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 캠페인 100일을 맞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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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59.♡.19.196) 댓글 3건 조회 14,094회 작성일 06-12-08 23:55본문
갖은 숙식 도구를 배낭에 챙겨서 전국을 도보로 이동하면서 행하는 캠페인을 나서려고 했을 때- 나는 상당한 걱정이 있었다. 하루 이틀이 아니고 4년 103일(인구 3만명당 하루 활동)을 기약하고 떠나는 활동이기에, 그 캠페인을 실행하는 순간부터 더 이상 ‘평범한 삶의 길’에는 다시 돌아 올수 없다는 두려움 때문이었다.
통념적으로 그 나이대에서 해야 할, 이뤄야할 일들을 하지않고, 누군가 가보지 않았던 새로운 길을 가려는 ‘의지’를 실행한다는 것은 그것 자체로 상당한 모험이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유랑캠페인의 실행을 9월 1일로 잡고 그 날이 다가오는 것을 접하며 가진 ‘막막함’은 상당한 것이었다.
일을 해서 돈을 버는 중간 중간에 차분히 필요한 물품 목록을 하나하나 사서 배낭의 적당한 공간을 할당하면서, 카운트 다운은 시작되었다. 아련한 두려움은 점차 현실이 되어오고 있었다. 과연 내가 무엇을 경험할 것인지? 무엇을 배울 것인지? 그리고 이루는 바를 잘 행할 수 있을 것인지...
길에서 무슨 일을 당할 줄 모르는데... ‘성한 몸’으로는 돌아올 수 있을 것인지...
아직 더위가 끝나지 않은 늦여름... 전남 영광의 한 거리에서 후들거리는 다리로 그 묵직한 짐을 지탱하면서 사람들의 시선을 애써 피해내려 삐질 거렸던 것은 한편의 희극이었다. 더군다나 그 짐의 무게에 ‘안휘청거리는 시늉’을 하려고 했으니 더욱 그럴만도 했다.
박성수기자 |
매고다니는 짐 - 적게는 20여 km에서 많게는 100여 km에 이르는 시군간 이동시에는 저것들이 어깨와 다리를 극한까지 혹사시키곤 한다. 좌측 검은 가방은 사진을 찍어 기록하고 자료를 정리하는 노트북가방 |
짐에 눌려 헐떡거리고 땀을 흘려대던 내 머릿속에 가득 찼던 생각은 다른 무엇보다도 현실적이면서도 물리적인 것이었다. ‘과연 내가 이 짐’을 앞으로 버텨 낼 수 있느냐는...
얼마 걷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깨와 팔다리가 온통 쑤셔왔고, 몸의 진이 빠졌는데 어렵사리 찾은 초등학교 공터에 짐을 내려 놓고 텐트를 치고 나서 얻은 것은 ‘짐의 무게로부터의 해방과 자유’가 아니었다. 앞으로는 매일 저녁 마다 그렇게 ‘칠흙 같은 어두움’속에 놓여져야 한다는 ‘황망함’이었다.
박성수기자 |
노숙 첫날 째 사진 - 대책 없는 현실에 발을 들여 놓았음을 비로서 체험한 그 막막함이란...] |
아는 사람이 없는 타향에서, 빈털터리 나그에게 그나마 숙식을 가능케 할 수 있는 것은 야영장비 덕분이었다. 문제는 텐트를 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 ‘사람이 지나다녀서 잠을 방해하지 않는 곳’이어야 함의 전제에서는 필연적으로 ‘구석’을 찾아 들어갈 수 밖에 없는데, 그런 곳이라는 것은 하나같이 어두침침한 곳일 뿐이었다.
이렇다 보니 저녁 밥도 해 먹을 겸 해서 7시 경쯤 주로 초등학교 구석을 찾아 들어가 텐트를 치고 나면 그 이후로는 암흑에 놓이는 상황이 처해졌다. 텐트에 짐이 그렇게 가득 있는데, 그것을 그냥 그대로 놓고 저녁에 이리 저리 돌아다니다가는 분실당할 우려가 있었다. 그러하기에 저녁에 밥을 해 먹을 겸해서 텐트를 치면 어둠 속에 발이 묶이는 상황에 처해졌다. 둘이나 되면 교대로 돌아다닐 수 있다지만 혼자로서는 ‘집지키는 개’의 역할에 충실해야 했다.
텐트 생활은 덮거나 춥거나, 비가 쏟아지거나 모기가 한 두마리 텐트 안에 들어와 나의 피를 노릴 때는 상당히 번거로운 일까지가 겹쳐진다.
하지만 어려움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시군간 이동 중 인심 좋은 마을의 정자나무 옆에 텐트를 치고 그 한쪽을 삐끔히 열어서 별을 보며 잠이 드는 날은 차라리 한편의 시였다.
박성수기자 |
어느 마을 정자나무 아래에서 텐트를 치고... |
밥은 아침 저녁으로 죽을 해서 먹었다. 반찬까지 가지고 다닐 정도로 내가 짐의 무게를 견뎌낼 힘이 없었기 때문에 죽을 해서 다시마 몇 개씩을 넣어서 먹곤 했다. 대신 영양실조가 걸릴 것을 우려해서 점심에는 식당을 찾아 아침과 저녁에 먹을 반찬을 미리 먹어 두곤 했다.
박성수기자 |
아침과 저녁을 대비해 반찬을 저장해 두는 식습관으로 인해서 초토화된 반찬 그릇 |
도보로 시군 간을 이동하는 것은 낭만적이기는 했지만, 상당히 고달픈 작업이었다. (발다닥과 어깨가 느끼기에)가장 고통스럽게 시군 사이를 이동한 것은 진도에서 해남까지였다. 물집이 계속 잡히는 바람에 추석 당일부터 해서 4박 5일을 절룩거리면서 이동했다.
40분 걷고 20분 쉬고를 반복했지만, 오후가 되면 짐의 무게가 짖누르는 어깨의 고통이 온 몸을 비비 꼬게 만들고, 발바닥에서부터 발목-무릅-허벅지-골반으로 이어져 올라오는 압력은 진땀을 몸밖으로 내보내고 숨을 가쁘게 만들곤 한다.
목포에서 진도로 향하는 길에는 발바닥 물집은 물론 여러 악제가 겹치는 바람에 이례적으로 하이재킹(차 얻어타기)를 했다.
박성수기자 |
40여대 이상의 차량이 지나간 후에야 차량 한대가 멈춰섰고, 차 주인의 호의로 진도에 닿을 수 있었다. |
물론 걷는 일이 단순히 ‘고통’은 아니었다. 발바닥과 어깨에는 많은 무리를 주었지만, 많은 볼 꺼리와 먹꺼리 등의 풍성함이 늘 그 길에 펼쳐져 있었다. 추석 전후로 해서는 길가는 곳곳 마다 ‘감나무’ ‘대추나무’ ‘밤나무’ 등의 유실수가 배푸는 풍성함이 나를 기쁘게 했다.
박성수기자 |
대추나무 - 가을이 선물하는 풍성함이란... |
씻고 옷 갈아 입고 하는 일도 쉬운 것은 아니었다. 여름에 아무리 땀에 흠뻑 젖었어도 ‘활동비’의 한계 때문에 1주일에 1회 이상 목욕을 하지 못했고, 학교 수돗가 등에서 빤 옷들은 널어 말릴 곳에 마땅치 않아서 배낭에다 걸어 돌아다니면서 말리곤 했다.
박성수기자 |
빨아 말릴 곳이 없어서 배낭에다 걸고... |
노숙자로 100일을 견디면서 세상의 각박함을 피부로 느꼈다. 특히나 길가는 거지가 묵을 곳을 부탁하는데, 단호하게 한목소리를 내며 이를 거부하는 모 교회의 임원들의 모습 등은 참으로 안타까움을 안겨주었다.
이는 과거 강 하구과 마을 곳곳에 세워져 있던 나그네와 한량의 쉼터인 ‘정자’가 산업발전이다 뭐다 해서 다 무너트려지고, 도로, 공장으로 바뀌게 되면서 그 ‘여유로움’을 잃어버린 것과도 궤를 같이하는 듯 하다. 각박해진 세상에서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도 함께 사라지다 보니 길가는 굶주린 나그네를 잠시도 포용할 수 없는 것이다.
모 초등학교에서는 캠패인 중에 ‘학교를 지저분하게 한다’는 이유로 선생님으로부터 벼락같은 훈계를 들으면서 활동을 제지당하고 쫓겨나야 했던 적도 있었다.
그렇다고 그러한 야박함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신안에서는 사회복지공무원을 하고 있는 후배를 만나서 하루 잘 묵어 갔고,
해남에서는 한 형님이 친절하게 다가와서 활동하는 것을 물어오시면서 이것 저것 챙겨주셨고, 진도에서는 자신의 자식이 각박한 사회챗바퀴 속에 내 던져지는 것을 원하지 않아 서울 생활 접고 시골로 내려온 형님이 진도사랑연합회에서 몇 일 묵게 해주셨다.
완도에서는 처절한 투쟁 중에 있는 공무원노조지부장님등/완도사랑연합회회장님이,
고흥에서는 사람 좋기로 소문만 고흥군청 김계장님 등이 잠자리를 살펴 주시고 양말까지 보충해 주셨다.
고흥에서 순천가는 길목의 제석사에서 이틀 묵으면서 주지 스님에게 공양에 차대접까지 받았고, 벌교에서는 원동교회의 목사님을 비롯한 그 일당(?)들과 몇 일 함께 하면서 정신적인 위안까지 받았다.
그리고 순천에서는 KYC 회원이자 순천공무원이신 최선생님이 자리를 추천해 주셔서 사려깊은 사무국장님의 허락에 힘입어 1주일을 넘게 묵었다. 또한 어김없이 물집이 잡혀서 벌교에서 순천까지 절룩거리며 당도한 첫날 저녁 추위와 피로에 성당 교육실로 찾아 들어가 시맨트 바닥에서 침낭을 깔고 잠을 자고 있는 나그네를 깨워서 여관비를 쥐어주며 따뜻한 곳에서 쉬라며 배려해주신 천주교조굑동 교회의 신부님도 잊을 수 없다!
고생한다고 가방에다 붙이는 플랭을 공짜로 해준 나주의 참미광고기획사 사장님들... 건물 내에서 몇 시간을 죽치고 앉아서 컴퓨터 작업을 하고 있는데 고생을 하고 있다며 커피를 대접해 주신 ‘나주시청’ ‘나주광주은행’ 관계자분들... 고생한다며 캠페인 끝나기를 기다리고 있다가 커피를 건네주신 해남동초등학교 유아부 선생님... 몸이 불편한 상태에서 생계를 이어가시려고 앉은 채로 장사를 하시면서도 캠페인 하는 나그네의 활동을 높이 사셔서 ‘뭐든지 골라 먹어’라며 자신의 가게를 개방해주시던 영산포 초등학교앞 가게 아주머니... ‘다른 것은 해 줄 것이 없고 우리는 이것이라도 도와줄 수 있을 것 같네요’라면서 옷 몇 벌을 공짜로 빨아주신 완도의 옷 수선 세탁소... 지나는 나그네에게 호의를 보이시면서 지역에 대한 자부심을 마음껏 표출하시던 강진 어느 이용원의 아저씨와 그 친구들... 적극적인 지지를 해주시며 한 달 활동비를 건네신 숭의교회 김동호 목사님... 그리고 인터넷을 통해서 알게 되어서 식사까지 대접해 주시고 정신적 후원을 아끼지 않으시는 **님의 마음씀도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박성수기자 |
강진초등학교에서 캠페인 하고 있는데 초등학생 하나가 수고한다며 건넨 커피 - 커피를 먹지는 못해서 뱃속에 담지는 못했지만, 그 온기는 마음속 까지 스며들었다. |
그들로부터 받은 감사함을 어찌 다 말로 표현할 수 있을까.
그들이 아니었으면 이곳까지 버텨 지나오지 못했으리...
그러하기에 나는 아무리 외롭고 힘들고 뼈마디가 쑤셔왔어도 한가히 쓰러져서 신음만 하고는 있을 수 없었다.
나는 이번 유량을 통해서 많은 것을 얻은 듯 하다. 특히나 내 자신의 심경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 보는 법을 배웠고, 분노가 일 때 그것을 다스리는 법도 조금 더 진지하게 숙고할 수 있는 기회를 얻은 듯 하다.(물론 아직도 분노가 일 때는 그것을 표출하곤 한다)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심어줄 수 있는 스승 밑에서 ‘자발적이고 주체적인 사고’를 가진 학생들이 나타난다는 사실도 ‘경험’으로 깨우쳤다. 이러한 ‘시야’를 갖게 된 것은 참으로 큰 소득이었다.(=> 보기)
무엇보다도 처음에 이 유랑캠페인을 나설 때 목적했던 바 대로의 ‘나의 행복이 있는 곳에서 세상의 행복을 찾고, 세상의 행복 속에서 내 행복을 찾으려는’ 그 ‘방법’을 조금 더 깨우친 듯 하다.
물론 아직 가야할 길이 멀다. 이제 갓 100일을 맞이했으니, 전체활동의 10분의 1도 못 미친 상태이다. 그러하기에 앞으로 내가 가야할 길은 나에게 약간의 ‘걱정’과 상당한 ‘기대’를 주고 있는 상황이다.
더군다나 여지껏 100일의 활동을 해 오면서 내가 성취했어야할 지지기반을 전혀 마련하지 못한 아쉬움이 있다. 캠페인을 하기 위해서는 활동비용이 필요한데, 초반에 시작전에는 이런 저런 잡일 막일을 통한 수입으로 충당했지만, 활동하는 중에 관심 있는 분들의 ‘정기적인 후원’이 따를 것으로 기대했었다.
1회성으로 지원해주시는 분들이 몇 분 있어서 그들의 후원금이 귀하게 쓰였기는 하지만, 활동내내 정기적인 후원금은 단 2분이 해주고 있으신 상황이다. 이리하여 쪼들리는 상황이기에 필연적으로 동계, 하계에는 활동을 몇 달간 접고 잡일-막일을 해서 활동비를 충당해야할 필요를 확인한다.
그간 나라는 인간에 있어서 늘 문제가 되어왔던... 사람이 인품이 고매하지 못하고 덕이 없는 결과를 새삼 깨 닫는다.
박성수기자 |
2004년 시민단체를 끝없이 괴롭히면서 전횡을 일삼던 전 군산시장이 뇌물수수혐의로 구속되자 혼자 쇠파이프를 들고 시청 시장실에 들어가서 문짝을 박살내놨다. 공무원에 의해서 팔다리가 잡혀서 끌려져 내려왔고, 공용물 손괴죄로 고소까지 당했었다. 고향에서 4년 활동하는 동안 이런 일이 비일비재했고 ‘과격분자’로 낙인이 찍힌 상태였다. 엄청난 자본과 권력을 가진 21세기형 파시스트들이 시민사회를 유리하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21세기형 무정부주의적 투쟁이 과격히 진행되지 않을 수 있는가? 하여간 이런 생각과 행동으로 일관해 오다 보니 ‘덕’이 붙을 수 없었으며, 사람들의 관심과 지지를 받을 수 없었다. 자업자득이리라. ->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오면 똑같이 행하리라!!! (이러니 덕이 붙겠는가?) |
하지만 나는 내 인품과 덕이 부족한 것과는 별도로 사람들이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서 자신들이 해 줄 수 있는 것을 진지하게 생각해 보고, 내 활동이 조금이라도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면 나를 통해서라도 아이들이 자극될 수 있도록 지원을 해주기를 바랬기에 약간의 아쉬운 감이 든다. 활동 내내 항시 국민들을 향해서 열어 놓은 농협 090-12-023267 (예금주 박성수) ^^;의 통장이 늘 바닥이 것을 확인하면서 ㅠㅜ 어차피 걸어서 다니기 때문에 차비는 필요 없고, 돈 없으면 굶으면 되지만, 스티커 만들 돈 없어서 캠페인을 변변히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는 너무도 큰 아쉬움을 가져왔다.
‘전국유랑캠페인’이라는 제목 하에 100일째를 맞는 나의 활동의 ‘중심’은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한 [인간과 자연사랑 캠페인]이었다.
[인간과 자연사랑캠페인]
아이들은 우리의 미래이다. 하지만 학교에서나 집에서나 공부 못한다고 매일 닦달이나 할 뿐이지, 인간과 자연사랑의 마음, 나눔의 미덕, 힘없고 어려운 이들을 대하는 법, 조화롭게 사는 세상에 대한 ‘진지한 얘기’를 건네들은 바 없다. 이렇기에 아이들은 어렸을 때부터 겉멋만 늘고 제 이익을 위해서 다른 이들을 밟아서는 법을 배우며, 양심에 무감각하고 진실에 어두운 마음과 시야를 공고히 한다.
아이들이 혼탁한 세상에 적응하는 과정에 제 이익을 위해서 진실을 배반하고, 성장을 핑개로 순수를 져버릴 것에 가슴이 타지 않는가!!!
하지만 물질을 숭배하고 경쟁을 조장하는 현대사회는 아이들의 양심마저도 자본과 권력의 속성 아래 교묘히 굴림시키고, 이기적이고 각박한 인간이 되기를 강요함에 이 속에서 아이들이 겪어야할 압력은 엄청난 것이다.
이때 누군가 ‘순수한 의지’를 가지고 사심 없이 만들어낸 스티커를 나눠주면서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 주세요’라고 얘기하며 아이들의 눈을 맞출 때... ‘그래도 세상이 살만 한 곳 이구나’하는 생각이 아이들의 작은 마음 한 켠에는 들어서지 않을까?
박성수기자 직접디쟈인하거나 도움을 받아서 만드는 스티커 - 1000장에 1만 5천원이면 떡을 치지만, 후원이 없어서 손가락만 빨고 있어야할 때가 비일비재했다. |
태어나면서부터 ‘황폐한’ 삶을 살게 운명지워지다시피한 아이들 앞에... 누군가 생판 모르는 어른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서 ‘인간과 자연을 사랑해주세요’라는 말을 하며 인간사랑 자연사랑 스티커를 건넬 때... 아이들은... '아~ 이런 문제에 대해서도 고민하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구나'라는 약간의 이해가 깨이고, 인간과 자연의 문제에 대해서 보다 사려 깊게 자신의 생을 연관시킬 수 있는 [사전 자극]을 받지 않을까?
이것은 내 개인의 몽상적인 기대가 아니고 ‘교육철학’의 기본이고, 사회복지전공하면서 지역의 20개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해서 그러한 ‘자극’이 미치는 영향이 어떤 것인지를 분석한 결과 자신 있게 얘기할 수 있는 사안이기도 하다.
물론 아이들 100이면 그 중 50은 이 활동에 무심하게 지나치고, 다시 그 중 반절은 스티커를 버리지만... 그래도 ‘적절한 시점’에 놓여진 아이들에게는 어떤 특별한 의미가 부여된다.
이것은 굳이 내가 아니고 다른 사람이 해도 가능한 활동이다. 하지만,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관심을 가진 이들 중에서는 주로 ‘사회구조적인 문제’에 대한 투쟁을 하는 이들이 많고, 또는 ‘공동체 운동’을 하며 자신의 삶을 위주로 해서 주변을 바꿔내는 운동을 하는 이들이 있지만, 실지로 무차별 아동들을 대상으로 ‘한 번씩의 자극’이라도 줄 수 있는 활동을 하는 이들은 없다. 이로 인해서 많은 아이들이 ‘인간과 자연사랑에 대한 자극에 대해서 사각지대’에 놓이게 됨으로 어린 시절에 ‘단 한번도’ 인간과 자연 사랑의 자극을 받지 못한다는 것은 얼마나 가슴 아픈 것인가?
이렇기에 이러한 활동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는 이의 활동이 필요한 것이라 생각하여 활동하는 것이지, 몇몇 이들이 제대로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고 폄하하는 것처럼 내 자신이 소영웅주의에 빠져서 일시에 세상을 바꾸려고 하는 생각을 갖고 이 활동을 한다고 한다던지 하는 비난과 이 활동이 과학적이지 않고 현실적이지 못하다는 말은 그리 적절하지 못한 것이다.
[생명의 온기]
활동 내내 많은 그리움이 가슴에 들어찼다. 다른 사람들이 모두 가는 길과 상관없는 길을 향하면서, 혼자 생각하고 고민하고 결정내리고 터덜거리며 가끔은 굶주리고, 어두워질 때부터 잠이 들 때 까지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내 자신을 대해야 한다는 것은 끝없는 그리움을 내 가슴속에 들어차게 했다.
길을 걸으며 하루에도 열 댓번 이상은 봐야하는 무수히 널려져 있는 죽음의 흔적들로 인한 아픔은 생명에 대한 그리움을 증폭시키면서 내 영혼을 더욱 깊고 싸늘히 만들어 냈다.
박성수기자 |
시군간 이동하는 국도 변에 이런 시체들은 넘쳐난다. 짐을 매고 헐떡이면서 걷다가 이 죽음의 자취들을 접할 때는 그 영혼을 위로하는 뜻으로 멈춰서서 카메라에 그 처참한 모습을 담는다. 내가 너를 기억함으로 너의 자손들이 살아갈 세상이 좀 더 나을 수 있게 만들어낼 힘을 달라고.../ 위의 사진은 보고 견딜만한 것들 몇장만을 올린 것이다. |
이리하여 안그래도 풀벌레의 찍찍거리는 소리에 마저 한없는 그리움을 느끼곤 하던 이 황량한 이의 마음에는 생명에 대한 타는 갈증이 생겼다. 역설적으로 이로 인해서 마음에 온기를 채워지기 시작했다고 하면 무리한 이야기가 될까.
박성수기자 |
아구구~~~ 귀여운 것. 종종 길에서 마주치는 개가 그래도 이 황량한 마음에 들어찬 외로움을 조금씩 달래주곤 한다. |
내 가는 길에서 인생을 함께할 여인을 운명적으로 만났으면 하는 간절한 바램도 증대되는 고독과 함께 커져만 갔다. 이런 허접한 삶을 이해해줄 여인이 있을까하는 의혹이 동시에 들기는 하다만.
많은 이들이 묻는다. ‘왜? 너는 그 길을 가냐?’고...
나는 말한다. 나는 내가 생각하는 바대로의 내가 가장 가고 싶은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그리고 내가 행복해서 하는 일 속에서 세상의 행복을 찾고, 세상의 행복 속에서 내 행복을 찾는 일을 하는 것이라고... 나는 단지 그것에 가장 ‘적당한 길’을 가고 있는 것이라고...
박성수기자 |
내 미래로 향한 새벽길에 동이 터오는 풍경. 그 미래는 나의 것이면서 동시에 내 동시대인의 그것이고, 내 자식세대의 것이면서 온세상에 존재하는 생명의 것이리라... 나는 오늘도 이 길을 향한다. |
[2006년 12월 9일 전국유랑캠페인 100일째 / 세상의 중심에서... / 인간과 생명에 대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이가... http://howcan.or.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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징징이님의 댓글
징징이 아이피 (211.♡.164.127) 작성일
저두 생명평화결사 등불입니다
가수 김원중씨와 서언문 cd도 함께 제작했는데...
몸소 평화를 실천하시는 모습 대단하십니다
아니~~부럽습니다
전 구미에 살고있구요
이곳에 오실일 있으시면
연락주세요
밥한끼 정도는 살 수 있습니다
푸대접 받으시는 모습이 내내 마음에 걸리네요
010-4412-0909번입니다
몸조심하시구요 *^^*
선장님의 댓글
선장 아이피 (222.♡.190.134) 작성일
서프대문에 떠있던데요
둥글이님 축하 ^^
나도 언젠간 먹고 말거야 가문의 영광이라는 서프대문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59.♡.204.18) 작성일
관자재님 실은 '아름답게 색칠한 것'에 불과합니다. 제가 기록남겨서 재단하는 능력이 탁월합니다. ㅋㅋ
징징이님은 생명평화결사시군요~ 오호호~ 전수받아야할 기술이 많습니다. 구미에서 꼭 들리죠.
그리고 선장님은 다 알면서 사람들이 원래 엽기적인 것을 좋아하는 특성이 있는지라 대문에 잠시 걸쳐 놓았는가봅니다.ㅎㅎ 엽기 발랄하게 살자~ 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