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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그림쟁이 이야기 -첫번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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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vira (110.♡.249.160) 댓글 8건 조회 6,087회 작성일 10-10-14 21: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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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그림쟁이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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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언제부터인지 좋은 것은 또는 찬란한 것은 미래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참고 견디면 희망찬 미래가 온다는 박정희 시대의 교육 때문인지 열심히 공부하면 훗날 훌륭한 사람이 된다는 어른들의 거짓말 때문인지 알 수 없다. 또는 나쁜 책의 대명사인 위인전 탓일 수도 있겠다. 중3 올라갈 겨울, 입산수도 십여 년에 뜻을 잃고 하산하여 술로 세월을 보내다 문득 미쳐서 삶을 놓아버린 삼촌의 죽음 이후부터 우울하고 소극적인 성격으로 변해갔다. 여러 어른들의 죽음과 집안의 몰락, 할머니와 어머니의 한숨과 탄식, 아버지의 무기력과 술 그리고 불화... ‘니는 집안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열심히 하면 된다’는 상투적인 이야기들. 항상 벗어나고 싶었다. 그들의 기대와 부담감, 암담한 현실로부터.

고교시절, 공부에 뜻을 잃어버렸으며 대안으로 그림을 붙잡았다. 이것이 유일한 희망인 것 같았다. 대학만 가면 정말 폼 나는 미래가 주어질 것 같았는데, 이런 제기럴, 낙방, 또 낙방, 또 낙방... 그 무력감, 아득한 절망감. 정신을 잃도록 마신 홧술과 토하기의 세월. 그러다가 도망가듯 무더운 8월 어느 날 입대했다. 고등학교 때 친구 두 명이 배웅한 것 같다. 여자 친구와 헤어지는 것을 아쉬워하는 아이들을 부러워하며 덜 깨어 쓰린 속을 붙잡고 훈련소로 들어갔다. 내 청춘이 끝나가고 있다고 초조해했으며 날마다 날마다 제대할 날을 세었다. 여기 이대로 있어서는 안되는데, 저기 저곳에 있어야 하는데... 그때 함안관리대의 겨울이 참 스산하고 추웠다는 것과 ‘똥방위’라는 사람들의 비양거림이 생각난다. 항상 지금 여기를 못 견뎌하며 저항하고 저기 폼 나는 어떤 것을 꿈꾸었지만 너무나 느리게, 더디게 삶이 움직여가고 있었다.

스물다섯, 원하던 미술대학에 입학했다. 찬란한 봄의 캠퍼스에는 최루탄 냄새가 가득했으며 어두운 세월이 펼쳐지고 있었다. 학비와 재료비와 작업실 유지를 위한 매일 매일의 아르바이트와 술과 그림 그리기, 과제하기... 비대한 욕망과 대비되는 힘겨운 현실은 또 다시 저기를 꿈꾸게 했다. 졸업하면은, 대학원만 가면은, 대학 강의를 나가면, 전시를 하면, 그 어느 날 행복하고 폼 나는 훌륭한 화가가 될 것이야, 그러나 어렵게 대학원을 가도, 강의를 나가도, 전시를 해도 행복하지 않았으며 폼 나지도 않았으며, 훌륭하기는커녕 이도 저도 아닌 이상한 상태에 빠져있음을 발견했을 때, 30대 중반이었다. 문득 정신이 들어보니 평균적인 30대 가장이 가지고 있는 것을 하나도 가지고 있지 않음을 발견했으며 그래서 더 두려웠고 절망스러웠다. 아무도 좋아하지 않는 그림들을 트럭으로 내다 버리면서 길을 잃어버렸고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으며 이삼년 내리 술만 마시고 아무 것도 하지 않았다. 깊은 어두움, 어두움, 어두움...

구원은 엉뚱한 방향에서 왔다. 그즈음 유일하게 붙들고 있던 것이 소규모 명상 모임이었는데, 어느 날 미얀마에서 한 수행승이 초빙되어 작은 골방 같은 선원으로 온 것이었다. 그의 지극한 현존에 나는 완전히 매료되었으며 그의 평화로움과 선명한 알아차림. 그의 ‘메따‘와 ’카루나‘가 이끄는 대로 경주에서 열린 10일간의 집중수행코스에 참가하게 되었다. 하루 종일의 수행과 법문으로 뿌연 막이 걷히는 느낌과 그 5월의 찬연함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황폐한 마음속 깊은 곳을 적시는 맑은 물... 일정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왔을 때 거리는 온통 월드컵의 함성과 붉은 셔츠의 물결이었다. 2002년이었고 그때 내 나이 마흔이었다. 얼마 후 작업실을 일산으로 옮겼다. 멍하니 캔버스 앞에 앉아 고등학교 미술학원 시절 수채화나 뎃상을 그럴듯하게 그렸을 때 누군가 보아주기를 바라며 뿌듯해 하던 기쁨을 떠올렸다. 그런 즐거움을 느껴본 적이 언제던가? 특히 여학생들이 둘러서서 찬탄하는 모습을 떠올리며 빙그레 웃는다. “어머! 재익이, 오늘 참 잘 그렸다...” 그런 것이지, 그게 그림인 것이야. 겨우 겨우 마음을 추스르고 붓을 들 수 있었다. 그해 가을 토요일 오후의 햇빛이 작업실 창으로 길게 들어왔다. 가슴 속에서 뜨거운 것이 울컥 올라왔다.

(2)
몇 년 뒤 공항으로 배웅 나온 아내와 아들을 뒤로 하고 밤 비행기를 타고 미얀마로 향했다. 먹구름 가득한 하늘 위로 밝은 보름달이 떠있었고 저 아래 구름 사이로 번갯불이 번쩍이고 있었다. 아름답기도 하고 아주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풍경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건가?’ 라는 물음과 두려움에 몸을 내맡기고 미래로 떠내려갔다. 수행승이 되어 살고 싶다는 소망과 내 깊은 마음속을 확인해 보고 싶다는 열망으로. 양곤, 찌는 듯한 무더위와 꽃 내음, 매연과 유자나 호텔, 창밖으로 쏟아지는 폭우와 밤의 황금색 셰다곤탑은 환상적이었다. 다음날 이런저런 준비물을 구입한 후 존경하는 우꼬살라 사야도께서 주석하셨던 셰우민사사나에익따로 향했다. 그리고 비구계를 받았으며 수행승으로서 일년을 살았다.

(3)
일산 경찰서 앞을 지나 꺾어드는 백여 미터의 작은 길은 작업실 갈 때와 집으로 올 때 걷게 되는 한적한 곳으로 번잡한 차 소리와 사람들과 건물에서 비껴나 있어 참 좋아하는 곳이다. 길가와 가운데로 나무가 심어져있고 사람의 왕래가 거의 없어 마음이 쉬기에 참 알맞다. 그곳에선 햇빛도 바람도 나뭇잎도 매미소리도 경이롭게 만나게 된다. 그리고 느리게 걷는 즐거움, 평화로움. 이곳에 어디 헛된 생각이나 관념이 스며들 자리가 있는가? 미래에 이루어 질 것이라는 거짓 약속이 있는가? 바로 지금, 여기, 이 순간. 한 번도 진정한 삶을 살지 않았음을 안다. 마음속에 집을 짓고 거기에 푹 빠져있던 지난날들. 분별과 이원성의 세계에서 빠져나와 다만 존재할 것이다.

문득 잘랄루딘 루미의 시가 생각난다.
「봄의 정원으로 오라 / 이곳에 꽃과 술과 촛불이 있으니 /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댓글목록

無心님의 댓글

無心 아이피 (125.♡.109.174) 작성일

만일 당신이 오지 않는다면
이것들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그리고 만일 당신이 온다면
이것들이 또한 무슨 의미가 있는가


가슴이 따뜻해집니다...^^

아리랑님의 댓글

아리랑 아이피 (222.♡.115.101) 작성일

아멘입니다.~

사람을 만나면 편안하며 말을 하지 않아도 부담이 없고 있는듯 없는듯
참 좋은 사람이 있다.
그런 조선생님을 만나면 반갑고 고마움이 샘솟네요.
조선생님 감사합니다.()

수수님의 댓글

수수 아이피 (175.♡.130.98) 작성일

vira님 안녕 하세요
그러지 않아도 글을 올리신다 하셨는데 하고 찾았었어요
근데 어디선가 짧은 답글에서 Vira님인줄 알았지요

수수도 그렇게 미래에 대한 환상이 깨지고 현실, 지금이 바로 하나님이구나를 알아지기 까지
많이 자신을 속이고 살았습니다
vira님의 2편이 기대됩니다 ^^
비구계를 받으면서 처절하게 살아냈던 그 일년간의 체험들
3편은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 살면서 만나는 것들 그리고  서울 도덕경 모임에 나오면서 만나는 것들이 궁금합니다 ^^

우리가 살면서 지금 여기가 안돼가 안돼는 많은 장애 요소들이 있지요
잘난체 하고 싶어 나온 정답같은 이야기 보다 ^^
처절하게 상처를 부둥키며 지나온 과정이 우리가 살아내는데 더 현실적이고 힘이 됨을 알고 있습니다

맞아요
한번 크게 자신을 내려놓고 난 후에는 전에는 무의식에서 나오는 것들이 여전이 지나가지만
그걸 놓치지 않고 보고 분별없이  지나가는 과정이 있을 뿐
.....다만 존재할 뿐이지요

사람이 만나서 아무런 감정이  일지않고 편안한 물같은 사람들을 이번 전국 모임에서 몇분 만났습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그냥 그랬습니다

일념집중님의 댓글

일념집중 아이피 (211.♡.129.216) 작성일

조선생님 글 재밌게 잘 읽었습니다....

모임에서 잠깐 나눈 대화속에서도 저절로 느껴지는 맑고, 겸손하신 기운들에
저의 거친 기운이 정화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 이렇게 진솔하고, 소중한 글을 만날 수 있어
참 고맙습니다...

vira님의 댓글

vira 아이피 (175.♡.182.48) 작성일

글올리기 조금 망설였습니다. 벌거벗은 모습 보이는 듯한 느낌.
 무심님,아리랑님,수수님,일념 집중님께 감사의 마음 보냅니다.
 항상 평화로우소서.

행복한나무님의 댓글

행복한나무 아이피 (115.♡.218.94) 작성일

날마다 날마다 님들에게서 배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날마다 조금씩 조금씩 벗어버리고 있는 느낌입니다.

김기태님의 댓글

김기태 아이피 (211.♡.96.16) 작성일

조선생님의 이야기를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한 사람을 만난다는 것은, 한 인생을 만난다는 것은 가슴 뭉클한 일입니다.
읽는 내내 가슴이 짠 하면서 울컥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고맙습니다....

원주노자님의 댓글

원주노자 아이피 (175.♡.50.135) 작성일

제가 도착했을때 마당에서 서성이셨던 님의 모습이 떠오릅니다.
다가가서 이야기를 나누는데, 참 좋은 사람이라고 느꼈습니다..
이렇게 님의 이야기를 읽으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혹시 원주근방에 오시면 꼭 연락한번 주세요.
곡차라도 한잔 마시면서 님과 아름다운 이야기 나누고 싶습니다...
늘 행복하세요...
또 뵙기를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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