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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그냥 (59.♡.87.250) 댓글 0건 조회 5,781회 작성일 07-03-16 18:41본문
여기 지금이 중요하다라는 것은 재론할 여지가 없으나 제대로 오늘 이 순간을 충만하게
보낼 수 있을 가능성은 개별적으로 미지수이다.
머리로는 또한 관념적으로는 확신이 가는 그 어떠한 것도 실행이라는 행위로 넘어가기에는
현실적으로 장애가 많다.
누군가 어떠한 문제로 고민을 상담해 오면 내가 아는 범위(거의 관념적이고 추정적인 범위가 많음)내에서 열심히 상담하고 동병상린으로 치유해 주려고 노력하지만 실제로 아파하고
있는 이에게는 순간적인 치료 즉 아스피린 한 알 정도의 하루 효과 정도로 그치는 경우가 많다.
이미 도리를 깨쳐 열반지경을 경험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모든 아파하는 이에게 제대로
처방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부처님도 오죽하면 무연중생불가도 즉 인연 없는 중생은 부처님도 못 다스린다라고 하셨
으며 후대에 팔만사천 법문을 남기셨겠는가.
오로지 아픈 문제는 자신의 것이며 치유도 온전히 자기 몫일 수밖에 없는 가장 큰 이유는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유한 품성과 파장이 너무나 독특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경험칙상 외부로부터 치료 방법을 받더라도 그 결과가 개인간에 현저한 차이가 있어
결국에는 각자가 충분히 아파하고 그 과정에서 직접 해결을 갈구하고 그로 인한 시행착오
로써 자신만의 고유한 해결책을 세우는 것이 가장 나아 보인다.
지금 여기라는 어귀도 혼란한 과정을 겪고 난 후에 듣는 것과 그냥 그러려니 듣는 것은 하늘과 땅차이 이다.
개인적으로는 이 어귀만큼 나를 순간적으로나마 평온함을 주는 것도 없다.
나는 간단하게 생각하기로 한다.
당장 몇 시간 후에 무슨 일이 나에게 생길지 불가지 한 상황이다.
내일이라는 단어를 조금만 모아보면 죽음이 바로 코앞이다.
지금 여기가 불편하고 아프고 아니면 충족하다 하더라도 가장 내가 확실하게 운신하고 조종할 수 있는 가시권 안에 있는 것이 바로 here now이다.
충분히 아파할 수 있고 행복해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지금 여기에 있다.
죽음 이전과 이후의 그 중간지점의 불안정한 상태에서 지금 여기 말고는 무슨 방책이 있겠는가.
문제는 충분히라는 단어이다.
개인적으로 아직 충분히 쓰라리고 즐기는 것이 체화 되어 있지 않다.
아파도 조급하고 행복해도 불안감이 바닥에 깔려 있음을 본다.
늘 상 적당히 자신과 타협하여 그냥 넘어가는 일이 다반사이다..
그러니 충분히와 적당히의 간극을 좁혀나가야 한다.
받아만 들이는 연습이 늘 부족함을 느낀다. 습관적으로 간택을 나도 모르게 하게 된다.
세상을 내가 사는 게 아니라 이끌려서 살아지게 될 지라도 잘 받아들이고 이끌려지게 됨을
객관화하여 찬찬히 바라보고 어떤 상태이든 몸 마음 전체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열심히
한다면 이윽고 의식 저 밑바닥의 무의식 세계의 자성이 평온할 것이다.
마하트마 간디의 자서전 제목이 THE EXPERIENCE OF MY TRUTH이다.
진리를 향한 실험 즉 연습이라고 제목을 부침에 나는 많은 의미를 부여한다.
방금 드라마를 보다가 죽음을 눈앞에 둔 사람이 이렇게 얘기하기 시작한다.
'내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지 말고 오늘을 즐기자구요'
갑자기 오늘의 소중함을 깨닫고 주변을 따 스한 눈으로 바라보고 주위 사람에게 사랑을
전하는 모습을 보고 생각이 나서 몇자 긁적거리는 중이다.
간극을 줄이는 방법중 하나가 실제 죽음이 코앞에 있지 아니하더라도 늘상 백척간두에
서있는 마음을 설정하는 것이다.
그러면 매사 유정 무정이 그렇게 소중하고 따스할 수가 없고 어찌 충분히 아프고 즐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해서 당장 빠른 시간 안에 충분히 즐길 수 있는 그 무엇을 하고자 안사람과 의논을 하다.
아내는 언제나 OK이다.
지금 나는 충분하다.
충분히 아프고 있었음으로.......
내일 일은 내일에게 맡겨두는 무모함을 사랑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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