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자-장자! 어떻게 적용이 가능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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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211.♡.228.63) 댓글 11건 조회 13,279회 작성일 07-03-05 01:02본문
'노장사상'은 그 당시 보편화되어 있던 정치사회적인 가치체계인 ‘유가’에 반해서 ‘반제도’ ‘반권력’적인 관점을 제시하며, 인간의 바람직한 존재의 방법으로서의 ‘도’와 ‘무위자연’을 설파한 ‘가치체계’이다.
노장사상은 갈등과 경쟁이 난무하고 권력과 부를 쟁탈하기 위한 끝없는 혼란 속에서 생성되는 ‘집착적인 자아’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서는 엄청난 매력으로 다가왔다. 실지로 이를 접한 많은 이들의 ‘자아 해체적’인 노력이 세상의 ‘갈등’과 ‘분열’요소들을 상당히 ‘완충’했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문제는 그 특유의 ‘반집중적’ ‘반확대적’ 성격으로 인해서 ‘노장사상’은 소수지식인들의 유물로 전락하거나 여타의 문화와 철학에 일정한 자양분은 공급할 수 있을 지언정 결코 대중의 가치체계나 삶으로 스며들 수 있는 여지는 없는 운명을 지닌다.
노장철학이 세상살이의 원리가 될 수 없는 이유를 알아보기 위해서는 인간의 ‘생리작용’을 일으키는 과학적인 원리가 노장철학에 맞지 않다는 것을 들춰낼 필요까지는 없다. 다시 말하면, 모든 생명은 혼돈으로부터 ‘질서’를 가지려는 성향이 있기 때문에 노장철학에서 처럼 스스로를 ‘해체’하려는 노력만은 인간존재의 원형과도 배치된다는 식의 생물학, 물리학적인 원리까지를 시시콜콜히 들먹일 필요까지는 없다는 얘기이다.
다만 ‘노장철학’의 ‘반확대적’성격만 조금 살펴보면 왜? 노장철학이 일반적인 인간존재의 원리가 되지 못하고 지식인들의 가십꺼리가 되어있는지를 살필 수 있다.
[대중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없는 노장철학]
물론 상당수의 사람들에게는 늘 노장철학은 그들의 삶의 원리가 될 수 있었다.
그것은 상당수 사람들에게 ‘유가’가 맞았던 것 처럼... ‘법가’가 맞았던 것 처럼...
‘사회주의’가 입맛에 맞고 ‘자본주의’가 맞았던 것 처럼...
단지 ‘확률적’ 인 이유로, 그들의 정신생리적인 현실이 그러한 노장적 가치체계에 집중된 때문이다.
문제는 ‘유가’ ‘기독교’ ‘불교’ ‘자본주의’ ‘사회주의’와 달리 왜? 그것이 대중의 가치체계로 성장하지 않았는가 하는 것이다. (‘도교’는 노장사상을 배반하고 ‘집중성’을 획득한 결과 만들어진 ‘사생아’임으로 다루지 않기로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노장사상과 같이 ‘자아의 해체’가 요구되는 가치체계에서 ‘집단’과 ‘조직’이 만들어지거나 ‘제도’화되어서 그것이 보편적인 인류의 생활 속에 스며들어갈 여지는 없기 때문이다.
온갖 ‘생산’과 ‘소유’ ‘소비’와 ‘경쟁’의 소음이 가득한 사회 속에서 ‘무위’의 화음이 어찌 들리겠는가? 열등감과 우열감을 발화시켜서 손에 쥐는 돈의 양을 늘이고 지위를 높이는 인간이 살기에 용이한 이 ‘사회’라는 거대한 인큐베이터는 유일하게 그 인큐베이터의 규모를 확장하는 것에 인간을 자양분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도 하다.
이러하기에 더더군다나 그 가치체계를 확대하거나 집중시킬 수 없는 노장사상은 기존의 ‘집중적 세계관(소비 소유의 세계관)’에 밀려서 대중화될 수 없는 것이다. 노장사상 자체에 노장사상을 대중적으로 확대시킬 논리가 없고, 노장사상에 능통한 이들은 노장사상을 대중적으로 확대시킬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문제는 노장사상이 단순히 ‘대중화 될 수 없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노장사상에 있어서 ‘인류’와 ‘자연’]
노장사상은 기존의 각종 가치체계와 형식을 거부하며 ‘탈자아’론 적인 관점을 취하며 ‘무위자연’을 설파한다. 문제는 이러한 노력의 목적은 자아의 ‘확대’를 통해서 ‘인류’ ‘자연’과 일치를 꿰하는 것이 아니라, 그야 말로 자아의 ‘해체’에 중점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하기 때문에 노장사상에 정통한 이들은 헐벗고 굶주리는 이들이 가득한 세상의 문제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은둔’에 능통하다.
이는 그들이 스스로의 자아를 해체한 ‘순간’ 타인의 자아도 의미가 없기 때문에 빚어지는 자연스러운 작용이기에 스스로가 세상만사에 ‘희노애락’하지 않고, ‘생노병사’에 둔감한 것 처럼 타인의 그것에도 무심하게 반응하는 당연스러운 결과이다.
종종 노장사상을 이야기하면서 노장자가 말하는 참된 ‘도’를 깨우치면 ‘인류’와 ‘자연’과 ‘하나된다’(자아가 인류와 자연으로 확대된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는 이들이 있지만, 이는 ‘노장 사상적 도’와는 차이가 있는 ‘도’임으로 명확하게 구분해야한다.
그것은 자신들의 ‘개인적인 기호’ 내지는 ‘감성’을 발휘해서 노장사상에 꿰어 맞춘 것일 뿐 진정한 ‘인류애’와 ‘자연애’를 가능케 하는 ‘(인류와 자연으로)확대된 자아’를 만들어낼 수 있는 여지가 ‘노장사상’에는 없다. 단지 노장사상에서는 ‘인류’와 ‘자연’의 거대한 흐름 속에 스스로를 내 맡길 뿐이다. 세상이 잘 돌아가면 돌아가는대로 안 돌아가면 안 돌아가는대로... 어떠한 현실 속에서도 그에 휘둘리지 않고 평정한 마음으로 일관할 수 있는...
물론 ‘모든 사람이’ 노장사상이 말하는 도를 체득하면 그것 자체가 인류애와 자연애로 불리워질만한 ‘평화’가 도래하기는 하겠지만, 그러한 ‘모든 사람이 그럴 수만 있다면’면이라는 전제는 모든 사이비 종교의 가치와 피라미드 판매조직의 강사의 말까지도 ’진리‘로 만들어내는 전제임을 알아야 한다.
어쨋튼 정말로 ‘인류’와 ‘자연’에 자아가 뻗혀져서 그것과 하나가 되는 ‘도’를 체현한 사람이라면 인류와 자연의 아픔까지에도 몸부림 칠 수 있어야할 터인데, 노장자가 말하는 ‘무위자연’은 그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으로 봐서도 노장사상은 ‘자아의 확대’와는 차이가 있는 말 그대로 ‘자아의 해체’에 중점을 두는 가치체계이다.
이렇게 ‘경계’를 두지 않고 마냥 해체할 수 있는 철학적 기반이 서다 보니 노장자의 스케일이 유달리 클 수 있었던 듯하다. 하지만 그것은 단지 스케일이 클 뿐이지 앞서 살폈던 것 처럼 ‘포용’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것이 바로 노장사상이 일견 불교사상과 비슷한 점이 있으면서도 차이가 생기는 대표적인 차이점일 것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노장사상은 ‘유아론’과는 분명 다르지만, 그 맥을 같이하는 부분이 있다.
‘타아’(인류/자연)의 문제에 대해서 무심한 것을 공유하기 때문이다.
[노장사상에서 빼 놓은 것]
노장사상은 ‘선악’ ‘높고 낮음’ ‘앞과 뒤’ 등의 ‘가치’와 ‘현상’ 자체를 부정하면서 모든 것을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의 문제로 얼버무리려는 듯한 시도가 보인다. 그런면 자체에 노장사상의 매력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파격적으로 이론이 구성되다 보니 가치체계 자체가 불분명하고, 불완전한 요소로 작용하는 듯 하다.
일예로 ‘인간이 살아가기 위한 최소한의 물질적 필요’의 문제에 대해서 노장사상에서는 제대로 다루고 있지 않다. 그도 그럴 것이 그 문제를 다루는 동시에 그 물질적인 필요를 충족하기 위한 ‘인식’과 ‘판단’ ‘행동’의 문제를 다뤄야 하게 되고 전반적인 노장자적 세계관이 뒤틀리기 때문이다.
이렇게 되면 인간의 기본적인 필요를 충족시키는 물질을 고리로 해서 ‘인류’와 ‘자연’의 문제까지가 다뤄지게 되고, 결과적으로 자아가 (노장자적으로)‘해체’되어야할 것이 아니라, ‘확대(인류애, 자연애)’되어야한다는 식의 결과까지가 도출되고 필연적으로 ‘선악’의 문제까지도 언급 될 것이다. 따라서 노장자는 자신들의 세계관을 유지하기 위해서 인간생존을 위한 가장 ‘기본적인 물질적 필요’의 문제를 제대로 거론하지 않았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노장사상은 철저한 ‘넌센스’인가?
결과적으로 봤을 때 아무 필요 없는 이야기를 노장자가 쏟아낸 것과 마찬가지인가?
어떤 면에서 노장자는 한편의 스케일 큰 소설에 불과한 것인가?
그건 아닐 것이다. 다만 우리는 그들이 보여주려고 했던 하나의 세계관 속에서 삶을 살아가는 한편의 진리를 찾으면서, 그들과 끝없이 대화하면서 그들이 ‘못 다한 얘기’ ‘빼놓은 얘기’를 우리 자신의 ‘삶’속에서 ‘내 것’으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노장자가 그러한 문제를 다루지 않았어도 노장자가 한 얘기만 기계적으로 되읊을 것이 아니라, ‘현실적’으로 접하는 무수한 문제들에 대해서 끊임없이 ‘질문’을 해야한다는 것이다.
우리의 삶은 필연적으로 ‘물질’과 ‘인식’과 ‘실천’이 동반되는 과정이지 결코 노장자가 종종 강조하는 경전의 한 구절(극단적인 상대주의와 회의주의적 표현)과 같은 것은 아니기에...
노자의 첫마디를 기억하라.
‘내가 하는 얘기를 곧이 곧대로 들으면 낭패본다’는...
[노장사상이 주는 매력]
앞서 정신-생리적으로 노장적인 가치에 수용력있는 사람들이 ‘확률적’으로 있다는 것을 이야기한바 있다. 하지만 이는 노장적 가치에 심취한 소수의 사람들을 구분하기 위한 하나의 기준이고, 많은 이들에게 노장사상이 주는 보편적인 매력은 ‘편안함’ ‘자유’를 줄 수 있다는 점일 것이다.
우리는 ‘권력’과 ‘소유’를 중시여기는 제도화된 세상 적응하며 살아야 한다. 이 과정에 다른 사람의 손에 쥔 것을 하나라도 더 빼앗고 다른 사람의 머리를 밟아 올라서려는 경쟁을 끝없이 치루며 그 속에서 늘 긴장된 마음을 갖는다.
자아는 편협히 오그라들고 ‘원래적’으로 그리 살지 않았음의 ‘자유인’으로서의 내부의 불만은 뭔가 심각한 불협화음을 만들어 낸다.
과거로부터 당연시 여기고 있었던 ‘권력지향적’이고 ‘자아집중적’인 사고는 ‘노장사상’이 주는 그 특유의 ‘해방감’에 숨통을 틔우고 무한한 자유감을 갖게 한다.
문제는 ‘이수준의 경험’은 모든 다른 종교적인 경험과 하등 다를 바 없다는 것이고,
‘이 수준’에서 자기만족에 빠져 [‘인류’와 ‘자연’으로 자신의 자아를 확대 포용하려는 의지 없이 머물러 있는 것] 역시 다른 종교인들의 그것과 역시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여타의 종교가 그 ‘집중성’이 있어서 사람을 많이 끌어 모을 수 있는 일정한 여지가 있지만
‘신’을 찾으며 ‘기복’하는 수준에 머무르거나 ‘인류평화’ ‘환경문제’를 입으로만(기도만)할 뿐 실천성이 현격히 뒤떨어져서 결과적으로 인류의 문제에 제대로 대응할 수 없는 것 처럼...
노장사상은 집중성도 없고, 인류평화의 문제는 논의 꺼리도 되지 않는 이유로 결코 세상에 우뚝 서는 가치체계일 수 없는 명백한 한계가 있다.
[어떻게 노장사상을 실현할 것인가?]
(이것은 여타의 종교 ‘기독교’ ‘불교’적 관점에서도 함께 적용되는 이야기이지만) 경전 일 부분 부분의 특정한 문구에만 집중하거나 경전에 실려 있는 언어적인 표현 안에서만 ‘진리’를 보려고 하는 좁은 시야를 벗어나야 한다.
노장자가 다뤘던 부분은 일상생활 속에서 실현하면서 그 ‘미묘한 차이’들을 늘상 체현해야하고, 거론되지 않았던 부분은 따로 숙고하면서 노장적인 가치체계과 비교, 통합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특히나 노장자가 자신들의 세계관을 세우기 위해서 다루지 않았던 [인간의 기본적 필요의 문제(물질적 필요의 문제)] 등까지를 고민해야 한다. 이를 통해서 인류의 한계상황과 환경파괴의 문제점을 제대로 ‘인식’하고 ‘판단’하며 ‘실천’으로 이를 수 있는 ‘시야’를 가져야 한다. 진정한 ‘도’인은 나무그늘 아래서 무위를 논하는 이보다는 인류의 아픔을 자신의 것으로 여겨 ‘밥을 나누는 이’에 더 가깝지 않은가? 나무그늘 밑에 바람에 한들거리는 존재는 풀 이파리로 충분하다.
인류와 자연의 문제에 대한 시야가 생겨 ‘분별’과 ‘간택’이 이뤄지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노장자’의 가르침과 어긋나는 ‘관점’에 대한 수용의 필요성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것은 전적으로 ‘실존적 존재’인 우리 개개인이 선택하고 판단해야할 일이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노장자의 중심체계에서 말하는 ‘사리분별과 갈등이 없는 상태’라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살아있는 순간동안에는 늘 ‘자연 속’에서 인간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야 한다. 보고(밥상), 판단(밥의 위치)하고 실천(밥 먹는 행위)하고 작용(소화)하며 살아야 한다.
의식적으로 ‘그렇지 않다’고 스스로 믿으면서 ‘마음을 텅비운다’고 주장할 수는 있을지언정 실질적으로는 노장자가 주장했던 세계란 하나의 이상향이라는 것을 염두에 둬야 한다.
기독교, 불교의 사상체계가 현실세계에 올바로 적용되려면 그 종교를 가진 이들부터 ‘종교적인 아집’과 그 위에 세워진 개개인의 ‘아집’을 먼저 벗어나야 한다.
(현재와 같이 ‘입으로만’ 자신을 버리고 신께 귀의했다는 자기최면은 중단하고...)
마찬가지로 노장적 가치계가 올바로 현실 속에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노장사상 자체가 ‘아집을 버리는 사상’이라는 아집을 버리고,
그 아집 위에 세워졌던 ‘아집을 버렸다고 스스로 여겨왔던 아집’을 벗어나야 한다.
‘익숙했던 것’으로부터 한발 물러나는 용기와 ‘인간의 기본적 필요(밥)’까지를 염두에 두는 고민들이 노장사상에 종합된다면 노장사상은 ‘대중적으로’ 다시 태어날 것이다.
2천년이 넘은 원형은 보존하되, 직면한 인류와 환경의 문제에 대한 고민은 담아낼 수 있는 것이다.
문제는 ‘그토록’ 아집적인 기독교와 불교는 그래도 그 안에 이러한 문제의식을 수용할 수 있는 여지가 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자아에 의미를 두지 않는)노장사상에는 그러한 (혹시나 편협하다면 그 편협히 만들어졌을 자아를 들여다 볼) ‘교통’장치가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이 말이 그들에게는 (벽이 깨진다면)‘완전한 의미’로 다가가던지, 아니면 (벽이 있는지 모른다면)‘전혀 의미 없이’ 보이던지 두 방향 중의 하나로 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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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리랑님의 댓글
아리랑 아이피 (222.♡.115.90) 작성일
둥글이님도 잘지내시죠.
조용히 은퇴를 하셨나 했는데(?)이리 오셨으니 반갑습니다.
어제는 바람에 빗방울이 떨어지더니
날씨가 쌀쌀해 졌습니다.
감기 조심하십시요.
노자의 첫마디를 기억하라.
내가 하는 얘기를 곧이 곧대로 들으면 낭패본다는...
저도 티벳불교 책을 보다가 이런 글을 본적이 있습니다.
부처님은 말했다.
나의 가르침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라.
마치 금을 감정하듯이.
무게를 달아보고 잘게 부수어 녹여 본 다음 그것의 가치를 확신하라.
단지 나를 신뢰한다는 이유 하나로 무조건 나의 가르침을 따르는 일은 옳지 않다.
둥글이님도 올해는 건강하시고 즐거운 한해가 되십시요.
둥글이님께도 행운이 충만하시길 기원합니다.
좋은 하루 되십시요.
taoist님의 댓글
taoist 아이피 (141.♡.63.108) 작성일
노장사상을 단단히 오해하셨네요
실제로 중국에서 대대로 정치철할적으로 수용한 것은 유가사상이지만
민중에 훨씬더 깊이 뿌리박힌 사상은 도가사상입니다.
너무 노자의 無爲적인 측면만 본것 아닌가요 ?
無爲而無不爲 인데 무불위의 측면을 간과한 '노자'의 기본의 기본도 모르는 분이군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63) 작성일
지적 감사합니다.
저는 앞서서 [노장사상이 문화와 철학에 일정한 자양분은 공급할 수 있을 지언정 결코 대중의 가치체계나 삶으로 스며들 수 있는 여지는 없는 운명을 지닌다.]는 '한정'을 말씀을 올렸습니다.
일정한 '영향'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실질적으로 민중의 삶에 스며들지 않았다는 것을 지적한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님의 말씀 같이 도가사상이 민중에 뿌리 박혔다면 세상이 이모양 이꼴일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쨋튼 도가사상은 민중의 삶속에 깊이 뿌리박혀있다'고 주장하실 수 있습니다.
저는 그에 대해서 다시 '일정한 영향은 인정하지만 실질적으로 노장사상이 체현된 것은 아니다'고 반발하겠죠.
어찌 생각하시는지요.
님이 말씀하시고자 하는 것이 '형이상학'인지 '현실적인 분별'인지를 우선 구분해주시면 대화가 수월해질 듯 합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63) 작성일
~ 받고 다시 보태서 ~
아리랑님 내일까지 좋은일 생기십시요. ^^
taoist님의 댓글
taoist 아이피 (141.♡.63.108) 작성일
지금 대중의 가치체계나 삶에 스며들 수 있는 여지 가 없다고 주장하셨는데
그건 지금의 가치관이 본질주의 세계관에 물들어져 있어서 그렇다고 봅니다.
그래서 현대의 사람들이 마음의 공허함을 더해가고 있지요, 왜냐면 '본질'은 필연적으로 '공허'를 낳습니다.
노자는 거무스름한 색깔과 물을 숭상하는 철학입니다. 이것은 고대 중국의 '하' 나라에 맞닿아 있습니다.
노자는 그 '하' 나라는 여성적이며(다양성을 존중) 사람들이 자연의 본성을 지키고 살았던 이상적인 국가로 보고 있는 것 같습니다. 물론 노자의 어느 구절에도 직접적으로 나와있지는 않습니다.
현대는 물질주의와 배금주의에 빠져서 점점더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것 같지만 점점 자살율도 늘어가고 사람들은 예전보다 결코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마음의 행복을 찾기위한 노력을 하기 시작했다고 봅니다.
그런 시대적인 요구와 노자나 붓다의 사상 그리고 서양의 해체론 등이 맞아들어가고 있다고 보는것입니다.
기존의 자본주의(현실주의) 나 공상주의(사회주의, 이상주의) 의 본질적인 세계관은 이미 사람들에게 행복함을 가져다 주지는 못하는것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하나라 처럼 노자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국가가가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그러한 비본질주의적인
,해체적인 사상에 기반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요구가 일어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도가나 불가는 기본적으로 본질은 있지 않다라고 봅니다.
인연이 다하면 없어지는 것인데 도대체 '본질'이라는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이것이 우리가 아는 훨씬 정확한 사실 아닙니까?
도가나 불가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고자 하는 철학입니다. 이 이상 더 바랄것이 무었이 있겠습니까?
더이상 이상주의나 현실주의의 세계관에 빠져서 마음의 행복에서 멀어지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63) 작성일
님의 적절한 자극으로 인해서 연상되던 문제의식이 맞물리면서 네시간 넘게 글을 하나 썼습니다. ㅠㅜ
제 홈피 http://howcan.or.kr 의 잡글방에 [과연 ‘생명공동체’가 세상을 바꿀 원동력이 될 수 있는가!]라는 제목으로 방금 글하나 올려놨습니다. ㅎㅎ 님이 주신 자극 덕분입니다.
'본질적'(?@#$%^)으로 님의 관점에 동의를 하는데...
[하나라 처럼 노자가 생각했던 이상적인 국가가가 있었던 때도 있었습니다. 지금 다시 그러한 비본질주의적인, 해체적인 사상에 기반한 세상을 만들고자 하는 요구가 일어나고 있다고 저는 봅니다.]
라는 말씀도 동의를 하는데...
문제는 그러한 '요구'가 너무 '소수'(생명공동체)에게만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대해서 관심있으시면 위에 소개해드린 글을 참조하시길... 너무 잡다할 것 같아서 안올립니다.]
현재 우리에게 닥친 문제(인류/환경의 문제)가 '시급'하고, 오히려 소유적 욕망을 고도화 하는 이들의 세는 '강한데'... 그러한 '노장적인 가치'가 그냥 가십꺼리로 이야기되어지거나 소수 지식인들의 소유로 전락해버리다보니 '인류 환경의 문제'가 노장적인 가치로 풀릴리는 요원함을 나름대로는 말씀 드린 것이죠.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경험' '정보' '현실'을 파악해야합니다.
이는 시민조직과 과거 독재투쟁의 궤가 어떤 식으로 발전해 왔으며 생명공동체 운동의 현실은 어느정도인지 등의 잡다한 이해가 있어야 가능합니다.
문제는 노장사상에 심취해 있는 이들 대다수는 그러한 문제에 별로 신경을 안쓴다는 것이죠.
그렇기에 더더욱 노장사상에 '정통한 이들'에 의해서 현재 인류에게 닥친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이 없음을 확신하게 됩니다.
개인적인 생각입니다.
taoist님의 댓글
taoist 아이피 (141.♡.63.108) 작성일
님의 의견에 대부분 동의합니다.
노자가 바라는 이상의 국가관은 도덕경 80장에 잘 나타나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장에는 천하라는 것은 신성한 그릇이라서 함부로 건들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구절도 나옵니다.
세상은 적극적인 의지로 바꿀 수는 있어도 인류의 행복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노자나 붓다 예수도 마찬가지로 세상 보는 눈을 바꾸기를 종용한 것입니다.
깊이있는 답변은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서 다른분에게 맡기겠습니다.
님의 깊이있는 통찰을 존경합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63) 작성일
님과 같은 분이 필요합니다.
'노장자'에 완전히 함몰? 되지 않고 적당히 심취하셔서 그것을 '들여다볼수 있는 분' 말이죠.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노장자 전문가들은 (속된 표현으로 하자면) 자기 자신은 면밀히 볼 수 있는 능력은 있고 스스로를 '해체'했는지는 몰라도 세상에 대해서 너무 모르기 때문입니다.
석가가 바랬던 것처럼 '자기성찰'(자기해탈, 자각)의 문제를 자기 성찰의 문제로만 끝내지 말고,
그것이 세상사람과 공유할수 있게 우리가 노력 했으면 하는 생각입니다.
즉 '세상을 보는 눈을 바꿔서 궁극적인 행복을 찾는 노력'을 함께 공유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도 그 진실을 공유하고자 원했습니다.
노자장자도 그러한 바램이 있었기에 그것을 책으로 남겨서 후대인들이 볼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습니다.
하지만 작금의 시대에 '노장자'를 아는 분들은 그러한 이해와 믿음을 사람들에게 전파하려는 노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노장사상 특유의 '무위'적 삶 때문일까요?}
그런면에서 예전에 김기태 선생님에게도 몇차례 불만 비슷한 말씀을 올린 것입니다.
김기태 선생님은 스스로 책을 쓰고 모임을 이끌어 가시면서 그러한 이해를 전파하고는 있기는 하셔도
그러한 노장자적 세계관이 널리 퍼트려짐에 의한 '변화된 세상에 대한 의지'가 없으시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의지가 없다'는 표현에 대해서 제 3자의 경우에는 '그것은 선생님에 대한 모욕이다'고 말씀하실 줄 모르겠는데... 노장자에 통달해서 '무위자연'한 삶을 체현하시는 김기태선생님의 경우에는 전혀 게의치 않음을 몇개월 전까지 확인했었습니다. 그냥 그렇게(무위자연하게) 하시는 것이죠.
그래서 그 이후로 김기태 선생님처럼 노장사상을 깊이 체현하시는 분들은 지혜를 제공하는 뿌리로 그 자리에 그렇게 있으시길 바라면서... 님과 같이 너무 깊이 심취하지 않으신 상황에서 그것들을 들여다볼 수 있는 시야를 가진 분들이 나타나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님들과 같은 시각을 가진 분들은 '그 이해를 세상에 전파할 수 있는' 심리적인 근거를 가지셨기 때문입니다.
님과 같은 특별한 분들이 '움직이기'를 기원합니다.
싸리비님의 댓글
싸리비 아이피 (211.♡.93.26) 작성일
노장사상이라...
그게 사상인가?
있는 그대로 라는 뜻을 ,무위자연이라는 말씀을 무슨 철학사상으로 이해하는지...
또,이갓이 인위적인 전파 가 가능하다 보시나요?
그분들의 말슴을 진정 이해한다면,
그렇게 되도록 스스로 힘 쓸 뿐이지
무슨 전파가 필요할까요? 그게 바로 그 본질에 접근이 되지 않은 증거가 아닐까요?
굳이 노장이나,유.불.선,모든 진리의 핵심은 오직스스로에 충실하란 뜻으로 보일 뿐,
그 누굴 가르치고,이끌라는 것이 아닌듯 싶고 도,스스로가 모르는데,누구에게,어떤 메시지를
전하며 나중,그 부작용을 어찌 감당하리오.
다만 인연따라 할 뿐이라 보이고 ,인도에 불교가 사라진 이유가 그 증거가 아닐까요?
무위자연입니다. 세상이...춘몽이고 세상이...모두가 학생이고....초등?...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211.♡.228.63) 작성일
감사합니다.
님께서 말씀하시는 바에 대해서 제가 말씀드린 것입니다.
아큐제로님의 댓글
아큐제로 아이피 (211.♡.28.167) 작성일
사부님 오셨군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캠패인 성과는 있었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