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효대사 똑바로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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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7.16) 댓글 5건 조회 12,485회 작성일 06-08-28 23:43본문
본인 둥글이선사는 대사취급을 받는 원효승보다 호칭에서부터 한끝발 낮은 이유로ㅠㅜ 그의 이해가 다다른 영역에 대해서 개인적인 입장을 피력할 수 있는 자격도 역량도 안 된다.
하지만 그가 자신의 ‘자각의 순간’을 좀 더 사려깊게 설파하지 못했음으로 인해서 그 후로 1500여년간 중생들이 심각한 이원론적 관념론에 매몰되는 특이한 현상을 빚어냈음으로 이에 대해 논하고자 한다.
원효대사는 당나라 유학길에 무덤 속에서 하루밤 묵으면서 해골에 괴인물을 마시고 큰 자각을 얻게 된다.
마음이 생길 때 우주 만물이 생기고 마음이 없어질 때 썩은 물과 깨끗한 물이 서로 다르지 않음을 안 것이었다. 이로 인해서 그는 ‘오로지 마음에 의해서 모든 것이 좌우되는 것’이라는 그의 중심적 이해를 설파한다.
그렇담 만약 원효가 ‘그날’ 마신 물이 해골물이 아니라 양잿물이라면 어땟을까?
원효가 그 후로 ‘어차피 모든 것은 마음으로부터 생기기 때문에 나는 앞으로 해골물만 먹고 살겠다’고 했다면 어찌 되었을까?
만약 그리했다면 그의 이해는 우리에게 다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특히나 그가 거지들과 어울려서 술을 마시면서 무애박을 두드린 것이나,
요석공주와 정열의 밤을 보내고 설총을 낳은 것이나, 그가 본인 스스로 얘기했던 ‘마음에 의해서 우주가 빚어지는 문제의식’을 정면으로 대응해서 무아를 실현한 사람으로는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원효는 ‘거짓말’을 한 것인가? 그는 ‘위선자’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는 구체적으로 모든 문제상황을 서술할 필요가 없었던 것이다. 비록 해골물에 의해서 촉발된 인식의 대 변화을 겪기는 했지만, ‘설마’ 자신이 했던 그런 표현자체를 사람들이 ‘양잿물 먹거나’ ‘안 먹어도’ 정신력으로 살수 있다고 여길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기에 그는 자신도 밥을 먹었고, 더러운 물보다 깨끗한 물을 찾아 먹었으며, 술을 찾아 먹고, 요석공주와 뜨거운 밤을 보낼 수 있었던 것이다. 더군다나 ‘무아’하라고 외친이 답지 않게 방대한 불량의 책을 썼음에 더 말해서 무엇을 하겠는가?
물론 그는 자각 후에 자신의 문제를 한발 물러나서 볼 수 있는 시야를 가졌기에 그것은 분명 이전 상태와는 다른 것이기는 해도 동물로 태어난 이상 그에 제반되는 모든 필요에 대해서는 부정하며 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그 ‘한계’를 그렇게 몸소 인정하여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그가 그간 자신의 종파만을 주장하며 서로의 이권을 얻고자 쌈박질을 해대던 수 많은 불교 교파를 ‘화쟁사상’을 통해서 통합하려는 노력이 대승불교적 차원에서 실행된 것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그는 ‘우주 만물이 마음에 의해서 일어나니 저들 종파가 대립하는 것으로 보이는 것도 내 마음 때문이리라’하고 손을 놓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 중제 조정과 화합을 위해서 나섰던 것이다.
그는 깨달음 이후로 모든 세상사의 문제에 손을 놓고 염불만 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갈등과 대립관계에 있는 불교종파를 그렇게 통일했고, 240여권의 책을 저술해서 후학들에게 이해의 관점을 제공했으며, 무애박을 쥐고 천촌만락 전국 방방곡곡을 다니며 노래하고 춤을 추고 돌아다니면서 대중을 불법으로 귀의하게 했다.
결국 원효대사가 터득한 것은 회의주의적 관념론이 아니라, 자신의 자아를 세계로 뻗히려는 노력을 하는 ‘실천적 자아상’의 구축이라는 것을 조금만 들여다보면 확인할 수 있다.
(말하자면 ‘이해와 실천’을 통합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그 이후로 ‘감각’과 ‘문자’에 집착하는 한국인 특유의 성향이 원효를 왜곡시켜 놨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런 식으로 원효대사를 이해한다.
‘깨끗한 물과 더러운 물의 차이는 없다’는 원효대사의 믿음
-> ‘이 모든 것은 마음이 일어섬으로 빚어진다’는 이해
-> ‘따라서 철저히 마음을 비워야 한다’ 결과
=> 고로 세상사의 문제도 중요하지 않다. 우선 내 마음만 비우면 모든 것이 깨달아진다. 모든 문제를 안에서 찾아야지 밖에서 찾는 것은 잘 못이다. 다른 문제에 신경 쓰는 사람들은 ‘마음에 의해서 법이 일어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이다’.
이런 식의 이해가 ‘고정’되고 이것이 ‘강박적 집착으로까지 이어지다보니, 이것은 사회적인 부조리와 부정을 ’묵인‘하여 결과적으로 그에 ’동조‘하는 효과까지를 불러일으킨다.
이들의 머릿속에는 회의론적 관념론의 ‘공식’이 깊숙이 박혀져 있다.
이로 인해서 ‘물질’ ‘실천’에 대해서 등한시하며(관념적으로만 등한시 할 뿐이지 본인들의 필요는 어김없이 충족하는 이율 배반성이 나타난다..), ‘마음에 의해서 법이 일어나는 것을 모르는 사람들 부류’로 보여지는 이들이 나타나면 뇌가 자극되면서 불편한 심정을 갖는다.
이들은 마치 영문법 시험을 보는 것과 같이 특정한 상황이나 상대방의 언사에 대해서 ‘강박증적으로’ 그 공식을 적용한다.(물론 이러한 기준 공식도 그들의 취향에 맞게 고른 몇 가지 극단적인 것이다.) ‘마음이 일어나면 우주가 일어나기 때문에 마음을 죽여라’라는 이야기를 그들은 다른 이들의 마음 일어섬을 지적하기 위해서 주절댄다.
(어김없이 강박적으로 일어나는)마음의 촉발작용으로 빚어지는 그 주절댐이 얼마나 모순된 것인지조차 알 수 없게되어 있는 상황이다.
이들은 세상에 분별해야할 것과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 사이에 어떤 구분이 있다는 사실 자체를 분별하지 않으려고 하면서 그에 대한 분별심 자체를 잘 못된 것으로 '분별'한다.
성경의 ‘십일조 안내면 지옥간다’느니 ‘목사는 하나님의 자식이라니’라는 본질로부터 벗어난 몇몇 포인트를 종교사업가들이 강조하여 돈벌이를 할수 있는 것과 같은 맥락으로...
그들은 원효 등의 몇몇 구절만을 강박증으로 되뇌이면서 그에 자신의 존재성을 매몰시킨다.
원효대사를 철저한 회의론자(관념론자)로 받아들이는 정신적 성향은, 도덕경을 접하면서도 그대로 나타난다. 많은 이들은 도덕경의 원리(그들이 선별해서 수용한 원리)를 짜깁기 해서 그들이 믿는 방향의 이해를 끄집어 낸다. 이것이 ‘종교화’된 것은 필연이지만, 자신이 어디서부터 ‘도가적 종교성’에 빠져서 맹목적이고 강박적으로 그것을 추구하게 된 것인지를 본인들은 알 생각 조차없다.
왜냐하면 '의심하며 믿으면 안된다‘는 기독교적 관점이 그 이해에 한번 매몰된 사람들에 의해서 그게 사이비가 되었던, 신도들 강간하는 교주의 믿음이 되었건 한번 ’씌워지면‘ 그 망을 벗어날 수 있는 심리적 근거가 완전히 상실되는 것 처럼, ’판단하면 안된다‘ ’분별하면 안된다‘는 식의 종교적 구속을 주는 논리 하나가 머릿속에 한번 박혀 버리면 그러한 이해가 잘된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를 판단하고 분별할 수 있는 심리적 지반이 아예 무너져 버리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들이 진리에 다다르기 위한 유일한 행위는 자신의 관념이나 다른 사람의 언행 중에서 ‘분별하는 것’이 보일 때 발끈 해 하는 것이다.
이는 ‘중’을 보거나 타종교의 상징을 대했을 때 발끈해 하는 수구기독교인들의 그것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러다 보니 노자의 도덕경역시 혼란으로 고통을 겪고 있던 나라에 다시 화합과 평안을 가져오기 위한 처세와 치국의 길을 제시하고 있다는 본래의 목적까지도 왜곡하면서 그렇게 ‘폐쇄된 자기 만들기 종교서’로 그들은 그 서를 전락시켰던 것이다.
이렇게 ‘종교화된 이해’는 그들이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이 구속을 스스로 깨치고 나와서 그 모습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기 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고리로 엮어져 있다.
그들에게 이 ‘종교적 집착’을 벗어나서 ‘삶’에 올바로 하나로 융화될 수 있는 자극의 근거로 줄 수 있는 것은...
원효대사가 해골물을 먹고 나서 얻었던 그 ‘자각’이...
과연 ‘양잿물을 먹고 나서고 가능했을까’를 생각해보는 것이고, ‘완벽한 무아와 분별없음이 만들어 내는 종국이 어떤 것일지’를 신중하게 숙고해 보는 것이다.
그들이 ‘밥의 문제’(관념적 이원론이 아닌 물질적 현실과 실천의 문제를 하나로 통합하는 문제)에 대해서도 스스로 명확한 답을 할 수 없다는 사실이 인식의 틀을 흔들어 낼 수 있다면 어느 순간부터 ‘완벽한 무아와 분별없음의 세계라는 것’은 그냥 깨달은 자들이 그것을 ‘언어화 해서’ 표현하다보니 그리 이미지화된 ‘이상의 세계’일 뿐이지, 현실세계에서는 분명한 구분이 있어야할 것들이 있어야 함을 받아들이고, 자신의 실존성에 맞게끔 그 ‘선’을 대략 정리를 해야함을 분별해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지 않고 노자의 몇몇 구절이 주는 ‘종교성’에 매몰되어 그 것이 주는 ‘자유감’ ‘해방감’ 에만 집착한다면, 우리는 ‘예수천국 불신지옥’이라고 떠벌리고 다니면서도 항시 온화한 미소와 평정한 마음을 가진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극보수기독교인들과 같은 꼴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아니 ‘정확히’ 같은 꼴이다. ‘사이비나 다름없는 수준의 신도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이들일 수록' 자신들이 빠진 함정이 어떤 것인지를 모르고 이에 대해서 지적하는 사람들에게 사이비 기독교 신도들이 하는 얘기처럼. ‘네가 한번 나와 같은 체험을 해봐야 안다. 그러기 전에는 결코 알 수 없다’는 말을 주절거리며 ‘실로’ 안타까움을 표한다. 그들은 스스로가 빠진 ‘함정’을 오히려 축복으로 아는 것이다. 하지만 사이비 기독교 신도들이 자신들의 처지에 오히려 ‘환희’하는 것 과 같은 똑 같은 맥락으로 이들은 스스로의 현재상태를 조망할 수 없다.
우리는 자신이 보고자 하는 것과 자신이 처해있는 지반에 의해서 현실이 왜곡해석되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대승불교의 원효대사가 혼란된 불교계를 통합하고 세상에 나서서 그 이해를 실천하고 다녔고, 그 후의 걸쭉한 불교의 기둥이 선종적 관점에서 돈오점수와 정혜쌍수를 포교하며 교종과 선종을 통합하고 다녔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나,
‘무아’와 ‘분별없음’을 종교화한 많은 이들은 이러한 사실에는 아랑 곳 않고 그들의 가르침으로부터 오직 ‘평안’과 ‘안락’ 만 찾으려 하니 아쉬울 뿐이다.
노자가 참선방법론을 정리한 것이 아니고, 하물며 동쪽으로 온 달마도 중생을 구제키 위해서 설법했는데...
세상에 대한 이해를 접고 완전한 ‘무분별’과 ‘무개념’으로 살아가려는 것이 적당한가?
‘나만 찾으면 다 끝나니 세상의 문제는 관심꺼리가 아니다’는 말을 말이라고 하는가?
물론 세상사에 찌들어 많은 아픔을 간직한 이들... 그들에게 ‘마음이 일어나니 우주가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네 마음만 비우면 우주는 존재하지 않는다’류의 문구들은 그 상처난 마음에 통찰적인 치료를 가하기 때문에도 매우 매력적으로 그들을 사로잡는다.
하지만 기독교인들이 흔히 하는 실수와 같이 그러한 ‘해방감’에만 대책 없이 안주하다 보면 그 속에서 마냥 평정할 수는 있을지언정 올바른 자기 존재를 이해할 기회를 얻을 수 없으며, 자신과 세상의 유기적인 연결 관계를 파악하지 못하고 편협한 자아의 테두리 내에서 한평생을 마감할 수 있다. 눈앞에 보이는 작은 이해에 집착해서 보다 큰 평안과 자유에 발을 내 디디지 못하는 것이다.
그 전의 우리의 뇌리를 채우고 있던 ‘집착’ ‘해탈’의 이원론을 벗어 던지자.
그사이에는 ‘관조’도 있을 수 있고, ‘이해’도 있을 수 있으며, ‘공감’도 가능하다.
‘밥’을 먹고 ‘똥’을 싸려면 이를 분별하고 판단하고 실천해야할 현실적인 작용이 이루워져야 하듯이 우리는 자신의 실존에 맞는 현실을 재구축해야지~ ‘무개념’과 ‘무분별’의 종교에 빠져 있어서는 안 된다.
그 길은 각자가 가야할 것이지만, 정신이 관념의 껍질을 깨고 나와 현실적인 부대낌 속에 연마되면서 견고해져야한다는 것을 강조할 필요는 있다.
물론 우리가 관념을 깨고 나온 후 놓여진 현실 속에서의 끊임없는 고민과 갈등, 판단, 책임, 마찰, 굴욕, 열등, 우쭐, 절망, 통탄의 순간에 잊지 않고 새겨야 할 격언은 ‘오로지 마음에 의해서 우주가 선다는 사실’이다.
즉, 아무것도 안하려는 빌미꺼리를 마련하려고 ‘오로지 마음에 의해서 우주가 선다는 사실’을 되뇌여야 할 것이 아니라, 뭔가를 나서서 하는 와중에 힘겹고 벅차고 이기심이 들 때 그 이해를 적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삶’과 ‘선현들의 이해’가 자신의 성격과 기질, 가치에 맞게 실존적으로 어우러질 때 그는 비로소 ‘바로 설’수 있게 될 것이다.
그 바로 섬 자체가 바로 누운 것이고, 스스로를 비운 것이며, 진정한 무아의 실현 아닌가.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고 ‘거지를 대접한 것이 나를 대접했다’고 말했으며, ‘천국이 너희 안에 있다’고 선포했다.
또한 도마복음에는 ‘너희들이 둘을 하나로 만들 때, 안을 밖처럼, 밖을 안처럼 위는 아래처럼 만들 때 그리고 남자와 여자를 하나로 만들 때, 너희들은 그 왕국에 들어가리라’는 말까지 남김으로 인간이 서로 간에 유기적으로 엮어진 하나의 관계성을 직시하고 ‘너 속에서 나를(즉 세상 속에서 나를 나 속에서 세상을 찾는 관계를) 발견할 때 그것 자체가 ’천국‘임을 천명 했다.
물론 이러한 성경적 이해의 지반에는 ‘우상숭배’를 금지하는 - 근본적으로 ‘분별’과 ‘아집’(자기)을 극복하는 영성의 바탕에서 이뤄져야할 인간실존의 현현이 전제된다.
이러한 ‘자기를 버리고(자기를 제대로 찾고)’ ‘세상과 하나가 된다’는 이해는 모든 종교와 현명한 이해가 관통하는 생명의 정수임을 파악한다면 특정한 사상의 단편적 ‘논리’와 ‘문법’에만 치우치는 일이 얼마나 무모한 일임을 알게 된다.
아래 참여할 수 있는 시민-사회-복지 단체들이 정리되어 있다.
이것은 '나에 대한 이해 노력을 접고 세상에 나아가기 위한 참여'가 아니라,
단지 당신앞에 쓰러져 있는 사람을 일으켜 세우기 위한 그것이다.
받을 수 있는 이들만 받기를...
이것에 내가 나눌 수 있는 전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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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목록
묘각님의 댓글
묘각 아이피 (203.♡.153.42) 작성일
둥글이 선사~~
두고 두고 새겨볼만한 글을 써 주었군요.
감사 감사~~~~ 오랜만에 글같은 글 보고 기분째진 묘각이 짖다. 멍멍멍~~~~
몽둥이님의 댓글
몽둥이 아이피 (211.♡.167.55) 작성일
급료에 대한 설명이 안보이는데 ,게서 일하면 얼매나 벌죠 ?
윗분은 기분이 재~진다 하는걸 보니 벌서 입사하신 모양이군요.
괜찬으면 저도 부~~탁좀 해용.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7.16) 작성일
아하 ^^'
돈 버는 것이 아니라, 님이 가지고 있는 역량을 가서 쏟는 것이죠.
제가 어떻게 그곳에서 봉사활동 할 수 있게끔 주선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냥 들어가서 부딪치십시요.
클릭하고 들어가셔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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홧팅 하시길...
자유님의 댓글
자유 아이피 (150.♡.136.46) 작성일
이제야 한 편을 다 보았습니다... 쉽지 않네요...
둥글이 님 좋은 말씀 잘 보았습니다.
근데... 질문하나 ...
님께서 말씀하신
이렇게 ‘종교화된 이해’는 그들이 우연한 기회를 통해서 이 구속을 스스로 깨치고 나와서 그 모습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기 전에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뫼비우스의 고리로 엮어져 있다.
를 보면 둥글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전달하고자 하시는 그들이 나옵니다.
아마! 이 곳에 님께서 말씀하시는 그 들이 너무나 많기에
그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아 붇고 계시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들이 구체적으로 어떤 이들인지 말씀해 주실 수 없나요..
닉 네임으로 알려 주시면 더욱 쉽게 알 것 같은데....
제 눈에는 몇몇분외에는 보이지 않아서 그렇습니다.....^.^
왜! 이런 질문을 드리냐 하면요?
제 자신의 밥의 문제를 풀기 위해 밤 낮으로 머리를 쥐어 짜다 보니 시야가 좀 틀어 졌나 봅니다.
둥글이 님께는 보이는 것이 제게는 보이지 않으니 말 입니다.
님께서 보신 것을 좀 나눠 주면 안 될까요? 히히...
요즘 점점 맛이 가고 있습니다. ... 제가..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7.16) 작성일
맛 간놈! 하면 접니다. ㅋㅋ
저도 잘 모르는 놈이지만, 아쉬운 대로 작은 이해를 풀어 볼까 합니다.
'그들'을 어떤 분들이라고 구체적으로 호명하면 큰일 나고ㅠㅜ ...
다만 그들의 공통적인 특성은 다음과 같습니다.
1. '분별하면 안된다' '판단하며 안된다'는 확고한 이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본인들은 '다른 사람들이 판단하는 상황이 보이면' 그것을 잘못된 것이다라고 '판단'하면서도 스스로의 행동에 모순이 있는 것을 모릅니다.
2. '현실' '실천' '물질' '세계'의 중요성에 대해서 '무심한' 태도를 가집니다.
간혹 '그것도 역시 중요한 것이다'라고 말하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말 뿐일 뿐 '생활'에 연결되어 있지 않는 것을 보게 됩니다.
3. 이들은 철저한 회의론과 허무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선 이들이 그렇게 관념론에 심하게 빠져 있는 것 자체가 '이원론적 사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질과 정신에 구분을 두는 것이죠. 이들은 이렇게 세계를 이원론적으로 나눈 후에 모든 것을 회의적이고 허무적인 관점으로 파악을 합니다.
'그렇게 활동해서 뭐하느냐?' '내가 나서서 뭘 하겠느냐?' '결국 돌고 도는 것이다'
는 식의 말을 하면서 말이죠.
노자나 석가, 예수등은 '회의'와 '허무'를 전파한 것이 아니라 세상의 경계없음과 하나됨을 이야기를 했고 이에 따라서 인간이 서로간에 하나되어야 함을 결과적으로 설파했지만,
'그들'의 관점에서는 그것이 철저한 '회의'와 '허무'를 주장하는 것으로 밖에 안보이는 것입니다.
물론 이는 근본적으로 '사람의 기질'에 근거하는 것일 수 있으나, 주로 '생활방식'과 '가치관'에 의한 것이고, '다른 이해를 접해볼 기회'가 없어서 현재의 '주류적인 흐름'에 빠져든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꾸준한 주절댐을 통해서 새로운 자극의 기회를 줘야 하는 것이죠.
4. 이들의 대표적인 특징은
(보수기독교인들 처럼) 자신들의 이해에 맞지 않는 이들에게 '너는 진실을 모른다. 한번 겪어봐야 안다. 그렇기 전에는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할 수 없다'는 식의 말을 태연스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본인들이 스스로 '완벽한 자각'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스스로 했던 완벽한 자각의 언어를 사용하지 않는 이들은 당연스레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훈계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럴 수 있는 것이 스스로의 이해와 경험에 대해서 '종교적인 기준'을 들이대기 때문인 것입니다.
5. 이들이 '무분별의 종교'에 빠져있는가 아닌가를 알기 위해서는
'밥'의 문제에 대해서 질문해 보면 압니다.
'당신은 진정한 자각에 이르기 위해서는 분별과 간택을 하면 안된다고 하셨는데... 그렇담 밥은 어떻게 먹습니까?'라고 물으면 아예 아뭇소리를 못하거나 딴정만 피웁니다.
왜냐하면 '분별해야 할 것과 분별하지 말아야 할 것의 구분이 틀림없이 있는데.
'무조건 분별하지 말아야 한다는 종교'에 빠져 있기 때문에 그런 때는 '모순'을 일으키는 것이죠.
기타 등등의 분들이 있겠는데...
위의 것 중에서 몇개가 적용되면 그러한 종교적 함정에 빠져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씀 드릴 수 있습니다.
저 역시도 계속 배우는 입장여서 제가 드릴 말씀은 없사오나 인류의 스승들이 쓰신 책들을 읽으시면 이해가 높아지리라고 믿습니다.
° 감정과 이성 - 리처드 래저러스 공저
° 사랑의 기술/소유냐존재냐/자유로부터의도피/
의혹과 행동/건전한사회/너희도신처럼되리라 - 에리히 프롬
° 철학으로 마음의 병을 치료한다 - 투매리노프
° 끝나지 않는 길 - 아서 스킷팩
° 융 무의식분석 - CG 융
° 인지심리학 - 론엔더슨
° 행복에 관한 10가지 철학적 성찰 - 필립 반덴보슈
° 예수는 없다? - 오강남
° 컴퓨터와 마음 - 필립론슨레어드
° 아름다운 삶 사랑 그리고 마무리 - 헨린 니어링
° 마음과 물질의 대화 - 그레고리베이트슨
° 0 의 발견 - 마르틴 우르반
흔히들 서양철학은 열등하고 동양철학이 진수라고 하는데...
사실 그런 부분이 없지 않아 있지만, 동양철학이 고도의 직관을 제공하는데 반해서
너무 추상적이고 감성적인 경향이 있다보니 쓸데없는 오해의 소지를 제공하고,
사이비 종교로 빠질 수 있는 경향이 높습니다.
하지만 서향철학과 과학은 수천년의 세월을 돌아서 결국 현재는동양철학의 이해에 다다랐는데...
이들의 철학과 과학은 군더더기가 없고 명증한 이해를 제공해 줍니다.
참고하셔서 보시면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