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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화기 너머의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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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몽 (210.♡.107.100) 댓글 0건 조회 4,401회 작성일 07-07-10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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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을 새로 장만하여 새 번호를 부여받았다.
번호는 새로 생성된 게 아니라 예전에 그 번호를 사용하던 前 주인의
번호를 신규 가입자에게 인계해 주는 방식이라는 것을 나중에야 알게 되었다.
지금 내가 사용하는 휴대폰 번호의 이전 주인은 박모씨라는 사람이다.
몇 달 동안, 박모씨 아닙니까?라는 전화가 귀찮게 계속 걸려왔다.
일이 묘하게 꼬이게 된 것은 나의 목소리와 박모씨의 목소리가 비슷한지
신분도 확인 하지 않은 체, 나를 박모씨로 알고 통화하는 사람들이
간혹 있었다.
처음엔 짜증스러워 죽을 뻔 하다가 이것도 차츰 면역이 되어 가는지
난데 없이 걸려오는 전화에 적응해 갈 무렵......
나도 모르게 박모씨라는 낯선 인간을 마음 속에 그려 보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중에는 어떤 인간적 호기심 같은게 생겨 몇번은 그에게
걸려온 전화에 귀를 기울인 적도 있었다.
지금껏 걸려온 전화로 박모씨의 삶을 퍼즐 맞추기 식으로 복원해
보면......
우선 박모씨는 부동산 관계 업종이나 투자에 깊이 관여 되었거나
자신의 아파트를 최근 공인 중개사에게 내어 놓은 적이 있다.
박모씨는 카톨릭 신자이며 성당에 다니고 그기서 간혹 봉고 차
운전을 하여 교인들과 함께 교역 봉사 활동을 자주 간다.
그는 사십대 중반으로 술을 좋아하며 몇 군데 단골집이 있다.
왜 요즘 술 마시러 안오냐는 술집 마담 전화가 꽤 있었다.
갚지 않은 외상술값도 좀 있었다.
그는 경기도의 어떤 동네 산악회 총무로 주말이면 모임을
주선하고 산행 후 내려 올 때 회식을 자주 한다.
산행에 빠진 산악회 회원들이 모임 장소를 묻는 전화가 일요일이면
꼭 한 두 통 걸려 왔다.
그는 몇 군데 전자 제품을 구매하여 할부료 지급을 연체하는
경우가 있었다. 러닝 머쉰 운동 기구는 할부 삼개월 어치만
지급하고 계속 연체하고 있다.
그리고......
어제 밤 한 시 무렵 약간 술에 취한 어떤 여자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조금은 거친 숨을 몰아 쉬는 듯, 또 말못할 어떤 사연이
가슴 위로 쏟구쳐 올라오다 턱턱 목에 걸리는 듯 띄엄띄엄 말을 하고 난 후
몇 초간 공백이 이어지고, 술에 취한 것인지 혀도 좀 엉키고 말도
두서가 없었다.
야...야...너...나 한테...그럼 안돼. 야아...내가 미쳤다고
널...너를...좋아해서...이...고생 해야 하니...나...이제
그 짓 못해....앞으로...안만날거야. 야...이 새끼야. 날.
나를 좋아했다는게 내 몸덩어리 뿐이였니...아니면 내가
...너를...흐 윽(한참을 입을 막고 흐느끼는 것 같았다)
나 지금 광원 삼거리 포장마차에 있다....너 나올래...
이번...마지막이야. 어...(약간의 긴 휴지) 마지막으로
너 잘난 낯짝 함 보자. 니가 나에게 이럴수 있냐......
흑흑...이 새끼야 나 지금 괴로워 죽겠어...너 어쩔래
통화기 너머, 어떤 대꾸를 하지 않아도 다행일 정도로
그녀는 막무가내로 혼자서 말하고 울부짖고 또 술주정 하였다.
내가 심야에 전화를 끊지 않고 어떤 낯선 여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 들은 것은.......
'박모씨'라는 인간과 그의 삶과 그가 남긴 삶의 궤적과 자취가
내 방안 어디선가 배회하며 흐르다가 벽장 속에서 사각사각 소리를
내고 벽 사이로 흐릿한 영상 하나를 그렸기 때문이다.
인생은 삼류잡지의 기사 처럼 통속 하거늘 이 광할한 도시 어디선가
세상의 어떤 남녀는 침대에서 서로의 몸을 애무하며 땀을 흘리고......
애증의 숨바꼭질을 한다.
그들도 내일 아침이면 환한 빛을 받고 일어나 아무런 일 없었다는듯이
이 도시의 군락 어디선가 꿈틀거리며 일상을 견뎌내고 각자의 서식처에서
숨을 쉬며 태연히 살아간다.
그리고 밤이되면 도시의 한쪽 어디선가 나즉막히 숨죽이며 전화기 너머
누군가를 애타게 부르짖으며 나방의 날개짓을 퍼득이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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