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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원리에 대한 깨달음]과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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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24.♡.71.69) 댓글 6건 조회 5,795회 작성일 06-11-26 2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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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의 진실’을 알기 위해서는 단 한 발 짝도 문 앞을 나설 필요도 없고, 석가와 예수의 이야기에도 귀 기울을 필요가 없다. ‘지금’ ‘여기’에 몰입이 아닌 몰입을 하면서 자기 자신의 내면을 진지하게 통찰 하면 된다. 그리하다보면 자신의 욕망과 가치, 주관성, 개념들이 얼마나 허구적이면서도 공허한 기반에 그 뿌리가 박혀있는지를 알게 되고, 기존의 집착적이고 아집적인 자신의 삶에 대한 객관적인 통찰과 함께 자신의 삶을 덤덤히 조명할 수 있는 시야가 만들어진다.


물론 그러한 ‘존재의 진실’을 알았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깨달음’은 ‘부족한 밥을 참아 견디게는 해 줄 수 있어도’ 없는 밥을 만들어 내지는 못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밥’을 만들어 내고, ‘옷’을 취하며, ‘잠자리’를 얻기 위한 노력, 타인과 관계하고, 사회에 자연 속에서의 자신의 위치를 뿌리박게 하는 과정에서 ‘삶’과 ‘인생’의 문제가 발생하는데 이는 ‘존재의 진실’을 깨닫는 ‘과정’과 ‘작용’과는 전혀 다른 그것을 개인에게 제공한다.


전자- 즉 ‘존재의 진실’을 깨닫는 것에만 치중하고 후자- 즉 ‘삶-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무심한 이들은 주로 ‘선불교’ 계통의 사람들이 취하는 삶의 방식이고, 후자쪽에까지 관심을 갖는 이들은 주로 ‘대승불교’ ‘기독교’ ‘힌두교’적인 믿음을 가진 이들의 삶의 방식이다.


‘존재의 진실’에만 집중하는 이들은 인생 전반이 ‘공허하다’고 믿고 살아 갈 수 밖에 없는데 그 이유는 (그것이 사실인지 아닌지와는 별도로) ‘존재의 문제’에만 집중하는 것을 ‘최선’이라고 여기고 ‘삶-인생’의 문제를 공허하다고 여기는 ‘전제’를 하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연역되는 결과이다.


그것은 ‘인생은 슬픈 것’이라고 여기는 이들이 그 명제 자체를 인생을 해석하는 주요 전제로 삼기 때문에 그들의 인생이 슬플 수 밖에 없는 것과 동일한 그것이다.


문제는 우리가 내면에서 발견되는 통찰에 너무 집착해서 그러한 [존재의 원리]를 올바로 깨닫는 것이 마치 없는 밥을 생기게 하는 것이라고 까지 곡해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정신적인 성찰과 물리적인 필요는 전혀 다른 차원에서 수레를 움직이게 만드는 두개의 바퀴이고, 아무리 존재의 원리를 처절하게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직접 나가서 문을 열고 보지 않으면 대문 밖에 무엇이 떨어져 있는지를 우리는 알 수 없음의 사실을 알아야 한다.


많은 이들은 삶이 ‘공허’하다고들 말하고 모든 ‘법’이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고 한다.

게중에 그러한 ‘문법’에 철저히 매몰된 이들은 그와 조금이라도 다른 이야기가 들리워질 때는 그 ‘공허의 문법’을 갖다 대면서 상대방의 입에서 허무의 한숨이 뿜어져 나올 수 있게 종용한다.


하지만, 그러한 ‘공허의 강조’ ‘마음의 작용의 중요성’을 설파한 것은 과도한 욕망과 아집이 만들어내는 극단적인 갈등과 분열 그리고 번뇌와 고통을 통제할 수 있는 마음의 작용을 촉발시키기 위해 현자들이 필요한 때에 특별한 ‘뇌관’을 건들어서 주의를 환기시킨 것일 뿐임을 알아야 한다.


‘모든 법이 마음으로부터 생겨난다’고 얘기했던 세상의 그 어떤 현자도 ‘밥과 물’을 눈앞에 놓고 ‘이것은 내 마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다’라고 하면서 그것의 섭취를 거부한 이가 없음을 알아야 한다. 그 어떤 현자들도 그리 극단적인 ‘허무주의’를 설파한 적이 없다.


하지만 작금의 암울한 시대에 사람들을 유혹하는 회의주의와 허무주의의 수렁이 너무 깊은 듯하다. 너무도 많은 이들이 그 ‘공’에만 집착해서 ‘인간과 자연’의 문제에 대한 처절하리만큼 무지하고 무실천한 입장을 정당화 시키고 있는 듯 하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대해서 관심을 갖고, 어느 정도 수준에서 그 실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면서, ‘존재의 원리’를 들여다 보기에만 집착하는 삶이 아닌 그야말로 삶-인생의 문제에 대해서 전반적으로 조명하면서 ‘잘’ 살아갈 수 있겠는가?


물론 그 '정답‘과 ’기준‘은 없다. 하지만 먹은 만큼 배설을 해야 몸의 균형을 이루는 것과 같은 차원에서 ’정신적으로‘도 ’자신이 요구하는 만큼 자신과 작용하는 ‘타인’과 ‘자연’의 요구에 부응해 주는 것이 옳지 않을까?


즉, 내가 ‘밥’을 먹고 ‘옷’을 중요시하며, ‘질병’을 멀리하고, ‘지붕이 있는 집’에 거하고 싶은 만큼 ‘타인의 그것’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그로인해서 발생하는 자연의 고갈의 문제에까지 고민을 해야하지 않을까?


이런 고민까지 실현하기 위해서는 많은 ‘집중’과 ‘훈련’ ‘고뇌’ ‘양보’ ‘실천’이 필요하다.

이는 ‘존재의 원리’를 알아내는 것과는 전혀 차원이 다른 관점에서의 에너지의 투입을 필요로 한다. ‘삶-인생’의 문제가 어려운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리라.


참으로 이율 배반적인 사실은 삶이 ‘공허’라고 주장하면서 ‘모든 법은 마음으로부터 생긴다’는 식의 주장을 하며 이웃과 환경문제에 무관심, 무실천한 이들의 상당부분이 실지로는 물질에 대해 고도로 집착을 하고 있고 자기통찰이 허술하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이웃과 환경문제에 대한 무관심 무실천을 합리화 하면서도 하루 세끼 자신의 입 속에 들어가는 밥은 거르지 않는다.

자신의 입에 들어갈 밥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아예 의심의 필요성이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고 늘 실천적으로 그 물질적 필요성과 실체를 경험하면서, 다른 이웃이 굶주리고, 환경이 파괴되는 문제에 대해서는 ‘모든 것이 공허이다’라고 읊조리곤 한다. 그렇담 그들의 그러한 ‘담대함’?은 어디로부터 나오는 것일까?


그것은 단 하나의 원인에 기인한다. 바로 ‘무지’이다.


자기 자신을 객관적으로 삶-인생의 지반위에 올려놓고 ‘인류’와 ‘자연’이 엮어져 있는 역학관계를 읽어내지도 못하고(읽어낼 필요조차를 느끼지 못하고), 극단적인 관념론 수준에서 ‘존재의 원리’에만 집중해 있는 이들.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밥’을 다른 사람이 구경도 못 맡는 현실이 어떤 것인지를 느끼지 못 할 만큼 ‘무감각’한 이들의 그것을 ‘무지’말고 다른 것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물론 그런 이들 중에서는 선문답에 능하여 사람들에게 신선한 자극을 주며, 기를 잘 끌어 모으는 내공에 강한 도사들이 그 능력을 종종 선심성으로 배풀며 사람들의 칭송을 받을 수는 있다. 하지만 그게 도대체 뭔가? 근본적으로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 없는 상황에서의 그러한 즉흥적인 배풂은 그야 말로 ‘쇼’아닌가???


불교에서는 ‘선’과 ‘덕’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잘 못알고 있는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불쌍한 사람들 돕는다’는 수준의 그것이 아니다. ‘선’과 ‘덕’은 한국적인 정서로 알고 있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닌, 정말로 진지한 ‘존재에 대한 원리’를 바탕으로 ‘삶-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통찰’이다.


그 ‘선’의 행위의 시작은 내가 배고푼 만큼 다른 이들의 배고픔을 알고, 내가 아픈 만큼 다른 이들의 아픔을 알아서 그들의 아픔에 반응하는 것... 그래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아 이를 하나로 보둠을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힘쓰는 것... 그 과정에서 내 욕망과 아집을 자연스럽게 털어 낼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의 행위이다.

이렇게 욕망과 아집을 털어 내면 업보 자체가 존재하던 기반이 무너지기 때문에 ‘선’을 많이 쌓으면 윤회가 끊긴다는 원리가 당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삶-인생’의 원리에 대한 이해에 다다르지 못하고, 오직 ‘관념적’으로만 ‘존재의 원리’에만 집착하여 ‘도놀이’에만 매몰된 이들은 ‘모든 것이 공이다’고 주장하는 연장선상에서 ‘선’의 의미 자체가 없다고 떠벌리고 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인간’과 ‘자연’에 대한 진지한 관심을 가질 필요성조차 느끼지 못함으로 자아를 확대하고 자아를 해체할 수 있는 기회 자체를 얻지 못함으로 인해서 근본적으로 자신의 아집을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지 못한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의 아집을 벗어났다는 주장을 할 수는 있다.


‘보이는 것’ ‘감성에 와 닿는 것’만 믿는 한국인의 특성은 자기 정신의 내면을 집중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 참선을 잘하는 사람, 기를 많이 발산하는 사람 흔히 말하는 도인만을 높게 취급한다.


하지만 다시 말해 무엇하랴? 그들은 자신이 향유하고 필요로 하는 많은 것들을 ‘당연스레'사용하면서 다른 사람의 필요에 대해서는 무심하다는 것 그것 하나로도 자기 자신의 껍질을 벗어나지 못했음을!!!


존재의 원리를 깨달았다고 하더라도 우리에게는 늘 ‘비루한 현실’이 그 앞에 놓여져 있고, ‘다른 이들의 그것’ 역시 다를 바 없음을 아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관념적인 허상을 넘어서 비루한 현실에 맞서는 것... 더불어 내가 포함되어 있는 인간과 자연의 문제에 당당히 직면하고 관계하는 것... 즉 ‘삶-인생’의 문제에 대하여 회피하지 않는 것... 그것이 바로 우리가 가야할 길이 아닐까...


삶에 정답이라는 것은 있을 수 없지만, 그러한 길은 최소한 ‘그릇되고’ ‘왜곡된’ 길은 아니지 않을까...


댓글목록

선장님의 댓글

선장 아이피 (222.♡.190.158) 작성일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연상하게 만드네요.
물론 둥글님이 소유적인간형이라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님뿐 아니라 두 인간형의 한끝을 극단적으로 선택해 살아가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님의 아이디처럼 둥글둥글하게 자신속에 '소유와 존재'가 믹스되어 살아가겠죠.
(노파심으로 말씀드리는데 에리히프롬에 둥글님을 끼워 맞추려는 것은 아닙니다. 서두에 말씀드렸듯 단지 연상작용이 드는 것뿐입니다. )
저 개인적으로도 에리히프롬의 이런 나누기는 공감하지 않습니다.
다만, 존재의 기반에서라야만 소유의 문제도 더 잘 풀릴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둥글님 또한

{불교에서는 ‘선’과 ‘덕’을 강조한다. 그것은 우리가 흔히 잘 못알고 있는 통속적인 의미에서의 ‘불쌍한 사람들 돕는다’는 수준의 그것이 아니다. ‘선’과 ‘덕’은 한국적인 정서로 알고 있는 그런 수준의 것이 아닌, 정말로 진지한 ‘존재에 대한 원리’를 바탕으로 ‘삶-인생’의 문제를 해결해 나갈 때 얻을 수 있는 최고의 ‘통찰’이다.

그 ‘선’의 행위의 시작은 내가 배고푼 만큼 다른 이들의 배고픔을 알고, 내가 아픈 만큼 다른 이들의 아픔을 알아서 그들의 아픔에 반응하는 것... 그래서 너와 내가 둘이 아님을 알아 이를 하나로 보둠을 길을 마련하기 위해서 힘쓰는 것... 그 과정에서 내 욕망과 아집을 자연스럽게 털어 낼 수 밖에 없는 것 그것이 바로 ‘선’의 행위이다.}

이 말씀에서 존재원리를 바탕으로 한 '선의 행위'를 강조하였듯이.
존재를 탐구하는 일은 '선'한 일로 향하는 '과정'이라고 한다해도
-님의 말씀에 비추면 - 큰 비약은 아닐것입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 할것이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이 누구인가 물을 것이며
자신이 누구인가 묻는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까라고 생각하며 산답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24.♡.71.69) 작성일

선장님의 말씀 공감합니다.
[존재의 기반에서라야만 소유의 문제도 더 잘 풀릴 수 있지 않을까]라는 말씀은 의심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도 '존재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기본적으로 깔고 '물질의 필요성이 실재하는 삶의 문제'에 대한 관심까지를 가져야 하지 않는가 하는 말씀을 드린 것이죠.

다만 '존재의 문제'에만 관심을 갖는 듯이 보이는 이들(그러면서 삶의 문제에 대한 명제에 대해서는 배척하는 이들)은 실지로 '물질과 소유'의 문제에 깊숙히 개입해 있기 때문에 그러한 이율배반성을 보이면서 결과적으로 정신적인 균형(?)을 잃지 않는가 하는 말씀을 올렸습니다. 

[자기가 무엇을 해야할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자신이 누군가인가 물을 것이며
자신이 누구인가 묻는 사람도 자신이 무엇을 해야할까라고 생각하며 산다] 는 말씀도 참으로 통찰적입니다.

조금 더 이해를 덧붙여서 그러한 통찰을 바탕으로 자아의 경계를 허물어 트리는 과정에 '너와 내가 하나임'의 현실을 직관하고(다른 표현으로 모두가 '공'인 현실을 직관하고) 내가 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다른 표현으로 내가 할수 있는 일이 없다는 사실을 직시할 때) 비로소 존재의 원리를 풀어내는 한가닥 실마리가 잡히면서, 비루한 자신을 가끔씩 직시해야하는 '삶의 문제'가 본격적으로 대두되지 않는가 합니다.
이때 비로소 '물질'과 '실천'의 중요성이 고개를 드는 것이죠. (물론 이는 물질과 실천의 문제에 집착하고 그에 휘어 잡혀야 한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것을 올바로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을 갖는다는 의미입니다. 아니 운영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지배적'이고 '권위적'인 표현도 적절하지 않습니다. '올바로 관계한다'는 말이 가장 적절하겠군요.)

(이러한 저의 말씀이 옳은 것인지 아닌지는 모르지만) 이정도 이해와 관점이 잡힌다면
'생각하는대로 살지 않으면 사는대로 생각하게 된다!' 는 한 시인이 던진 명제가 끝없이 영혼에 울리여 집니다.
'존재의 원리'를 체득한 이가 그 원리가 제대로 된 것인지 아닌지를 실험할 수 있는 방법은 그의 '삶'의 공간이 아닌 곳에서는 가능하지 않기 때문이죠.
 
항구적으로 자기지속성을 가질 수 없게끔 운명지워진... 부는 바람에 끝없이 흔들리는 갈대와 같은 인간존재에게 있어서 이 명제는 인간이 필연적으로 매 삶의 순간에서 자신을 다잡을 수 밖에 없는 '실존성'의 본질을 잘 드러낸 그것이라 생각합니다.

단지 우리 각자는 그것을 실험하는 장소일 뿐이고, 그 실험의 방법에는 정답이라는 것이 없어서 각자의 관점과 감성과 기질과 취향에 따라서 그것을 실험하고 결과를 대하곤 하죠.

이렇기 때문에 진실을 대면하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홀로서야할' 우리 각자는
'공'에서 왔다가 '공'으로 치닫는 존재의 비밀을 파헤쳐야 하는 고독한 삶을 짊어져야할 운명을 타고나지만,
우리의 옆에는 늘 각자의 고독을 짊어지고 가는 이들이 있기에
여기에 모종의 연대감을 발견할수 있고, 자기독선과 아집을 더더욱 극복하여 '타인'과 '생명'에 대한 좀더 진지한 성찰을 이뤄낼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또 조잡한 글이 되었군요. 제대로 깨우친 이는 간단하게 표현할 수 있는 말들을 복잡하게 어렵게 돌아서 표현할 수 밖에 없는 한계를 이해하시길...

청산님의 댓글

청산 아이피 (222.♡.169.111) 작성일

내가 알기론 -선 불교에서 하는 것이 바로 대승불교의 가르침과 같다고 알고 있고....
그건 중도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며, 이것이다 - 또는 저것이다 해도 무소득이며 -언어도단, 염화미소,불립문자를 떠 올려봅시다.....

악플님의 댓글

악플 아이피 (61.♡.21.172) 작성일

그게 그리 길어야 하는 내용인가요,둘글님?
님의 글은 항시 너무 길더군요.
실상 ,별 의미도 없는 기나긴 서론을 읽다보면 대체 무슨 내용인지 헸갈릴 때도 많아요.
좀 간략히 부탁합니다. 마치 놈문을,책을 읽는듯한 지루함이.....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24.♡.71.69) 작성일

죄송합니다.
저 같은 최 하수는 그냥 머릿속에 들어있는 잡다한 생각을 풀어 낼 수 있을 뿐이지 상대방에게 그 문제를 이해를 시킬 수 있는 '간결함'과 '촌철살인'의 문구를 구사할 수 없는 한계가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그냥 제 이해를 풀어내면서 제 자신의 생각을 정리를 하는 것일 뿐이지 다른 분들에게 '강의'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제 글을 이해해주시는 분들이 되받아주시면서 적절한 부분 탁탁 쳐주시면 감사하고 아니면 뭐...

그냥 보이는 것만 보시고 안보이신다면 다른 분들의 훌륭한 분들의 간결하고 통찰적인 말씀이 많으니 그쪽을 향하시는 것이 적절하실 것입니다.

악플 2님의 댓글

악플 2 아이피 (220.♡.226.60) 작성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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