때문에 ‘순수한 나’의 관점에서 도덕경을 접해야한다는 얘기이다.


하지만 필연적으로 인간은 위약 효과, 후광효과, 방사효과, 자기 이행적 예언, 욕구-상보성, 맥락 효과, 부정성의 효과, 자존심 고양, 내적귀인, 조건반사, 열등감, 자아방어기재, 허위의식 등이 촉발하는 심리적인 에너지의 영향으로 자유로울 수 없고, 그러한 다양한 변수들이 특이하게 얽혀진 작용의 결과로 특정한 ‘관점’을 갖게 되고 나름의 ‘도덕경’해석의 길을 택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사실 ‘도덕경에 각자를 맞춰야 한다’는 지향은 그야말로 다만 이상적인 바램일 뿐이다.

다만 우리는 ‘도덕경 해석’에 각자의 심리적 경향성이 삼투되어 있다는 사실을 명확히 하고그 한계가 있을 수 있음을 밝혀서 그 해설서를 읽는 이들에게 몸에 맞지 않는 옷까지를 억지로 입히면 안 된다는 것을 염두에 두면 된다.


도덕경은 신이 쓴 책이 아니다. 또한 그것을 해석한 개개인 역시 도덕경을 신의 수준으로 완벽히 해석해 낼 수 없다. 그 해설서를 읽는 사람 측에서 내용은 다시 한번 굴절된다.


5. 도덕경은 극단적인 회의론과 허무주의를 조장하는 책이 아니다.


도덕경 2장에서는 선악, 유무, 길고 짧음이 각각의 양분화되어 실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로 연결되어 통합된 현상으로서 분석한다. 이를 통해서 성인이 한편의 현상에 몰입해서 집착하지 말고 공을 이루고도 그에 머무르지 말 것을 당부한다.

하지만 이것은 그런 현상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다’(무)는 말이 아니다.


인간의 감각기능은 필연적으로 빚어지는 현상을 ‘단절화’ ‘대상화’ 시켜서 이해하기 편한 ‘분절된 단위’로 나누곤 하는데... 단절된 시간공간개념이 아닌 - 영원의 시간과 무한의 공간을 놓고 본다면 잘 못 판단하는 것일 수 있음으로 ‘넓게 보라’는 차원에서 노자가 다룬 이야기이지, 그 자체가 ‘의미가 없다’는 것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문제는 이러한 서술에서 ‘회의’와 ‘허무’를 뽑아내려는 성향 심리가 발동하면 그 해석은 극단적인 회의론과 허무주의를 조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경계해야 한다.


6. 도덕경은 ‘극단적인 자아의 해체’와 ‘무’(관념, 행동)를 다루는 서가 아니다.


도덕경의 해석하는 이들의 성향이 ‘불교적인 허무주의’를 동반하는 결과로 도덕경 자체가 ‘자아의 해체’와 ‘무’를 다루는 것으로 일방적으로 이해되는 경향이 있다.



물론 ‘그러한 성향’의 사람들에게 그렇게 보이는 것을 잘못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나, 과연 도덕경 자체가 ‘자아의 해체’와 ‘무 관념, 무행동’을 조장하는 서인지에 대해서는 신중하게 고민을 해봐야 한다.



많은 이들은 도덕경 11장을 살피며 ‘안이 비어있어야 쓸모 있는’ - ‘바퀴’ ‘그릇’ ‘방’을 예로 들면서 인간의 마음도 이와 같이 텅텅 비어야 함을 강조한다. 하지만 이것은 내면에 아무것도 없이 완전히 비우라는 말과는 전혀 의미가 다른 것이다.


가령 거기에 그릇이 없다면 ‘빈 공간’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거기에 ‘벽’이 없다면 역시 집의 빈공간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인간의 마음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자아를 비우긴 비우되 그 비운 것 안으로 들어올 세계를 담아낼 수 있는 ‘마음의 테두리’를 만들어 내야한다.


이러한 테두리도 없이 무턱대고 자아가 비워지고 해체되기만 한다면 그것은 말 그대로 ‘아무것도 아니다’. 이는 ‘허무주의’와 연결된다.


노자가 말하는 ‘무위’는 아무것도 없는 진공상태인 ‘무’가 아니라, 인간과 인간, 인간과 사회, 인간과 자연이 무한의 공간과 영원의 시간 속에서 지금 현재순간에 자연스럽게 작용하는 통합의 관계이다.


우리는 무너트리려고만 해야할 것이 아니라, 세워야할 것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쓰러지는 것이 있으면 세워지는 것이 있는 것이 자연의 원리이다. 하물며 원자의 혼돈의 세계로부터도 질서가 들고 일어나서 ‘존재’가 성립하게 되었는데 인간에게 있어서는 오죽하겠는가?


그 무너트려야할 것과 세워야 할 것을 정확히 분별한 후에 무너트리고 비울 것을 무너트리고 비우고, 세우고 채울 것은 세우고 채워야만이 우리는 노자가 이야기한 이상향에 보다 근접히 접근할 수 있을 것이다.


스스로 자신의 발로 한번도 서보지 않은 이들에게 스스로를 무너트리는 노력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처럼... 우리는 세워야할 것과 무너트려야할 것, 채워야할 것 비워야 할 것을 정확히 판단해서 그리해야 한다.


‘비움’과 ‘무’ ‘낮춤’이 주는 ‘반발적인 충만감’은 우리를 ‘공’의 세계로 향하게끔 유혹하지만, 언어에 제약된 한계를 숙고해본다면


‘자아를 올바로 세운다/자아를 세계로 확장한다’는 말이 ‘자아를 해체한다/자아를 비운다’는 말과 통해있고, ‘나를 올바로 채운다’는 말 속에 ‘나를 비운다’는 말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게 된다.


이러하다면 우리는 ‘무위’ 속에서 무(없음)만을 쫓을 것이 아니라, 유(올바로 있음)도 찾아야 할 것이고, 이렇다면 ‘무관념’ ‘무사색’ ‘무판단’ ‘무실천’으로 이어지는 ‘무책임’의 연결고리가 ‘도’와는 관계없음을 알 수 있게 된다.



7. 무위의 의미...


그것은 있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 존재의 가장 자연스러운 작용이다.

그것은 ‘있는 것을 없다’고 하고, ‘배고픈 것을 배고픈 것이 아니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있는 것을 있다고 하고 배고픈 것을 배고프다고 하는 것이다.


하지만 ‘있는 것’과 ‘배고픈’ 것은 때로 ‘있을 수도 있고’ ‘배가 안고플 수도’ 있기 때문에 절대적인 현실의 기준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하기에 ‘있을 수도 있고 없을 수도 있으며’ ‘배고 풀 수도 있고 배가 안고 풀 수도 있고’ 길고 짧음, 아래와 위가 같은 것이라는 ‘통합된 관념성 / 시공간의 변수를 확장하는 노력 / 자아를 우주로 뻗히는 노력’이 선행되어야 하고, 이에 동반되어서 그것들이 ‘어떻게 어우러져서 작용’하는가 까지를 이해 해야만이 우리는 ‘무위’를 제대로 알 수 있다.


문제는 이 ‘무위’가 앞서 지적된 바대로 많은 이들에게 ‘현실의 세계상황’(에너지위기, 환경위기-인류의위기)을 무시한 체 개인의 자각과 깨달음의 문제에만 국한된 원리로서 격하되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위’가 아닌 ‘인위’이다. 자연스러운 정신의 작용이 확장되는 것을 ‘자아경계’ 내에 벽을 치면서 그 확장을 막은 것이다.


하물며 ‘물’도 알아서 낮은 곳을 찾아서 흐르고, 강물이 바다에 맞닿아서는 그에 섞이는 것이 이치일 터인데, 혼란한 세상사를 초월한 깨달음?(무)에 안주해서 마냥 평정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위’이겠는가?


문제는 앞선 ‘종교화’된 의식 문제처럼 그러한 ‘개인의 테두리’ 내에 자아를 가둬둔 이들은 그 자신의 내면속에서만 세상을 찾기 때문에 헐벗고 굶주려 죽어가는 사람들이 있는 것과 무관하게 세상을 ‘아름답게’ 본다. 이에 따라서 세상의 문제에 대한 ‘사색’과 ‘실천’의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한다. 이는 철저한 유아론적인 발상으로 스스로의 눈이 감기면 세상이 어두운 것으로 알고 눈이 뜨이면 세상이 밝은 것으로 판단하는 사고이다.


물론 이러한 가치도 각기의 개인의 고유한 선택영역일 터이지만,

하루 세끼 밥알을 자신의 입에 쑤셔 넣으면서 현실생활에서의 실천의 필요성을 늘 경험하는 이들이 ‘다른 이들의 삶’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리 관념적 낙관론으로 일관하는 것은 ‘이율배반적’이라고 표현할 수 있는 근거를 준다.


이는 ‘자아’와 ‘세계’를 통합시키지 못한 이들이 겪는 필연적인 분열이지만, 스스로는 그 분열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에 문제의식 자체가 생기지 않는다. 더군다나 이를 비판할만한 ‘도덕적’ ‘법적’ 기준이라는 것이 아예 존재할 수가 없기 때문에 이러한 분열 마저도 (의도하던 의도하지 않던)전적으로 개인의 취향적 선택의 문제가 된다.


하지만 이렇게 인식의 지평을 넓혀보자.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인간'과 여지껏 지구상에 존재했던 '인류'를 좌우측으로 결합시키고 그 연장선상에 '앞으로 존재할 인간'과 '앞으로 존재할 인류'의 연장선상을 그어 보자.


이렇다면 우리는 따로 떨어져 있는 '개체'가 아니라, 인류라는 한 덩어리의 '정중앙'에 존재하는 한 '지점'임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서 우리는 ‘개체적’으로 스스로를 인식했을 때의 ‘극단적상대성’과 ‘허무’ 자체의 의미를 증발시킬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단절된 한 점’이 아니라 영원의 시간과 공간의 한 ‘과정’에 존재하는 자들이다.


여기서 우리는 '인류'와 ‘생명’에 대해서 가져야할 책임감의 근거를 얻을 수 있다.


개체적 속성까지를 초월하여 자아를 인류와 생명으로 확대(자아를 비운다는 의미와도 상통)해서 그것을 하나의 덩어리로 묶어서 [그 '중심'으로 존재하는 생명의 본질을 자각하는 의식]을 고도화 하는 그 순간 우리는 비로소 ‘온전히’ 무위 할 것이다.

------------ 게시판 용량의 한계로 이하는 2에서 ===========

댓글목록

어부가님의 댓글

어부가 아이피 (211.♡.43.63) 작성일

과연 총명하십니다.
혜안도 그만하면 밝게 뜨였고,
서술방식도 그만하면 믿을만 하군요.
지엽적인 것은 둥글님 자신이 이미 토를 달아놓으셨기에 생략하고,
젊은 선생의 원만하신 지혜, 감탄하며 읽고 갑니다그려.^^

묘각님의 댓글

묘각 아이피 (203.♡.153.199) 작성일

나도 같은 생각을 했어요
둥글이 착혀요!!!!

가다가님의 댓글

가다가 아이피 (203.♡.145.114) 작성일

태양이 온누리를 비추듯

진리는 몸체의 자식을 낳고 그 배경이 되어 무한으로 이렇게 떡 벌어져 있습니다,~~~

머리가 아니라 영혼으로 인식해야 합니다.

자유님의 댓글

자유 아이피 (150.♡.136.46) 작성일

둥글이 님!

역시! 대단하시네요...
마지막에 님의 한계까지 명확하게 정의하시는 것까지.... 역시! 대단하십니다.

항상 느끼는 거지만
님께서는 이미 모든 것을 알고 계시네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7.16) 작성일

네~ ㅠㅜ

어부가님의 댓글

어부가 아이피 (211.♡.43.63) 작성일

태양이 온누리를 비추듯
진리는 몸체의 자식을 낳고
그 배경이 되어 무한으로 이렇게 떡 벌어져 있음을
머리가 아니라 영혼으로 인식하고 있는 듯 한데요, 이미 둥글님은.

***너무 훈장질 하려들지 맙시다.
    까놓고 말해 님이나 소생이나,
    서른 넷 나이에 뭘 제대로 알기나 했남요?
    적어도 한 가지,
    둥글님은 님의 나이에 이르러
    그리 서툰 훈장질 하려들진 않을 거라는 것,
    소생은 믿겨집니다.

정리님의 댓글

정리 아이피 (218.♡.76.209) 작성일

둥글 님.

설대 논술 수시 넣으면 일등!!! 이것다.^^

직관이 좀  쌘 나로서는(논리에비해..ㅠ..ㅠ) 막연히 생각해 왔던 부분을
진짜 속 시원히 터치 해 주시네요...

즉, 내가 말하고 싶은 내용은,


동감!!!!!!!!!!!!!!!!!!!!!!!!!!!!!!!!!!!!!!!

(사랑와 영혼에서 데미무어가 말했던 바로 그 말, 동감..^^)

생각보다 둥글 님...좀 빡세네요...ㅎㅎ

담에...시간이 남아 넘치면, 둥글 님 글, 무엇에 동감인가..조목조목 따져봐야  쥐~~~~~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7.16) 작성일

ㅠㅠ 어부님이 잘 모르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저는 벌써 '둥글이교'를 창시해서 교주로서 활동하면서
'둥글복음' 전파에 혈안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

'할랄루야~ 둥글이 선사를 믿느뇨???' ㅋㅋ

오호!!님의 댓글

오호!! 아이피 (211.♡.184.111) 작성일

대단하십니다, 둥글이 선사 __()()()__

흔히 도덕경을 접하며 하는 실수중의 하나가 서에 정리되어 있는 [이상적 존재성]에 극단적으로 매몰되어서 그러한 존재성을 만들어내기까지의 [과정적 중요성]을 간과하고 [현실적인 존재성]을 등한시 한 체 그 [이상적 존재성]과 일치하기 위해서만 매달린다는 것이다.

요모조모 다 공감하지만 특히 위의 문구에 딱 걸려 더욱더 공감, 동감하여이다~~

폐인님의 댓글

폐인 아이피 (211.♡.184.111) 작성일

도덕경 책의 서문이나 일러두기에 이 글을 꼭 올려주소서~~부디@~~

자유님의 댓글

자유 아이피 (58.♡.218.100) 작성일

별 뜻 없이 한 가지만 언급하고자 합니다.
님께서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고 계십니다.

----------------------------------
노자는 통탄한다.

‘아~ 내가 왜? 저 교본의 끝에 그림속의 군사가 취하는 동작은 이상적인 기준일 뿐이고, 그냥 각자의 신체와 현실에 맞춰서 동작을 하면 됨’이라는 간단한 주석을 하나를 달아주지 않았는가?’하고...
----------------------------------

하지만 노자는 다음과 같이 이야기 합니다.

名可名 非常名
즉, 말에 속지 마라...

전체를 이해하시는데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7.16) 작성일

좋은 지적입니다. 그러고 보니 전체 장을 꿰뚫을 수 있게 1장을 적절하게 해석했어야 하는데...
전체 개관만 하느라고 소홀히 지나쳤군요.
좋은 지적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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