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인 과의 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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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59.♡.118.101) 댓글 4건 조회 5,175회 작성일 07-05-21 13:11본문
진해 지리를 익히려고 이곳 저곳 뒤지고 있는데, 길 가는 앞쪽에 거지 행색을 한 아저씨 한 분이
평상에 앉아 있는 것이 보인다.
흰 수염 세 줄 건너 한 줄씩 검은 수염이 보인다.
모자 창이 라도 그나마 성해서 그 형태를 유지했기에 망정이지, 머리에 걸레를 얹은 것인지
모자를 얹은 것인지 분간을 할 수 없었다. 한 30년 쉬지 않고 쓰면 저 정도의 모양이 되리라.
옷도 여기 저기 빛바래고 때가 찌들대로 찌들어있는 상황이다.
작은 가방을 하나 가지고 다니시는 듯 하다.
[94 도인? 할아버지]
눈을 마주치니, ‘한 푼 달라’고 손을 내 미는 것이다.
단순한 호기심으로 ‘어디서 오셨냐’고 물으니,
‘쓸데없는 것 묻지 말라’고 하시면서
나랑은 ‘공부하는 분야가 달라. 학과가 달라’라고 하는 것이다.
!
그러고 보니 남루한 것은 확실한데...
그 남루함이 잘 단련된 느낌이 든다.
‘할아버지는 무슨 학과인데요’라고 묻는다.
‘나는 인문학이야’
헉~ 그럼 내가 인문학과 관계 없는 ‘사회과학’ 전공한 것을 어떻게 알았지?
아니 몸에 건 플랭[환경재앙 시작....]을 보고 ‘공과’계열로 판단했을 수도 있다.
하이튼 ‘인문학’을 한다면... ‘도’를 하시는 양반도 같고...
말씀 좀 나누려니 도무지 말을 안 붙여준다.
밥 값 안 보태 줄려면... 가란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에게도 ‘노숙자’의 자존심이 있지, 같이 노숙하는 마당에 삥을 뜯길 수야 없지.
밥 값을 드리는 대신에 ‘라면 있으니 같이 끓여먹자’고 말씀 드려도 막무가네다.
(내가 자주 쓰는 표현대로)‘너는 너의 갈 길을 가라’는 식이다.
이 양반을 뵈니 내가 너무 ‘럭셔리’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학과가 다르다’고 말한 것도 무리가 아니다.
(자신의 조촐한 짐)과는 달리 산더미 같이 장비를 휴대한 것을 보니 충분히 세상을 버리지 못한 것이요,
옷도 때도 안타있음은 타인을 의식해서 옷 매무새를 가다듬은 것이고,
이것 저것 거추장 스럽게 ‘아우성’ 치는 글을 써 붙이고 다니는 것 자체가 ‘타인을 변화시킬 수 있다는
아집’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이라~ 정도의 이질감을 느낄 수도 있었다.
‘도’하는 양반들의 생리로 볼 때는 충분히 그렇게 봤을 수도 있다.
그래도 좀 넓은 견지로 ‘노숙인’의 대동단결을 이루는 차원에서 좀 받아주실 수도 있었으련만...
아쉬움을 뒤로 하고 그냥 내 길을 갔다.
먼 발치로 사진을 하나 찍어 남긴다.
다음에 또 뵈면 무조건 밥 값 투자하면서 말씀을 청해야지... ㅎㅎ
나는 뭐 ‘도’하자는 것이 아니고, 나름대로 세상을 배우면서 캠페인 차 유랑활동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그의 삶에 매력을 느끼는 것까지는 아닌데...
하여간 그의 (세상사-핍박받는 민중의 고통-에 대해서마저 초연할 수 있는)‘버릴 수 있음’에 대해서는
상당한 부러움이 느껴진다. 그것은 ‘온전히’ 버릴 수 있음에 의해서 가능하기 때문이다.
여기서 ‘세상사에 대해서 초연하다’는 말은 일반적으로 ‘도’를 한다는 이들의 ‘사회적 무책임감’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도’를 한다고 나서는 많은 이들은 ‘사회 속에 그 구성원으로 살면서 그 사회가 주는 온갖 풍요와 이익을 탐닉’하지만,
‘사회문제’에 대해서만 무관심하다. 그러면서 그것을 마치 ‘세상사에 대해서 초연하다’고 이야기 한다.
이것은 참으로 이율배반적인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사에 대한 초연함’에는 ‘자기 자신의 욕망과 사고’까지가
포함되어야 하는데, 자신의 필요와 욕망을 채우는 것은 ‘당연시’하면서 ‘타인’의 그것에 대해서 무관심한 것은
말 그대로의 초연함이 아니라, ‘무지’가 바탕이 된 ‘무책임’ ‘이기주의’이기 때문이다.
정말로 세상사에 대해서 초연해지려 한다면, 우선 타인의 눈을 통해서 자신을 바라보는 습성을 버려야 한다.
거울 속에 비춰진 자신의 얼굴을 ‘타인의 시선’으로 보는 습성도 버려야 한다.
‘시각적 차원’에서 이 최소한의 것이 습득되면, 아예 외모에 대해서는 무심해 지게 된다.
옷에 일부로 똥을 뭍혀서 돌아다니지는 않겠지만, 그들의 복장은 일반적으로 말하는 거지 수준에서 평준화 된다.
이것이 ‘세상사에 대한 초연’을 달성하기 위한 기본이다.
이들은 ‘먹고 사는 문제’에 대해서도 역시 ‘초연’해서 ‘내일 먹을 것’ ‘모레 먹을 것’을 걱정하지 않는다.
배가 고프면 먹고 없으면 굶으면 그만이다. 다른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체면’과 ‘형식’에 얽매여서
‘어떤 밥’ ‘어떤 집’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을 그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왜냐하면 그냥 있는 그대로의 ‘현재’에 그 자각적 의식을 맞추고 사는 것 이 바로
그들 ‘초연한 이’들의 삶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이들이 ‘이웃’과 ‘사회’에 대한 관심이 없는 것은 ‘무책임’함에 의한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렇게 ‘초월한 이들’에게 있어서는 ‘무책임함’ 자체의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이들은 말 그대로 그냥 초연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런데 어느 때 부터인지 이 ‘초연한 삶’ ‘도 적인 삶’의 방식이 왜곡되기 시작한 듯 하다.
‘그래도 인간으로서 살아야 하는데’라고 전제를 붙이고 나서
‘삶의 수준’ ‘소비-소유의 기준’(삼시 세끼 잘 먹고 불편 없이 잘 잘 수 있을 만큼/세상사의 기준으로
타인에게 지탄받지 않을 정도의 외모/삶의 편리 등...) 을 작위적으로 높인다.
그 상태에서 ‘세상에 대한 관심’을 동결시키고 그것을 ‘초연함’이라고 규정한다.
이러한 이들의 세상사에 대한 ‘무심’은 그야말로 ‘무책임’ 내지는 ‘이율 배반성’에서 기인한다.
문제는 이러한 자기 편의적이고 교묘하고 관념적인 말장난을 분별해 낼 수 있는
‘기준’을 갖지 못한 이들에게는, ‘그 수준의 사람들’의 논의 과정에서 적당히’ ‘이 수준이다’라고 공표한
그 무엇을 ‘초연함’과 ‘도’ 로 인식하게 된다.
[이 이야기는 ‘도’를 하는 이들을 비방하려는 것이 아니라, 단지 ‘자기모순’의 문제를 짚은 것이다.
일명 ‘도’를 체현 하고 있는 사람들은 분명히 있지만, 상당수의 사람들은 이러한 -조금만 숙고를 해보면
빠져나올 수 있는 이율배반적인습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극히 모순적인 것을 쫓기에 그 ‘모순’을 지적한 것이다.]
과거에도 세상사를 초월한 듯한 분을 한분 뵌 적이 있었다.
‘나주’인가 가는 국도상이었는데, 길 한쪽에 개량 한복을 입으신...
머리가 길고 수염이 덮수룩한 한 분이 비밀 봉지 두개를 놓고 서 있는 것이다.
나는 그분이 산에서 약초를 캐가지고 내려온 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것은 약초봉지가 아닌 옷 보따리였고, 그분은 전국을 돌아다니시면서
‘기도’를 하시는 분이란다. 서로 지나치는 길이어서 많은 얘기를 못 나누고 인사로 몇 말씀만 나눴었는데...
나중에 지나치고 나서 곰곰이 생각하니 그 양반에게서 엄청난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도대체 ‘어느 정도의 내공’이면 ‘비밀봉지에 옷과 가재도구를 챙겨’ 양손에 들고 전국을 돌아다닐 수 있단 말인가!
하여간 그 분을 지나쳐 간 후에 많은 말씀을 나누지 못한 아쉬움에
‘다음에 비슷한 분을 만날 때는 놓치지 말자’는 다짐의 다짐을 했는데...
오늘 만난 할아버지는 그분보다 내공은 업그레이드 된 듯 한데, 아예 말도 안 붙여 주신다.
뭐... 하기야... ‘그의 문법’은 ‘지나쳐 보낸 것’에 더 많은 이야기를 담아 낸 것일 수도 있지만...
댓글목록
아큐제로님의 댓글
아큐제로 아이피 (121.♡.28.208) 작성일
밥좀 든든히 먹고,너무 무리하지 말아요.
헛 것 본거요.
내공은 별로 중요치 않아요.
외공'이 필요한 恐이지.ㅋㅋ
약좀 드시오,분명 열이 있을 것 같소.
아큐제로님의 댓글
아큐제로 아이피 (121.♡.28.208) 작성일아무리 봐도 정황을 보건데, 살짝 가신 분들 같소.
본지풍광님의 댓글
본지풍광 아이피 (222.♡.169.122) 작성일
학인이 스승에게 물었다.
도가 무엇입니까? _ 차나 한 잔 해라.
불법이 무엇입니까? _ 부채를 슬슬 부친다.
본지무광님의 댓글
본지무광 아이피 (221.♡.32.221) 작성일
더 분명히. 진실은,
도가 무엇입니까?- --- 도니라.
불법이 무엇입니까 ?---- -불법이니라.
부채는 왜 부치십니까 ?----더우느니라. 에어컨만 있다면야 이까이건, 無 ! 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