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쌍함'이 아니라 '미안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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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16.♡.205.9) 댓글 0건 조회 6,533회 작성일 10-04-03 12:39본문
우리는 흔히 아프리카 후발 도상국 등의 나라에서
헐벗고 굶주리는 삶을 사는 이들을 대할 때
마음속에 그들을 '불쌍히' 여기는 감정이 솟아나곤 한다.
그런데 이러한 감정은 우리가 사는 삶을
전지구적인 차원으로 보지 못하고
편협한 자기 이해 속에서 빚어낸 무지함의 결과이다.
지구 자원은 한계가 있다.
따라서 내 손에 지금 뭔가를 쥐려면
결국 이는 다른 사람으로 부터 빼앗아야 한다.
반대로 다른 사람의 손에 뭔가가 쥐어지면
반대로 다른 사람의 손에 뭔가가 쥐어지면
결국 나는 아무것도 쥘 수 없게 된다.
이런 터이기에 지금 양 손에 뭔가 묵직한 것을 들고 있는 우리는
손에 아무것도 들고 있지 않은 저들을 '불쌍히' 여겨야 할 것이 아니라,
'미안하게' 여겨야 하는 것이다.
그들이 헐벗고 굶주리고 있지 않았다면,
우리가 그러한 모습을 하고 있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들을 보고 다만 안타깝고 가련하게 여기면서 주머니에서 내 작은 일부를
꺼내 던져주고 싶은 심정을 가져야 할 것이 아니라,
내 손에 쥐어진 것들에 대해 미안하고 불편히 여기는 것이 온당하다.
내 손에 쥐어진 것들에 대해 미안하고 불편히 여기는 것이 온당하다.
그래서 내 것을 마땅히 함께 나누려는 의지를 갖는 것이 적절하다.
이는 도덕적 의무를 얘기하는 것이 아니다.
'너'가 바로 '저쪽에 서 있는 나'임을 온전히 알면 자연스레 그리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해가 다만 인간과 인간의 관계만이 아니라,
인간과 자연의 관계로 확대될 때...
그리고 궁극적으로 '나와 나'와의 관계에서 올바로 정립될 때...
우리는 비로소 자신의 발로 대지에 온전히 서는 경험을 할 것이다.
이렇지 않은 상태에서의 '앎'이란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실제세계와는 괴리된,
인간과 자연이 한데 어우러져 역동적으로 작용하는 실제세계와는 괴리된,
초월적이고 관념적이며 허황된 주절거림에 지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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