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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ahffk (61.♡.7.112) 댓글 3건 조회 4,237회 작성일 08-11-22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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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오늘 사람들 과의 마찰에서 오는 경계들로 인해 좀 힘들었던 하루였읍니다.
혼자있을때에야 난 착하고 대체로 마음도 편안하죠.
제잘못은 솔찍히 하나도 없고 타인들의 다툼으로 인해 말리고 달래느라 힘든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그 가운데서 솔직히 내안의 올라오는 마음들을 내려 놓는 다는게 참으로 쉽지
않다는 것을 또 한번 실감했죠.
김기태선생님의 견뎌내는 마음이 정도의 차이나 있어나 이게 보통일이 아님을 다시한번
실감한 하루였습니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있는한 전부 내일이요 내탓 이었슴을 그대로 믿고 오늘 겪었던 일들이
제게있었선 큰 수행으로 여기면서 회향하려고 합니다.
가르침에 의하면 이 모던일들이 하나도 다르지않는 있는 그대로의 진리의 나툼이요
본질의 일 임을 믿고 있는지 테스트하기 위해 공부재료로서 다가온 일이라 여겨 집니다.
그동안 마음수행하는 일을 입으로만 하였지 실참 수행하는 데는 게을렀다는게 느껴진
하루였읍니다.

댓글목록

가실님의 댓글

가실 아이피 (222.♡.106.214) 작성일

힘든 하루 편안히 내려놓셨기를 기도해 봅니다.
글을 읽다 님의 아름다움에 젖어 버렸네요. 그래서 우견 올려봅니다.

사람 살이가 옆에서 다투면 말리는건 당연하고 아름다운 일이지요. 말리다 보면 치밀어 오름도
당연하고요. 우리 모두가 그리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건 깨달은 성인도 똑같습니다. 말리고 치밀어 오르고...
치밀어 오름이 없다면 그건 성인도 부처도 아닙니다. 나무둥치나 돌덩어리에 불과하지요.

우선 내가 그곳에 있는한 전부 내일이요 내탓이었슴...을 뒤집어 보면 안될까요?
그곳에서 벌어진 일은 님의 일이 아니라 그져 '일어난 일' 일뿐이고, 내탓이나 누구탓도 아닌
'일어날 일은 반드시 일어난다'의 '그져 일어난 일'일 뿐입니다.

다음으로 '말리고 달래는 가운데 내안의 올라오는 마음들...
그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닐까요?  깨달은 자도 똑 같이 그 환경에선 말리고 달랬을 것입니다.
말리고 달래다가 치밀어 오름이 일어난 것도 님의 경우와 똑같이 치밀게 되어 있습니다.
만약 깨달았다 해서 안치밀어 오른다면 그건 감정없는 나무로 깍은 인형에 불과 하니 어찌 그걸 부처라
할수 있고,  성인이라 할 수 있겠나이까?
증도가(證道歌)에  誰無念 誰無生, 若實無生無不生, 喚取機關木人問(수무념 수무생, 약실무생무불생,
환취기관목인문)이란 말이 있습니다.
이말은 누가 생각(번뇌)이 없고, 누가 일어남이 없다고 했느냐, 만일 생도 없고 불생도 없다면, 차라리
니무로 만든 인형이나 붙들고 물어보라 라는 뜻으로 새길수 있습니다.
이처럼 일어나는 감정이나 번뇌는 자연스럽고 당연한것으로 부처 중생 할것 없이 똑 같습니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그건 너무도 미세하고 작은 차이인데, 그게 부처와 중생(깬자와 못깬자)의 경계선입니다.
님의 경우에서 님은 안에 올라오는 마음들을 내려 놓기 위해 애씁니다. 有爲(유위)지요. 그래서 힘듭니다.
올라오는 마음은 깬자도 똑같은데 치밀어 오를때 참느라 애쓰지 않고 한생각 일으킴니다 지금 올라오는건 당연해라고,  올라올 수 밖에 없는 상황에서 올라오는건 너무도 당연한 것 아닌가요? 그래서 올라오는 마음이
일어나면 올것이 왔다고 치미는 건 당연하다고 한생각을 일으킬 뿐입니다.
그런데 그리하면 정말 거짓말 처럼 올아오던 것이 녹아버립니다. 애씀이 없으니 無爲지요.

깨달은 자와 못 깨달은자의 차이는 이처럼 작은 차이일 뿐입니다. 단언합니다. 별거 없습니다.
이 작은 차이가 부처와 중생을 가르는 것이지요.
그래서 신심명(信心銘)에 호리유차 천지현격(毫釐有差, 天地懸隔 : 털끝만큼의 작은 차이가  하늘 땅 만큼의
차이를 만든다) 이라고 한것  아닌가 싶습니다.
깨닫는 다는것, 그리고 '지금 여기' 또는 '존재 그자체로 서의 이자리' 를 찿는 다는것 아무것도 아닌데
괜히들 수행이다, 구도다 거창하게 말하고, 무슨 삼매가 어떻고, 비상 비비상의 경지 운운하며
진아체험, 화두참구 등등 어렵고 귀족적인 말씀들을 많이 하니 어렵게만 느껴지는 것 같습니다.

  '지금 여기'서 한생각 차이가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가 부처와 중생의 차이라는것 만 생각하면됩니다
생각(번뇌)는 단언컨데 나쁜것 아닙니다. 그건 흘러 없어지기 위해 일어나는 것일뿐 아무것도 아니니
자기안에 생기는 번뇌를 누르거나 번뇌와 싸우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게 생기면 '한생각' (왔구나!)
반갑게 일으키면 그담엔 무엇이 진아인지, 깨달음의 경지가 무엇인지, 위대한 스승 김기태님 말씀대로
방황에 종지부 입니다.
부처는 생각(번뇌)를 참거나 누르거나, 싸우지 않습니다. 모든것을 존재 그자체로 받아 드릴뿐...

  수행에 참고가 되셨으면 하는 바람에 너무 장광설 되었네요. 성불하십시요  _()_

대원님의 댓글

대원 아이피 (211.♡.76.9) 작성일

내안에서 치밀어 오른다. 이것을 너무나 당연시 하는군요,
일단 치밀어 오르면 그것을 따라가던지 아니면 그것을 억누르던지 아니면 그대로
내버려 두고 지켜보던지 이렇게 해야만 할것입니다.
여기에서 따라가는것을, 억누르는것을 배제하고 지켜보는것을 깨달음으로 아는것은
두가지을 버리고 하나을 취해서 그것이 구경인줄 아는 것입니다.
또한 그것을 있는그대로 라고 아는것은 착각입니다

일단 치밀어 오르면은 벌써 생각이 움직여서 판단을 했다는 것입니다.
마음자리는 생각의 이전 자리입니다.
치밀어 오르든 안 치밀어 오르든 항상 고요한 것이지요.
치밀어 오르든 안 치밀어 오르든 이것은 항상 여여한데 사람들은 치밀어 오른는데
안치밀어 오르는데 머물어 있기 때문에 청청한 영성을 등지고 있는 것입니다
양변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호리유차 천지현격,
한 생각 일어 났다 하면 영성과는 하늘과 땅만큼 멀어진다는 것입니다.
경계을 쫓아서 분별을 하면 본성은 캄캄하게 된다는 것을 비유해서 한 말입니다.
번뇌즉 보리라 하지만 본성을 모르면 번뇌는 번뇌뿐입니다.
본성과 번뇌가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본성을 확인 하면은 번뇌가 바로 본성이라는 것을 확인 합니다.
그러면 본성[영성] 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성과 번뇌을 나누는 것은 가르침을 주기 위해서 방편을 쓴 것입니다.
이세상은 마음뿐이고 빛 뿐입니다.
눈앞에서 환하게 비추고 있어요.
이세상은 빛의 바다뿐이다 라고 부처님의 말씀이 있습니다

ahffk님의 댓글

ahffk 아이피 (61.♡.7.112) 작성일

정진하는데 큰도움들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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