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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의 약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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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봉식이할매 (175.♡.214.244) 댓글 1건 조회 8,570회 작성일 15-08-01 2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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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이런 질문하는 사람이 있다.

"왜 당신은 아픔에 관한 글을 쓰느냐고?"

사실 37세 이전의 나는 글쓰기를 극도로 싫어했었다.

공부를 취미로 두지 않는 아이들은 대부분 같은 고통을 공유했다.

'받아쓰기'는 채찍질이었고, '독후감' 제출은 살인이었다.

'글쓰기'란 마치 지옥의 불구덩이 속을 뛰어드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죽기보다 싫어했던 '글' 쓰기를 나 스스로 해야겠다고 마음먹게 된 것은,

누군가와의 약속 때문이다.


늘 집에만 있던 나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는 모르겠지만, 움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마침 유명하신 강사 선생님이 대구에 오신다기에 찾아갔었다.

강의가 끝나고 운도 좋게 선생님과 함께 식당에서 밥을 먹게 되는데,

내가 하필이면 선생님을 바로 마주 보는 자리에 앉게 된 것이 아닌가.

이런 만남(바로 앞자리)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질문을 하고 싶어서 머리를 열심히 굴렸다.

그러다 이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상우야! 넌 매일 몸이 아프잖아"

"네가 가진 것이라곤 아픔뿐이니, 아픔을 나누면 되지 않느냐?"

아무리 질문을 던지고 싶다고 하더라도,

처음 만난 선생님에게 이런 말도 안 되는 질문을 하는 건 예의에 어긋난다.

말을 할까 말까 긴장하기 시작하니 밥이 입으로 들어가는지 코로 들어가는지 몰랐다.

심장박동은 점점 켜져 나를 집어삼키고 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정말로 미친 척하고 질문을 해버렸다.

"선생님 만약에 가진 것이 아픔뿐이라면 그 아픔을 나눌 수 있습니까?"

내가 던진 질문이 선생님의 귀로 순식간에 빨려 들어갔다.

고개를 숙여 밥을 드시던 선생님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멀끔히 쳐다보신다.

그리곤 천천히 입을 연다. "뭐 그렇게 생각한다면 할 수 있겠지요."

만남이 끝나고 나는 창원으로 내려오면서 정말로 아픔을 나눌 거라고 혼자서 다짐한다.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어떻게 하면 아픔을 나눌 수 있는가….

잠자면서도 생각하고 하루 종일 생각했다.

내가 어떻게 하면 아픔을 나눌 수 있는가?

그 어느 누구에게 질문을 던진 것이 아니라 나에게 물어봤다.

나를 알지 못하면 아픔도 나눌 수 없기에 무수히 많은 상념에 빠져든다.

한 달 넘게 고민한 끝에 하나의 결론에 도달한다. "글을 쓰자!"

"뭐~ 라고!" 조금 이상하지 않는가?

위에서 분명히 나는 글쓰기를 정말로 싫어한다고 말했었다.

근데 고작 생각한 것이 '글쓰기' 인가!

지옥의 불구덩이 속을 자진해서 걸어 들어갈 힘은 도대체 어디서 나왔는가?


서유기 등장하는 부처님과 손오공의 유명한 일화가 있다.

"내(손오공)가 땅의 끝까지 간다면 당신(부처님)은 나에게 '제천대성(옥황상제와 동등한)'의 자리를 주고,
만약 내가 땅의 끝까지 못 간다면 당신에게 항복하겠소."
손오공은 부처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기 무섭게 오봉산(땅의 끝)까지 날아갔다.
부처님이 나중에 딴소리할지도 모르니, 빼도 박도 못할 증거를 남기기 위해 오봉산에 오줌을 싼다.
의기양양해진 손오공은 부처님을 찾아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땅의 끝까지 갔다 왔소."
그러자 부처님은 아무 말 없이 자신의 손가락을 가리키며 손오공에게 냄새를 맡아 보라고 한다.
손오공은 의아해하며 시키는 데로 부처님 손가락 냄새를 맡아 보는데, 지린내가 나는 게 아닌가.
부처님은 지긋이 웃으시며 "너는 아까부터 내 손바닥에서 한 발짝도 빠져나가지 못했다.”

예전에 나는 몸이 아프면 그 '고통'받는 사실에서 오로지 도망치기만 했다.

마치 손오공처럼, 그렇게 20년을 도망쳐봤지만 사실은 '부처님 손바닥 안'이었다.

'고통'에서 도망칠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 나는 변하기 시작했다.

마음을 고쳐먹고 '고통'에서 도망치던 걸음을 멈추고 받아들이려 노력했다.

지금도 당연히 '글쓰기'는 벅차고 힘들다. 단지 그 '고통'을 즐길 뿐.


"고통을 피하고 싶으면 고통 속으로 띠어 들어라!" 작가 미상.

나는 아픔을 나누려는 방법으로 글쓰기를 선택했다.

그리고 지옥의 불구덩이 속 탐험을 즐길 준비가 끝났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나와의 약속들을 어겼던가?

예전의 나처럼, 끝없이 나를 속이며 살기 싫어졌다.

이젠 나와 한 약속을 지키고 싶다.

이것이 내가 아픔에 관해서 글을 쓰는 이유이다.

댓글목록

루시오님의 댓글

루시오 아이피 (119.♡.124.87) 작성일

자기 자신과의 약속, 멋있어 멋있어~^^

아멘입니다.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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