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구도 실패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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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이동규 (211.♡.35.238) 댓글 1건 조회 6,240회 작성일 06-11-08 16:04본문
이제 나는 ‘생각 한 끗으로 얻은 평화’를 단연코 부정한다.
난 구도자였다. 그 과정에서 여러 사람을 만나고, 책을 읽고, 체험을 해왔다. 그 중에서 한 때 “추구하는 마음[=분별심]만 내려놓으니 여기가 바로 그 자리로구나!”하며 환희한 적이 있었다. 한 마음 내려놓고 나니 지금 이대로 그냥 살아도 아무 문제가 없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 달리 구해야 할 도(道)라는 게 전혀 필요치 않았다. 단지 현재의 나를 부정하고 미래의 이상적인 나를 꿈꾸는 자들이 도를 구하는 병[=도병(道病)]에 들뿐이었다.
어려웠던 선문답(禪問答)이나 선지식(善知識)들의 법문도 70%는 다 알아졌고, 마음의 짐이 내려져 삶은 대번 가벼워졌다. 대승경전들이나 ‘신심명(信心銘)’을 비롯한 선가의 명저(名著)들도 바로 이 소식을 전하고 있었다. 도는 정말 별것 아니었다. 누구 말마따나 ‘생각 한 끗’ 사이에 있었다. 여태 코를 쥐고 코를 찾고 있었으니 실은 코 잡기 보다 쉬운 게 도요, 깨달음이었다.
그런데 얼마 안 가 “정녕 이게 다인가?”하는 생각이 마음 한 구석에서 삐죽 싹을 내밀었다.
“이렇게 막 살아도 정말 좋은가? 안 것 같긴 한데 무엇이 달라졌지? 분명 무언가 모를 것이 있는 것은 또 왜인가? 왜 공안(公安)․법문(法文)들을 100% 알 수는 없는 거지? 선지식들이 아는 것을 왜 난 알 수가 없는가? 그들의 초범성(超凡性)이 왜 내게는 없는가? 이렇게 쉬운 도리라면 여태까지 부처님을 비롯한 위대한 스승들이 왜 계율과 수행이란 무거운 짐을 제자들에게 지워주면서 쉬지 말고 정진(精進)할 것을 당부했더란 말인가? 과연 내가 그들이 간 데까지 가기는 간 것일까?”
난 “이건 비교하는 마음이야. 부처는 부처고 나는 나일 뿐! 나는 나답게, 부처는 부처답게! 지금 모르는 것은 알아야 할 필요가 있을 때가 되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거야. 그건 내가 간섭하거나 걱정할 일이 아니야!”하고 그 의심의 싹을 짓밟아 버리곤 하였다. 그러나 어느새 줄기를 내고 자란 ‘불안과 의혹의 나무’는 나의 그 얄팍한 평화를 마침내 무너뜨려 버렸다. 나는 결국 ‘양심적’으로 나의 이 평화를 부정하였다. 이런 식으로 ‘생각 한 끗의 평화’와 ‘원초적 불안’ 사이의 내왕이 여러 차례 반복되었다.
이제 나는 ‘생각 한 끗으로 얻은 평화’를 단연코 부정한다. 그것은 처음엔 자기가 자기에게 속는 것이지만 나중에는 자기기만(自己欺瞞)으로 발전하여 마침내 보리심의 싹을 없애버리는 무서운 착각이다. ‘마음 그 자체[=본성(本性)]를 증오(證悟)하지 못하고, 에고의식이 문득 일으킨 한 생각[=알음알이]으로 한 가닥 마음의 쉼을 얻은 것[=해오(解悟)]으로는 절대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가 없다. 그것은 에고의식의 농간이며, 일시적인 ‘심리 치료술’에 불과하다. 그것은 구도자의 궁극적 목적인 일체고(一切苦)로부터의 해탈(解脫)과는 거리가 멀다.
이제 나에게는 심리안정술과 해탈정법(解脫正法) 사이의 구분이 명확하게 보인다. 아래에 내가 이에 관해 그동안 깨달은 바를 밝혀 여러 도반(道伴)님들께 나의 간절한 노파심을 전하고, 이제는 초발심(初發心)으로 다시 돌아가려 한다.
구도자라면 일체고로부터의 해탈에 도달하기 전엔 그 어디에서도 걸음을 멈추어선 안 될 것이다. 나는 구도자이지 심리적 평안을 추구하는 자가 아니다. 여기서 멈춘다면, 그것은, 나를 속이는 것이다. 이제 이 사실을 명확히 안 이상 나는 다시 해탈정도(解脫正道)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이제 나는 에고의식의 작용이 온전히 정지되었을 때라야 마음 그 자체인 진여본성(眞如本性)이 드러난다는 선사들의 가르침을 굳게 믿는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도 않은 채 ‘에고의식의 작용 말고 따로 진여본성이 없다.’라는 한 생각에 머리를 끄덕여댔다고 해서 그것이 실체적 해탈(解脫)을 가져다주지는 않는다.
나는 그동안 해오(解悟 : 알음알이) 에 빠져 허송세월 하였다.
개별자는 개별적 육체와 에고의식을 갖고 있다. 에고의식[=‘나’라는 인식주체에 대한 존재감, 개별의식]은 분리감[=‘분리의식’]을 동반한다. 이 분리감은, 그러나, ‘원초적 착각’이다. 왜냐하면 인식주체와 대상이 분리되기 이전의 존재 그 자체인 본성(本性)으로부터의 분리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에고의식과 본성과의 관계는 파도와 바다에 비유할 수 있다. 파도[=에고의식]는 분리 독립된 실체가 아니며 바다[=본성]의 일시적 작용이다. 그것은 바다라는 전체의 놀이에서 개체로 분(粉)한 전체의 한 극중 역할일 뿐이다. ‘바다[=본성]의 춤’이라는 대 연극이 공연되기 위해서는 파도[=에고의식]가 바다[=본성]인 자신을 망각해야만 하는 신비가 전제된다.
우리는 이 신비를 풀 수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다[=본성]를 알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식주체와 대상이 분리되기 이전이므로 결코 에고의식의 인식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본성은 무어라고 표현해도 틀리며, 단지 “○○인 것은 아니다.”라고 부정적으로만 표현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공(空)’ 또는 ‘무(無)’라는 표현조차도 실은 옳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고인(古人)들은 바다가 파도로 춤추는 이 신비를 다만 ‘진공묘유(眞空妙有)’라고만 언급하고 있다.
에고의식은 분리착각에 의해 ‘원초적 불안 상태’에 놓여있다. 그리하여 에고는 자신의 생존을 확보하기 위한 안전판을 마련해두려는 욕망을 끊임없이 분출한다. 재산, 건강, 사랑, 지위, 명예, 권력, 각종 공동체[=가족, 민족, 국가 등] 등은 바로 에고의 욕망이 확보해두려는 안전판들이다. 에고의식은 최종적으로 이 안전판들이 필요한 이유를 설명해주는 내적 사고체계를 만들게 되는데 이것이 바로 신념체계[=이데올로기]이다. 신념체계는 이 안전판들을 지탱해주는 가장 근본적인 지지대(支持臺)다.
개별자들은 생존의 이해관계에 따라 필연적으로 서로 충돌한다. 내 입에 들어가는 것과 네 입에 들어가는 것이 다르고, 내 사랑과 네 사랑, 나의 조국과 너의 조국, 나의 신념체계와 너의 신념체계가 다르니 충돌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므로 에고의식이 주도하는 이 상대적인 세계에서 진정한 사랑과 평화는 있을 수 없다.
세상의 정의와 우정과 사랑은 다 불완전하다. 더 좋은 것 더 안전한 것이 오면 친구고, 아내고, 자식이고, 선후배가 없다. 모두가 흔들리게 되어있다. “나는 진실로 너를 사랑한다.”라고 하는 자에게 그의 안전을 위협할 정도의 구원을 한번 청해 보라. 그러면 즉시 그 사랑이 흔들리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연합과 사랑’은 오직 자신의 안전을 위협하지 않을 정도의 한계 내에서만 가능하다. 에고의식이 주도하는 이 세상의 내면적 실상은 한마디로 ‘만인(萬人)의 만인(萬人)에 대한 투쟁’이다. 그것은 사랑과 용서를 부르짖는 종교단체에서의 주도권 싸움을 보더라도 명백하게 드러나는 사실이다. 에고의식의 본질이 그러하기 때문에 그것은 어쩔 수 없다.
구도자는 본능적으로 이 에고의식이 바로 고통의 뿌리임을 알기 때문에 이것과 씨름한다. 그리하여 “대체 ‘나’는 무엇인가?”를 묻게 되는 것이다.
이 에고의식의 주도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구도자는 이 개별자로서의 의식을 넘어 존재 자체[=본성]를 보려고 시도하게 된다. 구도자가 “‘나는 누구인가?”라고 물을 때 그것은 바로 ’나‘라는 의식을 넘어 “도대체 존재자체가 무엇인가?”를 묻고 있는 것이다. 구도자는 이미 자신과 똑 같은 동기를 가지고, 고된 수행의 과정을 거쳐 먼저 이 문제를 해결한 스승들이 있음을 보고 그를 믿는다. 그리하여 그는 스승의 가르침에 대한 절대적 신뢰의 바탕 위에서 그 가르침을 따라 수행하여 영원한 평화에 도달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에고의식을 넘어 존재 자체에 가 닿는다는 말은 인생사 중 가장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곧 에고의식[=통상적으로 알고 있는 ‘나’]의 죽음 내지는 주도권 상실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에고의식은 이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술수를 부려 한사코 이를 방해하려 한다. 해오(解悟)를 깨달음으로 착각하도록 만드는 것도 바로 이 에고의식이 벌이는 농간 중의 하나이다. 그러므로 ‘참선경어(參禪警語)’나 ‘동어서화(東語西話)’ 등 선사들의 어록집에는 해오라는 함정에 대한 경고가 수없이 나와 있는 것이다.
에고의식이 해오를 깨달음으로 착각하게 만듦으로써 본성을 보지 못하게 하는 교묘한 술수의 예를 든다면 아래와 같다. 구도자가 ‘생각 한 끗’으로 이런 착각에 빠지면 곧 바로 일체의 수행을 포기해버리는 우를 범하게 되는 것이다.
“번뇌(煩惱)를 일으키는 이 에고의식의 작용[=파도]이 이미 본성[=바다] 으로부터 나온 것 아닌가? 바다가 파도를 떠나 따로 있는 게 아닌데 왜 다른 곳에서 바다를 구해야 하는가? 일체 존재가 이미 바다인데 다시 바다를 구하겠다고 나선다면 어디서 바다를 볼 수가 있겠는가? 이것은 이미 제 코를 잡고 있으면서 코를 찾겠다는 어리석음과 다를 바 없는 것이 아닌가? 그러므로 도를 구하는 자는 절대 도를 얻을 수 없는 기막힌 비밀이 여기에 있는 것이로구나. 경전에 ‘번뇌가 곧 보리이다.’[=번뇌즉보리(煩惱卽菩提)]라고 설해두신 것도 바로 이 까닭이로다. 아, 이 엄청난 비밀이여! 어리석은 수행자들이 어찌 이것을 알겠는가?”
이리하여 그들은 평생을 구도에 바치는 수행자들을 바보로 여기기 시작한다. 그들이 보기에는 수행(修行)이란 정말 바보들의 행진이요, 코미디 중에 코미디인 것이다. 그리고는 이렇게 말하며 자신들의 행운을 즐긴다.
“딱한 사람들. 그러나 이 코앞의 진리를 아는 것도 다 시절인연이 익어야만 알 수가 있는 법이지!”
한 땐 내가 그랬으니까 나는 이 형편을 너무 잘 안다. 그러나 내가 해오를 깨달음으로 착각하고 있을 때에도 도무지 알 수 없는 것들이 있었으니 바로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여러분에게도 이런 의심이 행여 남아 있다면 반드시 해오를 의심해야 한다. 다 아시겠지만 사실 나는 여러분의 경지를 의심한다.
부처님은 끝까지 수행의 모범을 보인 분이다.
첫째, 나는 싯달다가 깨달음을 얻어 붓다가 된 이후에도 규칙적으로 선정(禪定)에 들고, 제자들에게도 엄한 계율과 수행을 강조하면서 나머지 생애도 모범적인 구도자의 모습으로 사신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냥 원래 중생(衆生)인 적이 없었던 이 도리만 잘 설명해주면 알아서들 즐겁게 살아갈 터인데 그 무슨 개나발 같은 선정(禪定)과 그 무슨 죽을 놈의 계율과 수행의 단계 같은 것들을 설하여 이 장난꾸러기 부처님들의 무궁한 자유를 억압했더란 말인가? 그것은 너무나 끔찍하고도 잔인한 가르침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제 나는 분명하게 알 것 같다. 그것은, 어느 해오자가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부처님께서 그 시대 중생들의 근기(根機)가 둔했기 때문에 둘러 가는 고된 수행의 길을 제시한 게 결코 아니었다. 그것은 해탈을 위한 필수 불가결의 길이었던 것이다.
보라. 처음 싯달다는 에고의식들이 낸 욕망들이 분투하는 화택(火宅)과 같은 삶의 현장을 고통이라고 직관하였다. 그는 바로 이런 ‘원초적 고통’으로부터의 해탈(解脫)을 목표로 하였기에 욕망의 뿌리인 에고의식은 반드시 넘어가야 할 숙제였던 것이다. 그는 여러 명상법을 전전하다가 마침내 에고의식의 작용을 무력화시키는 효과적인 수행법인 위빠싸나를 통해 에고의식 저 너머의 삼매(三昧)로 들어가 마침내 무상등정각(無上正等覺)을 얻음으로써 해탈도(解脫道)를 성취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 최종적인 삼매는 에고의식 저 너머에 있는 본성에의 체험이었다. 이 최종적인 삼매에서는 실로 체험자(體驗者)도 체험되어지는 것도 있을 수 없으나, 그것은 자증(自證) 자명(自明)함이 너무나 분명한 체험 아닌 체험인 것이다. 이것을 증험(證驗) 또는 증오(證悟)라고 한다. 선사들은 이처럼 존재자체와 계합(契合)하는 증오와 생각 한 끗으로 심리적 평화를 체험하는 해오를 엄밀하게 구별하고 있다.
경전에는 수행단계, 즉 의식의 깊이에 따른 무수한 삼매체험들이 설해지고 있다. 수행이 깊어갈수록 에고의식의 작용은 소멸되어 간다. 소멸된 정도에 따라 체험하는 삼매는 달라진다. 그러나 에고의식의 작용이 미세하게라도 남아 있다면 그것은 완전한 삼매가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체험자’와 ‘체험의 세계’가 있는 ‘경지’이다. 그러다가 삼매가 깊어져서 마지막 상념작용마저 완전히 정지되었을 때 즉 일념도 없이 다만 성성(惺惺)하게 깨어있는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큰스님들은 “이런 상태로 3일이 지나도 도를 못 깨치면 내 목을 베어가라.”라고 장담하신다.- 반드시 체험자도 체험대상도 사라지는 때가 온다. 이것은 늘 양손으로 손뼉을 치다가 손바닥 하나를 내리게 되면 나머지 한 손바닥을 오래 들고 있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체험자가 없으니 그것은 체험이 아니며, 서 있는 자가 없으니 ‘경지’라는 표현도 성립되지 않는다. 그리하여 고인은 이것을 다만 존재자체와의 ‘계합(契合)’, ‘자증자명(自證自明)’, ‘내외명철(內外明徹)’이라고 표현했던 것이다.
그러나 해오자들은 이러한 수행의 단계를 모른다. 보는 자만 남아있는 깊은 삼매에 가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이런 단계들을 설하고 있는 경전들을 경원시한다. 이런 해오자들이 수행의 단계를 도매금으로 부정하고 ‘생각 한 끗’으로 얻은 심리적 해방감을 ‘위 없는 깨달음’이라고 호언하면서 수행자들을 비웃는 것은 정말 말도 안 되는 망발이다.
싯달다는 진여본성을 ‘증험’함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 부증불감(不增不減)이라고 일컬어지는 자리이다. 진여본성에 닿으면 허망한 에고의식의 뿌리가 잘린다. 이제 그의 에고는 생명을 잃었다. 남아있는 에고의 모습은 다만 흔적일 뿐이다. 그의 에고의식은 이제 집착을 일으킬만한 힘을 잃었다. 그리하여 그는 더 이상 욕망에 끄달리지 않는 대자유인(大自由人)이 된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를 붓다라고 부르는 소이연(所以然)이다. 그러므로 해탈 전의 싯달다와 해탈 후의 붓다는 완전히 다르다. 그는 욕망의 끄달림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다. 이 욕망의 끄달림으로부터의 해방 여부가 바로 붓다와 중생을 가르는 선이다.
그러나 해오자에게는 이런 변화가 없다. 그는 다만 ‘심리적’으로, ‘생각 한 끗’으로 가벼워졌을 뿐이다. 그의 에고의식은 여전히 남아 있다. 그러므로 그는 여전히 욕망에 끄달리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것은 문제될 것 없어. 너무나 자연스런 생명현상일 뿐이야.”라고 문제 삼지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심리적으로 ‘오리발’을 내미는 행위이다. 현 ‘도덕경 다시 읽기’ 그룹의 원조였던 한 해오자 그룹에서 스스로 그 그룹의 이름을 ‘오리발교회’라고 했던 까닭이 바로 이것이다. 그들은 더 이상 오리발을 안 내밀어도 될 때까지 줄기차게 오리발을 내밀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온전하지 않다고 믿었던 오랜 과거의 습 때문에 이런 행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니까 이게 바로 ‘보림(保任)’인 셈이었다. 이 어리석음이라니!
그러나 에고의식이 남아있는 한 “이거 내가 과연 끝까지 가기는 간 것인가?”하는 미세불안은 끊임없이 올라온다. 그래서 해오자들에게는 반드시 암흑이 찾아오는 현상이 생긴다. 왜냐하면 에고의식이 창조한 평화는 불완전한 평화이기 때문이다. 여러분에게 선사들의 경고를 다시 한번 전해드리거니와 그들은 해오자들이 ‘새 하늘과 새 땅’이라고 대단하게 평가하는 이 평화를 경안(輕安)이라 하여 철저히 경계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선사(禪師)들은 왜 끝까지 화두(話頭)를 챙기라고 하는가?
둘째, 해오 이후 선사들의 법문을 읽어보니 바로 내가 서 있는 경지와 별로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그 선사들이 “이것이 바로 그것이다.”라는 법문은 속 시원히 곧잘 하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화두 챙기기를 간절히 독려하는 데 대해서는 그만 심사가 뒤틀리는 것이었다. “아 그냥 살라하면 될 일을 그 무슨 죽을 놈의 화두(話頭) 오랏줄로 수행자들의 삶을 묶으려들어?” 그래서 우리끼리는 곧잘 “이 양반들 잘 나가다가는 꼭 이렇게 삼천포로 빠진단 말이야.”하면서 낄낄거렸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망발인지를 난 거의 10년이 지난 후에야 알게 되었다. 증오자(證悟者) 역시 ‘번뇌가 곧 보리’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실제로 본성에 닿은 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본성 맛도 못 본 자가 머리만 굴려서 하는 소리와는 전혀 다르다. 그의 에고는 뿌리가 잘렸으며, 과거의 습(習)들은 이제 시들어 갈 운명에 놓여 있다. 그러나 이것들은 여전히 관리할 필요가 있기 때문에 선사들은 죽을 때까지 수행자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이다.
증오자(證悟]者)의 중심은 언제나 본성에 있다. 그는 이미 중심이동을 해버렸다. 파도는 여전히 작용하지만 중심은 언제나 심해에 있으니 파도에 더 이상 끄달리지 않는다. 바로 이것이 ‘여여(如如)’ 또는 ‘동중정(動中靜)’이라고 하는 증오자의 살림살이이다.
이에 비해 해오자는 곧잘 경전(經典)이나 법어집(法語集)에서 해오와 일치하는 내용들을 찾아내어 위안을 얻기에 바쁘다. 해오자들은 곧잘 최상승법문(最上乘法文)과 동일한 법문을 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들의 중심은 여전히 에고의식에 있다. 그리하여 끊임없이 상념에 끄달린다. 그러면서도 그들은 “핵심은 분별심(分別心)을 내리는 것이며, 이것만 되면 상념은 전혀 문제가 안 된다.”라고 말한다.
“분별심을 내려놓기만 하면 더 수행할 게 없다.”는 해오자의 말은 맞다. 그러나 에고의식을 돌파하지 않고는 진실로 분별심을 내릴 수가 없다. ‘생각 한 끝’으로는 결코 분별심이 내려지지 않는 게 문제인 것이다. 자신에게 진실한 해오자라면 이 사실을 솔직하게 인정해야 한다. 그것은 ‘오리발’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다. 증오자(證悟者)와 해오자(解悟者)의 살림살이는 근본적으로 다름을 알아야 한다.
그들이 아는 맛을 내가 어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셋째,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경전과 화두, 그리고 법문들이 상당부분 이해되는데도 100%는 이해되지 않은 게 아무래도 이상했다. 기분이 좋을 때는 “그런 걸 모른다고 나의 부처성품이 어딜 가기라도 하는가? 몰라서 의심이 드는 것도 곧 나의 부처성품이다.”라고 변명하면 별 문제가 되지 않다가도 풀이 좀 죽어지면 그것은 곧 바로 불안이 되었다.
“어째서 깨달은 이들이 이심전심(以心傳心)으로 통하는 바를 나는 알 수가 없는가? 본성의 맛은 같을 텐데 그들이 아는 맛을 내가 어찌 모를 수가 있단 말인가? 내가 과연 그들이 맛본 것을 맛보기나 한 것일까?”
하고.
이제 나는 선사(禪師)들이 왜 문법자(問法者)에게 동정일여(動靜一如)[=깨어서 생활할 때도 늘 깨어있음], 몽중일여(夢中一如)[=꿈을 꾸면서도 늘 깨어있음], 숙면일여(熟眠一如)[=꿈도 없는 깊은 잠 속에서도 늘 깨어있음]를 점검하는지 조금 이해가 된다.
바다의 깊이가 다른 만큼 삼매(三昧)[=의식 상태]의 경지도 다르다. 그래서 무슨 각(覺), 무슨 각이 있고, 최종적으로는 구경각(究竟覺)[=최종적인 깨달음]이란 게 있다. 그렇다. 삼매를 체험했다면 일단 각자(覺者)이긴 하다. 그러나 그는 여전히 ‘경지’에 머물러 있으므로 대자유인은 아니다. 오직 구경각, 즉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최고의 바른 깨달음]을 증득한 자라야 진정한 붓다이다. 이것은 깊은 삼매에 든 자라 할지라도 삼매에서 깨어나면, 에고의식의 뿌리가 아직 남아 있으므로, 미세불안(微細不安)에 시달릴 수가 있다는 말이다.
한 화두[=풀리면 깨달음을 얻는다는 선가의 문제]는 이해가 되는데 다른 화두는 꽉 막히고, 이 경전은 쉽게 이해되는데 저 경전은 도무지 모르는 현상이 생기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진실한 선사들은 “내가 진정 안 것인가?”하면서 한 화두를 돌파하고도 또 다른 화두를 들고는 죽을 때까지 가기도 한다. 이처럼 에고의식의 밑창을 뚫고 들어가서 본성에 닿기는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다. 구도자들이 죽을 때까지 수행을 계속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지 해오자들이 비웃듯 그들이 바보라서 그런 것이 아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오직 ‘생각 한 끗’으로 해오한 자가 이들을 비웃는다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인 것이다. 선사들이 누누이 경고해왔음에도 불구하고, 해오자는 자신도 속고 남도 속이면서 봉사가 봉사를 인도하는 업을 짓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죽음이란 시간의 심판대에 서게 되면 그는 자신이 진정 깨달았는가를 되묻게 되는 것이다.
본성에 닿아 중심이 늘 깊은 바다에 이동해 있는 자는 죽음이 와도 정신이 흩어 지지 않는다. 그는 언제나 주시자(注視者), 즉 깨어있는 사람이다. 죽음이란 현상을 통과할 때도 그는 그 과정을 끝까지 주시한다. 나는 실제로 대화 중이나 꿈속에서도 주시가 계속된다는 관법수행자를 만난 적이 있다. 그가 잠자는 모습을 몰래 지켜보니 과연 흐트러짐이 없는 것도 알 수가 있었다. 아직 갈 길이 먼 수행자 수준에서도 이러할진대 하물며 본성에 계합된 스승의 경우야 어떠하겠는가?
선가(禪家)에서는 예로부터 불생불멸(不生不滅)을 넘어 능생능멸(能生能滅)[=태어나고 죽고를 마음대로 함]을 얘기해오고 있다. 생각해보라. 죽음의 과정에서 끝까지 주시자로 남아 있을 수 없다면 어떻게 자유롭게 화신(化身)[=원하는 몸을 만들어 냄]할 수가 있겠는가?
반면 중심이 에고의식에 있는 해오자는 죽음이 찾아올 때 그 끄달림이 최고조에 달한다. 그리하여 의심과 불안, 혼수(昏睡)[=몽롱함]와 산란(散亂)[=잡생각이 들끓음] 속에서 제 정신을 잃고 생을 마감하게 되기 십상이다. 그에게는 수행으로 쌓아 둔 선정력(禪定力), 즉 주시력(注視力)이 없다. 그러므로 막판에는 그 좋던 유유자적(悠悠自適)함도 다 잃어버리고, 혼비백산하여 허우적거리다 ‘죽음에 잡혀서’ 간다. 어쩌겠는가? 그는 그가 그토록 좋아하는 자연의 이법(理法)에 따라 그만 윤회의 수레바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중생(衆生)인 해오자의 최후이다. 그의 경지는 막판에 이렇게 뾰록이 난다. 적어도 죽음의 순간에 제 오가는 것을 끝까지 지켜볼 수가 없다면 그는 중심이 본성에 있지 못한 자가 분명하다. 그는 더 수행해야만 할 자이다. 진실은 속일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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맹인님의 댓글
맹인 아이피 (210.♡.88.173) 작성일지극히 맞는 말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