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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리 쥬빌레와 망고 탱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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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자몽 (210.♡.107.100) 댓글 0건 조회 7,020회 작성일 07-07-03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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쇼우 윈도우 바깥을 서성인다.
밝은 불빛의 안쪽에 그녀가 서있다.
용기를 내어 들어간다. 다행히 먼저 온 손님이 주문을 하고 있는 중이다.
무심한 척 그녀를 몰래 훔쳐 본다.
그녀는 까만 생머리를 뒤로 묶고 가느다란 분홍빛 체크무늬 티셔츠에
스포츠 모자를 쓰고 카키색 바지를 입고 있다.
언뜩 보면 약간의 중성적 느낌도 든다.
복잡한 주문을 제대로 못하는 손님으로 인해(나도 좀 그런 편이다)
당황하거나 언잖을 때 그녀는 순간적으로 왼쪽 볼 근육을 샐쭉 움직이는 버릇이 있다.
그럼 입술이 잠시 삐죽 나왔다가 작은 볼 우물의 보조개가 옆으로 살짝 패진다.
저거 주세요
네 손님, 체리 쥬빌레. 또 어떤 것을 드릴까요
그녀는 항상 똑같은 말을 앵무새처럼 노래한다. 상체를 숙이고 얼어붙은
아이스크림을 스쿠프(scoop)로 퍼내는 것이 쉽지만은 않아 보인다.
그녀는 두 손을 모아 힘을 주어 긁어낸다.
하얀 손등의 푸른 힘줄과 손목의 미세한 솜털이 움직인다.
간혹 운이 좋으면 목덜미의 아름다운 목선을 지켜 볼 수 있다.
이번에 이것을......(손으로 가리키며)
네 손님, 망고 탱고
나는 무의식적으로 그것이 의도된 짓인지 몰라도 그녀가 건네주는 콘을
잡을 때는 일부러 좀 더 아래쪽을 잡는다. 그러면 그녀의 손 일부를 살짝
스쳐가며 잡을 수 있다. 나의 잠든 촉각세포을 일제히 일깨워 이 부드러운
터취를 1/60초라도 느끼고 싶은 갈망은 한 순간에 아련히 사라진다.
그녀는 재빨리 카운터의 탭을 눌러 계산을 마치고, 고개를 숙여
네 손님, 감사합니다. 또 오십시오 라는 말을 건넨다.
그러면 나는 정말 바보같이 아이스크림에 혀를 낼름거리며 문을 열고 나온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모른다. 단지 내 마음 속에서 '토끼'라고 부른다.
그녀는 대학교 이학년으로 스물 두 살 나이 쯤이며 아르바이트를 한다.
몰래 주인 아줌마에게 슬쩍 물어 본 것이다.
그녀가 며칠 나오지 않은 날 나는 그 집 앞을 서성였다.
그녀의 오똑한 얼굴, 맑은 눈매, 작고 귀여운 몸짓, 그리고 약간은 차가우면서도
사무적인 목소리는 꼭 무슨 나쁜 짓을 하다가 들킨 사춘기 소년처럼 내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고 머리 속을 까맣게 비우다가도 환한 무엇인가로 다시 채운다.
미혹에 흔들리지 않는다는 불혹의 중년 남자가 조카보다 나이 어린, 무려 스물살
차이가 나는 낯선 여자 아이에게 마치 책상 서랍에 무엇인가를 감춘듯 얼굴을 붉히는
십대로 돌아가다니, 이 얼마나 철 없는 짓인가.
그래도 이 나이에 '사랑하고 싶다' '사랑받고 싶다'. '사랑에 빠져 보고 싶다'
다시 가슴 설레이며, 울고, 웃고, 아프고 싶다는 욕망을 바라본다.
왜 나는 그녀 앞에서......
언제나 속절없이 분홍빛 체리 쥬빌레와 샛노란 망고 탱고만을 달라고 하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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