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의 문제'는 통찰의 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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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둥글이 (116.♡.205.9) 댓글 7건 조회 6,431회 작성일 10-04-04 18:58본문
공유와 베가님과의 이야기가 즐거운 것은 막무가네의 주장이 아닌,
서로 간에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근거를 주시기 때문입니다.
자 시작합시다~ ^^
밥의 문제는 통찰의 문제
1. “타인의 굶주림은 내가 배부른 결과다”
이 말은 지구자원이 한계가 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내가 하나 더 가지면
상대방이 빼앗길 수 밖에 없는 역학관계를 짚은 것입니다.
이는 단순히 ‘사람 대 사람의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사람과 자연의 관계’에서도 빚어지는 문제입니다.
내가 하나 더 손에 쥠으로 타인의 손에서... 그리고 자연으로부터 그 무언가가 상대적으로 빼앗기게 된다는 것이지요.
2. 검증 방식
만약 우리가 지금으로부터 100년전 200년전 혹은 수천 수만년 전의 삶을 살고 있다면,
내가 손에 뭔가를 쥔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것을 빼앗는 결과는 가져오지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기름진 옥토를 뚫고 씨앗이 고개를 들고 나와 싹을 틔우고, 잎을 펼치며, 꽃을 피워 맺은 열매...
그 열매를 날아다니던 새들이 먹고, 그 새를 들짐승이 취하고, 그 들짐승을 인간이 취하지만
결국 그 인간은 죽어서 퇴비가 되듯이...
자연의 모든 것은 서로 돌고 돌기 때문에 누가 더 취하고 누가 더 취함 당하는 문제는 없기 때문입니다.
심지어 ‘죽음’조차도 내 ‘삶’이 다른 죽음을 기반으로 이뤄진 것이기에, 마땅히 받아들여야하는 그것이지요.
이는 지극히 ‘자연적’인 우리의 삶이었지요.
이러한 삶 속에서는 우리는 수백수천년을 같은 지역, 같은 땅에서 정든 산천초목과 벗하면서 함께
어우러진 삶을 살아왔습니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집약과 더불어 인간의 욕망은 과도한 폭력성을 보이기 시작했고,
씨감자까지 캐먹는 일을 서슴치 않기 시작했습니다.
수백 수천년 한결 같이 뿜어져 나와 건조한 땅을 적시던 샘물, 강, 호수는
좀 더 많이 생산하고 좀 더 많이 소유하려는 욕망에 의해서 바닥이 말라가고 있는 상황입니다.
적당량 사용하면 영원히 사용할 수 있지만, 인간의 과도한 욕망이 자연의 ‘임계점’을 넘겨버리면,
더 이상 자연은 인간과 조화를 이루려고 하지 않습니다.
2020년까지 아시아 땅 40%가 사막화가 된다고 합니다.
해마다 규모를 더해가는 '황사‘는 사막화가 진전되는 결과이지요.
지하수의 문제뿐만 아니라, 각종 자원의 문제, 화석연료사용에 의한 지구온난화 문제는
인류뿐만 아니라 생태계 조차 파국으로 몰고 가고 있습니다.
인간 생존의 기반이 생태계가 붕괴되었을 때 빚어질 끔직한 문제를 상상해 보십시오.
2006년 국제연합의 환경보고서에 의할 것 같으면 2020년에 양서류가 멸종하고,
2050년에 동식물 절반이 멸종한다고 합니다. 지금도 그런 전조가 수도 없이 보이고 있습니다.
전년도까지 잘 잡히던 어류가 한순간에 눈에 보이지 않고, 꿀벌이 갑자기 사라지는 현상이 빚어지고 있습니다.
하여간 이로 인해서 우리 후손들이 겪을 고통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해마다 한반도 규모의 땅이 인간의 욕심으로 벌목되고 있고, 한반도 규모의 땅이 사막화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이렇게 지구 자원은 감소하고, 환경은 파괴되고, 거주지는 줄어드는데, 세계 인구는 증가하고 있고,
그들이 가진 ‘욕망’ 역시 증가합니다.
현재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모든 에너지의 사용을 다 중단시킨다고 하더라도 현재까지 대기 중에 내 뿜어진
온실가스로 인한 화학작용이 끝날 50년 후까지 계속 지구 온도가 상승하면서 각종 파국이 빚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문제에 대해서 이해가 없는 인류는 아랑곳 않고 ‘더 많이 생산하고 더 많이 쓰고
더 많이 소유하고’를 구호로 살아갑니다.
물론 이에 대해서 “그럼 그게 왜? 내가 죄책감을 갖아야 하는 문제냐?”고 반발할 수 있습니다.
“그게 왜? 내가 다른 사람의 손에 쥘 것을 빼앗는 결과가 가져오냐?”는 의문이 가져질 수 있습니다.
3. 실질적 통계
지금 일반 대중이 살아가는 생활의 기반 자체가 ‘지속가능한 발전’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삶입니다.
즉 후손들의 씨감자까지 캐서 먹고 살아간다는 것이지요.
구체적인 통계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환경운동연합에서 2006년 ‘생태발자취’를 조사해 봤더니, 한국인 1인당 지구를 2.03개 꼴로 생활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지구를 두 개 있는 폭의 소비생활을 한다는 것이지요. 그만큼의 지구자원과 환경의 파괴가 따르겠지요.
그런데 그 당시 1인당 국민소득을 계산해 보니 140 만원 정도 였습니다.
산술적으로 쉽게 얘기 드리자면 140만원 벌어 쓰는 삶이 지구를 2개 있는 폭의 삶이란 것입니다.
다시 말하자면 한달 140만원 벌어 쓰는 삶이 지구를 갉아먹고 후손들의 존립을 불가능케 하는 삶이라는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질 것을 뺏는다!” “환경을 파괴한다” “후손들의 씨감자를 캐먹는다”는 주장의
근거가 있는 것입니다.
산술적으로만 계산해 보자면 한달 70만원 이상 버는 삶 자체가 ‘다른 사람의 손에 쥐어질 것을 빼앗는 삶’인 것이지요.
4. “타인의 굶주림은 내가 배부른 결과다”는 문장의 분석
물론 ‘직접적으로 강탈해 가는 것’만을 ‘빼앗는 행위’로 전제한다면 저의 주장은 올바르지 않겠지요.
따라서 저는 ‘사회관계적’으로 본다면 ‘간접적인 착취행위’인 것이라고 전에도 말씀 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착취행위는 일부 몇몇 ‘부자들’만 규탄할 문제가 아닙니다.
큰 부자들은 중산층과 하층민들을 빼앗고 살아가기 때문에 ‘공공의 규탄대상’이 되어있지만,
중산층은 하층민들의 것을 빼앗고 살아가고,
하층민들 역시 그들 나름대로 빼앗을 대상이 있는 것이지요.
상층민이든 중층민이든 하층민이든 우리는 후손들의 존립과 생태계의 유지를
어렵게 만드는 삶의 가치와 방식을 가지고 생활하고 있는 것입니다.
5. 몇몇 부자만의 잘못이 아닌 모두의 책임
‘가장 가난한 자’라고 해서 그들이 착취만 당하고 사는 것은 아닙니다.
가난한 자들은 단지 ‘부자’가 되기 위해서 발버둥 치다가 경쟁에서 낙오된 이들일 뿐이지요.
언제든지 그들 역시 부자가 될 기회를 노리고 있는 것입니다.
문제는 단순히 ‘부자이고 아니고’가 아니라, 끊임없이 잘 먹고 잘 살기위해서 발버둥치는
우리 각자의 욕망이지요.
그러한 욕망이 결국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낸 것이지, 부자들 몇몇이 세상을 이렇게 만들어 낸 것은 아닙니다.
‘지속가능한 발전’에 대한 이해 없이, 내가 지금 손에 거두는 것이 어떤 식으로 세계와 자연에 작용한다는 이해 없이,
“잘 먹고 잘살려는” 생각만 가진 ‘평범한 삶’ 자체가 범죄행위입니다.
그러한 의지가 하나하나 모여서 현대의 문화를 만들어 내고, 현대의 정치를 만들어내고, 현대의 사회를 만들어 내지요.
전 국민이 단합되어 상대편 국민을 살육하는 ‘전쟁’이 각종 미사어구로 치장되듯이
우리 각자가 서로를 갉아먹고 뜯어먹고, 후손들의 씨감자를 캐먹고, 자연을 파괴하는
우리의 ‘일상의 삶’은 정말로 야만적인 생존 양식입니다.
우리의 일상을 한발만 벗어나서 보면 이것은 명확하게 보입니다.
다만 그것을 벗어나지 못하니 안 보이는 것이지요.
(심지어 ‘모든 것을 비우라’면서 깨달음 운운하는 이들의 대부분도 일상에 집착하곤 하지요.)
물론 이러한 특이한 생존양식은 앞서 말했듯이 과학기술과 더불어 20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시작된 삶인데,
과학기술과 편리성이 주는 포만감의 장막을 걷어내고 온전한 시야를 갖기 위해서는 앞으로
몇 세기는 인류가 뼈저린 반성을 해야 할 것입니다.
문제는 지구온난화로 인해서 인류가 이번세기를 넘길 수 있는가 하는 것이지요.
6. 왜? 이 사실이 안보이는가?
왜? 우리 자신이 여지껏 이러한 문제를 직시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생각해봐야할 것입니다.
왜? 이것이 우리 자신의 직접적인 생존의 문제이고, 삶의 문제이고, 후손들의 문제이고,
우리의 존립근거인 자연의 문제였음에도 여지껏 이 문제에 대해서 고민하지 못했는지에 대해서
곰곰이 통찰해 봐야 합니다.
그것은 작금의 자본가들과 정치인들이 이러한 사실을 볼 수 없게 막은 이유도 있지만,
결국 이러한 사실을 볼 수 없게 막은 것은 다름 아닌 ‘내 자신의 무지’인 것입니다.
내가 이 사실을 알려하지 않고 나서서 알 수 있게끔 노력을 하지 않으니,
결국 세상이 이렇게 된 것이고, 그 세상에 적응된 나는 결국 같은 과오를 되풀이 하는 것입니다.
문제의 근본은 나 자신의 무지입니다.
내가 사람들과의 다툼에서 늘 ‘다른 사람 탓’만 했던 것은 결국 내 마음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게으름의 결과였듯이....
내가 이러한 세계의 진실을 볼 수 없게 된 것 역시 내가 놓인 세계의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으려는
게으름의 결과인 것입니다.
7. 생존의 문제는 깨달음의 문제와 별개인가?
이에 대해서 많은 분들이 ‘우리의 생존의 문제와 깨달음의 문제는 전혀 별개의 것이다’라고 얘기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생존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곳에 가서 하라는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누가 그렇게 정의를 내렸습니까?
깨달음의 문제가 ‘밥’ ‘생존의 문제’와 전혀 별개의 것이라는 것을 누가 규정했습니까?
‘나’의 문제가 ‘너’와 ‘세계’의 문제와는 전혀 별개의 것이라고 누가 규정했습니까?
물론 저는 ‘너’와 ‘세계'의 문제, 인간과 자연의 문제까지를 아는 것이 ’깨달음이다‘는 얘기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만 ‘너’와 ‘세계’, ‘인간과 자연’의 문제도 포괄하지 못하는 ‘깨달음’이라는 것은 허황된 것이라는 것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생존의 기반에 아무런 연관 관계 없는 깨달음.
존재와 삶, 너와 세계와 자연에 아무런 역학관계가 없는 깨달음.
이 모든 것을 집약한 ‘밥’의 문제를 논외로 하는 깨달음이란 것은
다만 ‘관념적이고 초월적이며 유아론적인 것’이라고 얘기하는 것이지요.
하여 저는 깨달음이라는 것이 근본적으로 그러한 것들과 괴리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려 할 따름입니다.
8. 가장 기본적인 물음
그렇다고 해도 저는 저의 주장을 깊게 밀고 가지는 않습니다.
깊은 얘기 해봤자 서로 머리만 복잡합니다.
그래서 가장 기본적인 수준의 제가 제기할 수 있는 문제만 거론합니다.
‘너와 세계, 인간과 자연’의 문제에 대해서 초연한 것 같이 위선을 떨면서,
오직 “마음의 문제만을 들여다 봐야한다”고 주장하는 ‘관념적이고 초월적이며 유아론적’인 이해에 매몰된 이들이
왜? 세끼 밥은 꼬박꼬박 챙겨 먹냐는 질문을 하는 것이지요.
자기 세끼 밥 챙겨 먹는 것의 중요성을 ‘당연히’ 전제하고 있다면,
다른 사람의 세끼 밥에 대해서도 당연히 중요히 여겨야 합니다.
(이것은 도덕적 책무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이해의 원리가 보편 타당하게 어디서나 적용되어야 하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밥에 대해서 고민해 봐야하지 안느냐?”는 얘기를 할라치면,
“그건 깨달음과 상관없는 이야기이다”고 답변하곤 합니다.
저는 그렇게 ‘나와 너’를 철저히 구분하는 이해는 엄청난 모순이라고 생각합니다.
‘다른 사람의 밥’의 문제를 ‘내 밥의 문제’와 구분하는 것 자체가 깨달음으로부터 멀어지는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8. ‘밥의 문제’는 ‘봉사’의 문제가 아닌 ‘통찰’의 문제이다.
제가 ‘다른 사람의 밥’의 문제를 거론함은 ‘불쌍한 사람 돕자’는 의미가 아닙니다.
이는 도덕적 책임과 봉사의 문제가 아닙니다.
결국 그들의 배고픔은 나의 배고름 인 것입니다.
‘너’는 결국 '저쪽에 서 있는 나‘일 뿐이지요.
이는 이타심으로 무장해 사회복지적 실천으로 수행해야 할 일이 아닙니다.
그러한 이타심을 갖는 즉시 우리는 ‘진실’로부터 멀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러한 이타심을 갖는 즉시 ‘나’는 ‘너’로부터 급속도로 고립됩니다.
‘남을 돕는다는 생각’은 해악입니다.
절대로 그런 생각은 가져서는 안됩니다.
다만 ‘내가 할 일을 하는 것’입니다.
도덕적인 실천으로서의 ‘내가 할 일’이 아니라,
내가 배고팠을 때 내 입에 밥을 가져가는 것과 같은 ‘내가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다만 내가 배고플 때 내 입에 밥이 들어 가듯이 타인의 밥의 필요성에 대한 이해도 자연스럽게 이어져야 합니다.
참된 자비는 ‘타인에게 베풀되 베풀었다고 생각하지 않는 베풂의 상태’에서 시작됩니다.
왜냐하면 ‘타인’이라는 것은 실지로 존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결국 거기에는 ‘나’밖에 존재하지 않는 것이지요.
따라서 ‘타인에게 베푸는 실천’이라는 생각을 하며 실천을 할수록 ‘나’는 분리되고 고립되면서,
갖은 복잡한 갈등상황이 빚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해를 바탕으로 ‘밥의 나눔’의 문제에 대해서 '실증적' '실천적' '실제적' 고민을 해볼 기회를 얻는다면
‘나와 너’의 경계가 무너지면서 여지껏 해왔던 필요 없는 고민들의 무게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을 접합니다.
관념적, 초월적인 거창한 문구를 남발하며 깨달음을 추구할 때와는 차원이 다른 어떤 '체험적 앎'의 상태가 도래합니다.
참된 자아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댓글목록
베가님의 댓글
베가 아이피 (112.♡.0.169) 작성일
잘 읽었습니다.
오늘부터 저는 허황되고 공허한 추구를 버리고, 환경과 식량 문제에 관심을 가져 보려 합니다.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침을 주십시오. 게으르고 무지한 저도 할 수 있는 일이면 해 보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됩니까? 미안함만 가진다고 될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사막화를 막고.
꿀벌이 사라지는 것을 막고.
양서류가 멸종하는 것을 막고.
인류의 1/3이 굶는 상태를 호전시키고.
씨감자를 캐지 않고,
우리 후손들이 황폐화 된 지구에서 겪을 그 고통을..어찌하면 줄일 수 있습니까?
단순한 방법이라도 제시해 주시면 실천해 볼 까 합니다. 가르쳐 주세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헉~ 대단한 집중력이시군요.
제 글이 길어서 왠만해서는 다 못 읽는데, 정말 고생하셨습니다.ㅠㅡ
사실 저도 '어떻게 해야 파국을 막을 수 있을지' 잘 모릅니다.
이제야 '간신히' 파국에 다다르고 있다는 사실 만을 절실히 확인했을 따름이죠.
이 사실을 인식하는데까지도 참 어려운 길을 왔습니다. ㅠㅡ
원칙적으로
'인간과 자연이 나와 한몸이다'는 사실만 진실되게 이해하게 되면 해결의 길을 찾을 수 있을 듯 합니다.
쉽게말하면 이렇습니다.
우리 각자가 생활이 파탄나지 않게 잘 살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내 삶'이 소중한 줄 알기 때문에 '먹을 것' '입을 것' '생활할 것'을 늘 고민하고 잘 꾸린 결과이지요.
'내 삶'이 소중하다는 사실 자체만 알면 부수적인 것들은 알아서 상황에 맞게 꾸려집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의 파국을 막기 위해서 구체적인 방법론도 중요하지만,
우선 가장 필요한 것은 '내 삶이 너의 삶과 자연과 연결되어 있음'을 절실히 아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말로만 그렇게 얘기하는 것이 아니고, 막연히 느끼는 것이 아니고,
'절실히' 그렇게 알아야 합니다.
'나와 너'가 다르지 않고, '나와 자연'이 둘이 아님을 절실히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되면 세상과 환경이 파국으로 가는 길을 막을 수 있습니다.
그게 '내 일'일 줄 모르다보니 세상이 이렇게 되는 것이지요.
이를 위해서 자아를 확장하기 위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그래서 '너'와 '자연'까지가 '나'와 하나인 것을 명증히 알 수 있을 만큼 자아가 확장되었을 때...
자연스럽게 조화로운 삶이 가능한 것이죠.
그렇지 않은 상태에서 '이타적인 마음'으로 혹은 '환경을 사랑하는 마음'으로(시혜적인 자세로)
그에 대처했다가는 '나와 너' '나와 자연'의 괴리가 커지는 것은 물론 그 결과의 작용도 그리 긍정적이지 못합니다.
물론 그렇게 시혜적인 마음으로 '이타적인 마음'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실천하는 것이 안하는 것보다는
낫기는 합니다.
하지만, '나와 너'가 하나임을 온전히 알고 접근할 때보다는
서로에게 별로 효과를 줄 수 없지요.
따라서 우리가 '우선 해야할 것'은 내 자아의 경계를 무너트리면서 내 외부의 것으로 생각했던 것들이
나와 하나로 맞물려 있음을 온전히 아는 것이지요.
그런데 여기 함정이 있습니다.
막연히 '감상적' '직관적'으로 모든 것이 하나다라고 생각하는 것은 참 잘 못된 것입니다.
도, 깨달음을 추구하는 이들 중에서 그런 이들을 많이 봅니다.
물론 이곳 싸이트에도 많죠.
거창한 수식을 난발하면서 '세계와 나는 하나이다.' '색즉시공 주절주절' 하면서
그야 말로 '경계가 없는 세계관' '통합적 세계관'을 제시합니다.
그런데 그런 말이 허황된 표어일 경우를 자주 봅니다.
그들은 말로만 '세계와 나는 하나다'고 얘기할 뿐이지,
실질적인 얘기로 들어가서 '밥'의 문제 등을 거론할 때는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고 마음이다'는 따위의
도무지 앞뒤가 안맞는 얘기를 하는 것입니다.
그들이 말하는 바대로 진정 '세계가 하나'일라면 마음과 물질, 너와 나가 통합되어야 하는데,
그 물질 중에서 상징적 중요성을 가진 '밥'의 문제를 제쳐두려고 하니 이건 말이 안되는 것이죠.
더군다나 이를 지적할라치면 '불쌍한 사람 도와주는 것하고 깨달음은 다른 것이다'는 식의 이야기를 하고요. ㅠㅡ
하여간 두서없이 말씀 드렸는데, 좀 정리해서 말씀 드려야겠습니다. ^^
수용적인 마음을 가져 주셔서 감사함다.
베가님의 댓글
베가 아이피 (112.♡.0.169) 작성일
그냥 절실히 알기만 하면 되는 것인가요?
죽어가는 지구를 살리고 우리 후손들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그저 '알기만' 하면 된다니..
잘 이해가 안됩니다.
공허합니다.
뭐 하나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살아남기위해 도를 닦는척 하면서 삼시세끼 꼬박꼬박 챙겨 먹듯이..
후손들의 생존을 위해 '아는 것' 외에 뭔가를 해야 하지 않느냐 하는 의문입니다..
솔직히 저는 그 차이를 모르겠습니다.
행동하지 않는 양심은 죽은 것입니다.
선생님또한 그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그저 주관적인 '인지' 절실한 인지만을 말씀하고 계신건 아닌가요..
가르쳐 주십시오.
내가 내 구차한 입을 위해 밥을 챙겨먹듯이 우리 후손들의 밥도 챙겨 주고 싶습니다. 너무도 절실히..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내 손가락을 먹는 행위가 잠시의 배부름을 만들어내기는 하지만,
손가락, 팔목... 을 먹다보면 결국 그것이 나를 죽음으로 이끌 것인지를 알게됩니다.
그렇기에 '나'는 '나'를 위해서도 그렇게 잠시의 배부름을 위해서 내 자신을 해하는 일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나의 풍요로운 삶이 결국 '다른 나'를 파괴시키는 것을 '절실히' 안다면,
나는 다른 사람, 자연을 파괴시키지 않는 삶을 살게 되지요.
왜냐하면 그것은 나를 괴롭게 하기 때문입니다.
'너'는 결국 '나'라는 것을 '절실히' 알아야 합니다.
그렇게 되면 원칙적으로 풍요로운 삶의 반대의 삶.
즉 '무소유'의 삶을 추구하게 되지요.
물론 아무것도 없이 살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최소한의 생계는 하면서 살아야 하지요.
하지만 '최소한'의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의 삶 속에 버려야할 것이 너무 많음을 보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그 버려야할 것을 쉽게 버리기가 어렵다는 것이지요.
내 적응된 가치와 관습을 벗어나는 것은 참으로 힘듭니다.
그것을 버려야 하는 와중에 '친구관계' '가족관계'로 부터 극도의 소외감을 느낄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아직 그것을 버릴 준비가 안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럴 필요조차도 못느끼기 때문에 님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극도의 고독이 찾아올 것입니다.
그 '고독'을 올바로 직면하는 것이 변화의 가장 커다란 시작입니다.
구체적인 실천 꺼리는 이러한 '무소유' '자발적 가난'의 삶을 살기 위한 과정에서의 수 많은 것들일 것입니다.
좀 덜먹고, 덜 쓰고, 내가 거둬들이는 것들의 일부를 사회에 환원하고,
사회, 정치, 환경 적인 관점에서 그러한 긍정적 이해를 증폭시킬 수 있는 '단체'나 '조직'에 가입해서
힘을 모으는 활동 등등 무수한 활동이 있습니다.
김기태 선생님같은 활동도 역시 엄청나게 중요한 활동입니다.
고통받는 이들의 영혼을 달래줌으로 인해서 그 영혼들이 고통받았을 때보다 덜 병리적으로 움직인다면
사회적인 갈등과 분열을 줄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언듯 겉으로봐서는 김기태 선생님과 비슷한 얘기를 하는 것 같은데,
실질적으로는 극단적인 '관념' '감성' '초월적'인 성향을 가진 이들의 문제점을 지적하는 것도 중요한 활동? 중의 하나입니다.
왜냐하면 그렇게 사람들의 정신을 현실로부터 앗아가는 이들은 고의는 아니겠지만,
결과적으로 세상이 망가져가는 것에 눈을 감음으로 세상의 파국에 동조하는 결과를 빚어내기 때문입니다.
뭐 대충 제가 생각하는 정도입니다. ㅎㅎ
그리고 제 아이디는 '선생님'이 아니라, '둥글이'입니다.
베가님의 댓글
베가 아이피 (112.♡.0.169) 작성일
잘 알겠습니다. 궁극적으로는 김기태 선생님과 같은 말씀을 하려 하시는군요. 제가 이해한 바로는 그렇습니다. 김기태 선생님의 말씀도 결코 일신의 평안만을 주장하시는건 아닙니다. 그보다 훨씬 더 큰것입니다.
다만 그 가르침을 따라 온 저같은 무지한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뿐이지요..
아 그리고, 시민운동가 박성수 선생님, 저는 선생님의 아이디를 칭한 것이 아닙니다.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굳이 명칭을 붙이자면 '유랑활동?가' 둥글이라고 칭해야 할 것입니다. ㅎㅎ
그리고 저 같은 사람에게는 그냥 하는 말로라도 '선생님'표현은 안쓰시는 것이 좋습니다.
아이디가 있으니 그냥 '둥글이'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왜냐하면 베가님의 '선생님'이라는 표현에 적응되다보면,
다른 그 누군가의 '야이똥자루같은 둥글아'라는 호칭에 대한 거부감 때문에
그가 쓴 글마저 부정적으로 볼 소지가 다분합니다.
제가 '선생님'의 호칭을 받을 자격이 있는 사람였다면 그리 마음이 오락가락하지는 않겠지요. ㅋㅋ
하여간 잘 주무십시요.
둥글이님의 댓글
둥글이 아이피 (116.♡.205.9) 작성일
^^ 감사합니다.
글이 길어서 새로 쓰기를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