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악히 잘 못된 전제 모든 법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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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25.♡.237.66) 댓글 0건 조회 6,126회 작성일 09-06-07 14:30본문
많은 이들이 ‘모든 법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고들 한다. 이들은 ‘마음을 다스리는 것만이 모든 것의 왕도’인 것처럼 이야기를 하며, 현실-물질의 문제를 부차적, 삼차적인 문제로 치부하곤 한다. 문제는 이런 발상이 시작되는 순간 이 사람은 이미 ‘이원론자’(물질과 마음을 극단적으로 가름)인 동시에 ‘관념론자’가 되는 것이다.
'모든 법은 마음으로부터 나온다'는 말의 '진실된 뜻'은 '마음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는 것이 아니라, '마음이 많은 것을 창조-재구성-해석 한다'는 정도로 받아들여야 한다. 말의 의미를 잘못 새겨 '마음이 모든 것을 창조한다'는 말 그대로의 뜻에 매달려 버리면 현실은 극단적으로 어그러져버린다.
사실 ‘모든 법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는 말 보다는, ‘물질이 없으면 마음 자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더욱 자명하다. 따라서 물질(육체, 삶, 실천)을 생각하지 않고 마음에만 매달려서 삶을 올바로 살 궁리를 한다는 것 자체가 언어도단이다. 이렇게 현실과 정신을 별개의 것으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를 잘 못 인식한 결과이다.
그 대다수는 ‘현실생활 속에서 겪었던 그 어떤 실질적인 문제가 빌미가 되어서 그로부터 빚어진 고통을 벗어나기 위한 ‘해탈’을 찾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진리를 찾아 나서려고 하는 목마름조차도 어쩌면 현실생활이 주는 구체적 억압으로부터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도피하려는 심리적 작용의 결과일 수도 있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현실-물질-몸’이 없었으면 그런 갈증조차 빚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따라서 인생사의 갖은 ‘법’을 만들어내는 것은 ‘마음’ 이기 이전에, 더욱 근본적으로 ‘몸’(물질)임을 알아야 한다. 무턱대고 마음의 문제만 잡고 늘어져봤자 진리가 그 안에 스며들 공간이 생기지 않는다.
하지만 이원론자이면서 관념론자인 상당수는 물질, 현실, 삶, 실천이 개입되지 않는 어떤 ‘순수한 정신상태’(플라톤의 이데아, 혹은 명분에만 매달렸던 성리학의 주리론 같은...)를 추구하고 있고, 이를 발견하는 것을 ‘견성’ ‘해탈’쯤 되는 것으로 이야기들 한다.
물론 ‘물질’ ‘현실’이 주는 집착, 욕망, 억압 등등의 문제가 마음을 혼란스럽게 하여 명증한 정신이 깨이기를 방해하기 때문에 마음의 문제에 집착하고자 하는 심정은 헤아리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물질에 대한 거부와 회의에 의해서 그 정 반대인 마음의 문제에만 안착해버리는 태도는 물질에 집착해서 사는 삶과 같은 또 하나의 극단론에 불과한 것이다.
마음의 문제 해결에 유난한 중요성을 두는 또 한 가지 이유는 ‘같은 현실’을 접하고도 마음이 다양한 반응이 생기다 보니 마치 마음이 그 모든 것을 만들어 내는 것 같은 혼란을 주기 때문인 이유가 있다. 하여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는 식의 ‘일반화의 오류’를 범한 후에 이를 마치 기정사실화 하는 극단적 관념론을 공고히 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에 말 그대로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는 말이 ‘참’이 되려면, 밥을 안 먹고도 마음의 만족만으로 생존할 수 있어야 하고, 독약을 먹고도 밥을 먹은 것으로 생각하면 아무렇지도 않게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음은 명백 한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다.
심지어
'마음이 생하는 까닭에 여러 가지 법이 생기고
[심생즉 종종법생(心生則 種種法生)]
마음이 멸하면 감과 분이 다르지 않네
[심멸즉 감분불이(心滅則 龕墳不二)]
삼계가 오직 마음이요, 모든 현상이 또한 식에 기초한다.
[삼계유심 만법유식(三界唯心 萬法唯識)]
마음밖에 아무 것도 없는데 무엇을 따로 구하랴!
[심외무법 호용별구(心外無法 胡用別求)]'
라는 ‘해골물을 깨달음’을 얻은 원효대사도 그 이후로 해골물만 마시고 살지 않았다.
이는 앞서 말했던 바대로 ‘마음이 모든 것을 만들어 낸다’는 생각 자체가 과도하게 일반화된 표현이기 때문이고, 기실은 물질이 그 기반에서 작용하기 때문이다.
이렇다면 우리는 극단적이고 과장된 표현을 곧이곧대로의 실재로 여겨 오직 마음의 문제에만 매달릴 것이 아니라, 어떻게 몸과 마음의 문제를 잘 통합해야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해야 한다. 이 두 요소가 현실생활 속에서 실존적으로 통합되어야 함은 두말할 나위 없다.
기실 현실에 대한 회의와 끊임없이 나고 사라지는 ‘영속적이지 못한 물질계’에 대한 불신은 결국 인간이 항구적인 (자기 보존적)속성을 지속할 수 있는 ‘마음’에 매달리게 만들어 낸 듯하다. 하지만 이러한 ‘순수한 마음’ ‘절대적 마음’을 추구하려는 욕망 자체에 근본적으로 사라질 것에 대한 공포, 불안, 도피 심리가 작용하고 있음을 명백히 인식해야 한다.
물리적 현실 세계는 영속성을 가진 듯이 여겨지는 정신에 비해서 언 듯 하잘 것이 없이 보이곤 한다. 나타났다 없어지고, 일어섰다 넘어지며, 성했다가 쇄하는 물질계의 작용은 기실 허무하게까지 보이기는 한다. 하지만, 물질계의 그 면면을 더 살펴 들어가면, 끊임없이 서로 상보, 상생, 조화를 이루며 순환과 교류의 역동을 이뤄내는 ‘공’의 바다임을 살피게 된다. 두 바퀴를 돌아야 정면이 나오는 이 모든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작은 단위 원자의 독특한 특성을 살펴본다면... (끈 이론 등에서 연구되고 있듯이) 세상 모든 만물이 확연히 구획 나누워진 물질들의 집합이 아니라, 미세한 끈이 하나로 연결된 독특한 체계를 하고 있음을 우리는 결코 ‘물질의 문제’가 ‘마음의 문제’보다 더 쉽게 생각하고 속단내릴 ‘하찮은 것’이 아님을 살피게 된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이원론과 관념론으로부터 벗어날 힘을 얻는다면, 그에 대한 통찰적 물음과 그에 따른 해답을 통해서 이에 적절한 실존적 삶을 사는 길을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기독교인들의 관념론(구원론)과 이원론은 불교-노장교를 숭배하는 이들의 관념론과 이원론과 근본적으로 다를 바 없음을 밝힌다. 오직 구원을 위해서만 교회 속에서 박수치고 울부짖을 뿐이지 현실생활 속에서는 자기 소유재산의 10분의 1도 내 놓지 않음(관념론)과 하늘과 땅을 명백히 갈라서 오직 ‘하늘나라에서의 천국’만을 염원하는 발상(이원론)은 더불어 극단적인 ‘이기주의’의 모습까지 살필 수 있게 한다. 기실 그들은 하나님을 올바로 믿기 위해서가 아니라, 보험 들어서 노후를 준비하려는 태도처럼 ‘영생’을 다만 준비하기 위해서 교회에 보험료를 납부하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그들(상당수)의 발상으로는 구체적인 사회 현실 속에서 나눔과 비움과 낮춤의 삶을 실현할 필요조차가 없는 것이다. 기독교든, 불교-노장교든 [충만한 감상과 관념적 도피]를 가르칠 뿐 ‘현실’과 ‘실천’을 가르치지 않는 종교는 그 하찮음이 비난 받아 마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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